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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5주년 특별기획 - 싱가포르의 미래모델은 한국? 

 

박성현 월간중앙 취재팀장 사진·전민규 기자
경제성장과 함께 민주주의 체제로 먼저 이행한 한국을 반면교사로 삼자는 목소리도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기업하기에 편한 싱가포르라지만 내국인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다. 자신들의 기본적 권리를 희생하고 얻은 경제적 성과에 일부 국민은 회의를 품기 때문이다. 야당이 의외로 약진하면서 국가 주도의 일방적 발전 전략에 수정이 가해져야 될지도 모른다.

▎마리나베이샌즈 호텔 인근 공사현장에서 일자리를 찾는 외국인 노동자들. 싱가포르는 고령화와 노동력 부족이라는 양대 난관에 직면해 있다.



“누가 봐도 내가 좀 죽여주잖아, alright, 둘째 가라면 이 몸이 서럽잖아, alright…” 2월 24일 오후 싱가포르의 쇼핑거리로 유명한 오차드 로드의 최대 쇼핑 상가 ‘니안시티(Ngee Ann City·義安城)’ 앞 광장에는 강렬한 비트의 K팝이 고성능 스피커를 통해 쾅쾅 울려퍼졌다.

삼성전자가 갤럭시 노트를 알리고자 니안시티 광장에 설치한 전시체험관과 홍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었다. 특히 걸그룹 2NE1의 히트곡 ‘내가 제일 잘 나가’의 경쾌한 노래가 나오자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가사를 직접 따라 부르기도 했다. K팝이 오차드 로드의 분위기를 단번에 압도하는 모습이다. 삼성전자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기자는 불쑥 한국의 새 정부가 추구하는 창조경제가 이곳에서 구현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창조경제를 일러 “과학기술과 산업이 융합하고, 문화와 산업이 융합하고, 산업 간의 벽을 허문 경계선에 창조의 꽃을 피우는 것”이라고 했다. 세계를 주름잡는 한국의 스마트폰과 동남아에서 인기를 끄는 K팝의 만남은 정보과학(IT) 산업과 문화콘텐츠 산업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싱가포르에서도 한류의 기세가 등등하다. 처음에는 TV드라마가 맹위를 떨쳤다. 2002년 <겨울연가>, 2006년 <대장금>, 2009년 <꽃보다 남자> 같은 인기드라마가 현지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드라마를 보려고 한국어 강의를 듣는 현지인도 적지 않다는 설명이다. 드라마의 뒤를 이어 K팝 가수들이 상륙했다. 2010년에는 소녀시대, 원더걸스, 빅뱅 등 인기 그룹이 20여 회 공연하고 지난해 12월에는 2NE1 등의 공연이 있었다. 심지어 소니 같은 일본 기업도 K팝을 싱가포르 마케팅에 활용할 정도라고 한다.

1인당 국민소득, 국가경쟁력 등 여러 면에서 앞서는 싱가포르지만 어쩌면 이 나라의 미래모델은 한국일지도 모른다. 싱가포르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뒷받침할 동력을 찾는 데 골몰해왔다. 그런 면에서 “IT, 영화, 음악, 게임 등 엔터테인먼트 부문에서 비교우위를 보이는 한국에 대한 싱가포르의 관심이 높아진다”고 오준 주싱가포르 한국대사가 말했다. 싱가포르 사람들도 지금 같은 성장전략만으로는 제2의 경제도약을 자신하지 못한다.


국가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리려면 그 단서를 한국의 창조경제, 창의산업에서 찾으려 든다는 게 오 대사의 분석이다. 비단 이런 분야뿐만 아니라 한국이 그동안 겪어온 숱한 시행착오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싱가포르 관리들이 부쩍 늘어나면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일도 잦아졌다고 대사관 관계자는 말했다. 보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접근이 필요한 사안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한 발걸음이다. 이 나라도 내부적으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는 까닭이다.

성장주의 인구·이민정책이 부메랑 될까 우려

지난 2월 24일 싱가포르에서 발행되는 일요판 신문 <선데이타임스(The Sunday Times)>는 이 나라가 당면한 과제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1면 톱 기사는 홀에서 직접 음식을 나르는 요리집 최고경영자의 얘기를 담았다. 인력이 너무 달린 나머지 경영자가 음식을 나르고 행주로 식탁을 훔친다는 얘기다.

이는 필연적으로 서비스의 질 하락을 낳고 찾아온 고객이 발길을 돌리는가 하면, 매출 저하로 문을 닫는 음식점이 속출한다는 보도내용이다. 싱가포르는 전체 인구 530만 명 가운데 외국인 노동자 및 이주자가 1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

싱가포르 정부는 현지인의 고용을 보장하기 위해 고용주가 직원을 채용할 때 일정비율을 반드시 현지인으로 채우도록 강제한다. 현지인이 예고 없이 직장을 그만두고 후임자를 구하지 못하면 외국인 노동자도 덩달아 줄여야 한다. 이런 인력 수급의 불균형이 식당 운영에도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설명이었다.

현지인이 힘들고, 궂은 일을 기피하는 상황인데도 외국인 노동자를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는 나라가 싱가포르다. 인구와 노동력 문제는 향후 싱가포르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큰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최근 싱가포르 건국 이래 거의 최대 규모로 열린 군중시위도 정부의 인구·노동 정책에서 촉발된 것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지난 1월 29일 현재 530만 명인 인구 규모를 2030년까지 690만 명으로 늘린다는 ‘인구백서’를 발표했다. 지금 같은 인구변동 구조로는 싱가포르의 경제발전을 기약하지 못한다는 기조 위에서 만들어진 청사진이다. 내국인 출산 장려도 하겠지만 궁극적으로 외국인 이민을 받아들여 나라의 덩치를 키우겠다는 게 이 백서의 요체다. 싱가포르가 적정 인구를 유지하자면 출산율이 2.1%로 받쳐줘야 하는데 지금은 1.2%에 그치고 있다.

이에 더해 경제성장도 촉진하고 인구 고령화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매년 1만5000명에서 2만5000명의 외국인 이민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 백서대로라면 2030년 싱가포르 외국인 이민자 비율은 현재의 28%에서 36%로 불어나고, 현지인들은 62%에서 55%로 줄어든다. 싱가포르 정부는 이민의 폭을 더욱 넓혀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다.

2월 16일엔, 야외 집회가 엄격히 금지된 싱가포르에서 거의 유일하게 집회가 허용되는 지역인 국립공원 내 스피커스 코너(Speakers’ Corner)에 4000명(주최 측 추산)이 모여 정부의 인구·이민정책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내국인들이 이민자의 유입으로 일자리 감소, 물가 상승, 주택난 등 삶의 질 하락으로 이어진다고 항변하는 시위다.

한마디로 성장에 연연할 게 아니라 구성원들의 행복을 보장하고, 삶의 질을 개선해 달라는 것이다. 이는 1965년 독립 이래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한 시위여서 사회적 파장이 컸다. 이 시위를 계기로 인구·이민 정책을 둘러싼 여·야 간 공방이 불붙었다.

2월 24일자 <선데이타임스>에는 정부 인구백서에 대한 야당인 노동당(WP·Workers’ Party)의 체계적인 반박 내용이 소개되기도 했다.

신문은 야당이 발표한 인구정책 보고서를 정부의 인구백서와 비교하면서 상세한 해석을 곁들였다. 야당은 싱가포르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이민에 의존하기보다 출산율을 높이는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매년 유입되는 외국 청년 이민자를 1만 명으로 제한하고, 매년 9000명에 이르는 싱가포르인과 결혼하는 외국인에게 시민권을 주는 게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더해 현재 76.6%에 머물고 있는 여성노동인구(25~54세)의 비율을 85%까지 끌어올리는 노력을 먼저 기울이자고 제안했다. 야당은 또 정부가 미래세대를 위해 개발을 유보하는 국토의 비율을 2030년 기준 4%로 하자는 주장에 맞서 그 비율을 10%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싱가포르 정부가 추구하는 성장주의 패러다임, 효율성 패러다임에 근본적인 제동을 걸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도 가만 있지 않았다. 총리실의 그레이스 푸(Grace fu) 장관은 야당이 인구보고서를 발표한 날 밤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일부 내용에 동의를 나타내면서도 “여성과 고령의 시민들로 노동력 부족을 메운다는 야당의 구상이 과연 막노동, 청소, 유지보수 업무와 같은 외국인 노동자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쿼터제에 따라 의무적으로 고용해야 하는 현지인을 못 구해 문을 닫는 식당의 예처럼 내국인이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는 일을 감당해낼 수 있느냐는 반론이다.



일당 지배체제에 대한 염증 나타나기도

최근 싱가포르 분위기는 기자가 5년 전에 방문한 그 시절과는 사뭇 달랐다. 2008년 국제 마라톤 대회 취재차 싱가포르를 찾았을 때 지하철역에서 있었던 일이다. 도착 예정시각을 훌쩍 넘긴 것 같은데도 지하철은 도착할 기미가 없었다. 시간이 더 흐르는 사이 승객들은 점점 불어나 승강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고, 이들이 뿜어내는 체온과 내쉬는 숨으로 인해 피로감은 더해갔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승객들 가운데 그 누구도 큰소리로 불만을 나타내거나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 같으면 고함을 지르거나 역무원을 찾아가 행패를 부렸을 법한데 그런 소동이 벌어지지 않는 싱가포르가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숙소로 돌아와 싱가포르 공무원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곳 사람들은 국가 시스템을 신뢰하는 데다 현실에 순응하는 편이라서 웬만해서는 역정을 내거나 거친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고 답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싱가포르 시민들은 단체행동을 하기 시작한 걸까?

그 답은 2011년 싱가포르 총선과 그 후 실시된 두 차례 보궐선거 결과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 의회 정수는 총 94명. 단일 및 집단 선거구로 이뤄진 24개 지역구 의원 정수가 84명이며, 나머지는 낙선한 야당 후보자에게 주는 의석, 국회가 지명하는 의석 등으로 구성돼 있다.

2006년 총선 때만 해도 리센룽 총리가 이끄는 집권 인민행동당(PAP)은 직선 의석 84석 중 82석을 쓸어 담을 정도로 지지율이 높았다. 1965년 독립 이래 계속돼온 정부·여당의 정국 장악력에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을 정도였다. 정치적 토론과 비판의 자유가 제한받기는 했지만 국민은 깨끗하고 투명한 데다 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정부·여당을 신뢰했다.

하지만 2011년 5월 총선은 달랐다. 사상 처음으로 야당인 노동당이 5명을 뽑는 집단선거구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야권의 득표율도 40% 선에 이르렀다. 선거 결과에 깜짝 놀란 정부·여당은 국민의 요구를 정치에 적극 반영하기 시작했고 정치개혁에 나설 것을 다짐했으며, 총리·장관 등 정무직 공무원 보수를 큰 폭으로 삭감했다. 그것이 민심의 이반을 완전히 되돌리진 못한 듯하다. 2012년과 올 1월 치러진 두 번의 보궐선거에서 야당이 또다시 승리한 것이다.

‘성장’이냐, ‘표심’이냐 선택의 기로에서

당장 인민행동당 일당 지배체제에 대한 염증과 변화의 열망이 반영됐다는 반응이 뒤따랐다. 싱가포르의 민주주의 발전은 경제력에 견줘 턱없이 더딘 편이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매긴 2011년도 167개 국가 ‘민주주의 지수’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81위에 머물렀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21위, 한국이 22위를 기록했다. 싱가포르에서 특히 저조한 분야가 ‘정치 참여’ 부문으로 10점 만점에 2.78점에 그쳤다.

싱가포르 민주주의 지수는 전체 평균 5.89점의 절반에도 못 미칠 정도로 구성원들의 정치참여 통로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실제로 이 나라의 정책결정은 권위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정 정책에 국민이 어느 정도 동의하는지도 모호하고, 대놓고 비판을 할 형편도 못 된다. 지금까지는 내 목소리를 내려놓고 정부의 지침과 비전을 따르면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많았다.

5년 임기의 국회의원 총선은 2016년에 다시 치러진다. 현재 유일 야당세력으로 부상한 노동당이 여세를 몰아 대거 약진하거나, 나아가 민주주의 기본원칙인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통할 정도로까지 의석 재편이 이뤄진다면 싱가포르를 작동하는 정치·경제 메커니즘에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지금처럼 엘리트 관료집단이 국민 기본권의 일부를 제약하면서까지 성장과 효율 만능주의로 국정을 이끌 수는 없다. 반대파를 힘으로 제압하고 민주주의를 억누르던 ‘싱가포르식 민주주의’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길로 접어든 것이다.

다시 인구·이민 문제로 돌아오면 싱가포르 정부·여당도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듯하다. 자신들의 국정철학이 담긴 ‘인구백서’에 의거해 노동·이민·고령화 정책을 줄기차게 추진할 것인지, 아니면 ‘표’를 의식해 철학과 정치노선에 변화를 줄 것인지 고민에 직면할 수 있다.

국회 한·싱가포르의원협회 회장인 김영환 의원(민주통합당)은 2012년 국회 지식경제위원장 자격으로 이 나라를 방문했다. 그는 싱가포르가 장점이 많은 나라라는 데 동의하면서도 지금처럼 민주주의가 미숙한 조건에서는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기 어렵다고 보았다.

김 의원은 “싱가포르가 부러워하는 한국의 IT(정보기술)와 엔터테인먼트 같은 산업은 정보의 자유화, 언론의 자유없이는 활성화되기 어렵다”며 “민주주의 실현은 싱가포르가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자 감내해야 할 고통”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가 부패 없는 투명한 나라라는 점에서 선진적이지만, 정치적으로 후진국이다. 그 점은 한국에서 배울 게 많다.”

사실 싱가포르나 한국이나 국가 건설단계에서는 사회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권위주의 통치가 나름 유용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는 미개한 상태에서 힘이 있는 권력자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면 자원을 적재적소에 투입하게 됨으로써 효용을 극대화할 수도 있다. 이에 반해, 민주주의 사회는 비효율에 따른 비용이 많이 생긴다. 여러 가지 의견을 합치는 과정에서 시간과 노력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의견도 없지 않다.

“아프리카 독재가 실패한 것은 길을 잘못 들어섰거나 지도자가 사리사욕을 채웠기 때문이라면 싱가포르는 리콴유 일가가 산업의 상당부분을 장악하고 있긴 하지만 방향은 잘 잡은 게 된다”고 정영수 싱가포르 한국상공회의소 회장이 말했다. 지금 싱가포르는 계속 이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새 길을 개척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있다. 유사한 경로를 걷다 1987년 이후 민주주의 체제로 진입한 한국의 사례가 싱가포르에게는 둘도 없는 반면교사가 될지도 관심사다.

201304호 (201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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