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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희성의 고택창연(故宅蒼然)(01) 퇴계 이황은 철학적 건축가였다 

 

퇴계 이황을 우리는 어떻게 알고 있을까? 아마도 1000원권 지폐 속 위인으로, 혹은 위대한 성리학자로 기억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행적을 깊이 들여다보면, 퇴계는 단순한 유학자를 넘어 건축에 깊은 철학을 지닌 인물이다.

이황 선생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건축물이 바로 도산서원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도산서원이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작은 규모의 도산서당을 1561년에 직접 설계하여 건립했고, 그의 사후에 제자들에 의해 도산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도산서당이 건립될 당시, 이황 선생은 공사 과정을 직접 감독하지 못했다. 중앙에서 임금님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공사 현장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이황 선생의 벗이자 공사를 맡은 이가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창과 문의 배치, 처마의 깊이, 기단의 높이 등이 일반적인 방식과 다른데, 이를 변경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황 선생의 답신은 단호했다. “문과 창의 위치와 크기, 처마의 깊이, 기단의 높이 등 모든 것을 고치지 말고, 내가 처음에 정해준 대로 하나도 고치지 말고 그대로 만들어라! 모든 것을 내가 처음 정한 그대로 하나도 고치지 말아라.”

그는 떠나기 전, 이미 철저한 설계도를 작성해두었던 것이 분명하다. 조선시대의 설계도는 현대의 도면과는 다르지만, 그의 구상이 매우 철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퇴계는 건축을 단순한 공간 배치가 아닌 철학과 사유가 담긴 구조로 완성하려 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마치 현대의 건축가처럼 보인다.

도산서당과 퇴계의 건축적 통찰


▎도산서당의 봉창과 문은 높이와 크기가 모두 제각각이다.
도산서당은 단출한 3칸 집이다. 3칸 집은 인간이 생활하는 최소한의 단위로 여겨진다. 퇴계는 검소함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공간에는 더욱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도산서당의 정면을 보면, 왼쪽부터 작은 창과 문 두 개가 보인다. 문과 창의 위치와 크기 모두 의도한 바가 있다. 앞서 절대로 고치지 말라는 편지 답신을 기억해보면, 반드시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창: 봉창(封窓). 봉창은 빛을 받아들이는 창이지만 열리지 않는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 하네’라는 속담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열리지 않는 창을 두드리는 것이니 어리석은 행동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봉창은 다른 전통 건축물보다 높게 배치되어 있다. 왜 그럴까?

두 번째 문: 길고 크다. 이는 땅을 딛고 서 있는 청년을 상징한다. 사람이 성장하면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가 된다고 믿었던 조상들의 생각이 표현된 문이다.

세 번째 문: 상대적으로 작고 낮다. 이는 허리가 굽은 노인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봉창이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봉창은 생명의 탄생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생명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믿었다. 그리고 인간은 성장하며 땅을 딛고 살아간다. 두 번째 문은 젊음을, 세 번째 문은 노년을 나타낸다. 시간이 흐르면 인간은 다시 땅으로 돌아간다. 마치 등이 굽은 노인이 땅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노인의 삶에서 마지막 여정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건축적 장치가 있다. 바로 지붕 끝의 눈썹 같은 처마이다.

이 부분은 『가례집람도설』과 삼국시대의 궁려도에서 ‘영(榮: 영화로울 영)’이라 불렸다. 이는 단순한 비첨(飛簷)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건축가로서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퇴계 이황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마지막 여정은 귀를 열고 모든 것을 공유하고 함께하라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마루 끝자락을 보면 사이사이가 비어 있어 사람이 앉기가 매우 불편하다. 오히려 새들이 앉거나 바람이 머물다 가는 것처럼, 혹은 자연에 더 귀를 기울이려고 공간을 내어준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퇴계 선생께서 유학자로서 절정에 오르셨을 때, 어린 소년이 편지를 보냈다. 이 소년은 감히, 퇴계 선생께서 주장하신 세상의 원리에 대한 이론에 반대하는 서신을 보냈다. 당대 최고의 철학가에게 버르장머리 없는 꼬마 선비가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우리가 만약 퇴계였다면 어땠을까? 어린아이의 투기정도로 생각하고 적당히 무시했을까? 아니면, 공부 열심히 하라고 응원의 답장 한 장 정도 보냈을까? 이황 선생께서는 이 어린 선비의 편지에 하나하나 답변을 달아보냈고, 어린 선비도 또 답신을 보냈다. 두 사람은 그렇게 8년 동안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열띤 논쟁을 펼쳤다.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웠던 바로 사단칠정론이다. 이 어린 선비가 퇴계 선생이 배출한 또 한 명의 거대한 유학자 기대승 선생이다.

결국 퇴계 선생은 건축을 통해 사람의 마지막 여정엔 ‘누구에게든 귀를 기울이라’는 뜻을 담은 공간을 만드신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담장도 여느 다른 전통 건축에서 보기 힘든 사례다. 중간중간 끊어져 있다. 문도 싸릿가지를 엮어 만든 싸리문으로, 구색만 갖췄다. 유정문(幽貞門)이라고 한다. 누구든 쉽게 들어올 수 있게 만든 서당이었던 것이다. 가볍게 손으로 밀기만 하면, 누구나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다. 건축가는 자기만의 특별한 생각을 담아 공간을 설계하고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퇴계 이황 선생은 건축가나 다름없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교당에 다시 담긴 뜻 “건축은 곧 철학이다”


▎퇴계의 제자들은 전례를 깬 전교당 건축으로 스승의 위대한 사상을 기렸다.
이황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기리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 도산서원 안에 있는 ‘전교당(典敎堂)’을 지을 때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 제자는 “스승님의 위엄을 기리기 위해 크고 웅장한 건물을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제자는 “스승님의 검소한 삶을 본받아 소박하게 짓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맞섰다. 결국 제자들은 기발한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 기단을 높인다: 위엄을 강조하기 위해 건물의 기단을 높이는 것.

- 건물은 작게 짓는다: 스승의 검소함을 담아 건물 자체는 소박하게 유지.

- 4칸짜리 건물: 전통적으로 중심 건물은 홀수 칸(3칸, 5칸)으로 짓는다. 하지만 전교당은 4칸이다. 부족한 건물인 셈이다.

- 비대칭적 편액 배치: 건물의 이름을 새긴 편액은 보통 중앙에 자리해야 하지만, 4칸 구조에서는 한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

이런 배치는 일부러 의도한 것이다. 건물이 비대칭적으로 보이지만, 그 부족한 한 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스승님의 위패를 모신 상덕사로 향하도록 설계했다. 즉, 제자들은 자기들의 부족함을 깨닫고, 스승님의 가르침을 더 깊이 새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불완전한 공간을 만들었다.

부족함으로 완벽함을 이루는 건축. 전교당에서는 그런 선조들의 지혜와 멋이 보인다.

건축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삶을 담고, 철학을 표현하는 하나의 언어이다. 퇴계 이황의 건축 역시 단순한 서원이 아닌, 인간의 삶과 죽음을 담은 공간이었다. 그는 건축을 통해 제자들에게 삶과 배움의 자세를 가르쳤다.

※ 백희성 - 프랑스 파리 발드센건축대학을 졸업하고, 파리 말라께건축대학에서 건축사과정(HMONP)을 마친 건축가이며, 장누벨건축사무소에서 핵심 건축가로 활동했다. 현재는 킵(KEAB) 건축사사무소 한국·파리지사를 운영하는 대표건축가다. 프랑스에서 동양인 최초로 폴메이몽 젊은 건축가상을 수상했다. 이 밖에도 건축소설 『빛이 이끄는 곳으로』를 출간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제품 디자이너, 문화재 연구가 등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202503호 (2025.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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