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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종의 중국인물& 인문지리지[22] 충칭(重慶) - 무인 기질이 넘치는 파인(巴人)의 고향 

‘운우지정(雲雨之情)’이란 성어가 유래된 낭만적인 고장… 활달한 성정으로 전통적으로 장수가 많이 배출된 곳 

유광종 중앙일보 국제부 기자

충칭시 위증 반도의 야경. 충칭은 낭만성을 깨우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도시다. / 사진·중앙포토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는 베란다가 있다. 중국어로 이를 ‘陽臺(양대)’로 적고 ‘양타이’로 읽는다. 이 말의 유래가 눈길을 끈다. 아파트의 베란다면 베란다지, 그 안에 뭐가 있길래 눈길을 끈다는 것인가? 뭐, 이런 물음이 나올 법하다. 이 베란다는 베란다 이전에 조금은 은밀한 새김을 얻었다. 남녀의 밀회가 이뤄지는 곳, 게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섹스의 행위가 벌어지는 장소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 말의 유래가 점점 더 흥미를 끈다.

중국에 싼샤(三峽)라는 곳이 있다. 세계 최대의 수력 댐이 들어서서 유명해진 곳이다. 세 협곡이 길고긴 줄을 이루는 곳이다. 지금 중국의 후베이(湖北)이창(宜昌)이라는 곳에서 쓰촨의 권역이었던 충칭에 이르는 깊은 협곡의 물길이다. 길이는 약 193㎞에 달한다. 이곳의 경치가 매우 빼어나 예부터 많은 시인 묵객이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곳에 우산(巫山, 무산)이라는 지명이 있다. 구름이 자주 협곡의 연봉 위에 걸려 있고, 그에 따라 빗줄기가 항상 오락가락하는 곳이다. 그래서 협곡 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이 산에는 늘 짙은 구름이 끼고 빗줄기가 뿌리면서 깊고 아득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곳에 여신이 살았다고 한다. 굴원(屈原)과 함께 중국 남방 시맥(詩脈)의 장을 열었던 시인 송옥(宋玉)이 자신이 살던 초(楚)나라 양왕(襄王)을 따라 이곳을 유람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송옥은 임금에게 전설의 한 토막을 들려줬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양왕의 선조인 회왕(懷王)이 이곳을 지날 때 우산(巫山)의 여신이 잠자리를 내줬는데 회왕은 결국 그 여신과 몸을 섞었다. 그 뒤 둘이 서로 헤어질 때 그 여신은 “저는 이 산의 남쪽에 머물고 있습니다. 아침에는 구름, 저녁에는 비로 나타납니다. 아침저녁 늘 산의 볕이 바른 곳에 있답니다”는 말을 남긴다.

여신이 남긴 말의 뒷부분을 한자로 적으면 ‘旦爲朝雲暮爲行雨 朝朝暮暮 陽臺之下(단위조운, 모위행우, 조조모모, 양대지하)’다. 여기서 탄생하는 단어가 운우(雲雨)와 양대(陽臺)다. 구름과 비를 뜻하는 운우(雲雨), 그리고 그 둘이 합쳐져 이뤄지는 운우지정(雲雨之情)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즉 남녀 사이의 성관계다. 아주 유명한 단어다.

여신과 함께 잠자리를 같이했던 초나라 왕의 스토리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양대는 볕이 잘 내리쬐는 곳, 즉 베란다로 번역할 수 있는 중국어이긴 하지만 본래의 말뜻은 남녀상열지사가 이뤄지는 장소다. 점잖은 자리에서 남녀의 성관계를 거론하는 게 아무래도 마땅치는 않아 보인다.




충칭은 중국 최장의 장강(長江)이 도시 전체를 감싸 안고 흐른다. / 사진·중앙포토
안개의 도시, 양대(陽臺)의 도시

그러나 성관계에만 눈길을 둘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남녀상열을 이루는 낭만성, 여신과 나라의 임금이 만나는 상상의 세계를 떠올리는 게 좋다. 안개, 또는 구름이 가득 낀 협곡의 풍광에서 범상치 않은 신분의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을 속삭이다가 안개와 구름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스토리가 낭만성을 깨우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번에 우리의 발길이 향하는 곳이 바로 충칭(重慶)이다. 앞 글자 重은 여기서 ‘무겁다’의 새김이 아니라 ‘거듭’ 또는 ‘겹치다’의 뜻이다. 뒤의 글자 慶은 기쁜 일, 즉 경사를 가리킨다. 따라서 중경이라는 이름은 ‘경사가 거듭 이어진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 이름은 남송 효종(孝宗)의 셋째 아들 조돈(趙惇)이 옛 이 지역인 공주(恭州)의 왕으로 있다가 아버지 효종을 이어 황제에 오른 뒤 이곳을 주(州)보다 큰 행정단위인 부(府)로 승격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지역의 수장이 황제 자리에 오른 일, 이곳이 더 높은 행정단위로 격을 높인 일, 이 두 가지 경사(慶)가 겹쳤다(重)는 뜻이다.

이곳은 거대한 산에 만들어진 도시라고 해야 옳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산 위에 앉아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도시 곳곳에 비탈이 많다. 아울러 중국에서 가장 긴 강인 장강(長江)이 지나가고, 거기에 다시 가릉강(嘉陵江)이 겹쳐 흐른다. 두 강이 도시를 감싸안고 흐른다.

날씨는 무덥고 습하다. 그런 높은 지형 위에 도시가 있는데다 거대한 두 강의 물줄기가 도시를 품고 있으니 늘 안개가 자욱하다. 그래서 얻은 별칭이 ‘산성(山城)’, ‘무도(霧都)’다. 산에 있는 도시, 안개의 도시라는 뜻이다. 아울러 큰 두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많아 ‘교도(橋都)’로도 불린다.

원래는 쓰촨성에 속해 있었으나, 행정적으로 독립했다. 쓰촨의 광활한 동부 지역을 뚝 떼어내서 직할시(直轄市)로 만든 때가 1997년이다. 원래 있던 충칭과 주변 쓰촨의 동부지역을 합병했다. 면적은 우리나라의 크기와 맞먹는 8만 2400여㎢에 이르고, 인구는 3천만 명이 넘는다. 아무리 중국의 영토가 방대하다지만 한 도시의 크기와 인구가 이 정도면 전 세계를 통틀어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니 엄격히 말하자면 이곳은 이름만 직할시일 뿐이지, 실제로는 중국의 여느한 성(省)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앞에서 이 도시를 이르는 별명을 몇 개 소개했지만,진짜 별명은 따로 있다. ‘파유(巴渝)’와 ‘유도(渝都)’다. 渝라는 글자가 붙었던 이유는 이 지역을 흐르는 물길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글자는 巴(파)다. 이 역시 현지의 물길을 가리키는 명사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설이 있고, 아니면 이곳에 독특하게 많이 자란 옛 식생(植生)의 한 종류와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다. 아니면 모종의 동물과 연관이 있으리라는 추정도 등장한다.

그 유래에 관한 정설은 없으나, 어쨌든 지금의 충칭을 가장 넓게 대변했던 글자가 바로 이 ‘巴’ 자다. 그래서 옛 쓰촨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명사는 巴蜀(파촉)이다. 쓰촨의 서부지역을 蜀(촉)이라 했고, 동부지역인 지금 충칭 일대를 巴(파)로 불렀으며, 전체를 말할 때는 이 둘을 병렬했다.




중국 국민당정부를 따라 충칭에 머물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옛 터. / 사진제공·건국대 한인희 교수
하리파인(下里巴人)의 유래

‘하리파인(下里巴人)’이라는 성어가 있다. 유래는 이렇다. 옛 전국시대에 초나라 사람들이 즐겨 부른 노래가 있었다. 바로 이 하리파인이라는 제목의 노래였다. 그 가사의 내용이 아주 대중적이었다고 한다. 쉽고 내용도 매우 흥미로웠다. 그래서 전국시대 초나라에서 아주 큰 유행을 탔다. 집집마다, 거리마다 이 노래를 불렀다. 문제는 그 내용이었다. 노골적인 쾌락,혹은 ‘남녀상열지사’의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노래가 한 번 대중들의 입을 오르내리자 삽시간에 노래가 퍼져나갔다.

그에 비해 ‘양춘백설(陽春白雪)’이라는 노래는 정반대였다. 그윽한 음조에다 내용도 교훈적이고, 우아한 노래였다 한다. 하지만 그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오늘날 두 노래의 가사 내용이나 곡조는 전해지지 않지만, 구전돼온 이야기에 따르자면 그랬다는 얘기다.

듣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따라 부를 수 있던 노래인 하리파인이 주목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지금의 충칭 동쪽에 있는 곳이 후베이(湖北)이다. 옛 초나라의 근거지다. 이곳 초나라 사람들에게 전해졌던 하리파인은 그 서쪽으로 들어선 옛 ‘巴’, 즉 지금의 충칭에서 만들어진 노래다. 노골적인 정서, 그리고 아주 얕은 즐거움, 심지어는 ‘야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거리낌 없는 대중적인 가요가 그곳에서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이 하리파인이라는 말은 결국 그런 스토리 때문에 지금은 ‘통속적인 예술’, ‘수준이 낮은 기예’ 등 좋지 않은 의미로 굳어졌다. 파인(巴人)이라는 단어도 원래의 ‘파나라 사람’이라는 뜻을 벗어나 결국에는 ‘시골놈’, ‘촌뜨기’ 등의 의미로 자리 잡았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었길래 그만한 화제로 떠올라 결국 하나의 고사를 이루고 성어로까지 정착하게 됐을까. 그 내용은 앞서 얘기한 대로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어쨌든 지독할 정도로 직설적이면서 노골적이었으며, 당시 상류층으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야하고 비속했으리란 점은 분명하다. 그 노래를 만든 사람, 즉 파인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을 수없다.

사실 중국 남부에 있었던 초(楚)나라 역시 중국 문명의 중심지로 행세했던 중원(中原) 사람들에겐 멸시의 대상이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몸에 문신을 새기는 야만의 문명 정도로만 인식된 지역이었다. 그래서 중원 사람들은 남쪽 초나라와 그 사람들에게 늘 남만(南蠻)이라는 낙인을 찍고서는 더불어서 함께 지낼 만한 동류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초나라의 상류층이 “차마 들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비속하며 저속한 노래를 만들어 유행시킨 파인들은 도대체 누굴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물음표를 매기지 않을 수 없다. 그 정체가 궁금해진다. 중원이 아닌, ‘오랑캐’의 낙인이 찍힌 채 살아갔던 초나라 사람들조차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의 ‘야함’을 보인 그곳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사람들이 안개의 도시라는 별칭을 얻었던 충칭 일대의 원주민이었음이 분명하다. 초나라 왕을 홀려 잠자리에 함께 들었던 우산(巫山)의 여신은 그런 우리의 상상에 조금 보탬을 주는 존재다.

아무리 전설 속의 여신이라고 해도, 처음 본 남자와 스스럼없이 잠자리를 같이하고, 있는 곳을 물었더니 “아침에는 구름, 밤에는 비, 있는 곳은 산의 볕이 바른 곳”이라는 말을 남긴 여신의 정체는? 이는 초나라 사람들이 즐겨 불렀던 하리파인의 작사·작곡가,파인과 연결지어 생각할 때 어느 정도 우리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여신이 있었다는 우산은 지금의 충칭 권역에 있는 곳이다. 충칭직할시 동쪽 끝인 이곳 우산으로부터 서쪽으로 싼샤를 거슬러 올라가 쓰촨 중부 지역에 이르는 권역이 모두 충칭직할시에 속한다.

지금 그 파인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우선은 그 원형의 일부를 짐작케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현재는 그들을 파족(巴族)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 정식으로 분류하는 55개의 소수민족 안에 들지 못할 정도로 극소수인 사람들이다. 게다가 문화적 맥락도 강하게 이어오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 극히 일부의 파족으로서는 파인의 정체를 정확하게 짐작할 수 없다.



돋보이는 활달한 성정

앞에서 펼쳐왔던 글에서 몇 차례 이야기한 적이 있다. 중국은 문명적인 구성을 보인다. 단순한 나라라기보다 그 안에 아주 다양한 문화적 갈래를 안고 있는 문명체로 보는 게 마땅할 때가 더 많다. 지금 우리가 거론하는 파인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극소수가 남아 있는 파족은 중국이라는 문명 구성에서 섞여 들지 못한 사람들이다. 비록 옛 파인의 자취를 안고 지금도 종족을 이어가지만, 섞이고 또 섞이면서 오늘날의 중국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는 참여하지도 못한 사람들이다.

중국은 문명 형성의 초기부터 부단하게 사람들이 섞이는 과정을 겪었다.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사람들은 전란과 재난을 피해 늘 쉼 없이 이동하면서 제가 편히 살 곳을 모색했다. 그런 역동적인 과정이 지금의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빚어냈음은 물론이다.

하리파인이라는 노골적이면서 직설적인 노래를 만들어 유행시켰던 옛 파인도 마찬가지다. 일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들은 중국 서북부에서 지금 장강 내지는 한수(漢水) 유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주의 경로가 분명치 않아 보인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파인들이 원래 한수 인근에 광범위하게 퍼져 살다가 그 일부가 다른 곳에서 이동해온 사람들에게 밀려 지금의 삼협, 나아가 쓰촨의 동부 지역을 이루는 충칭 일대에 터전을 잡았다고 본다.

이들은 하리파인이라는 노래를 남겨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경우처럼, ‘파국(巴國)’이라는 정체(政體)를 형성했음이 분명하다. 길고 험한 협곡에 몸을 숨기고 살면서 운우지정이라는 성어의 토대를 제공할 만큼 자유분방하며 활달한 성정을 보였던 사람들이다.

전국시대의 파(巴)나라와 그곳 사람들은 몇 가지의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 우선 파유무(巴渝舞)라는 춤이다. 파나라 사람들이 만든 춤이라고 하는데, 뒤에 들어선 유방(劉邦)의 한(漢)나라 황실이 그 춤을 선호해 궁중으로 끌어들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춤사위가 매우 강렬하고 역동적이었다고 한다.

술도 잘 담갔다는 기록이 있다. 파향청(巴鄕淸)이라는 술이 유명하다. 오늘날의 싼샤 중간에 있던 파향(巴鄕)이라는 마을에서 담근 술로, 맛과 향이 뛰어나 옛 중국에서 아주 귀한 술로 대접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아울러 이곳 사람들은 싸움 실력도 인정을 받는다. 무(武)를 숭상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아울러 나무로 다리를 길게 받친 건축물을 짓고,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 밑에는 가축을 키웠다는 기록도 전한다. 장례는 죽은 사람을 관에 담아 절벽 위의 틈새에 모시는 현관(懸棺), 배의 형태를 닮은 관으로 지내는 선관장(船棺葬)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장례 방식은 오늘날에도 중국 남부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장강 이남 지역에서 쌀을 지어 주식을 삼았던 도작문명의 주체로 옛 중국남부의 원주민이었던 비에트(Viet) 사람, 즉 월인(越人)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장례법이었다. 선관장의 경우는 가깝게는 동남아 일대, 좀 더 멀리로는 솔로몬군도 등에서도 나타나는 형식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지금 충칭 일대에 살았던 옛 파인들은 정통 중원 사람들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른 부류였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고춧가루 탕에 고기 등을 데쳐먹는 마라훠궈는 충칭 것이 제 맛이다. / 사진제공·건국대 한인희 교수
더 매서운 건 충칭의 여성들

현재 충칭 일대에 사는 많은 사람은 대개가 한족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한다. 중국 남부 전체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던 옛 월인(越人) 지역에 사는 지금 중국의 많은 사람 역시 대개가 한족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그 속에 파인과 월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섞이고 또 섞였던 ‘중국인’의 역사적 발자취를 보면 그렇다.

파인의 적통을 이었을 법한 집단이 아직도 남아있다. 바로 토가족(土家族)이다. 약 835만 명이 명맥을 유지하는 소수민족이다. 이들이 거주하는 곳의 분포가 대개 지금의 충칭과 겹친다. 일부는 후난(湖南)과 장시(江西) 일대에도 퍼져 있다. 강이 흐르는 협곡 등의 지역에서 주로 삶의 터전을 닦았던 사람들이다.

쓰촨과 충칭은 예로부터 인구의 유입이 매우 잦았던 곳에 속한다. 진시황이 중국을 처음 통일의 판도에 올려놓은 뒤 벌였던 사민(徙民: 백성들을 특정 지역으로 이주토록 하는 일) 정책에 따라 쓰촨 일대로 북부 지역의 주민과 병사들이 옮겨오기 시작했고, 왕조 교체 시기의 혼란에 따라 쓰촨의 인구가 급감한 뒤에는 더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또는 정부의 명령에 따라 쓰촨 일대에 끊임없이 유입했다.

충칭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옛 시절에는 이곳 역시 쓰촨의 범주에 들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칭은 다른 쓰촨 지역처럼 근대까지 인구의 유동이 매우 심했던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충칭 또한 다른 중국 지역의 이민사회와 같은 속성을 지닌다. 사람들의 성정이 대개 활발하며 거침이 없다. 웬만한 규범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편이다.

게다가 이곳에 전통적으로 거주했던 파인들의 활달한 심성도 그들과 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역시 ‘오랑캐’에 불과했던 초나라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자유분방한 노랫말로 깜짝 놀라게 했던 옛 시절의 그 파인 특유의 성정말이다.

게다가 이곳 사람들의 매운 음식을 잘 먹기로 소문나 있다. 정확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중국에 고추가 들어온 뒤 가장 나중에 전해진 곳이 바로 쓰촨이다. 날씨 또한 습하고 무더워 고추는 이 지역 사람들의 입맛에 가장 잘 맞았다고 한다. 몸에 스미는 습기를 밀어내는 데 맵고 강렬한 고추가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쓰촨의 음식은 맵기로 하면 중국에서 첫손을 꼽는다. 옛 쓰촨 권역이었던 충칭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먹는 데 있어서는 다른 쓰촨을 능가하면 능가했지, 절대 뒤처지지 않는다. 그래서 쇠솥에 새빨간 고추국물을 끓여 고기와 야채 등을 데쳐 먹는 마라훠궈(麻辣火鍋)는 충칭 것이 가장 유명하다.

파인의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성정, 이민사회의 활화산 같은 활력, 거기다가 매운 음식을 마다하지 않은 불 같은 성격을 다 품었다고 상상해보라. 충칭 사람들은 그 기질을 빼닮았다. 그중에서도 남성보다 여성이 더 유명하다.

개혁개방 뒤 충칭은 출발이 좀 늦었던 편이다. 내륙 깊숙한 곳에 들어선 위치 때문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내륙 기지 건설로 인해 중공업은 매우 발달한 편이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개혁 개방의 흐름에서 다소 뒤쳐졌던 충칭에선 많은 여성이 택시와 버스를 운전했던 것으로도 유명했다.

1990년대까지 충칭의 여자 택시기사와 버스기사는 꽤 이름을 높였는데, 운전 기술이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산비탈이 많은 충칭에서 커다란 버스를 모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충칭 여성들은 용감하게 그런 버스를 잘도 운전했다. 그러다가 교통사고가 나면 충칭 여성 기사들의 맹위가 드러나곤 했다. 남자 기사와 다투던 충칭 여성 기사가 상대방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일이 자주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칭의 여자 기사들은 한때 중국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이런 여성들을 보통은 ‘매서운 여자’라는 뜻으로 랄매자(辣妹子)라고 적는다. 쓰촨 일대의 성격이 강한 여자들을 일컬었던 유행어였는데, ‘국민가수’ 격이랄 수 있는 쑹쭈잉(宋祖英)의 노래로 더욱 유명해졌다. 그 ‘매서운 여자’의 전형이 어쩌면 이 충칭의 여인들이다. 아직까지 충칭의 여인들은 활발한 성정을 지닌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충칭 무인을 대표하는 진량옥


중국 역사에 이름을 올린 여성 중에서 가장 무공이 뛰어났던 진량옥. / 사진제 공·유 광 종
그런 충칭 여인들을 대표하는 여인이 명나라 말엽인 1574년 이곳에서 출생했다. 그 이름은 진량옥(秦良玉, 1574~1648)이다. 그는 중국 역사에서 이름을 올린 여성 중에서 가장 무공이 뛰어난 인물이다. 명나라 말, 그러니까 만주족이 산해관을 넘어 중원으로 진출하던 대혼란의 시절에 자신이 속했던 명나라 조정을 위해 여느 남성 무장(武將)보다 출중한 실력으로 전쟁터에서 이름을 날렸다.

후금(後金)으로 불렸던 만주족의 군대를 맞아 여성의 몸으로 전쟁터에 나가 싸워 여러 차례 승리를 거뒀고, 고향인 지금 충칭의 중셴(忠縣)으로 돌아와서는 장헌충(張獻忠) 등 지역의 군벌과 싸워 거듭 승리를 거둔 맹렬한 여성이다.

오늘날 충칭의 맹렬한 여성들은 아마도 이런 진량옥의 기질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 때의 여성 무장으로서 보인 진량위의 매서움과 날카로움이 교통사고가 났을 때 싸움판에 뛰어들어 남성의 뺨을 때리는 충칭의 랄매자와 어딘가 닮아 있다.

충칭은 비록 1990년대에 중앙정부의 결정에 따라 독립적인 직할시로 떨어져 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그 인문적, 지리적 전통을 따질 때는 쓰촨과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 전통적으로 쓰촨의 서부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 촉(蜀)인데, 이곳은 우리가 이 연재에서 앞서 다뤘다. 너른 평원과 풍부한 수량(水量)으로 곡식이 늘 넘쳐나던 곳 말이다.

그곳은 늘 지금 충칭의 파(巴)와 병렬하면서 불렸는데, 앞서 언급한 파촉(巴蜀)이라는 호칭이 그렇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두 지역의 인문적 특성을 따질 때 나오는 게 파장촉상(巴將蜀相)이란 말이다. 전통적으로 파지역에서는 장수(將帥)가 많이 나오고, 촉지역에서는 재상(宰相)이 많이 배출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촉상(蜀相)은 실제 재상 자리에 오른 사람이 많다는 얘기는 아니다.

소동파(蘇東坡)와 사마상여(司馬相如) 등 이곳 출신으로서 중국 문단에 가히 천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파에서는 장수가 많이 나왔다. 우선 앞에서 소개한 진량옥이 대표적이고, 그 이전의 전국시대 파만자(巴蔓子)와 감녕(甘寧), 현대 공산주의 중국을 건국하는 데 공을 세운 중국 10대 원수 류보청(劉伯承)과 녜룽전(聶榮臻) 등이 모두 충칭 출신이다. 남녀노소 모두 무인(武人) 기질이 넘치는 곳이니,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충칭에선 절대로 주먹 자랑할 일이 아니다.

201410호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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