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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46년 특별기획 - 흑산도는 꽃섬이다 

<현산어보> 출간 200년, 정약전 선생의 유배지 흑산도와 흑산도 사람들의 오늘 

글·이대흠 시인, 천관문학관 관장 사진·지미연 월간중앙 기자
2014년은 손암(巽庵) 정약전(1758∼1816) 선생의 <현산어보>(玆山魚譜)가 출간된 지 200년이 되는 해다. ‘玆山魚譜’는 자산어보 또는 현산어보로 불리는데, 최근 들어 현산어보로 통일되는 추세다. <현산어보>는 선생이 유배되었던 흑산도의 각종 물고기와 바다생물의 특징과 습성, 쓰임새를 자세히 기록해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 생물학 서적으로 꼽히는 명저이다. 2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흑산도의 풍광과 인물, 어류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남도의 시인 이대흠(46)이 흑산도를 다녀왔다.

▎바다는 검고 하늘도 검다. 검은 바다 건너 검은 섬 흑산도는 먼 데 있을 때는 검은 섬이어도 실제 그 안으로 들어가면 바위와 나무와 풀이 있고, 도처에 꽃이 있다.



흑산도 가는 배에서 커피를 샀더니, 커피가 천원이다. 조금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먹을 곳이 한 군데 밖에 없으므로, 할 수 없이 천원을 주고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샀다. 배는 연근해를 벗어나 먼바다로 들어선다. 파고가 높은 만큼 출렁거림이 심해진다. 파도는 일어서려 하고 배에 탄 사람들은 하나둘 눕는다. 바다는 파도의 것이다.

바다가 출렁거리고, 배도 출렁거리고, 배에 탄 사람들도 출렁거린다. 파도의 출렁거림보다 배의 출렁거림이 심한 것 같고, 배의 출렁거림보다 사람들의 출렁거림이 더 심한 것 같다. 동행한 사진기자는 의자에 앉은 채로 머리를 쥐어뜯더니 이내, 함부로 뱉은 껌처럼 바닥에 달라붙는다. 황급히 비닐봉투를 건넸더니, 다스리지 못한 몸속의 파도를 몸 밖으로 밀어낸다. 그러면서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의 목소리로 “물!”이라고 한음절의 말을 한다.

흑산도는 ‘천원’이다

나는 붕붕 날다시피 매점으로 가서 물을 산다. 물도 천원이다. 물을 가져다주고 나니, 휴지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파도를 거슬러 헤엄치듯이 가까스로 매점까지 가서 화장지를 달라니, 화장지도 천원이다. 사는 물건마다 천원이라고 하니, ‘흑산도는 천원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한때 갈 때까지 간 사람들이 마지막 정처로 잡는 곳이 흑산도라 했다. 그래서 ‘흑산도 아가씨’라는 노래 제목은 가사 내용과 상관없이 모든 색이 뭉쳐서 검어진(玄) 슬픔이 배어 있다. 배는 심하게 흔들린다. 그래도 이 배는 흑산도까지 갈 것이다. 흑산도는 멀고, 바다는 검고, 하늘도 검다.

검은 바다 건너 검은 섬, 흑산도. 그 섬에 가는 길은 어떤 캄캄함과 마주하러 가는 길이다. 흑산도 초행인 내 머릿속의 흑산도는 다만 검은 먹지처럼 여겨질 뿐이다. 섬 생활을 오래 해보았지만, 다시 섬에 간다. 섬은 외따로 떨어진 땅이고, 다른 곳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오래전에 썼던 시 하나가 떠오른다. ‘꽃섬’이라는 시다.

먼 데 섬은 먹색이다/ 들어가면 꽃섬이다

바다를 건너다닐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바다 위에서 섬을 바라보곤 하였는데, 먼 데 있는 섬은 하나같이 먹색이었고, 검은색에 가까웠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 덩어리가 섬이었다. 하지만 섬에 들어가보면, 섬마다 생김새가 달랐고, 바위와 나무와 풀이 있고, 도처에 꽃이 있었다. 먼 데 있을 때는 검은 섬이어도 실제 그 안으로 들어가면 꽃섬이었다.

어디 섬뿐이겠는가. 사람도 그러하다. 잘 모르는 사람의 실체는 잘 보이지 않기에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은 다만 검은 그림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사람의 속내를 보게 되고 내력을 알게 되면, 사람마다 어여쁜 꽃임을 알게 된다.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꽃마음도 없는 사람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될 일이다.

검은 섬, 흑산도가 보인다. 저 검은 섬도 결국 꽃섬일 것이다. 들어가서 내 몸으로, 내 눈으로 살피면 환하게 꽃 피어 있는 섬의 속살이 보이리라. 부두에 닿자, 배멀미가 심했던 사진기자가 다시 어지럼증을 호소한다. 이른바 땅멀미를 하는 것이다. 그의 짐을 나누어 들고 마중 나온 이영일 씨를 만났다. 나이가 지긋한 분인 줄 알았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은 분이다.

정약전은 책의 서문에서 “섬 안에 장덕순, 즉 창대라는 사람이 있었다. 성격이 조용하고 정밀하여, 대체로 초목과 어조 가운데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을 모두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직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분을 맞아 함께 묵으면서 물고기의 연구를 계속하였다”고 썼다. <현산어보>의 저술에는 장창대 등 흑산도 사람들의 도움이 컸던 것이다. 이영일 씨의 외가 쪽에 장창대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한다.

사진기자는 이영일 씨에게 일출과 일몰찍기 좋은 장소를 물었다. 나는 사령목이 있는 곳과 피리 부는 소년의 전설과 관련된 당산의 위치를 물었다. 사진기자는 계속 두통을 호소하였다. “갯멀미 하심마?” 이영일 씨는 땅멀미를 갯멀미라고 하였다. 여객터미널 옆에 있는 ‘자산문화관·도서관’에 들어갔다. ‘자산문화관·도서관’은 여객선 선착장에 붙어 있는 작은 도서관이다.

이름은 도서관이지만, ‘정약전 기념관’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1층에 정약전의 사상 및 생애에 대한 내용을 전시해 놓았다. 영정 사진도 한 장 있는데, 자세히 보니 손암 정약전의 얼굴이 아니라 다산 정약용의 초상이다. 흑산도에서조차 손암에 대한 자료가 없고 관심이 부족하다는 것은 의외였다.


▎흑산도는 큰 섬이 아니지만, 아주 작은 섬도 아니다. 일주도로의 길이가 26㎞쯤 된다.



흑산도의 두 마을, 예리와 진리

날은 흐리고, 아직은 바람이 차다. 자기의 움직임을 스스로 드러내지 못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골목 곳곳을 훑고 다닌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섬을 타고 떠도는 느낌이다. 애기동백의 꽃술이 붉다. 흑산도로 오는 육지의 배가 닿는 곳은 예리(曳里)이고, 면사무소는 진리에 있다. 예리는 새 모양을 한 흑산도의 부리 같은 곳이다. 끌미라고도 하고, 예촌이라고도 한다. 진리(鎭里)는 흑산도의 중심지로 모든 마을을 지배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섬에 입도한 사람이 처음으로 살았다는 읍동(邑洞)을 포함한다.

예리와 진리는 거의 붙어 있지만, 두 마을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과거 홍어파시가 있을 때면 예리항 앞에는 수백, 수천 척의 배가 몰려들어서 배와 배를 건너 몇 킬로미터를 걸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사람도 많았고, 거기에 기생하는 아가씨들도 7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반면 진리는 면사무소 등 관청과 종교 관련 건물이 많다. 예리가 흥성거리는 곳이라면, 진리는 고요한 곳이다. 예리가 동적이라면, 진리는 정적이고, 예리가 속세의 장소라면, 진리는 성스러운 곳이다. 성(聖)과 속(俗)이 이웃하여 있다. 문득 같은 날 죽은 마더 테레사 수녀와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떠오른다.

과거엔 유배지였고, 지금은 관광지가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도 제 발로 들어오지 못하고 끌려온 이들도 많았던 곳이다. 빚에 쫓긴 유흥가 여자들이 마지막으로 끌려온 곳이 흑산도였다는 것이다. 불과 얼마전까지도 흑산도는 갈 데까지 간 이들이 마지막 목숨을 부지한 곳이었다. 정약전의 유배지이고, 최익현의 유배지였으며, 이름을 남기지 못한 많은 이가 유배를 왔고, 유배되었던 검은 섬. 하지만 흑산도의 속이 시커먼 것은 아니다.

우거진 상록수림 속에 동백꽃이 피고 홍도풍란이 자란다. 흑산도는 큰 섬이 아니지만, 아주 작은 섬도 아니다. 일주도로의 길이가 26㎞쯤 된다. 버스로는 한 시간가량 걸리며, 반대편 끝까지 요금은 천원이고, 한 바퀴는 2천원을 받는다. 관광객은 택시를 주로 이용하는데, 택시비는 한 바퀴 도는 데, 4인 기준 6만원을 받는다.

흑산도의 밤은 가게들까지 전부 잠든다. 검은 섬이 비로소 온전히 고요해진다. 편의점도 있지만 열두 시가 넘으면 문을 닫는다. 흥성거렸던 과거가 있는 예리항은 지금도 식당이 많다. 하지만 집집마다 죄다 홍어전문이다. 된장찌개나 김치찌개 같은 것은 기대하기 힘들다. 모든 식당을 홍어가 차지한 것 같다. 흑산도는 홍어의 본고장이다. 정약전은 <현산어보> 2권 무린류(無鱗類)의 첫 번째 항목에서 홍어(洪魚)에 대해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동지 후에 잡히기 시작하나 입춘 전후에 가장 살이 찌고 맛이 뛰어나다. …나주 가까운 고을에 사는 사람들은 홍어를 썩혀서 먹는 것을 좋아하니 지방에 따라 음식을 먹는 기호가 다름을 알 수 있다. 가슴이나 배에 오랜 체증으로 인해 덩어리가 생긴 지병을 가진 사람들도 썩힌 홍어를 먹는다. 국을 만들어 배부르게 먹으면 몸속의 나쁜 기운을 몰아내며, 술기운을 다스리는 데도 효과가 크다.” 홍어 한 접시를 시켜먹는다. 흑산도 사람들은 삭힌 홍어보다 삭히지 않는 홍어를 더 즐겨 먹는다. 삭히지 않는 홍어의 붉은 속살이 이름값을 한다.


▎통일신라 말기의 유적인 흑산도 무심사의 절터. 무심사 터에는 석탑과 석등이 하나씩 남아 있다.
처녀당신(處女堂神)과 피리 부는 소년

초령목이라는 나무가 있다. 초령목이라는 이름은 이 나무를 불전에 꽂아 귀신을 부른다는 속설에 따라 붙여진 것이라 하여, 일명 귀신나무라고도 한다. 하지만 목련과의 국내 희귀종인 이 나무는 향이 좋아 불전에 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이름으로는 초향목(招香木)이라 하며 나뭇가지로 향을 피우면 향이 좋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흑산도와 제주도에서만 자생하는데, 흑산도에 있었던 300년가량 된 초령목은 1992년 천연기념물 369호로 지정되었으나 1994년 고사하고 말았다. 고사한 어미나무 주위에 43그루의 어린 초령목이 자라고 있고, 큰 것은 수고(樹高)가 5m에 이른다.

초령목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이는 이영일 씨였다. 이씨와 동행하고 나서야 초령목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 “여(여기) 아래 내려가면 많이 있어요. 며칠 전에 보니 꽃 피었던데요.” 이영일 씨가 앞장서 내려가며 툭 던진 말이었다. 아직껏 한 번도 보지 못한 희귀목인데, 꽃까지 피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그는 흘리듯이 알려주었다. 초령목 자생지는 진리당산 아래쪽 비탈진 산속이다. 초령목이 특별한 나무이긴 하지만, 그 나무를 당산나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고 한다.

바닷가 마을에서는 해상에서의 안전을 기원하기위해 당신(堂神)을 모시고, 당산제를 지내는 곳이 많다. 흑산도에서도 마을마다 당산 혹은 당숲이 있어서 해마다 제사를 지내곤 하였는데, 지금은 마을마다 들어선 교회에 밀려 당신(堂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은 없다. 당신으로는 대개 여성신을 모시는 게 보통이고, 그 여성신은 민속신앙에서의 신이나 그 마을의 전설과 관련된 신격을 모신다. 그런데 진리당신은 처녀라는 것이 이채롭다. 그 처녀당신과 관련된 이야기 하나가 전해져 내려온다.

오래전에 흑산도에 옹기를 팔러 다녔던 배가 있었다. 옹기를 실은 배는 흑산도에 열흘에 한 번씩 왔고, 선원 네 명과 한 소년이 타고 있었다. 진리 마을 앞에 배를 정박해두고 선원들이 마을을 돌며 옹기를 팔러 다닐 때, 혼자 남겨진 소년은 당산 앞 소나무 가지 위에 앉아 피리를 불며 놀았다.

그런데 그 피리소리가 사람의 넋을 빼앗고, 귀신을 홀릴 정도였다. 사람들은 소년의 구성진 피리 소리에 취했다. 하지만 그 소리에 매료된 것은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산천초목과 귀신들까지 그 소리에 취했던 것이다. 며칠을 섬에서 머물던 옹기배가 섬을 떠나려 하자 난데없이 풍랑이 일었다. 며칠이 지나 잠잠해져서 다시 출항하려 하자, 또 풍랑이 일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뱃길이 막히자, 선원들은 신령들께 제사까지 올렸으나 풍랑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나이 많은 사람 하나가 나타나 혀를 끌끌 차며, 용한 무당을 찾아가 길을 물으라 하였다. 선원들이 무당을 찾아가자, 무당은 “왜 이제야 왔느냐?”며, 올 줄 알았다는 듯이, 풍랑이 일었던 것은 요망한 피리소리 때문이라고 하였다. 피리소리에 빠진 진리의 처녀당신(處女堂神)이 소년을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는 말도 하였다. 하는 수 없이 뱃사람들은 소년을 그 섬에 놓아두고서야 흑산도를 떠날 수 있었다.

진리당산은 건물이 두 개이고, 당산 앞에 작은 흙무덤이 있는데, 그 흙무덤이 피리 부는 소년의 무덤이라고 한다. 신(神)까지 헤어나지 못하게 한 소리의 무덤이다. 당산 근처에 있는 초령목도 어쩌면 소년의 피리가 화(化)한 것이 아닐까.


▎흑산도 상라봉 열두 구비길을 오르면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노래비가 있다. 높은 곳에 있는 노래비까지 가는 길은 온통 동백숲이다.



흑산도 아가씨, 동백 아가씨

당산에 당제를 지낸 지는 20년이 넘었지만, 당산 건물은 아직 보존되고 있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에서 관리를 한다는데, 전통 보존 차원에서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흑산도에는 아예 없는 죽담(흙과 돌을 섞어 쌓은 담)을 두른 것은 아쉽다. 더구나 죽담의 형식마저 인근 지역의 방식이 아니다. 소년의 소리 무덤에 쓸쓸히 솔가리가 덮여 있다.

흑산도에 사람이 산 것은 신석기 시대부터인 것으로 추측된다. 소흑산도라고 불리는 가거도의 패총에서 신석기 유물이 출토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는, 진리 마을에 남방식 고인돌군 8기가 남아 있고, 통일신라 말기의 유적인 무심사(無心寺) 터도 있다. 무심사 터에는 석탑과 석등이 하나씩 남아있다. 유적 발굴 당시 기왓장에서 ‘무심사선원’이라 쓰인 명문이 발견되었다. 흑산도 사람들은 탑과 석등을 ‘탑영감’과 ‘안탑님’으로 부른다.

상라봉 열두 구비길을 오르면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있다. 높은 곳에 있는 노래비까지 가는 길은 온통 동백숲이다. 10년이 지나도 자라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동행한 이영일 씨의 설명이다. 산다화라고도 부르는 애기동백은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빨간 꽃잎처럼 멍이 들었다는 동백 아가씨들이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를 외호(外護)하고 있는 것 같다. 붉은 심장을 뜯어내는 것 같은 아픔에 정약전의 가슴도 시커멓게 멍이 들었을 것이다.

흑산도를 찾은 관광객 대부분이 상라봉에 있는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는 보고 가지만, 옆 마을 사리(沙里)의 정약전 유적지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정약전은 1801년(순조 1년)에 신유사옥이 일어나 많은 천주교 신도가 박해를 입게 되자, 아우 약용과 함께 화를 입어 신지도(薪智島)를 거쳐 이곳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16년을 살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산동식물 보고서인 <현산어보>를 남겼고, 몇 해전에는 그가 쓴 한시 40여 수가 처음으로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흑산도 부속섬인 장도 출신의 이동만(46) 씨는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직장이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사진을 찍어주는 게 일이다. “10분의 예술이죠. 버스가 오면 어떤 손님이 찍을 것인지, 판단하는 게 중요하죠.” “사진을 전공했느냐?”는 말에 “서울대 사진학과 나왔어요”라고 말하는 유쾌한 사람이다.

서울대에 사진학과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학벌 좋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왔고, 사진 찍는 것을 업으로 삼은 지도 10년이 넘었다. 그가 하루 종일 노래비 앞에 있는 것 같지만, 실제 근무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배 들어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기에 한바탕 사진을 찍고 나서, 다른 취미 활동을 한다. 심지어는 서둘러 바다에 나가 스킨스쿠버를 즐기다가 들어오는 배를 따라 복귀하기도 한다.


▎정약전 선생이 사리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며 <현산어보>를 집필한 사촌서실. ‘사촌서당(沙邨書堂)’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자산어보 집필한 사촌서실

손암 정약전 유적은 흑산면 사리에 남아 있다. 그가 살아있을 때는 복성재(復性齋)라는 현판을 붙이고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당으로 썼던 곳이다. 유배를 온 유학자들은 봉록을 받지 않았기에 생존에 필요한 것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많은 이는 유배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정약전도 마찬가지였다. 뛰어난 학자였던 정약전의 지식이 흑산도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혜택을 주었을 것이다.

“현산어보라고요?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우리를 안내하던 임송 선교사는 현산어보라는 말을 듣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가 올라갔다. 마땅히 玆山魚譜는 자산어보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의 말에도 일리는 있지만, 손암 정약전이 쓴 <玆山魚譜>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자산어보라고 읽었던 것이 보통이었으나, 최근 몇몇 연구자에 의해 현산어보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그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고 한다. 특히 서울세화고등학교 생물교사로 재직 중인 이태원 씨는 지난 2002~2003년 출판사 ‘청어람미디어’를 통해 <현산어보를 찾아서>라는 5권의 책을 펴내면서 현산어보로 고쳐 읽자고 제안한 바 있다.

정약전이 자신의 책 서문에, 흑산이라는 이름이 어둡고 처량하여 편지를 쓸 때마다 흑산을 玆山으로 썼다는 것과, 그와 유사한 기록을 정약전의 아우인 정약용도 기록으로 남겼기에, ‘玆山魚譜’가 흑산어보(黑山魚譜)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흑산도를 현주(玄州)라고 부르기도 하였고, 玄(현)과 玆(‘자’ 혹은 ‘현’으로 독음) 글자는 바꾸어 써도 되는 한자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玆’ 자의 독음에 있다. 최근에는 이를 ‘현’으로 읽는 추세인데, 임 선교사는 다른 의견인 것이다. 화제를 다시 돌렸다.

“그런데 왜 현판이 독우재가 아니라, 사촌서당인가요? 무슨 근거가 있나요?” ‘사촌서당’이라는 말이 생소하여 물었더니, 그 내력을 말해준다.

“손암(정약전) 선생이 사리마을 아이들을 가르쳤을 때는 복성재였겠지요. 하지만 그 건물은 진즉 사라져버렸고, 지금 있는 건물은 10여 년 전에 복원한 것인데, 그때 사촌서당(沙邨書堂)이란 현판이 붙었어요. 하지만 잘못된 것이지요. 손암과 다산의 글에 사촌서실이라는 말은 나와도 사촌서당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아요. 낙관도 ‘다산 정용 서’라고 새겨져 있는데, 정약용을 ‘丁容’이라고도 했으니, 그건 가능하다고 쳐도 그들이 살았을 당시에 정약용이 흑산도에 왔다는 기록이 없으니, 정약용이 직접 쓴 현판이라고 할 수 없지요. 잘못된 것이죠.”

“집을 새로 지을 때, 내로라 할 만하면, ‘헌(軒)’이나 ‘실(室)’자 대신에 ‘당(堂)’자를 붙이기도 하잖아요? 담당 공무원이 스스로 흐뭇하여 그렇게 작명을 했나 보군요.” “그래도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그래도 다시 현판을 할 때 저것(현재의 현판)을 버리지는 마세요. 잘못된 것도 역사잖아요.” “당연하지요.”

여수오케스트라 단장을 맡고 있는 임송 선교사는 사제가 아니다.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았는데, 흑산도 사리 공소를 지킬 사람이 없어서 자진하여 흑산도로 들어왔다고 한다. 손암 정약전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손암 선생이 천주교에서 ‘배교자’로 되어 있는데, ‘순교자’로 분류해야 한다며, 조선 교회사를 줄줄 외듯이 말해준다.

서당 아래쪽에 천주교 사리 공소가 있고, 공소 앞에 우물이 있다. 정약전이 물을 길어 먹었다는 그 우물로 추정된다. 자연과학에 밝았던 정약전이 판 우물이라서인지, 산 중턱에 있음에도 아직껏 마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돌담이 둘러쳐진 밭에는 야생화가 무더기로 심어져 있다. 이른 봄인데다가 관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서 야생화 무리가 마른버즘 같다. 흑산도에는 논농사가 없고, 밭농사와 바다농사뿐이다. 갯가에 나가보니 미역을 채취해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흑산도 미역은 흑산도에서 양식하는 전복의 좋은 먹잇감으로 사용된다.



흑산을 지킨 늙은 어부

<현산어보>에 미역은 ‘해대(海帶)’또는 ‘감곽(甘藿)’으로 기록돼 있다. 정약전은 “뿌리에서 줄기가 나오고 줄기에서 양 날개가 나오는데, 날개의 안쪽은 단단하고 바깥쪽은 부드럽다. 주름이 쌓여 있는 부분은 도장의 전각무늬처럼 보이고, 잎 부분은 옥수수 잎과 비슷하다. …임산부의 여러 가지 병을 고치는 데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썼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미역에 대한 지식과 별 다름이 없다. 200년이 흐른 지금, 흑산도에서는 미역을 전복의 먹잇감으로 쓴다. 흑산도에서 잡히는 어종(魚種)도 정약전이 살았던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전에는 고등어하고 가라지가 엄청 잽혔지요. 설레끼(1줄에 낚시바늘 10개가 달린 주낙의 일종)을 넣으면 열 개에 열 마리가 다 물렸어요.” 수소문을 해서 찾은 어부 박채순(78) 옹의 말이다. 목선을 탔던 시절, 1시간가량 노 저어 나가 고기를 잡는데, 1천 마리까지도 잡곤 했다고 한다.

“고둥어하고 가라지는 성질이 천방지축이라서 낚시 바늘에 돌멩이를 끼워 넣어도 문다고 했어요. 지금은 가라지가 없어요. 목포 어판장 같은 데 가도 없어요. 어쩌다 한 번씩 보인다고는 합디다.”

박 옹이 말하는 가라지는 ‘전갱이’다. 정약전은 <현산어보>에서 가라지를 ‘가짜 고등어’라는 뜻의 가벽어(假碧魚)로 분류하고, 속어로는 가고도어(假古刀魚)라고 한다고 썼다. 고등어와 비슷한 이 물고기에 대해 자산어보는 “몸이 약간 작고 빛깔은 매우 옅다. 입이 작으며 입술은 엷다. 꼬리 옆에는 잔가시가 있는데 가슴지느러미가 있는 곳까지 줄지어 늘어서 있다. 맛은 짙고 고등어보다 좋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갱이는 200년 전에는 흑산도에서 흔했겠지만 지금은 흑산도보다는 제주 인근에서 많이 나는 물고기다. 제주에서는 ‘각재기’라 불린다.

“흑산도에서는 어떤 물고기가 많이 잡히나요?” “등태(가오리 종류인 개홍어나 물홍어), 상어, 장어(아나고), 놀래미, 우럭이런 것들이 전에는 많이 잡혔는디, 지금은 잘 안 잡히요. 옛날에 (바다에) 나가서 한 백 마리 잡았다먼, 요즘은 30마리 잡기 힘들어요.” 잡히는 물고기들이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는 것이 박 옹의 말이다. 그럼 흑산도를 대표하는 홍어(참홍어)는 어떨까?


▎흑산도에는 홍어가 흔하다. 삭히지 않은 싱싱한 홍어를 즐겨 먹는데 허가된 여섯 척의 배만 홍어잡이를 할 수 있다.
“홍애(홍어)가 요새도 많이 잡히지만, 전에는 드문일이지만, 한 동이(한 뭇은 10마리, 한 동이는 100뭇)씩 할 때도 있고 그랬는데, 그렇게는 어렵고, 한 스무 뭇만 해도 풍장이라고 했제. 요새 흑산도 홍어잡이 배는 여섯 척이여. 300마리 500마리도 잡고, 못 잡을 때는 한 50마리.”

검은 섬의 일출

흑산도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나 홍어를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허가된 여섯 척의 배만 홍어잡이를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주낙으로 잡았는데, 저인망(고대고리)으로 잡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단속이 심해지자 저인망으로 잡는 것을 포기하면서 한 10년 정도 홍어잡이를 하지 않았다. 다시 홍어잡이를 시작한 지는 20년가량 되었다. 주낫(주낙) 대신 걸낫(걸낚시)으로 잡는데, 미끼를 주지 않고 잡는다.

“가자미(가재미)를 잡으러 댕겠는디,…많이 잡을때는 그물 한 뭇에 150마리도 걸려요. 그랄 때는 가자미로 그물이 흐게부러. 그라고 고기 잡어 갖고 자석들 갈치고 그랬제. 인자 또 4월 되먼 가자미 잡으러 가사제.”

흑산도에서 본격적인 고기잡이 철이 시작되려면 4월이 지나야 한다고 했다. 사고 났을 때나 바다에서 풍랑 만났을 때를 이야기할 때면 박 옹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고, 고기 잘 잡혔을 때를 이야기 할 때면 그의 얼굴이 환해진다. 박 옹의 얼굴에 몇 십 년간의 날씨가 스쳐간다. 그의 얼굴은 날씨다.

흑산도에서는 영산도에서 떠오른 해가 장도로 진다. 섬에서의 마지막 날, 새벽 여섯 시에 숙소를 나섰다. 사진기자 혼자서 일출 사진 찍으라고 내버려둘 수 없어서 삼각대라도 들어다 주자는 심사이다. 며칠째 일출 장면 찍는 것을 실패했던 예리항 인근 대신에 상라봉에 올라 일출을 맞을 셈이다. 홍어잡이 떠났던 배가 들어올 때 말고는, 흑산도의 새벽은 잠들어 있다.

다행히 구름은 거의 걷혔다. 새벽 여섯 시에 출발하여, 산꼭대기에 여섯 시 반에 도착하였지만, 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명이 밝아오고 나서야 영산도 산봉우리 너머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것이 보였다. 바람은 거세고, 상라봉 아래, 반월산성에 맞닿은 바다 쪽은 아슬아슬한 절벽이다.

손이 곱아가고, 껴입은 외투를 뚫고 찬바람이 들어온다. 춥다. ‘상라리 열두구비길에 피어있던 진달래는 옷도 입지 않았던데, ……’ 하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미소를 짓는다. 흑산도를 둘러싼 주변의 섬들이 있어서 흑산도는 혼자가 아니다. 여럿이 어울려서 파도를 맞고 해도 맞는다. 외로움이라면 수만 년 꽃 피우며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흑산도쯤 되어야 할 것이다.

구름 너머에서 누군가가 구름 쇠판을 용접기로 지지는 듯 시커먼 구름 한 가운데가 점점 붉어진다. 용접봉에서 불꽃이 일 듯 구름판에 붉은 점들이 후두둑 흩어진다. 이내 두꺼운 철판이 뚫린 듯 붉은 덩어리가 불쑥 닥친다. 일출이다. 검은 섬 검은 구름 밭에 시뻘건 해의 순이 텄다. 순간 나는, 동백꽃에 주둥이를 박는 동박새처럼 검은 섬 붉은 해에 쏙 빠져버렸다.

201404호 (201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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