중독될 만큼 강렬한 피트 향의 라가불린, 라가불린을 기주 삼아 쌉쌀하면서도 오묘한 피트 향에서 올라오는 단맛이 일품인 화이트호스의 매력에 푹 빠져 지구 반대편 아일라섬으로 떠난 위스키 여행.
▎스페이강을 따라 산책하다 근사한 올드 크레이겔라키 다리를 마주했다. |
|
일본 시장을 점령한 백마표 위스키일본에 갈 때마다 편의점에 들러 그곳에서 판매하는 작은 병에 담긴 위스키를 여러 병 사오곤 한다. 일본은 한국과 주세가 달라 다양한 위스키를 저렴하게 살 수 있지만, 여행가방의 무게와 면세한도 때문에 미니어처로 아쉬움을 채우곤 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 편의점에서는 요즘은 구하기 어렵다는 일본 싱글몰트 위스키도 작은 병들은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이제는 그런 유명한 위스키들은 판매대에 보이지 않지만, 아직까지도 일본 편의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위스키 중 하나는 바로 화이트호스이다. 노란색 바탕에 백마가 그려진 이 위스키는 저렴하면서도 눈에 잘 띄어서 흔히 일본 위스키로 착각하기 쉬운데, 사실 스코틀랜드에서 왔다. 나라마다 선호하는 스카치위스키가 다른데 우리나라에는 임페리얼, 윈저 등이 있고, 이탈리아는 글렌그란트이지만, 일본에서는 화이트호스가 가장 대중적이다. 화이트호스 위스키는 싱글몰트는 아니고 블렌디드 위스키인데, 저렴한 가격에 비해 쌉쌀하면서도 오묘한 피트 향에서 올라오는 단맛이 일품이다. 이런 맛이 나는 이유는 기주로 쓰이는 싱글몰트가 바로 라가불린이기 때문이다. 물론 라가불린 이외에도 탈리스커, 크라간모어 같은 디아지오 산하의 여러 증류소에서 생산한 위스키를 기주로 삼아 만든 위스키라 얼핏 같은 회사에서 나오는 블렌디드 위스키인 조니워커와도 풍미가 비슷하다.
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영일동맹을 맺어 영국과 관계가 깊은 일본은 영국군의 공식 보급품 중 하나였던 화이트호스를 들여왔다. 당시 조악한 품질의 일본 위스키를 제치고 식민지 조선까지 흘러 들어올 정도로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 현재까지도 일본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화이트호스는 스코틀랜드에서도 가장 피트향이 강한 위스키를 생산한다는 아일라섬 위스키 중에서도 강하기로 이름 난 세 가지 중 하나인 라가불린을 기주로 바로 사용한다. 아드벡과 라프로익, 라가불린 등 피트 3강 위스키 증류소는 묘하게도 모두 섬의 남쪽 포트엘렌 주변에 모여 있다. 아마도 섬의 남쪽에서 나는 피트가 더욱 강력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일라 위스키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나의 위스키 라이프 초기, 피트 향에 절어 살 만큼 즐겨 마시던 라가불린 16년 |
|
여하튼 예전에 일본 국적기들은 화이트호스를 필수 아이템으로 갖춰놓고 기내 서비스를 하곤 했지만 상향 평준화된 위스키의 취향 때문인지 요즘은 찾아볼 수 없다. 화이트호스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도 일찌감치 들어와서 춘원 이광수의 소설『흙』에서도 묘사되었고, 경성의 모던 보이들 사이에서는 백마표 위스키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그 인기를 몰아서 해방 이후에는 ‘백마(Baek Ma)’ 위스키라는 유사품이 나왔고 심지어 용마, 쌍마 위스키까지 등장했다. 어쨌든 백마 위스키를 사랑하는 나도 인생을 제대로 즐기는 우리 시대의 ‘모던 보이’가 되고 싶다.
꽤 오래전에 내가 아는 또 다른 ‘모던 보이’인 지인 T가 운영하는 바에 들른 적이 있었다. T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위스키를 공부했고, 그동안 모아온 위스키 관련 물품들로 연고도 없는 부산에 떡 하니 바를 차렸다. 경상도 사투리로 한구석을 뜻하는 ‘모티’라는 이름의 바인데 정말 이런 구석에 누가 올까 싶었다. 그래도 알음알음 찾아오는 이들에게 그만의 재미있는 루틴으로 서빙하고 다양한 위스키 지식을 뽐내다 보니 어느덧 부산의 명소가 되어버렸다.
▎당화를 끝낸 원액에 효모를 넣고 발효하는 과정이 이루어지는 발효조(Wash Back). |
|
그 바가 명성을 얻기 시작할 무렵, 나도 소문을 듣고 부산에 갔을 때 찾아가 위스키 한 잔을 마시며 바를 둘러봤다. 바 곳곳에 오래전부터 수집한 흔적이 보이는 여러 소품이 가득했고, 그중에서 특별히 어린아이만 한 화이트호스의 커다란 나무 간판이 눈에 띄었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화이트호스이기도 하지만 도대체 이 물건이 왜 여기 있는지, 이런 걸 갖다 놓은 사장은 또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스운 것은 우리 둘 다 과거에 비해 복장과 외모가 많이 달라졌고,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터라 서로가 예전 IBM에서 같이 근무했던 지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같이 근무할 때보다 훨씬 많아진 그의 흰머리와 짧게 깎은 헤어스타일, 자유로운 복장 탓에 그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는데, 그는 왜 나를 못 알아보았을까?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뭐 새삼스레 그 이유를 알고 싶지도 않으니 그저 계속 미스터리로 남겨두기로 한다. 아무튼 T와 한참을 이야기하고 나서 찬찬히 그 얼굴을 다시 보니 맙소사, 그 사람이 T가 아닌가? 그제서야 그도 나를 알아보고 서로 놀라 한참을 기막혀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유명해져서 이젠 예약도 쉽지 않지만, 그래도 내가 가면 흔쾌히 자리를 내어주는 T의 바는 이제 부산 여행의 필수 코스 중 하나가 되었다. 언젠가는 주인 몰래 화이트호스 나무 간판이라도 업어오고 싶은 마음이 드는, 정말 멋진 바임에는 틀림없다.
스페이강의 추억과 오버투어리즘
▎아일라섬으로 들어오는 항구인 포트엘런 다운타운의 전경. |
|
몇 년 전 처음으로 스페이사이드를 찾아갔을 때, 숙소 근처에 있는 스페이강을 따라 산책을 한 적이 있었다. 흐르는 스페이강의 찬물에 손이라도 담가보려고 산책길에 있는 근사한 올드 크레이겔라키 다리의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 다리의 계단 벽에 낙서라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백마가 한 마리 그려져 있었다. 화이트호스 위스키의 백마를 이렇게 멋들어지게 그려냈다니, 한참이나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아내가 가자고 재촉하지 않았다면 한참이나 더 있었을 법한 나만의 시간이었다. 위스키 라벨의 화이트호스는 다소 경직된 모습이지만 크레이겔라키 다리 아래의 화이트호스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귀인지 유니콘의 뿔인지 모를 귀여운 것 하나가 머리에 봉긋 솟아 있었고 발놀림조차 경쾌한 듯 꼬리까지 활짝 펼치고서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다. 보기만 해도 하늘로 날아갈 법한 백마, 아니 내겐 천마로 보였다.
▎위스키의 달달한 향이 느껴지는 듯한 커다란 통 모양의 당화조 (Mash Tun). |
|
그해에 미처 가지 못한 다른 스페이사이드 증류소들을 방문하기 위해 이듬해 나는 홀로 스페이사이드를 다시 찾았고 당연히 이곳의 통과의례처럼 자연스럽게 올드 크레이겔라키 다리 밑으로 향했다. 바로 내 사랑하는 화이트호스를 보기 위해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거기서 다시 만난 나의 화이트호스는 여전히 사랑스러웠지만 또 다른 야만의 흔적이 보였다. 1970년부터 수십 년 동안 아무도 손대지 않고 모두가 아끼며 바라만 보았던 화이트호스 위의 오염은 나를 무척 슬프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그사이 많은 관광객이 오간 듯하지만 새삼스레 오버투어리즘의 폐해까지는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도시에서 보는 오버투어리즘의 폐해와 달리, 오히려 인프라가 거의 없는 오지에서의 그것은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불가역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으니, 상처받은 나의 화이트호스를 보며 쓴 입맛을 다셨다.
12년이 16년보다 비싼 위스키
▎아드벡 증류소에서 라프로익 증류소로 가는 국도 변에 덤덤하게 들어선 흰색 건물의 라가불린 증류소. |
|
아일라섬에서 마지막 일정은 라가불린 증류소였다. 이미 아일라섬에 있는 여러 증류소를 돌아보며 많은 위스키의 제조 공정을 하나하나 다 보고 온 터라, 마지막 라가불린만큼은 제조 과정보다 증류소의 분위기만 즐기기로 하고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조금은 어두운 색의 인테리어가 완벽했던 이 공간은 그동안 내가 가보았던 어떤 증류소보다도 담백한 장소로 느껴졌다.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오직 나와 위스키만 존재하는 무척 드라이하면서도 색다른 공간이었다. 아드벡 증류소에서 라프로익 증류소로 가는 국도 변에 덤덤하게 들어선 이곳에서는 다른 곳처럼 위압적인 증류소 진입로도 없었고, 요란한 방문자센터나 호텔은커녕 카페테리아도 없었다. 그저 라가불린만(灣)의 A846 국도 변에 서 있는 흰색 건물이 라가불린 증류소이고, 마치 볼일 있으면 그냥 들어오라고 말하는 듯 서 있었다. 심지어 일하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방문자센터의 문을 열고 들어선 지 한참을 지나서야 머리가 희끗한 직원이 나와서 흘끗 쳐다보더니 목례를 하고는 또다시 아무런 말이 없다. 증류소의 숍도 다양한 위스키 라인업으로 관광객들의 구매욕을 자극하던 다른 증류소와 달리 이곳에서는 라가불린 16년과 12년, 단 두 가지만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12년이 16년보다 훨씬 비싼 라가불린의 요상한 가격 책정도 꽤 재미있다. 이곳은 기준이 되는 스탠더드 위스키가 보통은 12년인 다른 증류소와 달리 16년이다. 그리고 12년짜리는 알코올 도수가 무척 높은 캐스크 스트렝스 위스키라 16년보다는 가격이 훨씬 비쌌다. 모두 그 스토리를 알지 못하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가격 책정이고, 물론 머리가 희끗한 그 직원은 이런 설명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 좋은 미소만 지을 뿐, 눈을 한번 마주친 후 이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두 가지 모두 한국에서 구입할 수 있기에 애써 여기서 구입할 필요도 없었다. 그 시간에 방문한 손님이 우리뿐이었지만, 다른 이가 왔어도 굳이 이곳에서 라가불린을 사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 담백한 그 공간에서는 상거래의 공기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곳은 그저 위스키와 나, 이렇게 둘만의 온전한 공간이란 느낌이었다. 마치 포근하지만 냄새가 좀 나는 피트위스키 신의 품속에 넉넉하게 안겨 있는 듯했다.
▎증류소 내부의 스틸룸에 있는 2쌍의 구리로 된 독특한 모양의 증류기. 매우 느린 증류 시간을 통해 풍부하고 견고한 개성을 지닌 스피릿을 생산한다. |
|
아일라 위스키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나의 위스키 라이프 초기, 나는 늘 라가불린 16년을 끼고 살았고, 그 피트 향에 반쯤 절었을 때 문득 아일라로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마침내 이곳에 서 있게 됐다. 지금은 지구 반대편에 있지만, 만화 도라에몽의 도코데모 도아(어디에든문)가 있다면 계절이 바뀌는 9월의 서울에서 바로 그 포트엘렌의 다운타운으로 주문을 외우며 순간 이동을 해버리고 싶다. 오픈 세서미! 아브라카다브라!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일탈과 모든 일탈의 세상을 꿈꾸며!
※ 박병진 - 30여 년간 IBM, SAP, SK 등 국내 및 외국계 기업, 대기업과 중견기업을 망라하여 임원 및 CEO로서 대한민국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해왔다. 최근에는 포브스를 포함한 각종 매체에 칼럼을 연재하는 위스키 칼럼니스트이자 동아일보사의 최고위과정인 ‘광화문살롱’의 주임 교수로서 위스키를 주제로 MZ세대를 포함한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소통의 지혜를 나누고 있다. 더불어, 요리서적 전문 출판사인 ‘북스 레브쿠헨’의 대표로서 이 시대의 대표적인 N잡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