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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자 적다” 툭하면 폐강 인문학 강사의 눈물을 보셨나요 

어느 불문과 졸업생의 ‘작심 발언’
대학이 없다 

글■김상진 월간중앙 기자 [kine3@joongang.co.kr] 이경수 월간중앙 인턴기자 [timehasgone@naver.com]
교수 30년 된 교재로 버티기… ‘지식사기꾼’ 아닌가요 학생 책 한 권 안 읽고 문학수업… 그게 대학 공부입니까 대학 임시직 졸업생도 “취업했다”… ‘취업률 부풀리기’ 그만하세요 우리나라의 미래를 짊어진 대학의 현실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文·史·哲’로 상징되는 인문학 강의에는 학생이 아닌 ‘폐강’ 공고가 자주 나부낀다는데…. 어느 불문학 전공 졸업생의 촌철살인 대학비판을 1인칭 시점으로 풀었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賢者)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다.”

앙드레 지드가 쓴 <지상의 양식>은 그의 정신적 자서전이자 나의 정신적 지주였다. 정확하게는 10대 후반의 내가 대학을 꿈꾸며 그리게 한 최고의 서적이었던 셈이다. 지드에게 반한 나는 불문학과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뿐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문인 중에는 프랑스어권 출신자가 상당했다. 유년시절 누구나 읽었을 <삼총사><몽테크리스토백작> 등을 쓴 대 뒤마, 즉 알렉산드르 뒤마를 필두로 내 마음 속 영원한 <어린 왕자> 생텍쥐페리, <여자의 일생>을 쓴 모파상, 요절한 천재시인 랭보에 이르기까지….

자주 또래보다 어른스럽다는 말을 듣고는 했지만, 그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성적이 매우 뛰어난 우등생은 아니었다. 특히 수학은 ‘젬병’이었다. 어찌됐든 고등학교 3년을 거치면서 다른 전공을 택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들은 그런 내게 경영학이나 법학과 같은 실용 학과 진학으로 생각을 고쳐먹을 것을 종용했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다. “네가 생각하는 대로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먹고 살기 어려운, 즉 취업이 안 되는 불문학을 선택했다 크게 후회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공부가 하고 싶었고, 제대로 공부하게 된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부모님도 이런 내 결정을 탐탁지 않게 여기셨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우겼다. 대 학자가 될 터이니 두고 보라고.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학비는 꼭 마련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프로파간다로 가득한 대학문화

이런 설득 끝에 무사히 원서를 넣을 수 있었다. 2001년 겨울, 드디어 나는 서울 소재 A대학 불문학과에 합격했다. 뛸 듯이 기뻤다. 이제 마음껏 공부하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설마 그 순간이 ‘지옥문’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대학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는 연습을 8학기 내내 해야 했다.

그 첫 관문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이었다. OT 첫 날, 교내 노천극장으로 집합하라는 학교의 부름을 받고 시간에 늦지 않게 달려갔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희한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노천극장에는 각 학과의 깃발을 든 선배들이 있었다. 내 눈에는 마치 유치원생을 마중 나온 사람, 아니 관광 가이드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유심히 깃발에 쓰여 있는 글귀들을 살펴보니 학과 이름 앞에 ‘강철’ ‘선봉’ ‘전진’ 등의 문구만 잔뜩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쉽사리 간파할 수 있었다. 프로파간다성이 너무 짙어 약간 불쾌하기도 했지만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어느 정도 학생들이 모이자 선배라며 몇 명이 앞으로 나와 인사했다.

그러면서 무슨 학번 누구임을 스스럼없이 큰소리로 밝혔다. 그들 뒤에는 선배 몇 명이 뒷짐을 지고 있었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것으로 봐서 고학번들인 것 같았다. 속칭 ‘FM’이라고 부르는 자기소개 방식이었다. 일종의 시범인 셈이었다. 너희 새내기들도 앞으로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듯.

TV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군대에서 이등병이 힘차게 관등성명을 내뱉는 모습 말이다. 그러는 사이 옆 학과에서는 춤을 추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중가요에 맞춰 율동을 하는 것이라는데, 도저히 눈뜨고 봐주기 민망할 정도였다. 이제는 성인이라고 부를 나이의 사람들이 딱딱 행동을 맞춰 군무를 펼치는 모습을 어디서 쉽게 보겠나?


요즘 대학에서는 비실용 학문에 대한 인기가 낮다. 한 인문학 강의실의 수업시간, 휑할 정도로 빈 자리가 많다.

대학 입성 첫날, 나는 원칙 하나를 세웠다. 내일부터는 OT에 나가지 않으리라. 대학은 말 그대로 ‘큰 공부’를 하는 곳이지, 선전·선동이나 입대 전 군대문화를 미리 체험하는 곳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교양을 쌓기 위해, 또는 선후배 간의 건전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모임이라고 생각되면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 역시 헛된 바람에 불과했다. 첫 MT의 기억도, 과내 학회 모임 첫날의 분위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MT는 OT와 거의 똑같았다고 보면 된다. 약간의 유흥이 더해졌을 뿐이었다. 이제부터 학회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나는 당연히 학과 내 불문학회에 가입했다.

적어도 그곳만은 소설·시·희곡 등 문학을 사랑하는 대학생의 모임일 것이라고, 그리고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역시 착각이었다. 선배들 중 진짜 독서파는 극히 소수였다.

수박 겉핥기 식으로 아는 체만 했지, 제대로 책 한 권이나 읽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무식한(?) 선배들이 더 많았다. 학회 선배라기보다 그저 과 선배에 불과했다.

당연히 의문이 들었다. “왜 저 선배들은 학회에, 그것도 조금은 진지해야 할 문학회에 가입한 것일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내 동기들이 꼭 그랬기 때문이었다. 그 매커니즘은 OT에서 출발한다. 나는 두 번째 날부터 가지 않아 잘 몰랐지만, 선배들과 신입생 간에 친목이 두텁게 형성돼 있었다.

선배들은 서로 자신의 학회에 후배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하는 듯했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학회 회원이 많아야 과에서 운영비 등을 많이 지원받는다는 말도 나돌았다.

학술 아닌 친목 다지는 학회활동

학회 가입 후사로 술과 밥의 무한제공을 약속받은 새내기들은 자신의 관심사보다 어떤 선배를 따라갈까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았다. 이런 일이 어디 우리 학번만의 일일까? 매년 반복되다 보니 학회는 원래의 목적과 상반된 일반 친목단체로 전락한 경우가 허다했다. 물론 모든 선배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고학번 중에는 전공자답게 불문학에 심취한 사람도 소수이지만 있었다. 나는 그런 선배들과만 어울렸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선배들도 한 학기가 지난 뒤에는 얼굴 보기가 무척 힘들어졌다. 하반기 취업 시즌이 다가오면서 그런 현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1학기와 달리 2학기의 캠퍼스 풍경은 더 살벌한 편이었다.

그 즈음 나도 학회를 그만뒀다. 1학년을 마치고 남자 동기들 대부분이 군입대를 위해 휴학을 신청했다. 2학년에 진학하기 위해 남은 몇몇과 여자 동기들은 복수전공을 어떻게 신청해야 할지 매일 열띤 토론을 벌였다. 사회에 나가 무역업에 종사하고 싶다던 한 영문과 친구는 부전공으로 경영학을 신청할 것이라고 했고, 같은 과의 다른 친구는 통사론을 더 공부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때는 더 깊은 공부 쪽으로 방향을 잡은 친구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 판단이 완전히 틀렸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들은 수강신청 때 자리가 없어 수업을 못 듣는 경우가 허다하다는데 내 경우는 달랐다. 오히려 여유가 넘쳤다. 교양과목인 현대철학강의 신청자는 수강신청기간이 끝날 때까지 10명을 넘기지 않았다.

그 큰 강의실에서 교수를 포함한 11명이 수업한다니, 마치 토론회처럼 진지할 것 같았다. 전공수업보다 오히려 더 깊이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생겼다. 하지만 그 꿈은 1주일 만에 산산이 깨졌다. 첫 수업이 있던 날, 아침부터 들뜬 마음으로 다시 한번 강의실을 확인하고 집을 나섰다.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벌써 머릿속에는 그들과 라캉·데리다·들뢰즈 등의 철학을 논할 그림이 그려졌다. 한 사람이 이야기하면 옆에 앉은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런 생각 등을 하며 강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수강신청 인원이 부족해 폐강합니다.”

‘상실의 시대’에 빠진 인문학

교실 안은 썰렁했고 칠판에는 지극히 사무적인 투의 몇 글자가 인쇄된 A4용지 한 장이 붙어 있을 뿐이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 겪는 터여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우선 자리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봤다. 등록금을 지불하고 원하는 과목을 신청했는데 인원이 모자라 강의 자체를 없앤다? 이상했다. 교수도 확보됐을 테고, 수업할 여건이 갖춰졌으니 온라인 수강신청란에 띄웠던 것 아닌가?

한참 생각에 빠져 있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문 쪽을 바라보았더니 한 손에는 두 권의 책, 다른 한 손에는 가방을 든 사람이 서 있었다. 얼핏 교수처럼 보였다.

“혹시 교수님이세요?”
“네. 서둘러 왔더니 학생 혼자인가 봐요?”
“수업이 폐강된 것 같은데요.”

깜짝 놀란 교수는 칠판 쪽을 바라봤다. 잠시 굳은 얼굴을 하더니 이내 허탈한 목소리로 “아무 연락 못 받았는데…. 지난 학기에도 그러더니 또 이렇게 됐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단과대학 앞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정교수가 아니라 시간강사였다.

마치 조선시대 보부상처럼 전국의 대학을 떠돌며 강의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마저 자리가 없어 힘들다는 속내를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털어놨다. 얼마나 힘겨운지 짐작이 갔다. 그는 이번처럼 전에도 몇 번 수업이 폐강된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이번이 세 번째예요. 요즘 학생들이 이런 수업 듣나? 충격받을 일도 아니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눈가에는 물기가 어른거렸다. “꼭 강의를 듣고 싶었는데 못 듣게 돼서 아쉽다”고 말하자 그는 “내가 대학 다닐 때는 그래도 그런 학생들이 많은 편이었다”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문·사·철(文·史·哲)에 대한 탐구정신 같은 것이 있었어요. 어찌 보면 낭만이기도 했고, 그 자체가 자랑이기도 했죠. 그런데 요즘은 안 그래요. 학생처럼 관심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한 것 같이 느껴질 만큼 줄어도 너무 줄었어요.”

돈 버는 것과 무관한, 즉 비실용 학문에 대한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다는 그의 지적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에서 철학박사 과정을 밟았다는 그는 아직 사회 물이 덜 든 내게 철학이 아닌 세상 사는 이야기를 많이 해줬다.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제대로 해본 적은 없지만, 캠퍼스 울타리 밖에서는 의외로 호응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인문학에 목마른 사람은 대학생이 아닌 일반 사회인이라는 것. 하지만 그쪽도 벌이는 시원찮다고 했다. 열심히 듣는 청강생이 있다 해도 그 정원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인문학의 현실 때문이었다. 그래도 초심이 그랬듯 학자로서의 길을 걷는 것이니 진지하게 배우겠다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행복하다는 그.

문제는 역시 대학 쪽이었다. 찾는 학생이 없으니 학교에서도 지원을 줄이고, 그럴수록 수강신청하는 사람은 더 줄어드는 듯했다. 대학생활 내내 봤으니 이제는 진부하게 느껴지는 것이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내가 꿈꾸는 학자의 길이 그렇다는 것에 놀랐고, 대학과 대학생들의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고등학교 은사들이 진학을 권한 경영학과의 경우 사정은 딴판이었다. 영문학과 친구가 그랬듯 비경영대 학생들이 너도나도 취업과 관련해 경영학으로 몰리다 보니 강좌를 여럿 개설해도 미어 터질 정도로 학생들이 몰렸다. 부익부빈익빈의 악순환은 신성한 상아탑 안에서도 현재진행형인 셈이었다.

대학생활의 고비는 그때부터 왔다. 나 역시 방황하기 시작했다. 전공수업을 들어도 의심부터 하기 시작했다. 교수들의 행동이나 선후배, 동기들의 행동이 눈에 무척 거슬렸던 것이다. 심하게 말해 교수들 중에는 ‘사기꾼’이 많았다. 여기서의 사기란 ‘지식사기’다. 20~30년 된 교재는 물론 매년 똑같은 내용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어떻게 정년까지 버티는 것일까?

말로는 허울 좋게 인문학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내 생각은 그들과 달랐다. 인문학도 시대에 발맞춰 변하게 마련이다. 때문에 새로운 해석이 나오고, 새로운 학자들이 탄생하는 것 아니던가? 그럼에도 이들은 철옹성처럼 버티며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려 하지 않았다. 불문학의 경우, 가뜩이나 전국적으로 폐과 위기에 내몰려 교수직 공고를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상황인데 말이다.

실제로 강의의 질도 시간강사 쪽이 훨씬 나은 경우가 많았다. 가령 최근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한 강사는 비교문학 강의를 하면서 불문학 속에서의 소수문학과 한국·일본·중국 등의 동양문학 속 소수문학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과제를 주는 등 상당히 신선한 내용이 많았다.

하지만 이들은 학내에서 주목받지도, 성장하지도 못하는 듯했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고교시절부터 가졌던 내 꿈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구태의연한 강의에 신물 나…

학생들이 취업에 목을 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구직활동이 힘든 시기였던 만큼 더 그럴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이 선택한 전공에 대해 관심 정도는 가져줬으면 하는 다소 건방진 생각도 들었다. 학점을 따기 위해 벼락치기 공부를 할 뿐 제대로 책 한 권 안 읽고 문학수업을 듣는 과 학생들도 많았다.

그들이 평소 도서관에 앉아 펼쳐 드는 책은 영어시험 교재 아니면 고시 관련 서적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왜 대학을 다니는 것일까? 이런 질문 앞에 서면 우리 사회에서 대학이 대졸자 양성소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들에게 졸업장은 대학을 나왔다는 취업용 자격증에 다름 아니었던 셈이다.

하루는 도서관에 앉아 내 등록금의 가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했다. 강의 내용은 부실하지만 전공필수여서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과목들, 그리고 그 시간에 대한 기회비용 등을 고려해볼 때 산술적으로 따지기는 힘들지만 대학은 ‘비싼 도서관’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8학기째 접어들면서 많은 갈등을 했다. 계속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친구들처럼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갈등이었다.

쉬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의 대학 현실에서는 국내 대학원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땅에 묻는 행위일 테고, 또 학위 취득 후 시간강사 자리도 확보하지 못해 캠퍼스의 미아가 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취업 전선에 뛰어드는 것에도 문제가 있었다. 단 한 번도 실용학문 수업을 듣지 않은 나를 받아줄 기업이 국내에는 없다는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는 대부분의 학생이 가지고 있다는 토익 고득점이나 기타 자격증도 없었다. 학점 역시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다른 학생들처럼 학점이 후한 교수들의 강의를 찾아 듣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가짜 취업률로 돈 벌려는 대학

이런 생각들을 정리하지 못한 채 지난 2월 나는 졸업을 맞았다. 대학을 떠난 몸이지만 아직도 대학으로부터 자유롭지도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것은 며칠 전 받은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걸려 온 전화의 내용은 “취업했느냐”였다. 아무리 취업이 중요하기로서니 ‘지성의 산실’이라고 부르는 대학이 어떻게 갓 졸업한 동문을 상대로 취업 여부만 묻는 것일까? 그 숨은 뜻은 전화를 건 상대와의 대화에서 금방 나타났다.

“취업하셨나요?”
“아직 안 했습니다.”
“혹시 대학원에 다니시거나 아르바이트라도 하지는 않으시나요?”
“잠시 보습학원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럼 동문님께서는 취업자이십니다.”

이런 황당한 일이 있나? 얼토당토않은 취업률 조사 앞에서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내가 취업자라는 말인가? 이는 각 대학이 ‘취업률 인플레’를 조장하기 위해 만든 속임수였다. 이를 자료로 삼아 대학은 신입생 유치 때 홍보에 활용한다고 들었다. 멋 모르는 고등학생들을 꾀기 위해서였다.

진리를 가르쳐야 하는 대학의 요즘 실상이다. 그토록 졸업생 취업률이 중요하다면 차라리 화끈하게 지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등록금 낸 것을 아깝게 여기는 여러 졸업생이 도움을 받을 것 아닌가? 새로운 계좌인 미래의 신입생에게는 부단히 노력하면서도 헌 계좌인 졸업생은 나 몰라라 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대학이 그 정도로 매정한 곳이었다면 절대 들어가지도 않았을 터. 물론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대학은 생존의 절대 필요조건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대대적 투자를 마다하지 않는다. 화려한 교정, 최첨단 장비를 갖춘 강의실, 그리고 학생들을 즐겁게 해줄 엄청난 규모의 정기적인 축제. 오히려 강의의 질을 높이는 교수진 확보는 나중 문제다.

이러니 대학의 미래가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 또 다른 생각도 들었다. 우리 사회에서 대학이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대학이 과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의 문제였다. 다소 고답적인 이 질문 앞에 서면 자연스레 지난 6년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다. 꿈을 가지고 고등교육의 문을 두드린 학생이 있다. 그는 대학에서 꿈을 잃었다.

그 중심에는 돈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가 작용했다. 그리고 이제는 모교가 돈을 벌기 위해 그를 이용하려 한다. 지금도 그 대학 안에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야 할 취업준비생들로 가득하다. 진정한 대학과 대학문화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아닐까? 이러한 의문의 연속 속에 살아가는 나는 요즘 이 나라를 뜰 채비를 하고 있다.

이른바 유학이다. 그렇다고 학위를 따고자 함은 아니다. 다시 한번 제대로 된 공부를 하기 위해서다. 적어도 오늘날 한국의 대학보다 나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다면 내 꿈도 다시 불씨를 일으킬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 심정으로는 다시는 이 땅을 안 밟을 것 같다. 돌아와서 ‘고난의 행군’을 할 바에야 유학 현지나 다른 나라에서 학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을 꺼내든다.

“나의 이야기를 읽고 난 뒤에는 이 책을 던져버려라. 그리고 밖으로 나가라.”

200904호 (200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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