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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거장, 스승을 말하다⑤ - 갈라미언·시게티·프레빈이 깊고 광활한 예술세계 인도하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글·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 사진·전민규 기자
키릴 콘드라신, 주빈 메타, 게오르그 솔티 등 20세기 대표하는 마에스트로와 같이 한 음악 인생…이 세상에서 가장 신비한 소리 들려줬던 폴 마카노비츠키도 잊을 수 없는 스승

이반 갈라미언, 요제프 시게티, 앙드레 프레빈.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65)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감을 준 음악적 스승이다. 3인 모두 정경화의 놀라운 열정과 날카로운 음악성을 단박에 알아본 인물들이다. 정경화는 찌를 듯한 엄격함과 강한 집중력을 능기로 한다. 전 음역에 걸친 아름다운 톤, 안정된 테크닉, 정확한 리듬 감각, 곡의 순간 순간 감정을 입혀내는 표현력이 압권이다. 그 재능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한 음악인의 형성과정에는 무수히 많은 모멘텀이 있다. 정경화 음악 세계의 깊이를 고려할 때, 3인의 스승은 그 모든 모멘텀의 목격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진실의 순간, 가장 결정적인 음악적 도약의 순간을 정경화와 함께 했던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들은 음악적 스킬(이반 갈라미언), 예술세계의 광대함(요제프 시게티), 오케스트레이션의 찬연함(앙드레 프레빈)을 그에게 일깨웠다. 각각 음악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예술 장르 간 소통의 의미를 가르친 당대 최고의 예술인들이다.

천재가 이 정도냐, 죄책감 느끼기도 정경화는 신동이었다. 생후 6개월 만에 말하고 노래했다. 3세에 피아노를 배웠고, 방송에 출연해 노래를 불렀다. 만 5세에 바이올린으로 전향한 후 불과 6개월 만에 나간 콩쿨에서 1, 2위 없는 3위를 차지했다. 9세에는 전국 규모의 콩쿨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서울시립교향악단과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다.

그는 문학적으로도 조숙했다. 9세에 괴테의 <파우스트>를 독파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파우스트를 읽으며 선악의 세계에 어렴풋이 눈떴던 그 시절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고 고백했다. <파우스트>와 성서 등을 통해 그는 기독교 모태신앙을 더욱 강화했고, 모질고 고단했던 음악 수업시대를 크리스천의 인내와 기도로 극복했다.

정경화를 ‘메이킹’한 첫 스승은 어머니 이원숙(2011년 작고) 씨다. 정경화의 인생을 디자인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어머니와 스승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들의 말을 따랐던 게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이 그의 회고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세 가지 원칙을 지켰다.

첫째로 어떤 일이 있어도 자녀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 둘째로 실수를 야단치지 않으며, 셋째로 칭찬거리가 아닌 것을 함부로 칭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음악가로 성장한 명화(첼로), 경화(바이올린), 명훈(피아노·지휘)에게는 매우 엄격한 ‘음악적 훈육’을 했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명화·경화·명훈 3남매로 이뤄진 정트리오는 최고 기량의 앙상블로 전 세계 음악팬을 매료시켰다.
가장 신경 썼던 일은 고된 훈련을 감내할 수 있도록 자녀들의 체력을 길러주는 것, 매일 꾸준히 연습하는 습관을 붙여주는 것이었다. 음악 하는 사람이라면 특히나 뼈를 깎는 연습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정씨 3남매는 음악을 시작한 후 손이 아파서 더 이상 연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된 훈련을 거듭해야 했다. 정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어머니는 여러 형제 중 저를 꼭 집어 ‘천재’라고 불렀습니다. 어릴 적 무대 위에서 제가 보였던 엄청난 집중력과 패션(열정)을 파악하신 거예요. 그런데 저는 어머니의 그런 기대가 정말 부담스러웠습니다. 나는 천재인데, 천재가 이 정도밖에 안되나 하는 이상한 자책이 거의 죄책감 수준으로 저를 괴롭혔던 겁니다. 연습, 연습, 또 연습이었죠. 왜냐하면 저는 천재였으니까, 천재가 되어야 했으니까요.”

그가 어머니에게 끌려다녔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무대에 서기를 좋아했고, 무대 위에서의 신들림, 그 신들림에 시시각각 반응하는 청중의 표정을 즐겼다. 피아노에서 바이올린으로 전향했을 때에도 그는 직감적으로 ‘바이올린이 나의 악기’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바이올린을 처음 만진 2주 후(당시 덕수초 1학년), 그는 학교 조회시간 구령대 위에서 첫 연주를 했다.

“피아노와 달리 무대 위에서 춤추듯 돌아다니며 연주할 수 있다는 게 바이올린의 매력이었어요. 자의식이 없었던 시절이라 온갖 감정을 다 동원해 저를 표현했죠. 구령대 위에서 연주하며 친구들의 표정을 봤습니다. 굉장한 집중력으로, 묘한 표정들을 지어가며 제 연주를 들어주는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더 큰 무대에 섰을 때도 그랬어요. 먼저, 오늘 저 청중들을 한 없이 슬프게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어요.

그리곤 무대 위를 마구 휘저으며 분위기를 몰아가죠. 바이올린과 함께 저의 몸과 표정이 악기가 되는 거죠. 아주 구슬픈 표정과 몸짓으로 연주에 몰입하면서도 객석을 훔쳐봅니다. 그러면 눈물을 흘리는 청중들의 얼굴이 보입니다. 바로 이거다, 내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이 작은 무대 위에 앞으로 내 모든 삶이 걸려 있다…. 그렇게 저는 바이올린을 숙명처럼 받아들였어요.”

1960년대 유명했던 명동 음악다방 ‘돌체’에서도 그는 자주 연주를 했다. 어머니와 돌체의 여사장이 절친했던 사이라 밤늦은 시간에도 작은 무대가 종종 마련됐다. 모차르트의 협주곡 등을 음반으로 틀어놓고, 바이올린 협주를 시도하는 기이한 연주회였다.

“다비드 오히스트라흐의 모차르트 협주곡을 따라 했던 기억이 생생하죠. 야샤 하이페츠가 연주한 멘델스존 협주곡을 따라 할 때는 3악장에 가서 막히더군요. 3악장은 알레그로 논 트로포, 즉 ‘빠르게, 그러나 너무 빠르지 않게’ 연주해야하는데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던 거예요. 빨리 더 배워서 이 속도를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어린 마음에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내가 너의 하나님인데 어디를 가느냐”


▎1963년 줄리아드 음대 재학 당시 이반 갈라미언 교수와 함께 한 정경화. 갈라미언 교수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온후함을 겸비한 세계 바이올린계의 명조련사였다.
정경화가 줄리아드 음대에 입학하기 전 국내에서의 마지막 스승은 신상철 씨다. 그는 16세 때부터 일본인 선생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 1946년 서울시립교향악단 창단 멤버로 활약했다. 악단에서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대중가수나 탱고밴드의 반주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고 한다. 가수 현인의 ‘신라의 달밤’ 레코드 녹음에도 신씨의 바이올린 선율이 실렸다. 홍콩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주자, LA 체임버오케스트라 악장 등을 지낸 그는 악보 없이 연주할 수 있는 소품이 3000곡을 넘었던 당대의 천재였다.

“먼저 배운 선생님들이 유학을 떠나 신 선생님을 어머니가 모셔왔죠. 그분을 집으로 모셔 참으로 많은 연주를 들었습니다. 바이올린이라는 악기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그 분의 연주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곱고 예뻤던 그 선율이 지금도 생각나네요.”

정경화는 1961년 13세의 나이에 미 줄리아드 음대에 입학해 최고의 조련사 이반 갈라미언 교수를 만난다. 1905년 프랭크 댐로시가 설립한 줄리아드는 미국의 커티스·피바디 음대, 영국 왕립음악원, 독일 하노버 국립음악대학 등과 함께 세계 최고의 명문 음대로 꼽힌다. 정경화·정명화·정명훈 3남매, 백건우·장영주·김영욱·강동석 등이 줄리아드 출신이다. 이반 갈라미언, 도로시 딜레이 등 음악사에 남을 교육자를 다수 배출했고, 지금도 정경화와 이자크 펄만(바이올린), 에마누엘 엑스(피아노) 등 각 분야의 대가가 교수로 활동 중이다.

갈라미언은 조셉 푹스와 함께 줄리아드 최고의 바이올린 교수였다. 이란 태생의 소련인이었던 그는 일찍 연주자의 꿈을 접고 ‘티칭’에 입문해 일가를 이뤘다. 정경화의 표현에 따르면 그가 배출한 제자들은 ‘지구를 온통 뒤덮을 만큼’ 많았다. 그들은 솔로 주자, 교향악단 단원, 대학의 교수로 활약했다. 당시에는 바이올린으로 대성을 꿈꾸는 전 세계의 신동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어두컴컴한 스튜디오에서 그를 처음 만났는데 큰 키와 코, 왕방울 같은 눈이 정말 무서웠습니다. 그때 저는 콩알만한 키에 긴 머리카락을 땋아 늘어뜨린 포니테일 머리의 열세 살 아이에 불과했어요. 비니야프스키의 협주곡을 처음 만난 갈라미언 선생님 앞에서 연주했죠. 연주가 끝난 후 바로 저를 제자로 받겠다고 해요. 그가 주선해서 재학 중 내내 100%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1주일에 두 번, 한 번은 갈라미언 교수가, 또 한 번은 조교가 레슨했어요. 일요일 오전 7시에 레슨 시간이 잡히면 새벽 6시에 가서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일요일엔 교회를 가야 한다고 했더니 크게 역정을 내는 거예요. ‘내가 너의 하나님인데 어디를 가느냐’고요. 그에게 레슨받을 때는 교회에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갈라미언은 제자들을 한번 작심하고 혼을 내면 눈물을 쏙 뺐다. 인정사정이 없었다. 꾸지람이 끝나면 또 더 없이 자상하게 보듬었다. 광풍과 훈풍, 냉온탕을 되풀이하는 훈육법이다.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제자에게 휘두르고, 완벽한 복종을 요구하는 수업의 연속이었다. 혼나서 울고, 위로를 받고 또 울었다.

“저는 분명 한국에서는 최고였어요. 그런데 미국에 와보니 세상에는 기가 막힌 천재가 너무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핑커스 주커만, 제임스 버스웰, 마이클 라빈, 레오나르드 로즈 같은 친구들 말이에요. 제임스 버스웰을 볼 때, 내가 저 정도가 될 수 있을까, 저 정도 바이올린을 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갈라미언 교수는 제자들을 서로 경쟁시켰어요.

‘경화, 지난 번 버스웰의 시벨리우스 연주를 들어보니 기가 막히더군’ 하는 식으로요. 그들과 어쩔 수 없이 경쟁하게 되었지만 그들에게 배운 게 많았어요. 제가 깨달은 것이 제 아무리 천재라도 ‘온전히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재능’은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서로의 탤런트를 서로가 빼어먹던 시절, 그 과정을 통해 음악적으로 풍성해지던 시절, 눈물을 닦고 또 닦으며 오직 연습에만 골몰했던 시절이었죠. 하루에 10시간이 넘도록 말이에요.”

정경화의 비범한 재능과 몰입의 능력은 곧 인정받기 시작했다. 당시 줄리아드에는 일본인을 제외하곤 동양 출신의 학생이 거의 없었다. 언니 명화와 경화, 그보다 6개월 늦게 입학한 김영욱(바이올린), 그리고 중국계 학생이 1명 있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일본 학생이었다.

음악인생을 바꾼 앙드레 프레빈과의 만남


▎1.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앙드레 프레빈(가운데)과 함께 음반 녹음을 위한 리허설을 하고 있는 정경화. 2. 거장 주빈 메타와 공연 리허설 중인 정경화. 1970년 성공적인 런던 데뷔무대 이후 베를린 필, 빈 필 등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일본은 경제력을 배경으로 재능 있는 학생들을 줄리아드에 많이 보냈죠. 실력이 다 괜찮았어요. 아주 깨끗한 연주력을 보여줬지만, 그들은 왠지 틀에 박힌 것밖에는 표현하지 못했어요. 자유의 기질이 부족하다 할까, 너무나 겸손하고, 한계를 과감히 넘지 못하고 주저하는 이상한 ‘주눅’ 같은 것이 느껴졌죠.

천황제 군국주의의 잔재가 그들의 정신을 아직도 지배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1970년대 일본에서 첫 공연을 할 때 큰 환호를 받았던 이유도 아마 그런 배경이 작용했을 겁니다. 분명 그들에게 없는 자유분방함이 제겐 있었습니다. 신문 리뷰에 일본 평론가들이 탄식했어요. ‘왜 일본에는 정경화 같은 폭발적인 음악혼을 가진 연주자가 없느냐…’라고요.”

1967년은 줄리아드 시절 정경화에게 가장 잊지 못할 해로 기록된다. 그해 정경화는 전통 깊은 레벤트리 콩쿨에서 신성(新星) 핑커스 쥬커만과 공동우승을 차지해 세계 음악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것은 쿠데타에 가까운 일이었다. 유대 음악계의 대부 아이작 스턴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이 콩쿨에서 유대인 핑커스 주커만의 우승은 거의 확실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대관식을 앞둔 황태자와 같았다.

뉴욕 카네기 홀에서 열린 마지막 연주에서 생상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를 연주한 그의 모습은 음악적, 문화적 우월감으로 가득 차 있던 서양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동양에서 날아온 자그마한 체구의 한 여인이 내뿜은 넘치는 활력과 다이내믹…. 결국 아이작 스턴도 정경화와 핑커스 주커만의 공동우승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오히려 그 이상한 결과는 정경화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무대장치로 작용했다.

레벤트리 우승 후 약 2년간은 그에게 비교적 많은 연주 요청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 후부터는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가진 음악외적 배경의 취약함, 특히 매니징의 파워는 예컨대 핑커스 주커만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주커만은 레벤트리 우승 이듬해인 1968년 카잘스 음악제에도 초청되었고, 1969년에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한 뉴욕 필의 정기 연주회에서 결정적인 성공을 거뒀다.

같은해 다니엘 바렌보임과 협연한 것도 그의 커리어를 더욱 두텁게 했다. 당시의 주커만은 아우토반을 질주하는 벤츠와 같았다. 그런데 주커만의 승승장구는 정경화에게도 ‘성공의 복선’으로 작용했다. 정경화는 주커만과 우승을 나눠가진 연주자의 ‘잠재적 명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 정경화에게도 행운이 찾아들었다. 지휘자 앙드레 프레빈과의 만남이다.

“거장의 연주 취소는 젊은 음악인에게는 하나의 기회로 다가오죠. 제가 바로 그 행운을 잡았어요. 1970년 이자크 펄만이 런던 교향악단(LSO)과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공연을 예정했다가 취소한 거예요. 마침 그때 그의 아내가 분만을 했기 때문이었죠. 당시 프레빈은 LSO 경영진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저의 줄리아드 동문 제임스 버스웰에게 기회를 주려고 했지요. 그런데 LSO가 용납하지 않았죠. 그 대안으로 제가 추천이 되었던 겁니다.

주커만과 콩쿨에서 공동우승한 동양인 연주자를 내세우자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거죠. 프레빈이 기분 좋을 리 없었습니다. 리허설 당일 100명이 넘는 단원 중 고작 30~40명이 나왔어요. 프레빈도 난감했던지 연주를 다음 기회로 미루자고 했습니다. 제가 그랬죠.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은 너무도 익숙한 곡이라, 리허설 없이도 충분히 공연할 수 있다고요. 그래서 저의 세계무대 데뷔 연주는 리허설 없이 이뤄졌습니다. 어찌 보면 기가 막힌 일이었지요.”

“프레빈과 기싸움에서 밀리면 끝”이라는 절박감

그럼에도 런던 데뷔 공연은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차이코프스키 D단조 협주곡의 마지막 악장이 끝나는 순간 청중들은 전원 기립해 박수를 보냈다. 지휘자 프레빈도, 남성으로만 구성된 100여 명의 단원도 정경화의 강인한 개성과 놀라운 흡입력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다음 날 런던의 신문에는 ‘열정적’이라는 의미를 가진 형용사 수십 개가 동원된 공연 리뷰가 실렸다. 화려한 런던무대 데뷔 후 정경화는 연간 100회 이상의 공연을 소화하는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우뚝 섰다.

지휘자 앙드레 프레빈은 기재(奇才)였다. 영역을 넘나들었던 그의 커리어가 그의 기이한 재능을 잘 말해준다.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재즈 피아니스트로 큰 인기를 끌었다. 할리우드에 진출해 영화사의 음악감독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네 번이나 받았다. 1959년 돌연 클래식 지휘자로 전향, 센트루이스 교향악단, 로열 필하모니를 지휘하며 역량을 인정받았다. LSO의 수석지휘자로 취임한 해는 1968년, 정경화와 최초 협연이 이뤄지기 2년 전이었다.

“천재 중의 천재였죠. 능수능란한 인물이라 할까요? 풍부한 경험에 균형 잡힌 인격, 어떤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는 호방함까지….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죠. 그가 지휘한 LSO의 음색은 날카롭고 열정적이었어요. LSO의 전통적인 음색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어떤 교향악단도 LSO의 피아니시모, 그 강렬함을 따라올 수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 제 연주 스타일과 딱 맞아떨어지는 음색과 하모니였습니다.”

1970년 10월 정경화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세계 메이저급 음반사인 런던의 데카(Decca)와 레코딩을 하게 된다. 요즘 언론에서는 그 후일담을 보도하며 “데카가 이 ‘보물’을 놓칠 리 없었다”는 식으로 쓴다. 그러나 정경화의 고백에 의하면 그 레코딩의 이면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거기에는 런던 데뷔 공연 때와 마찬가지로 우연과 행운이 작용했다.

“런던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국내 순회공연을 하고 있는데 데카 레코드사에서 전보가 한 장 날아왔어요. 레코딩을 하자는 것이었죠. 런던 공연 직전 저는 데카에 오디션 테이프를 주기는 했어요. 당시 데카는 무려 15년 간이나 전속 바이올리니스트가 없었던 시절이었죠.

그래서 많은 바이올린 주자가 런던에 가면 데카에 오디션 테이프를 제출했습니다. 성공적인 런던 공연에, 오디션 테이프도 좋았겠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세션에 녹음키로 돼 있던 세계적인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가 목소리 이상으로 레코딩을 취소했던 거예요. 제가 그 공백을 메울 적임자로 선택된 것이죠.”

조제프 시게티의 압도적인 세계를 보고 울음 터뜨려


▎1969년 스위스에서 당대의 명 바이올리니스트 조제프 시게티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정경화.
정경화는 무대에서 선보였던 차이코프스키, 그리고 협연 경험이 없었던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데카의 스튜디오에서 다시 연주하게 됐다. 이 녹음은 이듬해 음반으로 세상에 나왔다. 앙드레 프레빈은 역시 거장이었다. 아직은 어린 정경화를 충분히 배려하면서도, 박력 넘치는 사운드를 끌어냈다. 정경화도 거장의 경륜에 결코 밀리지 않았다. “프레빈과의 기 싸움에서 밀리면 끝”이라는 절박감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했다. 이 음반이 나온 후 유럽과 미국 매스컴은 그녀를 ‘동양의 마녀’로 부르기 시작했다.

“레코딩 제안을 받고 급히 런던으로 향했습니다.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은 이미 수락했고, 나머지 한 곡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했습니다. 빅토르 랄로의 곡으로 할까하다가 시벨리우스 D단조 협주곡으로 결정했습니다. 제가 당시 시벨리우스에 깊이 빠져 있었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제가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오케스트라와 맞춰 연주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줄리아드에서 피아노 반주로 연습해본 것 외에는….

중간에 알래스카에 기착해서 공항 측에 사정했어요. 다음 비행기를 탈 때까지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을 내달라고요. 바이올린 통에 가지고 다녔던 백악관 연주사진을 보여줬죠. 닉슨 대통령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본 공항 관계자가 연습할 방을 내줬습니다. 그때 시각이 새벽 4시였습니다. 런던에서 만난 앙드레 프레빈이 경악했어요. 시벨리우스 협연 경험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알면서죠. 좀처럼 당황하는 법이 없었던 그가 얼마나 놀라던지…. 그 표정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정경화가 연주한 차이코프스키의 ‘D장조’는 1981년에 다시 나왔다. 이 음반 역시 데카에서 나왔다. 이 음반은 전문가들이 정경화의 레코드 중 첫 손가락에 꼽히는 수작(秀作)이다. 샤를르 뒤트와가 지휘하는 몬트리올 심포니와의 협연. 멘델스존의 ‘E단조’ 협주곡이 함께 수록돼 있다. 그녀의 나이 33세, 절정에 이른 기량을 뿜어낸다.

이반 갈라미언, 앙드레 프레빈과 함께 정경화의 음악 영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연주가가 1973년 타계한 바이올린 주자 조제프 시게티다. 야샤 하이페츠,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20세기 바이올린의 전설로 불리는 명인이다. 1967년 레벤트리 콩쿨 때 그는 심사위원 석에 앉아 동양에서 온 소녀의 놀라운 음색을 들었다. 그에게 연락이 왔다. 스위스에 와서, 자신에게 배우라고.

“1969년 스위스 여름 캠프에서 약 2달간 배웠습니다. 그에게 배우면서 저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런 바이올린의 세계가 있다니! 그 멀고 먼 여정에 압도되어 울었고, 그의 예술적 폭과 깊이에 감동해서 울었던 겁니다. 줄리아드에서 거장의 예술을 흡수했다고 생각했는데, 시게티 선생을 접하고 나니 그의 음악은 히말라야 산맥처럼 높고, 광대하게 느껴졌던 거예요. 그는 인접 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문학·미술·철학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죠. 제게 한시를 읽어주며 동양철학과 문학의 위대성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시게티를 알고 난 후 문화 전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계 각지 연주 여행을 다닐 때마다 그 도시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꼭 찾아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는 연주를 색채와 입맛으로 표현했어요. 예를 들어 드뷔시의 소나타 화음을 ‘혀밑에 넣은 레몬즙처럼 신맛’이라고 했지요. 돌체(부드럽게 연주하라는 음악 용어)는 ‘달콤한 맛’으로 묘사했습니다.”

시게티는 독특한 계보의 연주자였다. 그에게 바이올린적인 매력, 감미로운 서정성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날카로운 음색으로 액센트를 강하게 붙이면서 음악의 골격을 명확하고 웅장하게 그려나갈 뿐이었다. 이 대목에서 작품과 스트레이트 하게 맞붙는 정경화의 패기가 오버랩된다.

스승의 영향이었을까? 시게티는 청중과의 영합도 거부했다. 음질을 개선한 복각판을 자세히 들어봐도 보우잉도 거칠고 이따금 벅벅 긁는 소리까지 들린다. 끝까지 정공법으로 음악의 핵심에 다가드는 일사불란한 연주 태도다. 그의 관심은 아름다움 따위의 겉치레가 아니라 작품의 의미를 철저히 규명하고 어떻게 그것을 재현하느냐에 있었다.

“솔티가 먼저 요청해오면 협연하겠다”

시게티와 정경화를 논할 때 ‘콩쿨’에 얽힌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콩쿨은 정경화의 첫 번째 성공의 발판이었지만, 그는 연주가의 자유를 일정하게 억압하는 콩쿨의 속성을 싫어했다. 조제프 시게티는 그러나 정경화가 자신의 제자 자격으로 세계 유수의 콩쿨에 나가주기를 기대했다. 그것은 정경화에 대한 애정이기도 했겠지만, 정경화 같은 제자를 자신의 커리어 속에 편입시키려는 욕망의 표현이기도 했다.

“저명한 피아니스트 니키타 마갈로프가 그의 사위였습니다. 언젠가 집으로 부르더니 마갈로프 피아노 반주로 막스 블로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을 연주해보라는 거예요. 연주가 끝난 후 사위에게 ‘어때 대단하지?’ 하면서 제게 하는 말씀이 가장 권위 있는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콩쿨에 나가보라는 것이었어요. 제가 ‘이길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니 ‘물론’이라 대답했어요. 제가 다시 ‘1등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니 그는 ‘1등은 당연히 안되고 2등을 할 텐데, 2등은 서방세계 1등을 의미한다’라고 하는 겁니다.

당시엔 비 러시아인이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우승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너무나 고민이 돼 부모님께 장장 10장에 달하는 편지를 써 답장을 기다렸어요. 다행히 ‘나갈 필요가 없다’는 답변을 받아 저는 콩쿨의 굴레에서 영원히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레벤트리 콩쿨에 나갔던 것도 저는 부모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어요. 콩쿨의 수렁에 빠질 때 음악가가 직면하는 위험에 대해 저는 잘 알고 있었거든요.”

정경화는 마음속 가장 깊이 사숙했던 비장(秘藏)의 스승을 이번 인터뷰를 통해 처음 밝혔다. 폴 마카노비츠키다. 그는 누구인가? 4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만진 그는 이반 갈라미언의 첫 번째 수제자였다. 정경화는 1965년 서머스쿨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이 세상에서 그의 음색처럼 신비한 소리는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사람에게 저는 바이올린의 ‘색채’를 배웠습니다. 그가 남긴 연주는 베토벤의 10개의 소나타, 그리고 6개의 바흐 소나타와 파르티타입니다. 그 연주를 프랑스 무대에서 들은 이가 바로 미국 가기 전 저의 스승이었던 양해엽 선생님이었어요.

아, 인연이라는 것이 그렇게 연결된다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했어요. 미국 서머 캠프에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연주를 들으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연주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더군요. 제게는 너무도 소중한 음악적 스승이었습니다.”

정경화는 18세였던 1970년에 앙드레 프레빈과 협연한 이후, 그야말로 전설처럼 회자되는 거장들과 빈번히 조우했다. 지금도 그가 존경해마지 않으며 기억에 생생한 대표적인 지휘자는 루돌프 켐페다. 24세 때 막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같이 녹음했다. “그분은 제가 아무리 자유롭게 막 달려나가도, 기가 막히게 뒤를 받쳐주던 지휘자였어요. 요새는 솔리스트를 그렇게 멋지게 받쳐주는 지휘자가 별로 없습니다.

아주 무뚝뚝한 분이었는데, 연주를 하다 서로 눈이 딱 마주쳤을 때, 제게 보내주던 그 따뜻한 눈웃음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같은 곡을 마흔 살이 좀 넘었을 때 클라우스 텐슈테트하고도 협연했는데, 이분은 정말 순진한 장난꾸러기 어린애 같았어요. 동독의 바이올리니스트 출신 지휘자인데, 음악밖에 모르는 사람이죠. 그런데 이분은 가끔 폭발해요. 나하고 녹음을 같이하고 있을 때 프로듀서가 잠깐 연주를 정지시키니까, 사람이 확 돌변하면서 분노를 터뜨리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같이 하지 못했죠.”

그가 협연했던 지휘자 중엔 키릴 콘드라신, 데이비드 요훔, 게오르그 솔티 등 20세기를 대표하는 마에스트로가 즐비하다. 음반사 데카에서 “게오르그 솔티와 협연해보겠느냐”고 제안했을 때, “솔티가 먼저 요청해오면 하겠다”는 것이 당시 정경화의 ‘오만한’ 답변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음반사의 주선으로 영국 런던에서 만났다.

정경화는 “눈에서 그렇게 강렬한 빛이 쏟아지던 사람은 처음이었다”고 회상했다. 1970년대, 유럽 곳곳에서 연주회와 레코딩 요청을 받던 정경화는 아예 런던에 집을 마련해놓고, 미국 뉴욕과 런던을 오가며 바쁜 스케줄을 소화했다.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음악에 마케팅이라는 것이 도입되기 전이었으니, ‘로맨틱 에이지’라 할 만했다.

그는 그 시절의 대중음악을 지금도 좋아한다. 비틀스와 롤링스톤스, 레이 찰스와 빌리 홀리데이다. 재즈 보컬 엘라 피츠제럴드와는 <에드 설리반 쇼>에 같이 출연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한 가수 이미자의 오랜 팬이다.

“이미자 씨의 노래를 매일 열심히 따라 불렀습니다. 그 억양과 글리산도(음과 음 사이를 연결하는 것)를 흉내내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되더라고요. 대중음악이나, 고전음악이나 높은 경지로 올라가면 범접하기 힘든 경계가 있는 것 같아요. 둘은 하나의 깊은 예술세계로 통합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위대한 음악의 스승 바흐를 향해 떠나는 순례


▎정경화는 2005년 손가락 부상 후 5년 만에 재기에 성공했다. 올해와 내년 바흐의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을 녹음하는 것이 숙제로 남아 있다.
정경화는 2005년 왼손 손가락에 마비 증상이 오면서 연주를 잠시 접었다. 치명적이랄 수 있는 부상이었다. 다시는 연주할 수 없으리라는 절망에서 빠져나오는 데 꼬박 5년이 걸렸다.

그가 줄리아드 음대 교수로 부임하며 ‘티칭’으로 진로를 바꾼 이유이기도 했다. 그 후 기적적으로 완쾌돼 브람스의 협주곡(2010년)과 프랑크의 소나타(2011년) 등을 선보이며 어렵게 다시 무대에 섰다.

하지만 정작 그의 복귀를 완벽하게 선언했던 것은 작년 연주한 바흐의 대곡 소‘ 나타와 파르티타’였다. 올해와 내년 이 대작의 레코딩 작업이 그가 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갈라미언 선생이 제게 첫 번째로 주었던 과제가 ‘파르티타 3번’이었어요. 그때부터 18세까지 바흐를 공부했지만, 그 깊이를 제대로 알긴 어려웠죠. 그래도 바흐는 지금까지 제 음악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양식’이었습니다. 날마다 바흐를 연주했으니까요. 다른 연주회가 있는 날에도 백스테이지에서 그 위대한 음악가의 곡을 한 악장 정도씩은 꼭 연주했습니다.”

그는 대관령 국제음악제의 예술감독을 10년째 맡고 있다. 7월 14일부터 8월 6일까지 열리는 10돌 잔치의 주제는 ‘노던 라이츠(Northern Lights)―오로라의 노래’다. 덴마크와 핀란드, 아이슬란드·노르웨이·스웨덴 등 북유럽 5개국의 천재 음악가들을 기리는 자리를 마련한다.

“국제음악제 예술감독을 맡으며 많은 걸 느끼게 됩니다. 고전음악의 ‘효용이 없는 듯한 효용’을 어떻게 전파해야 하느냐를 고민합니다. 인터넷이 지배하는 이 부박한 시대에 그 참기 어려운 산만함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죠. 클래식음악계의 커다란 사명이라 생각합니다.

연주를 통해 기여하고, 후학들의 재능을 캠프 운영을 통해 북돋을 생각입니다. 예술을 보듬는 것은 우리의 진정한 삶을 보듬는 것이죠. 국가와 기업의 지원이 절실합니다. 스승에게 배운 것을 후대에 다시 돌려주는 일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여주었으면 좋겠어요.”

201308호 (201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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