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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내가 좀 죽여주잖아, alright, 둘째 가라면 이 몸이 서럽잖아, alright…” 2월 24일 오후 싱가포르의 쇼핑거리로 유명한 오차드 로드의 최대 쇼핑 상가 ‘니안시티(Ngee Ann City·義安城)’ 앞 광장에는 강렬한 비트의 K팝이 고성능 스피커를 통해 쾅쾅 울려퍼졌다.삼성전자가 갤럭시 노트를 알리고자 니안시티 광장에 설치한 전시체험관과 홍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었다. 특히 걸그룹 2NE1의 히트곡 ‘내가 제일 잘 나가’의 경쾌한 노래가 나오자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가사를 직접 따라 부르기도 했다. K팝이 오차드 로드의 분위기를 단번에 압도하는 모습이다. 삼성전자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기자는 불쑥 한국의 새 정부가 추구하는 창조경제가 이곳에서 구현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박근혜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창조경제를 일러 “과학기술과 산업이 융합하고, 문화와 산업이 융합하고, 산업 간의 벽을 허문 경계선에 창조의 꽃을 피우는 것”이라고 했다. 세계를 주름잡는 한국의 스마트폰과 동남아에서 인기를 끄는 K팝의 만남은 정보과학(IT) 산업과 문화콘텐츠 산업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싱가포르에서도 한류의 기세가 등등하다. 처음에는 TV드라마가 맹위를 떨쳤다. 2002년 <겨울연가>, 2006년 <대장금>, 2009년 <꽃보다 남자> 같은 인기드라마가 현지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드라마를 보려고 한국어 강의를 듣는 현지인도 적지 않다는 설명이다. 드라마의 뒤를 이어 K팝 가수들이 상륙했다. 2010년에는 소녀시대, 원더걸스, 빅뱅 등 인기 그룹이 20여 회 공연하고 지난해 12월에는 2NE1 등의 공연이 있었다. 심지어 소니 같은 일본 기업도 K팝을 싱가포르 마케팅에 활용할 정도라고 한다.1인당 국민소득, 국가경쟁력 등 여러 면에서 앞서는 싱가포르지만 어쩌면 이 나라의 미래모델은 한국일지도 모른다. 싱가포르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뒷받침할 동력을 찾는 데 골몰해왔다. 그런 면에서 “IT, 영화, 음악, 게임 등 엔터테인먼트 부문에서 비교우위를 보이는 한국에 대한 싱가포르의 관심이 높아진다”고 오준 주싱가포르 한국대사가 말했다. 싱가포르 사람들도 지금 같은 성장전략만으로는 제2의 경제도약을 자신하지 못한다.
일당 지배체제에 대한 염증 나타나기도최근 싱가포르 분위기는 기자가 5년 전에 방문한 그 시절과는 사뭇 달랐다. 2008년 국제 마라톤 대회 취재차 싱가포르를 찾았을 때 지하철역에서 있었던 일이다. 도착 예정시각을 훌쩍 넘긴 것 같은데도 지하철은 도착할 기미가 없었다. 시간이 더 흐르는 사이 승객들은 점점 불어나 승강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고, 이들이 뿜어내는 체온과 내쉬는 숨으로 인해 피로감은 더해갔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승객들 가운데 그 누구도 큰소리로 불만을 나타내거나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다.한국 같으면 고함을 지르거나 역무원을 찾아가 행패를 부렸을 법한데 그런 소동이 벌어지지 않는 싱가포르가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숙소로 돌아와 싱가포르 공무원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곳 사람들은 국가 시스템을 신뢰하는 데다 현실에 순응하는 편이라서 웬만해서는 역정을 내거나 거친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고 답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싱가포르 시민들은 단체행동을 하기 시작한 걸까?그 답은 2011년 싱가포르 총선과 그 후 실시된 두 차례 보궐선거 결과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 의회 정수는 총 94명. 단일 및 집단 선거구로 이뤄진 24개 지역구 의원 정수가 84명이며, 나머지는 낙선한 야당 후보자에게 주는 의석, 국회가 지명하는 의석 등으로 구성돼 있다.2006년 총선 때만 해도 리센룽 총리가 이끄는 집권 인민행동당(PAP)은 직선 의석 84석 중 82석을 쓸어 담을 정도로 지지율이 높았다. 1965년 독립 이래 계속돼온 정부·여당의 정국 장악력에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을 정도였다. 정치적 토론과 비판의 자유가 제한받기는 했지만 국민은 깨끗하고 투명한 데다 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정부·여당을 신뢰했다.하지만 2011년 5월 총선은 달랐다. 사상 처음으로 야당인 노동당이 5명을 뽑는 집단선거구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야권의 득표율도 40% 선에 이르렀다. 선거 결과에 깜짝 놀란 정부·여당은 국민의 요구를 정치에 적극 반영하기 시작했고 정치개혁에 나설 것을 다짐했으며, 총리·장관 등 정무직 공무원 보수를 큰 폭으로 삭감했다. 그것이 민심의 이반을 완전히 되돌리진 못한 듯하다. 2012년과 올 1월 치러진 두 번의 보궐선거에서 야당이 또다시 승리한 것이다.‘성장’이냐, ‘표심’이냐 선택의 기로에서당장 인민행동당 일당 지배체제에 대한 염증과 변화의 열망이 반영됐다는 반응이 뒤따랐다. 싱가포르의 민주주의 발전은 경제력에 견줘 턱없이 더딘 편이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매긴 2011년도 167개 국가 ‘민주주의 지수’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81위에 머물렀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21위, 한국이 22위를 기록했다. 싱가포르에서 특히 저조한 분야가 ‘정치 참여’ 부문으로 10점 만점에 2.78점에 그쳤다.싱가포르 민주주의 지수는 전체 평균 5.89점의 절반에도 못 미칠 정도로 구성원들의 정치참여 통로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실제로 이 나라의 정책결정은 권위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정 정책에 국민이 어느 정도 동의하는지도 모호하고, 대놓고 비판을 할 형편도 못 된다. 지금까지는 내 목소리를 내려놓고 정부의 지침과 비전을 따르면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많았다.5년 임기의 국회의원 총선은 2016년에 다시 치러진다. 현재 유일 야당세력으로 부상한 노동당이 여세를 몰아 대거 약진하거나, 나아가 민주주의 기본원칙인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통할 정도로까지 의석 재편이 이뤄진다면 싱가포르를 작동하는 정치·경제 메커니즘에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지금처럼 엘리트 관료집단이 국민 기본권의 일부를 제약하면서까지 성장과 효율 만능주의로 국정을 이끌 수는 없다. 반대파를 힘으로 제압하고 민주주의를 억누르던 ‘싱가포르식 민주주의’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길로 접어든 것이다.다시 인구·이민 문제로 돌아오면 싱가포르 정부·여당도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듯하다. 자신들의 국정철학이 담긴 ‘인구백서’에 의거해 노동·이민·고령화 정책을 줄기차게 추진할 것인지, 아니면 ‘표’를 의식해 철학과 정치노선에 변화를 줄 것인지 고민에 직면할 수 있다.국회 한·싱가포르의원협회 회장인 김영환 의원(민주통합당)은 2012년 국회 지식경제위원장 자격으로 이 나라를 방문했다. 그는 싱가포르가 장점이 많은 나라라는 데 동의하면서도 지금처럼 민주주의가 미숙한 조건에서는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기 어렵다고 보았다.김 의원은 “싱가포르가 부러워하는 한국의 IT(정보기술)와 엔터테인먼트 같은 산업은 정보의 자유화, 언론의 자유없이는 활성화되기 어렵다”며 “민주주의 실현은 싱가포르가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자 감내해야 할 고통”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가 부패 없는 투명한 나라라는 점에서 선진적이지만, 정치적으로 후진국이다. 그 점은 한국에서 배울 게 많다.”사실 싱가포르나 한국이나 국가 건설단계에서는 사회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권위주의 통치가 나름 유용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는 미개한 상태에서 힘이 있는 권력자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면 자원을 적재적소에 투입하게 됨으로써 효용을 극대화할 수도 있다. 이에 반해, 민주주의 사회는 비효율에 따른 비용이 많이 생긴다. 여러 가지 의견을 합치는 과정에서 시간과 노력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의견도 없지 않다.“아프리카 독재가 실패한 것은 길을 잘못 들어섰거나 지도자가 사리사욕을 채웠기 때문이라면 싱가포르는 리콴유 일가가 산업의 상당부분을 장악하고 있긴 하지만 방향은 잘 잡은 게 된다”고 정영수 싱가포르 한국상공회의소 회장이 말했다. 지금 싱가포르는 계속 이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새 길을 개척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있다. 유사한 경로를 걷다 1987년 이후 민주주의 체제로 진입한 한국의 사례가 싱가포르에게는 둘도 없는 반면교사가 될지도 관심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