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이강호의 생각여행(64) 런던, 찬란한 전통과 새로움의 조화 

 

찬란했던 대영제국의 영광은 많이 위축됐지만, 2022년 거행된 여왕 장례식과 새 왕의 대관식은 영국이 지닌 전통의 힘을 전 세계에 보여줬다. 오늘날 영국은 과거의 전통 위에 새로운 혁신을 더하는 온고이지신의 모델로 진화하고 있다.

▎런던을 상징하는 빅벤(Big Ben)의 멋진 모습. 웨스트민스터 궁전 북쪽 끝에 있다.
영국 수도 런던을 방문할 때마다 한결같이 느끼는 감정이 있다. 품격 있는 ‘신사(Gentleman)의 나라’답다는 감상이다. 최근 런던은 메가시티로 가는 새로운 변화의 복판에 서 있다. 신축 고층 건물들이 전통적인 옛 건물과 멋진 조화를 이뤄내고 있다. 영국은 여전히 전통을 잘 지켜가고 있는 나라라고 생각해왔는데, 그들의 자부심을 경험할 수 있는 역사적인 기회가 2022년 가을에 있었다.

영국 시간으로 2022년 9월 8일 오후 6시 30분. 버킹엄궁전은 “여왕이 밸모럴성에서 평온히 승하했다”고 발표했다. 영국의 전통과 왕실에 관심이 있던 터라 BBC와 CNN을 번갈아가며 뉴스와 생중계를 시청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스코틀랜드 애버딘셔에 있는 밸모럴성에서 사망했기에, 스코틀랜드에서부터 런던까지 여러 날 동안 이어진 장례 의식 중계방송을 거의 다 보았다.

찰스 3세 왕은 스코틀랜드에 도착해 영국군 예복을 입고 걸으며 홀리루드하우스 궁전에서 로열 마일을 지나 에든버러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에 엘리자베스 2세의 시신을 안치했다. 수많은 사람이 장엄한 장례 행렬을 따르는 장면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시신은 영국 공군 수송기로 에든버러 공항에서 출발해 런던 노솔트 공군기지에 도착한 다음 버킹엄궁전에 들렀다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이동해 안치됐다. 도로변에는 떠나는 여왕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고 시민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는 계속해서 국민의 조문을 받았으며, 템스강을 따라 엄청나게 긴 줄이 이어져 10~20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도 조문객은 갈수록 더 늘어나 건강이 나쁜 사람은 조문을 자제해달라고 권고할 정도였다.


▎폴 세잔(Paul Cézanne)의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 남자들이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코톨드 미술관에서 촬영.
9월 19일(D+11) 11시 정각,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엘리자베스 2세의 장례 의식이 국가장으로 진행되자 전 세계 주요 국가의 원수와 수반이 참여했다. 장례 의식 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웰링턴 아치(Wellington Arch)까지 영국 수병들이 수레를 직접 끌었고, 찰스 3세 등 일행이 수레 뒤를 걸어서 행진하는 모습도 전통적이었다. 웰링턴 아치 도착 직후에는 재규어 영구차로 관을 옮겨 윈저성까지 이동했다. 이때도 도로변에는 여왕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시민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영국군 근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윈저성 안에서 성조지 성당으로 이동했고, 관을 성당 내부에 안치하며 감동적인 장례 일정은 모두 마무리됐다.

‘온고이지신’의 정수, 영국 여왕의 장례식


▎버킹엄궁전 앞 원형 광장에 있는 빅토리아 기념비. 탑 꼭대기 지구본 위에는 화려한 금박에 청동 날개를 단 승리의 여신이 보인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52년에 즉위해 70년 동안 재위했다. 그가 작고한 이듬해 봄인 2023년 5월 6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는 찰스 3세 국왕과 카밀라 왕비의 대관 의식(The Coronation Service)이 거행됐다. 6단계로 진행된 대관식에서는 전통의식과 의상, 팡파르 등이 인상적이었다. 대관식이 끝난 후 대규모 퍼레이드인 ‘대관식 행진(The Coronation Procession)’이 버킹엄궁전까지 이어졌다. 6000명 넘는 영국군과 육군·공군에서 동원된 60대 이상의 항공기, 20개에 달하는 밴드가 행진에 동원됐다. 그리고 35개 이상의 영연방 국가에서 파견된 군인 400여 명도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찰스 3세와 카밀라 왕비는 1762년에 제작된 조지 3세의 황금 마차에 탑승했다. 마차의 무게가 4톤에 달했기에 사람이 걷는 속도 정도로 매우 천천히 이동했다. 다른 고위 왕족들도 찰스 3세 부부의 황금 마차를 뒤따르며 퍼레이드에 참여했다. 프린세스 로열 앤은 말을 타고 왕과 왕비가 탄 황금 마차를 호위하며 행진했다. 왕과 왕비가 버킹엄궁전에 도착한 후에는 궁전 뒤뜰에서 퍼레이드에 참여한 군인들로부터 사열을 받았고, 군인들은 국왕과 왕비를 향해 만세삼창했다. 왕과 왕비를 비롯한 고위 왕족들은 버킹엄궁전 발코니로 이동해 군중을 맞았고 영국 공군의 축하 비행을 관람했다. 대관식을 기념해서 영국 전역과 함정에서 예포를 발사하는 장면도 감동적이었다.

역사적으로 드물게 거행된 엘리자베스 2세의 장례의식, 찰스 3세 국왕과 카밀라 왕비의 대관 의식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역사적 전통 의식을 충실히 따르는 영국인들은 아마도 큰 자긍심을 갖고 있으리라 짐작됐다. 그들만의 신사도를 훌륭하게 지키는 것 같았다.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개척해가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사례라고 생각된다. 역사적인 행사인 엘리자베스 2세의 장례 의식을 시청한 사람은 2600만 명, 찰스 3세 국왕의 대관식을 지켜본 시청자는 1880만 명으로 집계됐다.


▎템스강을 가로지르는 타워브리지(Tower Bridge)는 매우 복합적인 구조의 다리다. 런던을 대표하는 명물 가운데 하나다.
최근 런던을 방문해 버킹엄궁전 주변을 거닐며 앞서 언급한 왕실 행사 장면들을 떠올렸다. 런던을 여러 번 찾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방문은 그런포스그룹에서 전 세계 60개국 CEO 회의를 런던에서 개최했을 때다. 개인 여행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다. 가장 먼저 런던자연사박물관에서 열린 만찬이 기억난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서 중앙 홀로 올라가니 엄청나게 큰 공룡 뼈대가 있어서 자못 놀랐다. 처음에는 실제 뼈인 줄 알았는데, 32m 길이의 초식 공룡 디플로도쿠스(Diplodocus) 골격의 복제품이었다.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사업가 앤드루 카네기가 카네기자연사박물관에 있는 원본을 복제해 기증했다고 한다.

안내인에게 설명을 들으며 박물관을 돌아보았는데 삼엽충 화석 앞에서 들은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다. 삼엽충은 지구 전역에 현재 인류의 숫자보다도 훨씬 많은 개체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는 설명이었다. 그렇게 많던 동물 개체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아직까지도 모른다고 하니 참으로 신기했다. 지구나 우주의 역사에 관한 설명을 들을 때면 언제나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삼엽충 화석을 보며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지속될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대관람차인 런던 아이(London Eye)에서는 런던 전경을 바라볼 수 있다.
박물관 내부를 돌아본 후, 거대한 공룡의 모형 뼈 아래에 만찬 테이블이 준비됐다. 흡사 공룡과 함께 식사하는 기분이었다. 자연사박물관 건물의 거대한 로비는 건축적으로도 참 멋진 장소였다. 만찬이 거의 끝나가던 시각, 갑자기 불이 꺼지더니 로비 반대쪽에 있는 양쪽 구름다리 계단에서 멋진 음악과 함께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조명을 받으며 나타났다. 깜짝 놀란 것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직접 나와서 노래하며 연기를 해주는 것이었다. [오페라의 유령]은 너무 좋아하는 뮤지컬이어서 런던·뉴욕·서울에서 여러 번 관람했다. 감동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자연사박물관 로비와 공룡뼈에 조명이 비치면서 정말 박물관 안으로 유령이 나타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아름다운 음악에 흠뻑 젖을 수 있었다.

역사적 장소에서 거행된 만찬 행사


▎빅토리아 기념비의 분수대 조각상.
다음으론 세인트 폴 대성당이 기억에 남는다. 다음 날 오후 4시경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인 세인트폴 대성당에 도착했다. 이곳은 윈스턴 처칠과 마거릿 대처의 장례식,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결혼식,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25주년·50주년·60주년 기념식 등 역사적인 국가 행사들이 열린 장소다. 경건한 마음으로 성당 입구에 들어서니 오르간 소리가 은은하게 울리고 있었다. 신부님들이 좌석에 배열해 앉고 우리 일행이 로비에 준비된 의자에 앉으니 거대한 오르간 연주에 맞추어 성가대가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참으로 성스럽고 멋진 장면이었다.

음악 행사가 끝나자 신부님들이 조를 짜서 성당을 안내해주었다. 설명을 듣고 만찬이 준비된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은 영국 역사를 빛낸 인물들의 무덤이었다.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영웅이자, 나폴레옹 전쟁 당시 해군 제독으로 트라팔가해전에서 영국을 구하고 전사한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의 무덤도 보였다. 넬슨은 자신의 전함 빅토리호 후미 돛대에 ‘영국은 모든 이가 자신의 의무를 다하길 기대한다(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라는 깃발을 내걸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넬슨 제독과 함께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은 영국군 총사령관이자 귀족 작위를 받은 제1대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 1st Duke of Wellington)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그는 나폴레옹전쟁 당시 영국 육군 최고의 지휘관으로 워털루전투에서 승리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시대를 끝낸 장군이자 영국 총리를 지낸 정치인이다.

스코틀랜드의 생명공학자이자 세균학자인 알렉산더 플레밍 경(Sir Alexander Fleming)도 세인트 폴 대성당에 안치돼 있다. 그는 항균물질 리소자임과 푸른곰팡이(Penicillium notatum)에서 페니실린을 발견해 항생제 분야 발전의 시발점이 됐다. 노벨 생리학·의학상도 공동 수상했다.

이렇듯 영국 역사를 빛낸 많은 인물이 세인트 폴 대성당 지하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너무나 놀라운 것은 이런 지하 무덤의 한쪽 끝에 밴드와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찬이 진행되면서 밴드 음악이 연주되고 댄스공연까지 하다니,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분위기가 연출됐다. 아마도 훌륭한 선조들을 떠올리게 하고 성당을 유지하기 위해서 외부 대관 행사들을 여는 게 아닌가 짐작해보았다. 런던 중앙에 있는 가장 큰 대성당인 세인트 폴 지하에 국가를 위해서 헌신한 인물들이 안치되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재즈 밴드에 맞추어 만찬을 하고 춤을 추다니 참으로 특이한 경험이었다.

다음 장면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자 템스강으로 이동해 배에 올랐다. 템스강을 따라서 오르던 배는 그리니치강 기슭에서 멈췄다. 배에서 내려 얼마간 걷자 고색창연하고 멋진 옛 해군대학 건물 안으로 안내됐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자 엄청나게 높은 천장과 거대한 기둥들, 천장화와 실내 장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압도적인 장관이었다. 대영제국의 옛 해군대학다운 모습은, 건축물 하나로도 과거 제국의 위상을 이해할 수 있게 했다. 그토록 멋들어진 공간에서 감탄하며 만찬을 하고 나오니 어둑한 연병장에서 영국군 의장대가 야간 퍼레이드를 훌륭하게 펼쳐줬다. 구 왕립 해군대학은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됐고,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화 촬영지이기도 하다.


▎영국의 국회의사당 (Houses of Parliament)인 웨스트민스터궁 (Palace of Westminster)과 빅벤.
최근 런던을 방문해선 코톨드 갤러리(The Courtauld Gallery) 미술관에서 인류 역사에 남는 명작들을 감상하며 받은 감동과 힐링의 시간이 기억에 남는다. 옛 추억을 떠올리고 사진 촬영을 즐기기 위해서, 세계 어느 곳이라도 대도시 여행 때면 즐기는 지붕 없는 투어버스에 올랐다.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자유롭게 타고 내리는 ‘홉온 홉오프(Hop-on Hop-off)’ 투어를 즐겼다. 런던탑에서 시작해 타워브리지, 런던아이, 빅 벤, 웨스트민스터 궁전, 웨스트민스터 사원, 트라팔가 광장, 피카딜리 서커스, 해러즈 백화점, 하이드 파크 등을 지났다.

여전히 엄격한 드레스 코드를 요구하는 런던리츠호텔 근처에 내려 아름다운 공원인 ‘더 그린 파크’를 가로질러 걸어서 버킹엄궁전에 도착했다. 빅토리아 기념비가 있는 버킹엄궁전 앞 원형 광장을 거닐며 얼마 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 의식, 찰스 3세 국왕과 카밀라 왕비의 대관 의식으로 군중이 운집했던 바로 그 장소에 닿았다. 영국 국기인 유니언잭이 펄럭이는 큰 거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과거 ‘대영제국에는 해가 지지 않는다(The sun never sets on the British Empire)’라던 영국의 위상은 현재와 미래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영국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우리 기업들과 우리나라 미래의 리더십과 위상은 어떤 사이클로 변화할까?

※ 이강호 - PMG, 프런티어 코리아 회장. 세계 최대 펌프 제조기업인 덴마크 그런포스그룹의 한국 법인 창립 CEO 등 33년간 글로벌 기업 및 한국 기업의 CEO로 활동해왔고, 2014년 HR 컨설팅 회사인 PMG를 창립했다. 다국적기업 최고경영자협회(KCMC) 회장 및 연세대학교와 동국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했고, 다수 기업체와 2세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경영과 리더십을 컨설팅하고 있다. 은탑산업훈장과 덴마크왕실훈장을 수훈했다.

202504호 (202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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