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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거장, 스승을 말하다④ - “정창화 감독에게 영화를, 조선과 한국 민중에게 예술혼 배웠다” 

영화감독 임권택 

글·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 사진·전민규 기자
액션 영화 대부 정창화 감독, 헐리웃 거장들에게 영화문법 익혀…밑바닥 사람들의 떠돌이 삶을 통해 근현대사의 질곡 표현

▎거장의 눈빛은 아직 흔들림이 없다. 그는 지난 50년간 우리 문화의 깊은 저력을 필름에 담아 스스로 한국영화의 역사가 되었다.
정창화 감독과 할리우드의 명장들, 조선과 한국 현대사의 무수한 군상, 한국의 자연과 전통문화, 그리고 임권택 감독 자신. 임권택을 길러낸 스승들이다. 엄밀하게 말해 그는 스스로를 가르치며 거목으로 성장했다. 각박하게 살아낸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껴안고 영화를 배웠다. 현대사는 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줬다는 점에서 가해자라 할 수 있는데, 그 가해자에게 아름다운 영화로 보답했다는 점에서 그는 거장의 이름에 값하는 인생을 살았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계 유일한 스승은 액션 영화의 세계적 거장 정창화 감독이다. 그에게 배운 것은 영화의 테크닉과 제작 메커니즘이다. 초년병 시절, 그는 정창화 감독에게 오롯이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의 영향력으로부터, 그의 영화 정신으로부터 멀어지려고 애썼다. 그런 점에서 정 감독은 스승이면서 극복의 대상이었다. 그는 아주 조금씩 극복했고, 마침내 스승을 시원하게 넘어버렸다. 임 감독의 진보는 천천히 이뤄졌지만 결과는 웅대했다. 작은 노력을 거듭해 큰 것을 이루는 삶의 그림을 그렸다.

인터뷰는 6월 7일 무더운 초여름 날 경기도 용인시 죽전동 자택에서 이뤄졌다. 1990년대 초반에 입주한 이 평범한 아파트에서 그는 20년을 살았다. 이 집도 그를 닮은 듯했다. 주인의 오랜 손길이 닿아 잘 길들여진 느낌이 들고, 가구며 꾸밈 등이 단순하고 건실하다.

그에겐 만나는 사람을 송구하게 만드는 겸허함이 있는데, 집의 분위기도 그렇게 소박했고 편안했다. 녹차를 우려 따라주는 그의 손길이 떨렸다. 수전증이다. 오래 마신 술, 오래 고민해 만든 무수한 영화 때문일 것이다. 1936년 생, 올해 77세다. 101편의 영화를 찍은 노장이다.

그는 최근 102번째 영화 ‘화장(化粧)’을 준비하고 있다. 원작은 김훈의 동명 단편소설이다.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아내와 젊은 여직원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자의 내면을 보여주는 영화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번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거장이 좀처럼 찍지 않는 멜로드라마를 어떻게 표현할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아직 출연진은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요즘 시나리오 작업이 한창이다. 연말 경 개봉된다고 한다.

치열하게 일했던 ‘똘마니 시절’을 눈여겨본 정창화 감독


임 감독은 트라우마가 많은 사람이다. 역사로부터 무진장 깨지고 시달렸다. 얼핏 보면 주눅든 인생을 살았는데, 그 상처를 아주 완만하게 회복시키고 종국에는 아주 통쾌하게 역전시켜버렸다. 영화를 통해서다. 그가 영화를 만들었듯, 영화도 그를 만들고 형성했다. 지독한 ‘역사의 트라우마’는 1930년대 생의 공통된 운명이다. 일제시대 말기와 해방 공간의 혼란, 6·25의 참상을 겪으며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다. 임 감독이 겪은 트라우마는 참담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고향 전남 장성에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어린 시절 일제 치하에서는 창씨개명, 노력동원 같은 어수선한 ‘식민지의 소동’을 보며 자랐지요. 해방 이후에는 좌익 활동을 했던 부친과 삼촌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 났죠. 형사들이 아버지를 잡으러 허락 없이 집에 막 들어왔고, 구둣발로 이 방 저 방 뒤지고 다니는데, 이불 속에서 보면 칼날이 번쩍번쩍 했던 기억이 남아 있죠.

빨치산을 잡아다가 초등학교 바로 옆 냇가에서 공개처형을 시켰는데, 동네 아이들과 함께 나가 그런 장면을 보면서 자랐어요. 다행히 부친은 극렬한 쪽은 아니었기 때문에 처형은 면했지만 저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가위눌린 삶을 살았습니다. 저에게 동화같이 즐거운 유년 시절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죠.”

전쟁 중 그는 가출해 임시수도 부산으로 갔다. 농사일에 젬병이었던 부친은 물려받은 땅을 파는 일로 호구지책을 마련했다. 가난을 맞게 된 ‘빨갱이 가족’의 일원으로는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부산에선 굶는 일부터 시작했다. 부산에서 그가 깨달은 것이 있다. 육체노동과 장사로는 도저히 밥 먹고 살 수 없는 체질과 천성을 타고났다는 점이다. 똑같은 무게로 지게를 져도 혼자만 뒤쳐졌다. 그런 식으로 몇 개월 살다 군화장사를 시작했는데 그 역시 하루 벌어 하루 먹기였다.

“제가 장사가 되는 사람이 아니죠. 군화를 윤 내서 잘 진열하고 말도 잘해서 손님을 끌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겁니다. 그냥 팔아서 그날로 먹고 땡이었죠. 재생산이 안 되는 겁니다. 스러진 집안에, 미래도 없는 삶, 그러니까 술을 마셨지요…. 술을. 그냥 오늘만 살면 되지 미래에 무엇을 이루고 산다는 희망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부산에서 군화 장사를 하던 임 감독은 1955년 서울 영화판에 뛰어들게 됐다. 군화 장사를 크게 했던 동료 상인들이 서울에서 영화 일을 시작, 임 감독에게 도와 달라는 부탁한 것이다. 고향 장성에는 영화관이 아예 없었고, 부산에서도 여성국극단이나 왔을 때 동시상영을 하던 영화를 몇 편 본 것이 전부였다. 열아홉 나이에 접해본 영화 일은 너무나 재미있었지만 더 중요한 몰입의 동기는 ‘드디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될 비전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똘마니(막내) 일을 하다 1957년 정창화 감독이 <풍운의 궁전>을 찍을 때 제작부 소품팀에서 일하기 시작했죠. 제가 생각하기에도 사력을 다해 일을 했어요. 그 이상 더 열심히 할 수는 없을 정도로. 아무래도 정 감독이 저를 눈여겨 보았겠죠. 이듬해 <비련의 섬>을 찍을 때 연출부로 옮겨 영화 제작의 실제 메커니즘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1960년 <햇빛 쏟아지는 벌판> 때 조감독을 시작한 그는 그 다음해 <장희빈>을 마지막으로 조감독을 졸업했다. 1961년 찍은 <두만강아 잘 있거라>가 감독 데뷔작이었으니 일자무식 가출 청년이 영화판 연출부에서 일한 지 불과 3년 만이었다. 이건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대중소설 탐독이 시나리오를 보는 능력 키웠다


▎2003년 10월 미국에 거주하는 정창화 감독(왼쪽)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아 임권택 감독과 오랜만에 환담을 나누었다.
“중학교 다닐 때부터 대중소설을 엄청나게 읽어댔던 것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때 김래성의 <청춘극장> 같은 다섯 권짜리 소설을 이틀 만에 독파했고, 아무튼 시중에 돌아다니는 대중소설은 모조리 읽었으니까요. 스토리에 대한 감각, 시나리오를 손볼 수 있는 능력이 거기서 배양됐겠죠.

그때 읽은 이야기들을 표절한 일은 없어요. 대신 그런 이야기를 제 안에서 소화시키고 응용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거의 매번 시나리오를 고치기도 하고 새로 쓰다시피 해가면서 영화를 찍었어요. 제대로 된 시나리오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계속 고치고 쓰고 하면서 찍었던 거죠. 그러니까 그때 많은 양의 책을 읽지 않았었다면 영화 찍을 때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정창화 감독 밑에서 연출부 일을 하면서 영화를 보는 눈이 일취월장했어요. 퍼스트 조감독 시절에는 정 감독이 저를 카메라 옆에 앉히고 연기자의 연기를 지켜보게 했습니다. ‘컷!’을 부른 다음 그 장면에서의 연기가 잘되었는지 보게 했죠. NG를 불러야 할 때도 제가 판단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감독이 ‘컷!’을 하면 연기자들이 감독 얼굴보다 제 얼굴을 먼저 쳐다봤죠.”

왜 그랬을까? 임 감독에 대한 특별한 신뢰나 실력에 대한 인정 때문이었을까. “그런 측면도 있었겠지만 사실 그때는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작품을 찍었고, 영화를 만들 때 감독이 봐야 할 것이 사실 너무나 많습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가는데 그 사이 혹시 놓치는 게 없을까 염려도 되었겠지요. 정 감독은 연출부 스태프진과 깊은 정을 나누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할 일만 딱 끝내는 스타일인데, 대신 굉장히 성실했고 일단 메가폰을 쥐면 엄청난 끈기를 발휘했습니다. 세트 운영이나 그런 것은 어디서 배웠는지 몰라도 기초가 굉장히 탄탄했어요.”

요즘 팬들은 잘 모르지만 임 감독의 스승 정창화 감독은 1953년 영화 <최후의 유혹>으로 영화계와 인연을 맺은 후 1960년대 충무로 액션영화의 전성기를 연 주역이다. 1968년 당시 홍콩 최고 영화사 쇼브라더스와 전속계약을 맺고 홍콩으로 건너가 만든 첫 영화 <천면마녀>가 홍콩 영화 사상 첫 유럽 진출 작품으로 기록됐다.

이어진 작품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홍콩 영화사상 처음으로 미국에 진출해 개봉 첫 주 전미흥행 1위를 차지하며 홍콩 영화의 전설이 됐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내 인생의 영화 베스트 10’에 꼽기도 했던 이 영화는 오늘날까지 무술영화의 고전 컬트로 남아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영화 <킬빌>을 만들 때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대거 모방하기도 했다. 이 사실은 정창화 감독도 잘 알고 있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모방이 나쁘다고 말하지만 좋은 것이 있으면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작품세계에 반영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타란티노가 한 잡지에서 내 영화를 인용한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했는데 참 귀엽다고 생각했다.”

쇼브라더스를 떠나 골든 하베스트사에 둥지를 튼 정 감독은 특기인 액션물로 성공을 거뒀지만 1977년 영화 <파계>를 마지막으로 홍콩 생활을 마무리한다. 1978년 한국으로 돌아와 화풍영화사를 설립해 제작자로 변신한 정 감독은 1987년 은퇴해 현재는 미국 샌디에이고에 살고 있다. 1953년부터 1977년까지 총 53편의 영화를 발표했다.

“정 감독은 콘티가 없으면 영화를 찍지 못했습니다. 거의 완벽하게 콘티를 해가지고 옵니다. 제가 데뷔작 때부터 비교적 정확하게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것도 정 감독에게 배운게 많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연출부 때부터는 영화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때는 한국에 들어온 영화는 뭐든지 다 봤으니까요.

특히 조지 스티븐슨 감독의 <셰인> 같은 영화를 유심히 봤죠. 그때 정 감독이 제게 시킨 일이 있어요. ‘야, 그 영화에 다치마와리(액션) 신이 있는데 어디 가서 좀 찍어 와’하고 지시합니다. 그럼 카메라를 들고 상영관에 가서 스크린을 찍어옵니다. 그 필름을 현상해 액션 장면을 분석하곤 했습니다. 편집실에서 다시 보면 역앵글(reverse shot)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 거기서 다 드러납니다. 정 감독과 그런 작업을 통해 굉장히 배운 것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 본 영화는 두 번 다시 보지 않는 스타일

조지 스티븐스의 <셰인>은 소년의 눈으로 본 서사시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서부극이다. 몽타주 기법을 백분 살린 서부극으로 재치 있고 박진감이 넘치는 영상을 보여준다. 정창화 감독도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1953년 <셰인>을 본 후 그 같은 영화를 꼭 만들어보겠다고 다짐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당시 임 감독이 쇼트 바이 쇼트로 분석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La Strada, 1954년 작)이었다. 원래 임 감독은 한 번 본 영화는 두 번 다시 보지 않는 스타일인데 이 영화만큼은 두 번을 봤다고 고백한다. 미국의 영화배우 앤서니 퀸이 매정한 차력사 잠파노로 주연한 영화다. 임 감독의 영화 <취화선>이 유네스코가 수여하는 ‘펠리니상’을 받은 것도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밑바닥 사람들의 떠돌이 삶에서 우러나오는 슬픈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영화죠. 어느 날 앤서니 퀸이 방랑하다 그 도시로 흘러들어와서 쥴리에따 마시나가 늘 부르던 노래를 듣고, 그리고는 그 여자가 죽은 것을 알고 바다에 나가서 우는데, 그 대목이 그토록 깊은 감동으로 남는 겁니다.

마음속에는 늘 조금은 살아 있고, 그러나 늘 무시하면서, 자기가 갖고 싶으면 언제나 가질 수 있는, 함부로 해도 되는 그런 여자가 어느 날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자, 비로소 그 여자가 얼마나 큰 비중으로 살아있었던가를 깨달아가면서 우는 장면이 그렇게 좋았어요.”

임 감독은 1961년 감독 제의를 받고 상당히 망설였다. 첫 작품에 실패하면 그나마 조감독 자리마저 지킬 수 없다. 감독했던 사람을 다시 조감독으로 쓸 감독은 없기 때문이다. 첫 작품에 실패해 영화판을 떠난 감독도 무수히 많았다.

“제작사 쪽에서는 제가 꽤 일을 잘하는 조감독으로 보였나봐요. 영화계에 입문한 지 5년째 되던 해에 감독을 해볼 의향이 없느냐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제가 영화감독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다닌 일도 없었고, 스스로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소신을 밝힌 적도 없었는데 그렇게 비교적 빨리 감독이 된 거죠. 보통 조감독이 되면 예고편을 맡아 찍는데, 제가 만든 예고편이 제작자들의 눈길을 끌었던 것도 작용했을 겁니다. 손님 끄는 예고편을 잘 만들었거든요.”

정창화 감독은 겉으로 드러난 카리스마를 무분별하게 행사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스태프나 배우를 심하게 다루거나 촬영 현장에서 화를 내는 법도 별로 없었다. 그가 가진 카리스마란 실력과 성실함, 그리고 현장에서 보여주는 어떤 끈질김 같은 것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제작팀을 장악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임 감독은 달랐다. 감독으로 처녀작을 찍을 때의 나이가 불과 25세. 게다가 임 감독은 동안이어서 외모에서 풍기는 카리스마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첫 작품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김승호를 비롯한 당대의 명배우가 올 캐스팅된 영화로 임 감독의 통솔력이 시험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1. 영화 <장군의 아들> 포스터 앞에 선 임권택(왼쪽)과 이태원. 두 사람은 제작자와 감독으로 만나 한국 영화계의 가장 순도 높은 순간을 창조했다. 2. 1969년 <상해탈출> 촬영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연기를 지시하는 임권택(왼쪽). 1970년대에 들어서야 그는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며 거장의 길에 들어섰다.
존 포드, 빌리 와일더, 조지 스티븐스 영화를 배우다

“조감독 할 때는 김승호 씨 같은 분하고도 굉장히 친했어요. 그런데 감독이 되니까 견제가 들어오는 겁니다. 하도 어린 놈이 감독을 한다니까 기가 막혔겠죠. 액션 장면에서 도망갈 때, 그때는 겨울이라 춥기도 했지만, 강물에 들어가라 해도 안 들어가는 거예요. 그럴 때는 제가 먼저 들어갑니다. 감독이 들어가니까 안 따라올 수가 없죠. 김승호 씨 같은 경우는 말을 안들어요. 그러면 제가 계속 NG를 냅니다.

박노식이나 독고성도 마찬가집니다. 다치마와리(액션)를 시키면 설렁설렁하고 잘 안해요. 그러면 촬영 테스트 때 제가 마음에 들 때까지 하루 종일 걸려도 시킵니다. 그렇게 하니까 액션 배우들이 뒤에서 그래요. 임권택이 하라고 하면 처음부터 화끈하게 해야지 안 그러면 사람 죽인다고 말이지요. 그렇게 배우들의 군기를 잡았습니다.”

임 감독은 영화감독 데뷔 후 10년 동안 50여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말 그대로 찍어내듯 영화를 제작하는 당시 한국 영화계의 현실 속에서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었다. 임 감독도 한국적인 영화에 대한 욕심은 있었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긴 것은 10년 뒤에나 가능했다.

“전반기의 작품은 우리 삶과는 전혀 무관한, 단순히 흥행만을 위한 영화들이었어요. 남작(濫作: 함부로 많이 지어 냄)을 했다고 표현해야 될 만큼 10년 동안 50여 작품을 찍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작품을 찍으면서도 특별히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단지 제 영화의 수준을 할리우드 영화의 삼류나 이류까지 그 질을 높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물론 그것이 가당치 않은 야심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 제작비의 규모부터가 다르고, 인적 능력도 그렇고, 여러 면에서 열악했거든요. 할리우드는 최신식 좋은 기자재를 바탕으로 과학적인 정보들을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했어요. 그래서 쓸데없는 꿈은 접자고 마음먹었죠. 그 후, 좀 미숙하더라도 한국 사람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우리만의 영화를 만들자는 생각을 했어요.

만약 제 영화가 외국으로 출품이 돼서 상영된다면 미국 영화의 아류가 아닌 한국 사람들이 살아낸 수난의 세월이나 삶, 그리고 우리가 가진 문화적 개성들을 담고 싶었죠. 그래서 영화의 질이 좀 떨어지거나 혹은 미숙한 것으로 평가된다할지라도 그 필름에 담긴 내용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찍어낼 수 없는 한국 고유의 것이니 눈에 띌 거라고 생각을 했던거죠. 제가 감독 데뷔하고 10년 후에 했던 생각이니 비교적 빨랐던 것 같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에 탐닉했던 시절 임 감독은 존 포드, 빌리 와일더, 조지 스티븐스 같은 명장들을 영화를 통해 사숙했다. 존 포드 감독은 카리스마의 화신과 같은 인물이었다. 임 감독이 그의 영화와 별개로 알게 모르게 그의 강력한 파워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존 포드 앞에서는 할리우드 스타 시스템 최강의 배우들도 함부로 나대거나 감독의 지시를 거부하거나 항변할 생각을 감히 할 수 없었다. 그는 영화를 제작할 때나 그 이후나 항상 자신이 보스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 권한을 즐겼다.

빌리 와일더 감독의 영화 중 임 감독이 인상 깊게 보며 많은 것을 배운 것 중에는 <하오의 연정> <제17 포로수용소>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등이 있다. 그 외 조지 스티븐스 감독 등의 영화를 보며 ‘최고의 아류 할리우드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가 표현했듯 ‘가당치 않은 야심’이었다. 그는 동시대에 활동한 국내 감독 중 이만희 감독을 가장 크게 의식했다. 두 감독 모두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고, 특히 액션영화와 전쟁영화에서 솜씨를 발휘했다.

1970년대에 이 감독의 <삼포 가는 길>이 있었다면 80년대에는 임 감독의 <만다라>가 있었다. 두 영화 모두 한국 로드무비의 대표작으로 두 사람은 모두 길을 통해 한국을 다시 바라봤다. 전쟁 영화도 마찬가지다. 이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 임 감독의 <전쟁과 노인>은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다. 이 감독은 그러나 1975년 불과 44세의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임 감독은 1975년 이만희 감독을 이렇게 회상하고, 또 평가한다.

“이 감독을 특별하게 의식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살아 있었다면 제 영화가 훨씬 좋아졌을거예요. 아, 저 사람에게 지면 안되겠다는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는 감독이 있다면 그가 바로 이만희 감독이었습니다. 제가 <증언>을 찍고 있을 때 이 감독은 <들국화는 피었는데>를 들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가 중간에 문제가 돼서 이 감독이 하차하고 저더러 나머지를 찍으라고 했는데, 막상 생각해보니 제가 그 나머지 작업을 도저히 할 수 없는 거였어요. 이 감독은 저와는 완전히 다른 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세계였지요.”

어머니에게 고스란히 머물러 고였던 조선시대

임 감독의 처녀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가 크게 히트한 것은 행운이었다. 아니, 행운이라기보다 영화 인생의 사활을 걸었던 작품이니만큼 임 감독 최고의 공력을 들여 만든 결과이기도 했다. 그가 만든 네 번째 작품이자 최초의 사극이었던 <망부석>도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혜경궁 홍씨의 입장에서 사도세자의 극을 다룬 작품이었다. 사극의 감성과 세계관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유교적 훈육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임권택 영화의 전편에 흐르는 견고한 전통의 흔적들은 그 세계로부터 온다.

“제게 사극이란 우리 어머니로부터 받은 정서를 들여다보고 싶은 세계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외가는 친가보다 월등히 교적 가풍 깊었던 집안이었습니다. 성장 과정을 돌이켜 보더라도 우리 어머니만큼 그런 엄모(嚴母)가 없어요. 아이들을 무지하게 엄격히 키웠으니까. 아마 그런 엄함 속에서 드러나는 우리 전통이 갖는 어떤 기품이나 그런 것들이 제 안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조선시대는 어머니와 바로 맞닿아 있던 시대죠. 조선시대 말기는 조선 역사 전체를 상당히 온전한 형태로 담고 있던 세계죠. 아주 느리게 발전이 이뤄졌으니까요. 정착된 유교적 규범이 주는 생활, 이런 것들이 어머니에게 고스란히 머물러서 조선시대가 고여 있었고, 그것이 가정교육을 통해 고스란히 제게 전해졌겠지요. 어머니라는 커다란 스승은 조선시대로 상징되는 하나의 거대한 문화적, 도덕적 체계를 제게 상속했다고 생각합니다. 선악을 떠나 전통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사극 영화뿐만 아니라 다른 영화를 만들 때도 저한테 조금씩 드러났다고 봐야죠.”

2002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취화선>의 장승업(張承業, 1843~1897)도 조선시대 말기, 다시 말해서 어머니의 세대와 맞닿아 있던 세계에 속해 있던 인물이다. 장승업이 죽은 지 불과 40년 후에 임 감독이 태어났으니, 시대를 좀 넓게 포괄하면 두 사람은 동시대의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나이에 객지에 나와서 고아처럼 자란 것, 그림 그리는 일과 영화를 연출하는 것, 장승업이 스무 살 때 천재 소리를 듣고 화가로서 이름을 날린 것과 임 감독이 20대 중반에 감독이 된 것, 술을 좋아했던 것 등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장승업 선생은 20세 때 천재 화가 소리를 들었으니 굉장히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을 텐데 행적도 없이 살다가 52세때 아예 행방불명이 되었어요. 그러자 주변 친구들이 금강산에 들어가서 신선처럼 살 것이라고 말했다더군요. 화선(畵仙)으로서 이룬 자, 혹은 화가로서 정말 크게 이룬 자로 평가되는 걸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통은 아주 어린나이에 천재성이 드러나면 오래 못 가요. 그런 천재성 때문에 노력도 안 하게 되고요. 그런데 장승업 선생은 화가로서 얼마나 삶을 치열하게 살아냈으면 행방불명 됐을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런 칭찬을 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분의 삶에 주목하게 되더라고요.”

‘임권택의 영화답다, 한국적인 삶이 진솔하게 담겼다’고 생각되는 영화들을 찍어낸 건 1970년대 이후부터다. <족보>(1978)나 <깃발 없는 기수>(1979), 그리고 <만다라>(1981) 등의 영화를 통해 어느 정도 성과를 얻어내기 시작했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 이어진 홍성유 원작 <장군의 아들> 3부작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임 감독을 ‘흥행의 보증수표’ 반열에 올린다. 본인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이 3부작을 자신이 추구했던 영화세계로부터의 ‘퇴행’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팬들의 생각은 달랐다.

늘 잊고 싶다고 말하던 자신의 1960년대식 다치마와리 액션 활극으로 돌아와 신명 나게 연출한 결과, 참으로 유쾌하고 즐거운 영화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평론가 정일성은 “마치 다듬을 대로 다듬어진 장인이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 펼쳐내는 거칠 것 없는 자유자재의 장면들, 여기서 임권택은 대중영화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평했다. 영화란 결국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소통이라는 사실을 일깨운 영화라는 것이다.

고향에서 판소리 접한 후 30년 만에 만든 <서편제>


▎1993년 <서편제>를 찍을 때 정일성 촬영감독과 현장에 섰다. <서편제>는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국민영화'의 반열에 우뚝 섰다.
<장군의 아들> 성공 후 제작한 영화가 <서편제>(1993)다. <서편제>는 전국적 관객집계가 불투명했던 당시 단성사 1개관에서만 100만 관객을 돌파하고, 6개월 넘게 전국의 영화관에서 상영돼 ‘국민영화’로 불리게 됐다.

“100만이라는 숫자는 영화가 상영됐던 그 당시, 종로에 있던 ‘단성사’라는 단독 상영관 극장에 들어온 관객 수를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 전국적으로는 얼마나 되는지 모르죠.

왜냐하면 그때는 그런 숫자를 정확히 집계할 자료들이 없었거든요.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지방에서는 표를 돌려 사용하기도 했고요. 서울 개봉관에서만 100만 관객이었으니 전국적으로 다 따지자면 꽤 됐을 거예요. 몇 백만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실 <서편제>는 제가 30년을 마음에 두고 숙성시키며 탄생시킨 영화였습니다.

감독 데뷔작인 <두만강아 잘 있거라>가 대히트를 치고 나서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갈 기회가 있었어요. 그 지역에서 영화의 흥행을 도와준 흥행업자가 먼 친척이었는데, 그분과 어떤 음식점에서 함께 식사를 했었지요. 그런데 그 식당에 판소리꾼들이 들어오고, 돌아가신 공옥진 여사도 오셔서 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걸 보고 제가 얼이 좀 빠질 정도로 빠져들었어요. 언젠가는 반드시 판소리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겁니다. <장군의 아들> 성공 후 제가 영화사에 제의를 했어요.

이런 영화는 절대 흥행이 될 리없겠지만, 우리 판소리를 알릴 수도 있고 저예산이기도 하니까 한번 찍어보자고요. 영화사는 <장군의 아들>로 돈을 많이벌었기 때문인지 흔쾌히 응해주더군요. 감독이 자기 입으로 흥행이 될 리 없다는 말을 하고, 영화사에서도 그 사실을 알면서 제작하는 일은 흔치 않은데 말이죠. 그렇게 영화를 찍기 시작했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 영화 인생에서 그 정도로 자유롭게 마음을 비우고 영화를 찍은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요. 망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찍었으니까요.”

“존경하는 것은 좋으나, 안이한 모방은 금물”


▎망중한 속에서도 노장의 카리스마가 억력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촬영에 임하기 전 영화를 포기하고 싶은 한계를 느끼며 절망하곤 한다.
임 감독의 청을 들어준 제작자가 바로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다. 지금은 극장업에 전념하며 영화제작을 떠나 있지만, 1980년대부터 2004년까지 이태원 대표는 한국영화의 어른이자, 또한 청년이었다.

그가 특유의 뚝심으로 밀어붙인 영화들은 한국영화의 굵직한 자산이고, 특히 임 감독의 영화 인생에서 ‘제작자 이태원’이 지니는 의미는 크다. 이태원 대표는 <만다라>(1981)를 보고 임권택 감독과 함께하겠다고 결심했고, 태흥영화사의 창립 작품을 <비구니>로 결정했다.

이후 <하류인생>까지 15년 동안, 임권택 감독의 12편 중 <개벽>(1991)을 제외한 11편이 ‘태흥영화사’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태원 대표는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를 축하하는 자리엔 함께하지 못했다. <천년학> 제작을 돌연 포기했던 것. 이후 영화는 난항을 겪다가 우여곡절 끝에 완성되었고, 영화계에선 충무로의 두 어른의 결별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이태원 대표는 제가 하자고 한 것에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어요. 무엇을 하자고 하면 그래, 하자였지 그 다음에 일체의 간섭이 없는 거예요. 그분은 어찌 보면 만날 임권택이 하자는 대로만 했습니다. <장군의 아들> 빼놓고는 그가 하자는 대로 한 게 없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신날 리도 없고요. 그러니 제가 그분을 원망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임 감독의 스승 정창화 감독은 앞으로 자신이 닦은 길을 갈 두 사람, 바통을 넘겨받을 후배 감독으로 박찬욱 감독과 류승완 감독을 꼽았다. 그는 <공동경비구역 JSA>(2000)를 보고 박 감독이 대성할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박 감독은 <올드 보이>(2003)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고, 정 감독은 그 장면을 미국에서 TV로 보면서 박수를 쳤다고 한다.

임 감독은 생각이 좀 다르다. 자신이 닦은 길을 후배 감독이 다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후배 감독들의 영화나 그들의 능력에 대해서는 몹시 말을 아낀다. “존경하는 것은 좋으나, 안이한 모방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102번째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 거장에게도 영화 제작은 아직도 고통스럽고 두려운 과정이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포기하고 싶은 한계를 느낄 때가 있어요. 촬영 준비는 다 끝나서 찍기만 하면 되는데, 정작 감독 자신이 어떻게 찍어야 될지 모를 때가 그래요. 그때는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수천리 밖으로 훨훨 도망치고 싶은 절망스러움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건 감독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누구도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그게 연출자들의 고통이라면 고통인데, 저는 평생 영화를 만들면서 그런 순간을 얼마나 여러 번 만났겠습니까? 그렇다고 도망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제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점이 있다면 영화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영화를 버리게 된다면 그날로 제 인생은 파멸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 어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그걸 넘어서지 않으면 죽음밖에 더 있냐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죠.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는 것, 영화 말고는 통 모른다는 것이 어쩌면 제가 영화 속에서 오래 살 수 있는 힘을 준 것 같습니다.”

201307호 (201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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