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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5주년 특별기획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빌딩을 지어 달라” 

국가경쟁력 2위, 국민소득 5만 달러… 도시국가 싱가포르 급성장 비밀 

박성현 월간중앙 취재팀장 김동현 인턴기자 사진·전민규 기자
■ 하늘에 배를 띄우겠다(마리나베이샌즈)는 상상력이 동남아 도시국가에 ‘현대판 로마’를 건설 ■ 외국인들이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파격적 인프라가 사람과 자본 빨아들이는 블랙홀 ■ 기업 CEO처럼 똘똘 뭉친 공직사회와 탄탄한 제조업이 선진화 이끄는 두 개의 수레바퀴

▎1인당 국민소득 6만 달러에 도전하는 싱가포르의 화려한 야경은 아시아 선진국의 미래를 보여준다. 마리나베이샌즈 하늘정원에서 바라본 싱가포르 마천루.



도시공학자인 김갑성 연세대 공대 교수에게는 싱가포르가 2010년을 기점으로 두 개의 서로 다른 도시로 각인돼 있다. 2003년 방문 때 이곳은 고지식하고, 딱딱하며, 보수적인 이미지가 풍기는 그저 그런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태형(笞刑)이 존재하고, 엄격한 법과 도덕에 짓눌린 도시는 우중충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2011년 다시 이 도시를 찾았을 때는 확연히 달랐다. 엄격한 형벌은 그대로였지만, 한층 밝아진 사회 분위기에 감탄사가 터져나올 정도였다.

무엇보다 도시 경관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2010년 4월 남쪽 해변에 문을 연 마리나베이샌즈(Marina Bay Sands) 호텔을 보고 깜짝 놀랐다. 55층의 호텔 빌딩 3개 동을 연결한 옥상에는 초대형 배가 하늘을 나는 모습을 한 ‘하늘정원(Sky Park)’이 들어서 있다.

건물 외관이 최고 52도나 기울어져 있어 현대판 피사의 사탑이라 불리는 이 호텔은 세계 최고 난이도 건축공사로도 주목받았다. 김 교수는 “하늘에 배를 띄운 싱가포르에 어찌 매료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독특한 디자인의 마리나베이샌즈 호텔이 들어선 뒤로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진 듯했고 활기차 보였다.”

특이한 랜드마크 하나가 이렇듯 한 도시의 인상을 180도 바꾼다. 마리나베이샌즈는 미국 카지노 그룹인 샌즈그룹이 55억 달러를 투자해서 2500개의 객실을 갖춘 특급호텔이다. 축구장 3개 넓이의 옥상 공간에는 수영장과 전망대, 식당이 들어서 있다. 싱가포르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고, 이 호텔 주위에 제각기 다른 디자인과 색상으로 설계된 고층 빌딩이 자리해 싱가포르 대표적 명소의 하나가 됐다. 싱가포르의 스카이라인은 이 호텔에서 쏘아 보내는 환상적인 레이저쇼와 어우러져 싱가포르 야경을 절정으로 이끈다.


▎1 싱가포르의 랜드마크인 마리나베이샌즈 호텔. 옥상에는 초대형 배가 하늘을 나는 모습을 한 ‘하늘정원’이 들어서 있다. 2 레이저 분수쇼는 마리나베이샌즈를 찾는 관광객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3 마리나베이샌즈 쇼핑몰 내부. 건물 내부의 수로를 따라 사람을 실은 배가 떠 다닌다.
싱가포르 정부가 이 건물을 지을 당시 샌즈사에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단 한 가지 요구 조건만 내걸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건물을 지어 달라”는 주문이었다. 어디서 본 듯한, 그저 그런 구조물은 사양한다는 말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건물은 이렇게 탄생했다. 마리나베이샌즈에는 싱가포르의 염원, 싱가포르의 미래가 녹아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파격이 숨어 있다.

MICE가 싱가포르 경제의 새 돌파구

그 파격이란 바로 이 호텔 지하에 들어선 내국인 출입이 허용된 카지노다. 껌을 아무데서나 씹어도, 화장실 물을 내리지 않아도 처벌되는 이 나라에 도박장이라니!

이는 2004년 8월 취임한 리센룽 총리가 카지노가 포함된 복합리조트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을 때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이자, 리 총리의 아버지인 리콴유 전 총리를 비롯한 많은 싱가포르 국민도 느낀 당혹감이다.

청정국가, 법치국가로 이름난 싱가포르에 무슨 사행심을 부추기는 카지노냐는 반대여론도 일었다. 하지만 리 총리는 아시아 관광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자면 카지노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모두가 변화하는데 우리만 변하지 않는다면 20년 후 싱가포르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정공법으로 반대파들을 설득했다.

김갑성 교수에게 갑갑함을 안겨준 싱가포르의 엄숙주의·보수주의 가치에 실용주의의 물결이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결국 2010년 4월 개장한 ‘마리나베이샌즈’와 직전인 2월 문을 연 ‘리조트월드센토사(Resorts World Sentosa)’ 등 두 곳에 카지노가 들어서게 됐다. 카지노는 싱가포르 경제의 새로운 도전을 상징했다.

리조트형 카지노 도박을 허가한 정부의 의중은 그대로 적중했다. 싱가포르는 2008년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2009년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2%포인트로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이듬해인 2010년에는 14.7% 성장이라는 역대 최고치를 달성해냈다. 전년도 마이너스성장에 따른 기저효과도 있었겠지만 2010년 개장한 두 개의 카지노가 관광산업 활성화의 촉매제 역할을 하면서 경기회복의 원동력이 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카지노가 국민의 사행심을 조장하리라는 우려도 상당 부분 씻겨나갔다. 리조트형 카지노 개장은 GDP 1.7%포인트 상승에다 4만 개의 일자리 창출 효과를 불러왔다는 분석도 나왔다.

2개의 카지노 개장은 싱가포르의 미래를 건 중차대한 결정이었다. 카지노를 포함한 대규모 복합 리조트를 건설해 고부가가치의 ‘마이스(MICE·Meeting, Incentive, Convention, Exhibition)산업’을 키운다는 발전 전략의 핵심이다. 이에 앞서 2008년 9월엔 F1(Formula 1) 그랑프리 자동차경주대회가 사상 처음으로 야간에, 그것도 도심 도로 위에서 열려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다. 시내 호텔에 투숙한 관광객들도 F1 경기를 즐기도록 고안된 경기 방식이다. 외국인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이벤트 유치에는 물불을 안 가린다. 이런 식으로 싱가포르는 모든 자원을 관광산업 활성화, 국부 창출에 동원한다.

관광경영을 전공한 박대한 박사(㈜한국의료관광개발 대표)는 “싱가포르는 자연적·문화적 자원은 거의 없는 편인데도 관광자원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탁월하다”고 말했다. 외국인의 눈요기가 되는 관광자원은 자연적·문화적 관광자원으로 나뉜다. 한국은 둘 다 부족하고, 싱가포르는 더 부족하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자연 관광자원이 아니라 인공 자원, 사회적 자원, 산업적 자원, 위락적 자원을 육성해 관광객을 끌어들인다고 박 박사는 말했다. “국제회의 유치나 전시회 등 MICE 산업은 원래 관광자원이 될 수 없는데 설문조사를 해보면 여기에 참석한 이들의 90% 이상이 관광에 나선다. 결국 컨벤션도 관광 인프라로 연계된다.”

관광객뿐만 아니라 해외 기업들을 끌어들이는 힘도 대단하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지난해 11월 4일부터 이틀간 싱가포르 현지에서 그룹 사장단 회의를 열었다. 에너지, 유통, 건설을 주력으로 하는 GS그룹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데 세계 3대 석유거래 시장을 가진 싱가포르의 중요성을 감안한 행보다.

허 회장은 이 자리에서 “GS그룹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자면 국내와 해외시장에서 축적한 기술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싱가포르를 발판삼아 동남아 시장에도 적극 진출해야 한다”고 했다. 싱가포르는 아시아 석유시장의 허브일 뿐 아니라, 아시아지역 소비유통 트렌드를 선도하는 테스트 시장이며, 금융과 연계된 선진화된 건설환경이 형성돼 있다는 게 GS그룹의 진단이다. 에너지, 유통, 건설을 주력으로 하는 이 그룹의 입장에서는 싱가포르가 동남아로 가는 교두보가 된다.

실제로 도심 곳곳에서 새로운 건물이 올라가고, 포크레인 기계음과 쇠망치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국내 기업이 싱가포르에서 수주해 진행하는 사업이 2013년 1월 현재 총 47개 프로젝트에 공사액만 15조원에 이른다고 이곳 한국대사관의 김홍주 상무관이 밝혔다. 국내 건설업체에는 황금어장인 셈이다. GS건설이 해외에서 수주한 최대 규모의 공사장(NTF 병원 신축)도 싱가포르에 있다.

1990년대 싱가포르는 한국, 홍콩, 대만과 함께 ‘아시아의 네마리 용’이라고 불렸지만 지금은 혼자서 승천하는 모양새다. 스위스 제네바에 자리한 비영리 국제기관인 세계경제포럼(WEF)이 해마다 매기는 세계 주요국 경쟁력 종합순위에서 싱가포르는 2011, 2012년 연속 2위를 차지했다. 2007년 7위에서 5위(2008년)→ 3위(2009·2010년)→2위(2011·2012년)로 차근차근 정상을 향해 다가서는 모습이다. 이제 극복해야 할 상대는 스위스 뿐이다.




한국의 W곡선, 싱가포르의 상승 곡선

반면, 한국은 2012년 144개국 중에서 19위에 그쳤다. 2007년 역대 최고인 11위를 기록한 이래 2008년 13위, 2009년 19위, 2010년 22위, 2011년 24위 등으로 계속 뒷걸음질 치다가 5년 만인 지난해 가까스로 반등에 성공했다.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싱가포르가 견조한 상승세를 보인 반면 한국은 들쭉날쭉한 ‘W곡선’을 그려왔다.

이 나라 1인당 국민소득도 2008년 3만9000달러에서 글로벌 금융위기 직격탄을 맞은 2009년 3만7000달러 선으로 조금 내려앉긴 했으나 이듬해 4만4000달러로 4만 달러의 벽을 단숨에 넘었다. 이어 2011년 5만123달러로 뛰어오르더니 이제 6만 달러에 도전한다. 물론 이는 환율 절하에 힘입은 착시효과라는 지적이 있기는 하지만 통계가 주는 인상만으로도 싱가포르가 승승장구한다는 느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사를 도전과 응전의 역사로 해석한 바 있다. 이 말이 꼭 들어맞는 나라가 싱가포르라 하겠다. 1965년 8월 9일 말레이시아 연방으로부터 싱가포르가 독립했다. 당시 싱가포르 총리였던 리콴유는 TV 방송국 기자회견에서 분리독립 과정을 설명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런저런 걱정 끝에 새벽 2시를 훌쩍 넘겨 잠자리에 들었지만 앞날이 걱정돼 잠을 설쳤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밝히기도 했다. 말레이시아 연방이 화교 즉 중국계가 다수를 차지한 싱가포르를 불편하게 여겨 떨쳐내는 ‘원하지 않은 독립(자서전의 첫 소제목)’이었던 탓이다. 물론 사학자들 중에는 리콴유가 분리독립을 노려 일부러 말레이시아를 자극하고 다른 말을 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하지만 자서전은 시종일관 원치 않는 분리독립을 당했다는 기조에 입각해있다.

말라카해협에 자리한 싱가포르는 땅덩어리는 비좁고, 부존 자원은 빈약하지만 동서양을 잇고 남아시아와 대양주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태풍·쓰나미 등 자연재해로부터도 안전해 예로부터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영국식민지 시절부터 일찍이 중개무역항으로서 무역금융이 발달한 게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이마저도 주변 국가들이 싱가포르를 배제하고 유럽·미국·일본 등과 직교역하겠다고 나서고 말레이시아도 순종하지 않는 싱가포르에 본때를 보이겠다고 벼르는 중이었다. 싱가포르는 말레이인의 바다 위에 외롭게 떠 있는 중국인의 섬과 같았다는 게 리콴유 전 총리의 회고다. 리 전 총리는 “싱가포르가 독립국가로 살아 남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라고 썼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남들과 다른 길을 갔다. 지리적 이점을 극대화한 개방과 자유경쟁을 택했다. 이는 아시아에서 일기 시작한 민족주의 물결을 거스르는 항해와도 같았다. 아시아 주요국가들이 다국적기업을 유치하기보다 자국 기업을 키우는 정책을 우선시할 때 싱가포르는 발빠르게 외자유치 전담기관인 경제개발청(EDB)를 설립하는 등 외국자본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았다.

세제 지원과 부지 제공 등의 결정권한을 가진 EDB는 해외기업을 찾아다니면서까지 유치활동을 벌였다. 또 자유무역 활성화 차원에서 술, 담배, 기름, 자동차 등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품목에 무관세를 적용하는 등 시장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변방의 소국에 지나지 않던 이 나라는 독립 후 반세기도 채 지나지 않아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섰다. 뉴욕과 런던에 이은 세계 3대 원유거래 시장이다. 또 아시아의 대표적 금융 허브이자 세계 4위의 금융중심지다. 중국 상하이에 이어 세계 2위의 컨테이너항을 가진 나라이기도 하다. 세계 환적 화물의 20%를 소화해낸다. 6300여 항공편이 2010여 개의 도시를 연결하는 아시아 항공의 허브이면서 연간 1600만 명이 찾는 관광대국이다.


자주국방 태세도 갖췄다. 징병제를 시행하는 싱가포르는 6만 명의 현역 군인과 31만 명의 예비군을 보유한다. 몸이 불편한 청년도 입대해 행정과 같은 할 수 있는 병역 의무 이행의 길을 열었다. 매년 예산의 25%를 국방비로 지출한다. F-16 등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군대는 아세안 역내 최강의 전력으로 평가받는다. 군인들은 호주·프랑스·미국·대만 등지에서 전지훈련을 한다.

싱가포르도 기업처럼 망할 수 있다?

화려한 외형과 명성을 자랑하는 싱가포르지만 물리적 실체는 의외로 초라하다. 전체 면적(710㎢)은 서울(605㎢)의 1.2배 정도여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그야말로 ‘지구 위의 작은 점’에 불과한 국가다. 적도에서 북쪽으로 137㎞ 떨어진 섬나라로 전형적인 열대 기후에 무덥고 습하며, 툭하면 스콜이 쏟아진다.

인구도 530만 명에 불과한 이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그 비결이 궁금할 법하다. 한국만 해도 정권이 바뀌거나 송도신도시 건설과 같은 대형 개발 프로젝트가 추진될 때는 ‘싱가포르 배우기’ 바람이 불었다.

싱가포르 전문가들은 이 나라 경쟁력의 요체를 다각도에서 분석한다. 2011년 부임한 오준 주(駐)싱가포르 한국대사는 싱가포르가 잘사는 이유를 기존의 개방정책과 더불어 예측 가능성에서 찾았다. 그는 WEF가 매기는 국가경쟁력 지수를 예로 들었다.

“싱가포르는 2년 연속 2위에 올랐다. WEF 국가경쟁력이란것도 결국엔 서구의 기업인들의 관점을 반영한다. 기업인에겐 안정적으로 사업하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나라가 국가경쟁력을 갖춘 나라다. 싱가포르에서 사업을 하면 이익을 낸다는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기업 관련 법과 제도가 잘 정비돼 있고, 심지어 정권도 안 바뀐다는 예측이 가능한 곳도 싱가포르다.”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싱가포르 한인회장을 지내고 지금은 싱가포르 한인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있는 정영수 CJ그룹 고문은 싱가포르에서 30년 살았다. 그래서 싱가포르의 체취와 습성, 근저에 깔린 본능까지도 잘 아는 편이다. 그는 이 나라가 “기본적으로 영어를 사용하고, 교통·교육·환경·치안 등 모든 것이 해결되고 막힘이 없기에 외국인이 살기 편하다”고 했다. 카지노가 번성하는 데도 암흑가의 입김은 없는 듯하다. 정 고문은 “작은 도시국가에서는 정보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국가기관에 전달된다“고 했다. 주먹들이 뿌리를 내리기 전에 경찰 등 공권력이 철퇴를 내린다는 말이다.

더운 날씨의 나라이지만 도심을 걸어보면 쾌적한 기분마저 든다. 1990년부터 배기가스를 내뿜는 차량을 일정한 대수로 묶은 덕분이다. 공기도 맑을 뿐만 아니라 교통 흐름도 비교적 원활하다. 싱가포르의 별칭인 ‘가든시티(Garden City)’가 말해주듯 가로수도 아름답게 정비돼 있고, 자투리땅에는 예외 없이 잔디가 심어져 있다. 싱가포르의 초석을 다진 리콴유 전 총리가 도심의 기온을 끌어내리고자 조경사업에 각별한 관심을 쏟은 결과다.

“이쯤 되면 다국적기업이 동남아 지역 본부 입지를 선정할 때 이왕이면 ‘싱가포르에서 살고 싶다’는 심리적 요인까지 작용하게 된다”고 지난해까지 주싱가포르 대사관 재무관으로 근무한 감충식 한국은행 외환건전성조사팀장이 말했다. 그는 “로마가 그랬듯이 싱가포르도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로마이래 가장 잘 가꿔진 도시라는 싱가포르는 오늘의 영광을 내일도 이어갈 수 있을까? 국가 경제규모(국내총생산액)라 해봤자 삼성그룹 한 기업의 매출액에 지나지 않는다. 2011년 싱가포르 경제규모는 2598억 달러였고, 같은 해 삼성그룹 매출액도 2480억 달러(273조원)였다. 그래서인지 국가 운영도 마치 기업 경영을 연상케 한다고 정우진 외교통상부 동남아과장이 말했다. 그는 2000년대 중반 2년 반가량 싱가포르에서 근무했다. “공무원들이 마치 기업의 임직원처럼 움직인다”는 게 그가 가진 싱가포르 공직사회의 인상이다.

2005년 싱가포르에 부임한 그는 한·싱가포르 FTA(자유무역협정) 타결 및 마무리 작업에 투입돼 싱가포르 카운터파트 격인 통상산업부의 부국장과 손발을 맞추게 됐다. 이 정도 직책이면 싱가포르의 엘리트 그룹인 일명 고위공무원단(Administrative Service)에 속하는 고위직이다. 협상이 완료된 뒤 정 과장은 아이러니한 장면을 목격했다.

싱가포르 부국장이 한국으로 치면 정부 부처의 산하기관의 과장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열심히 일해 상을 줘도 시원찮을 판에 한국 같으면 극히 드문 좌천성 부서 이동이자 당사자로선 열불이 날 만한 인사 발령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싱가포르 국장은 “그게 뭐 어때서”라며 오히려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정 과장은 “한국으로 치면 예컨대 지식경제부에서 산하 공기업으로 밀려나는 모양새인데도 싱가포르 공무원들은 어떤 자리에서 일하느냐에 그리 개의치 않는 듯했다”고 말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싱가포르 공무원들이 어느 자리에서든 철저하게 정보를 공유한다는 것이고 그게 싱가포르를 떠받치는 힘으로 느껴졌다.”

싱가포르 공직사회에는 긴장감과 위기의식이 짙게 깔려있다고 말하는 이도 많다. 작은 도시 국가이다 보니 중대한 정책 판단착오 하나가 나라를 나락으로 빠져들게 할 수도 있다는 류의 경각심을 말한다. 감충식 한국은행 팀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은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스스로를 ‘small open economy(작은 개방 경제)’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싱가포르 공무원에게 한국은 자기네보다 인구가 10배나 많은 큰 나라다. 싱가포르 공무원들은 곧잘 ‘한국처럼 큰 나라는 정책 열 개 중 서너 개가 실패해도 충격을 흡수할 체력이 있어 문제 안될지 모르지만

싱가포르는 주요 정책 한 개만 실패해도 되돌릴 수 없는 손실을 안게 돼 심지어 나라가 휘청댈 수 있다’는 절




부처이기주의나 칸막이 관행은 사치품

싱가포르 관 리들도 이런 의견에 수긍하는 편이었다. 국가 경제 발전 청사진을 그리는 싱가포르 경제개발청(EDB·Economic Development Board)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특히 그러하다. 이 부서는 싱가포르 산업을 혁신해서 경쟁력을 유지·발전해야 하는 임무를 진다. 싱가포르가 지금의 경쟁력을 유지·강화하자면 새 산업, 새 성장동력을 찾아야하는데 그게 이 부서의 몫이다. 그만큼 어깨가 무겁다. 그래서 “항상 변화에 열려있어야 한다”고 싱가포르 경제개발청의 림 스위 니안 아시아 담당국장이 말했다.

그는 “새 정책을 수립할 때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다면 즉시 바꾸고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101쪽 인터뷰 기사 참조) 그래서 어떤 정책을 시행하기 전에 다른 가능성과 있을 수 있는 부작용까지 모두 고려한다. “일단 정책이 시행된 후 뭔가 맞지 않다고 느낀다면, 얼른 그것을 바로잡을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게 기본이다. 정책 반응에 따라 대처할 유연함과 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것이 핵심적인 고려사항이다.”

이와 더불어 정책 수립단계에서부터 정보 공유를 통한 내부의견수렴에 만전을 기한다. 림 국장은 “특정 부처가 새로운 정책을 세우면, 그것과 관련된 다른 부서나 부처가 참여토록 한다. 그 정책에 정부 모든 부서의 의견을 담아내는 게 정책 수립의 첫 단계”라고 말했다. 부처이기주의나 부처 간 칸막이 관행은 이 나라에서는 사치품이다.

정보공유는 부서 차원뿐만 아니라 개별 공무원 사이에서도 아주 긴밀하게 이뤄지는 것으로 보인다. 주싱가포르 한국대사관의 한 외교관은 한국 공무원과 이곳 공무원의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은 외국 정부의 공무원으로부터 업무협조 요청 이메일을 받으면 그걸 담당공무원에게 전달해주면 그걸로 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담당공무원이 외국 공무원과 어떤 논의를 하는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다르다. 담당공무원이 최초로 이메일을 전해준 동료 공무원에게 진행사항을 이메일로 일일이 알려준다. 피드백이 잘된다는 말이다. 다른 부서 업무일지언정 그런 식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크로스체크하는 일이 일상화된 듯하다.”

싱가포르 공무원들은 본업에만 충실하면 된다. 본업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잡무에 시달려 일단 자기 손을 떠난 일에는 만사가 귀찮은 한국과 사뭇 다른 풍경이다. 해외에서 ‘주식회사 싱가포르’ 라고 부르는 이유를 가늠케 한다. 정우진 외교통상부 과장은 “싱가포르 공무원들은 이런 식의 정책 추진 메커니즘과 밀착된 업무 협조를 통해 기업의 CEO처럼 똘똘 뭉쳐있다”고 말한다.

싱가포르는 관료를 포함한 소수 엘리트층이 여러 국영기업의 임원을 겸하기도 한다. 이들이 정치와 행정, 경제를 일사불란하게 이끈다. 정부 관리들은 어쩔 수 없이 기업의 CEO를 닮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특히 고위 공무원들은 새 성장동력을 발굴하기 위해 세상 밖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안테나를 쫑긋 세운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예의 주시하고 그 결과를 모으는 게 중요한 일과다. 림 국장은 “기업인들은 매우 예민해서 사업의 기회가 있는 곳에 꼭 간다”면서 “기업가의 동향은 적어도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고,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를 알려준다”고 말했다. 그래서 “기업인들과의 채널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싱가포르 창이공항 인근 항공산업기지에 자리한 외국계 엔진수리 공장 내부. 싱가포르는 제조업 육성에도 공을 많이 들인다.
국토 면적이 좁다고 해서 굴뚝산업을 멀리하는 것도 아니다. 이 나라는 국제금융, 물류, 관광 등 서비스 산업이 주종을 이룬다고 알려졌지만 제조업 기반도 여느 선진국 못지 않게 탄탄하다. 제조업이 GDP의 22~23%를 차지한다. 싱가포르 정부는 1980년대 독자적인 석유화학 산업 구축, 2000년대 자체 기술에 기반한 바이오의학산업 육성이라는 중대 결정을 내렸다. 여기에다 전자산업까지 더해지면서 싱가포르 3대 제조업 라인업이 완성됐다.

서비스 산업과 굴뚝 산업의 양 날갯짓

1980년 GDP의 23%에 달하던 제조업 비중이 중국으로 반환된 이후 3% 대로 뚝 떨어진 홍콩의 경우와는 다른 발전 경로를 택한 것이다. 이는 경제구조를 고도화하면서도 균형 잡힌 산업구조를 가져가려는 싱가포르 정부의 정책적 의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경제학) 교수는 “싱가포르 정부는 1인당 GDP 2만 달러에 진입하던 1990년대 초 국가경제에서 제조업 비중을 25%로 유지한다는 제조업 육성 방침을 정했다”고 말했다.


“제조업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기술적인 진보가 여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서비스 산업도 제조업과 관련된 분야가 많다. 금융, 컨설팅, 연구개발(R&D) 등도 제조업과 긴밀하게 연동된다. 제조업을 계속 업그레이드하면서 관련 서비스 산업을 확장하는 게 바람직하다. 한국은 더구나 인구와 경제 규모가 싱가포르보다 훨씬 크므로 더더욱 제조업을 활성화해야 한다. 싱가포르가 국민소득 2만 달러에 그런 결단을 내렸듯이 말이다.”

한국의 제조업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3년 22.9%에서 2011년 28.1%로 커졌고,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견인차 역할도 했다. 다만 임금 상승과 기능 인력난 등으로 고비용 구조로 접어들어 현재의 비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투자도 증가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기업은 비용 절감 및 생산성 제고 차원에서 해외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는 추세다. 이렇게 가면 국내 제조업 기반이 취약해지고 일자리 창출도 멀어진다. 신 교수는 “고용창출과 성장동력 확보를 과제로 하는 박근혜 정부는 국민소득 5만 달러 시대에서도 제조업 비중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싱가포르의 전략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싱가포르가 여러 산업 분야에서 고른 경쟁력을 가진 건 이 나라의 국부인 리콴유 전 총리와 뒤를 이은 고촉통 전 총리, 현재 정부를 이끄는 리센룽 총리의 지도력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관료집단을 형성하고, 부패 없는 청렴한 조직으로 가꿔온 공적은 평가받아 마땅하다. 효율적이고 깨끗한 정부가 제시하는 국가 비전에 국민들도 잘 따랐다.

주싱가포르 한국대사를 지낸 유광석 백석대 초빙교수는 싱가포르 역대 지도자와 정부를 일러 ‘계몽적 권위주의 정부’로 표현했다. 안목을 갖춘 깨끗한 정부가 효율적인 경제발전 전략을 수립하고, 미래 먹거리 산업을 끊임없이 창출함과 동시에 지금처럼 정부가 사사건건 간섭하고 국가를 통째로 이끄는 체제를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게 거대 구조물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 이유다. 특히 교육과 공무원 육성은 동전의 양면이다. 교육에 관한 정부의 입장은 단순 명쾌하다. 리센룽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획일적 평등주의 환상에 사로잡혀 엘리트 교육을 포기하고 교육 평준화를 고집한다면, 국가의 열등화와 사회의 하향 평준화를 초래한다. 결국 망국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

모든 초등학생은 6학년 말에 국가시험(PSLE·Primary School Leaving Exam)을 치른다.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는 1차 관문이다. 그 후 과정별 일제고사 결과에 따라 엘리트 교육과정으로 갈 인재와 직업 교육과정으로 갈 학생들을 가른다. 우수인재는 정부가 국가장학생으로 선발, 해외유학까지 보낸다. 그들이 귀국해서 싱가포르를 이끌어간다는 일명 고위공무원단에 합류한다.

약 300~400명의 엘리트 공무원 그룹은 이렇게 만들어지며 싱가포르 정부의 핵심 인물들이 거의 대부분 이런 과정을 밟는다. 그래서 싱가포르 국민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곤 한다.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지만 싱가포르에서 출세는 성적 순이 분명하다.” “아이돌 스타가 되려면 한국에서 태어나고, 공무원이 되려면 싱가포르에서 태어나야 한다.”

이렇게 선발된 공무원에게는 확실한 보장이 따른다. 총리의 연봉이 대략 200만 달러로 미국 대통령의 40만 달러, 한국 대통령의 18만 달러 선을 훌쩍 뛰어넘는다. 장관급 연봉도 100만 달러를 넘는다. 10만 명이 넘는 일반 공무원의 보수도 고위공직자들에겐 못 미치지만 같은 업무를 하는 대기업의 직원들에 못지않다. 외부 유혹에 한눈 팔지 않고 소신껏 일하라는 뜻이다.

‘회전문인사’가 주는 희망과 불안

의원내각제를 택한 싱가포르에서 1965년 독립 이래 집권 인민행동당(PAP)이 한 번도 권력을 놓지 않았다. 일당 지배 구조가 수십 년간 이어져오면서 정책의 지속성과 효율성을 높였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속설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는 잘 버텨왔다. 총리실 직속 부패행위조사국(CPIB)이 부패 혐의자를 엄격하게 적발하고, 그 대신 공무원은 검은 유혹에 흔들리지 않아도 될 만큼 대우를 잘해주는 게 이 나라다.

뒷돈을 받다가 걸리면 평생 망신일 뿐만 아니라 어디도 발붙이지 못하게 함으로써 마음속에서부터 부패의 싹을 싹둑 잘라버리게 한다는말을 듣는다. 싱가포르를 ‘감옥이 있는 디즈니랜드’, ‘감옥 속의 파라다이스’라고 역설적으로 부르는 이유다.

그러다 보니 우수인력의 공직사회 집중 현상은 심화돼왔다. 인재가 사회 각 분야에 고루 퍼져 있어야 균형발전이 가능하다는 주장에 싱가포르 정부와 여당은 530만 명밖에 안 되는 좁은 인력 풀에서 차 떼고 포 떼고 할 여유가 없다며 일축해왔다. 소수의 우수한 인력이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는 신념은 지금도 흔들림이 없다. 그래서인지 이곳 공직사회도 이른바 ‘회전문인사’를 한다. 장관직에 10년 봉직한 고위 공무원은 공기업의 책임자로 가는 경우가 많다고 유 대사가 말했다.

말하자면 싱가포르식의 ‘선택과 집중’이

201304호 (201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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