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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야설천하⑨ 非山非野의 명당 찾은 청곡 김종회 - 도학의 에너지와 유가의 카리스마를 융합하다 

춥고 배고픈 상황으로 전락한 기호학파의 적자(嫡子)…20대부터 불일암 터에서 사서삼경 소리 내어 읽으며 정진한 유가의 도인 

글 조용헌 원광대 불교학 박사, 사진 오종찬 객원기자
체(體)와 용(用)이 있고, 학(學)과 술(術)이 있고, 이론과 실천이 있다. 용이 있고, 술이 있고, 실천이 있어야 힘이 붙는다. ‘문지방’이라고 하는 정신적 한계를 돌파하려면 신비체험도 필요하다. 청곡은 이 신비체험을 통해 어떤 경지로 나아갔는가.

청곡 김종회는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어 고향 산천을 지키며 제자를 가르쳤고, 강증산의 모악산파 이래로 내려온 도학의 맥을 이어받아 화합과 융합의 가치를 지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들판이 김제·만경 지역이다. 들판이 끝이 안 보인다. 끝이 안 보이는 들판에 서 있어 보아야 바람을 안다. 끝없는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보아야 허허로움을 알고, 모가 나는 상대방을 끌어안는 포용력이 생긴다. 중국에서 장자(莊子)가 태어난 고향이 넓은 들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장자는 들판의 품성을 보고 자란 인물이라는 이야기다. 거처하는 자연환경이 어떤가에 따라 사상도 달라진다. 반대로 그 사람의 성품이 어떤가에 따라 거기에 맞는 자연환경을 선택하기도 한다.

우암(尤庵) 송시열은 속리산 자락의 계곡 물살이 감아 돌아 흘러나가는 지점의 바위 위에 암서재(巖棲齋)를 지었다. 바위와 계곡물이 만나는 지점에 터를 잡은 암서재는 우암의 기질이 드러나 있는 공간이다. 바닷가에 있으면 또 다르다. 바다도 파도가 부서

지는 바위 위인가, 아니면 평화롭게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지점인가가 다르다.

서예가로서 탈속한 풍모를 지녔던 소암(素菴) 현중화 선생의 거처는 서귀포인데, 이 양반의 서실인 조범산방(眺帆山房)은 서귀포 앞바다의 범선을 고즈넉하게 바라다 볼 수 있는 조그만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가학(家學)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동양화가인 아산(雅山) 조방원 선생의 거처는 곡성군 죽곡면의 냇물이 정겹게 굽어서 흘러 들어오는 위치에 있다. 아산 말년의 달관한 풍모와 어울리는 터였다. 물은 관조하는 기질을 양성하지만, 산이 많은 동네는 기질이 강하고 소신이 강한 인물이 나온다. 들판이 넓은 동네에서는 가슴이 넉넉한 인물이 나온다는 게 풍수가의 이야기다.

소신도 소신이지만 가슴이 넓은 장부를 만나서 너털웃음이 만발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청곡의 거처는 드넓은 들판 한가운데에 있다는 점에서 이색적이다. 들판의 철학이 있는 것이다. 야설(野說)을 나누기에는 김제 만경평야만한 곳이 없다. 청곡(靑谷) 김종회(金鍾懷·51) 선생은 내가 생각하는 몇 가지 조건을 갖추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조건은 이렇다.

먼저 가학(家學)의 계승이다. 집안 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지적 전통을 가학(家學)이라고 하자. 그것은 유교도 될 수 있고, 불교도 될 수 있고, 도교도 될 수 있다. 아니면 어떤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콘텐트를 계승하는 것도 가학의 계승이다.

살면서 바깥의 정보에 귀를 닫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우리는 너무 밖의 것만 배우느라고 자기 것은 무엇이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 계속 헐떡거리는 삶의 연속이다. 외국에서 뭘 하는가 하고 끊임없이 귀 기울이고 여차하면 바로 흉내를 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긴장이 끝이 없다. 이거 다 정신병의 원인이 된다. 집안에서 수백 년간 내려오는 가학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밖으로 안 싸돌아 다녀도 된다. 여유가 있다. 청곡은 집안 대대로 유학을 숭상했고, 본인도 유년시절부터 반강제로 유학과 한문경전을 공부해야 했다.

한문은 유년시절부터 배워야 제대로 배운다. 어렸을 때부터 회초리를 맞아가면서 배워야 뼛속에 박힌다. 그 다음에는 공간이 있다. 가학이 있어도 그 내용을 담을 수 있는 하드웨어가 있어야만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김제시 만경(萬頃)에 학성강당(學聖講堂)이라는 수십 칸 규모의 기와집이 있다. 이 강학 공간에서 찾아오는 학생에게 한문공부를 가르친다.

주로 사서삼경이다. 10대 초반의 청소년부터 대학생, 그리고 일반 성인들도 학성강당에 머무르면서 고전을 공부하고 있다. 새벽 4시부터 공부 일과는 시작되는 전통 서당교육 시스템이다. 도시의 콘크리트 빌딩 3∼4층에서 배우는 것보다 끝없는 만경의 들판 한가운데 서 있는 우뚝 솟은 전통 한옥에서 소리를 내어 경전을 독송하는 것은 그 품격과 차원이 다르다.

한국에서 가장 넓은 만경 들판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학성강당은 봄에는 트랙터 소리, 여름에는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가을에는 누런 벼가 익어가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이다. 세상의 풍파가 어디 안 미치는 데가 없지만, 그래도 이곳 만경 학당에는 조선의 정조(情調)가 이어져 오고 있다.

유교 카리스마는 경전 이해에서 비롯


하늘에서 바라본 전북 부안 계화도의 아름다운 모습. 일제 강점기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었던 간재 전우는 적극적인 항일운동에 가담하지 않고 계화도에 들어가 제자 양성에 주력했다.
가학이 있고, 그 가학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므로 30세 무렵부터는 밖으로 나가서 회사에 다니거나 공무원을 하거나, 또는 사업을 하거나, 기타 다른 사회활동을 할 생각이 없었다. 자기 고향 산천에 머물면서 조상이 물려준 공부를 계속하면서 살 수 있는 삶이었던 것이다. 고향을 버리고 타향에 나가 먹고 산다고 치고 받으면서 헐떡거리는 인생이 아니었다. 고향 집에서 책 보다가 된장국 먹고,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고전 가르치고, 시간 되면 들판에 나가 바람 쐬는 것이 일과였다.

그러나 우리는 다 고향을 버리지 않았던가! 지나고 보니 별것도 없는데, 뭘 그리 대단한 일을 한다고 고향 산천을 등지면서 그리 바쁘게 돌아다녔단 말인가! 몇 푼의 돈을 얻었지만, 그 돈의 몇 십 배나 되는 상처를 가슴에다 새겼고, 쫓기면서 살다 보니 병만 얻고 늙어감을 한탄하는 중생의 삶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청곡은 책만 읽은 서생(書生)이 아니다. 파워가 있다. 어떤 파워냐 하면 풍수와 한의학에 대한 내공이다. 그는 명당을 눈으로 보는 힘이 있다. 투시(透視)하는 공력을 갖추고 있어 땅도 뚫어지게 보지만, 사람의 오장육부도 들여다보는 내공이 있다. 그래서 가끔 몸 아픈 사람들이 방문해서 조언을 듣고 간다. 내가 보기에 청곡은 풍수의 고단자다. 국내에서 사서삼경을 연마한 유학자 중에 도력을 갖춘 인물을 꼽는다면 금곡(金谷) 하연순(68) 선생이 있고, 만경의 청곡(靑谷)이 있다.

진주 태생의 금곡 선생은 서울 혜화동의 학당에서 식자층들에게 주로 <맹자>를 가르치고 있다. 금곡 선생은 지인지감(知人之鑑)이 발달한 분이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다. <삼국지>에 보면 지인지감이 발달한 인물로 수경(水鏡) 선생이 나오는데, 금곡은 이분야다. 10년 전쯤 필자가 금곡 선생을 만났을 때 초저녁부터 새벽 2시 무렵까지 이 양반 자택에서 도학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옛날 도인들의 도력 품평에서부터, 당신 선생 이야기, 금곡이 젊은 시절에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면서 신비체험을 한 이야기, 1960년대 후반 일본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를 만난 이야기 등등. 그러면서 필자에게 “조 선생!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은 더 나겠지만, 비례해서 건강을 주의하시게” 하면서 걱정을 해주시던 대목이 머리에 남는다.

청곡은 풍수와 의학이다. 불교적 카리스마는 고승들에게서 볼 수 있고, 도교적 카리스마는 지리산파(智異山派)와 계룡산파(鷄龍山派)의 산가(山家)에서 볼 수 있지만, 유교적 카리스마는 경전에 대한 해박한 이해와 도력이 겸비되었을 때 나온다. 불교와 도교에 비해 발견하기 힘든 카리스마가 유교적 카리스마가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유교는 윤리도덕과 명분에 중점을 둔다. 삼천대천(三千大天)의 정신세계의 권능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에 도력에 대한 관심이 적다.

기도, 참선, 정신수련에 대한 안배가 적다. 그 대신 경전공부에 방점이 찍힌다. 책만 많이 읽다 보면 도력이 안 나오는 경향이 있다. 사람은 신통력이 어느 정도 있어야 실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것 아닌가! 실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분야는 사주, 풍수, 한의학이다. 강호동양학 3대 과목이다. 강단과 학생, 칠판이 없어도 생존이 가능한 분야가 3대 과목 아닌가!

오늘날 영남학파(嶺南學派)와 기호학파(畿湖學派)는 입장이 뒤바뀌었다. 영남학파는 돈이 많고, 기호학파는 돈이 없다. 돈이 있어야 문집도 번역하고, 출판도 하고, 학술세미나도 지원해서 연구논문이 많이 나오고, 해외에 널리 알려지기도 한다. 돈 없으면 적막강산이다. 영남학파에 대한 학계의 저술과 연구논문은 풍성하다. 그러나 기호학파에 대한 연구는 매우 초라하다. 기호학파에 대한 제대로 된 체계적인 연구저서를 과문 탓인지는 몰라도 아직 접해보지 못했다.

예를 들면 ‘기호학파의 형성과 전개’와 같은 제목의 책을 보지 못했다. 이러한 영부호빈(嶺富湖貧) 현상은 조선시대와 뒤바뀐 상황이다. 1623년의 인조반정 이래로 약 300년 동안 기호학파는 집권 여당이었으니 돈이 많았다. 이때는 연구활동이 매우 풍성했고 사람도 많이 배출했다. 그러나 만년 야당이었던 영남학파는 춥고 배고팠던 300년이었다.

집권 여당인 노론(기호학파)의 ‘칼바람’에 눌려 무려 300년 동안이나 시골 촌놈으로 살아야만 했던 영남학파였으니 아무리 실력 있는 인재가 있었다 하더라도 중앙에서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가 없었다. 이 시기에 영남학파는 전국구 인물을 배출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조선조 300년 동안 배고픔과 탄압에 지지리 시달려야만 했던 영남학파는 이제 기호학파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기호학파는 왜 계화도로 갔나?


사계 김장생의 초상. 기호학파는 율곡에서 시작하여 사계 김장생이 그 맥을 이어받았다. 기호학파의 인물은 김장생을 스승으로 본격 배출되기 시작했다.
청곡은 배고픈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었다. 기호학파의 바톤터치 과정을 보자. 율곡에서 시작하여 사계 김장생이 그 맥을 이어받았다. 율곡은 바빠서 제자 양성을 제대로 못했다. 과로한 탓에 50세가 못되어 일찍 죽은 것도 작용하였다.

충남 연산의 사계 김장생으로부터 기호학파의 인물은 본격적으로 배출되기 시작했다. 사계는 송구봉의 직접적인 훈도를 받은 제자이지만 송구봉이 천민 신분으로 강등되어 공식적으로 나설 수 없었고, 송구봉과 율곡은 사상적 동지이자 절친한 관계였으므로 율곡의 학맥으로 포함시켰다.

사계 다음에는 신독재 김집, 그 다음으로는 우암 송시열-위암(魏菴)-매산(梅山) 홍직필-전재(全齋) 임헌회-간재(艮齋) 전우로 내려왔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의 기호학파 종장이 간재다. 당시 영남학파에 면우 곽종석이 있었다면 기호학파에는 간재 전우가 있었다.

간(艮)은 주역의 방위로 볼 때 동북방에 해당한다. 중국에서 볼 때는 한반도가 동북방이다. 간방(艮方)인 것이다. 나라 잃은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동북의 간방인 한반도에서 후천개벽이 일어난다는 풍수도참의 신앙이 유행하였던 시기다.

그래서 당시 식자층들은 ‘간(艮)’ 자(字)를 좋아했다. 간재 제자가 3천 명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간재 밑에는 제자가 많았다. 간재는 일제와의 무장투쟁이나 적극적인 독립운동에는 가담하지 않고, 전북 부안의 계화도(繼華島)라는 섬으로 들어가 살면서 제자 양성에 주력한 탓이다. 청곡의 부친인 화석(和石) 김수연(89)은 간재의 학맥을 받은 유학자다. 간재 다음의 양재(陽齋)-서암(瑞岩)을 거쳐 화석에 이르렀고, 청곡은 기호학파의 이러한 학맥을 계승했다.

구한말 이후 기호학파와 영남학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영남학파는 일급 학자들이 만주로 많이 갔다. 독립운동 한다고 집 팔고 논 팔아서 만주로 이주하는 통에 A급 학자들 집안의 피해가 컸다. 안동 임청각(臨淸閣)의 고성 이씨 집안 석주(石州) 이상룡만 하더라도 영남의 내로라하는 일급 집안의 종손이었다.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 하다가 집안이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기호학파는 만주에 별로 가지 않았다. 간재의 가르침이 총칼로 일본에 대항하기보다는 우선은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계화도라는 섬으로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다. 일본 사람 밑에서는 있기 싫으니까 외딴 서해의 섬으로 은둔한 것이다. 그 대신 제자를 양성하는 일에 주력했다.

해방이 되자 기호학파에는 이렇게 국내에 남아서 유교 경전을 공부한 제자들이 영남에 비해 많이 남았다. 1960∼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서울 성균관에는 기호학파와 간재 제자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그런데 기호학파의 유학자는 자식을 신식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신식학교에 자식을 보내면 일본사람이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총칼을 들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일본 사람이 세운 학교에서 자식 교육시키는 것은 거부하였다. 그러다 보니 해방 이후에 이 집안의 자제가 취직을 못했다. 일급 양반일수록 신학교를 안 보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중인 집안 자식은 학교에 갔다.

강증산 “해탈보다 권능을 달라!”


한때 영화를 누렸던 기호학파는 춥고 배고픈 상황으로 전락했지만 김제·만경 들판의 청곡이 하나 살아남아 그 학풍을 전수하고 있다.
새로운 시스템의 사회가 도래했지만, 신학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스템에 편입할 수가 없었다. 집에서 상투 틀고 도포 입고 앉아서 오직 ‘공자왈 맹자왈’ 하는 유교 경전만 공부하다가 죽었다. 집안 살림은 말이 아니었다.


기호학파의 본향 호서와 호남은 동학혁명 당시 일본군에 의해 살육당한 경험이 있다. 사진은 1996년 일본 홋카이도대가 한국에 반환한 동학군 장군 유골. ‘한국 동학당 수괴의 수급(머리)’이라는 일본어 붓글씨가 씌어 있다.
이걸 보고 자란 그 자식 세대는 ‘우리 아버지 같이 세상 물정 모르고 공자왈 맹자왈 하다가는 사회에서 낙오 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유교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아버지 돌아가시자 아버지가 보던 유교 한문책을 고물상에 내다 팔아버렸다. 이런 구닥다리 책 보다가 우리 집이 세상 적응 못하고 어렵게 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들어왔고, 교회 다니면 제사 안 지내도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이 대거 이루어졌다. 기독교는 영남학파 지역보다는 기호학파 지역에서 훨씬 왕성하다. 기호는 호남과 호서(湖西·충청)를 총칭한다.”

영남학파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많이 했다. 만주에 간 유학자의 대부분이 영남학맥이다. 기호학파는 뭐했는가? 만주에 별로 안 갔다. 그 대신에 제자 양성에 주력했다. 당시 영남학파의 대표급이었던 면우 곽종석은 파리장서(1919년 경상북도 김천 출신을 비롯한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보낸 서한)에 서명했다.

그러나 기호학파의 장문인(문파의 우두머리)이었던 간재가 파리장서에 서명 안하고 계화도에 들어가 산 것도 이러한 양상을 대변한다. 왜 기호학파는 투쟁에 소극적이었는가? 기질이 약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풍토가 그런 것인가? 내가 보기에 거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동학혁명이 그것이다.

동학은 경주사람 최제우가 창시했다. 동학의 씨앗과 사상은 영남학파에서 배양된 것 아닌가. 그런데 그 폭발은 서쪽에서 이루어졌다. 기호학파 지역에서 동학이 폭발한 셈이다. 영남에서 동학은 유림 사회에서 크게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영남 유림은 동학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호서와 호남의 정서는 그게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10만 명이 넘는 동학의 대병력은 일본군의 모젤 기관총에 모두 살육당했다. 이후 벌어진 일본군의 토벌대가 서쪽을 휩쓸고 지나갔다. 동학에 연루된 사람은 일본 토벌대에 모두 죽었다.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영남은 동학 때문에 시체가 산을 이루는 참상은 보지 못했다. 영남은 충청과 호남만큼 사람이 안 죽었다. 일본에 당한 쪽은 서쪽이었던 것이다. 강증산은 일본군의 월등한 무력에 죽어야만 했던 동학의 참상을 보고 모악산에 들어가 ‘나에게 권능을 달라’고 천지신명에게 기도했다.

번뇌에서 벗어나는 해탈이 아니라 권능(權能)을 달라고 기도했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물리적 파워를 얻기 위하여 강증산은 모악산에 들어갔다고 하는 대목은, 그 당시 조선의 민초가 일본군의 군사력에 얼마나 두려움을 가졌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간재를 비롯한 기호학파가 무력투쟁 대신에 실력양성이라는 우회전략을 택해야만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군의 군사력이 너무 강한 것을 눈으로 목격했던 것이다. 즉 호서와 호남은 동학혁명 때 일본 군사력과 직접 부딪쳐본 경험이 있었고, 영남은 직접 부딪치지는 않았다. 간접적인 피해만 당했다. 이러다 보니 일제강점기에 일본을 대하는 태도도 양쪽 학파가 달랐다고 보여진다.

영남이 무력 대결도 불사해야 한다는 강경 노선으로 흘러갔다면 호서와 호남은 직접 대결을 피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얼마나 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재의 고민이 여기에 있었다. 기호학파의 장문인으로서의 명분과 현실의 벽 사이에서 고뇌하던 간재는 결국 섬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죽을 수도 없었고, 일제 치하에서 본토 육지에서는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6·25의 타격도 영남학파보다는 기호학파가 훨씬 강하게 받았다. 낙동강 이남은 보존되었던 것 아닌가. 서쪽은 1·4후퇴 때 공주·부여까지 중공군이 또 내려왔다. 톱질을 두 번 당했다. 지주계급이었던 유학자 집안은 6·25 때 피해가 심했다. 사람도 죽고 집안에 전해지던 전적(典籍)도 불탔다. 영남은 보존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때부터 서쪽 기호학파가 정권을 잡고 300년을 누려오다가 5·16 이후부터 영남학파가 주도권을 잡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제 기호학파는 춥고 배고픈 상황으로 전락했지만, 김제·만경 들판의 청곡이 하나 살아남아서 그 학풍을 광야에서 전수하고 있는 것이다.

문지방 못 넘으면 책상물림에 불과

체(體)와 용(用)이 있고, 학(學)과 술(術)이 있고, 이론과 실천이 있다. 이거 다 같은 말이다. 용이 있고, 술이 있고, 실천이 있어야 힘이 붙는다. 그러자면 문지방을 넘어야 한다. 동양학은 한 경지를 넘어야 개안이 되고, 영발이 생기고, 파워가 붙는다. 책만 읽고 이 문지방을 못 넘으면 책상물림에 지나지 않는다.

불가에서는 파워가 없이 입만 살아 있는 승려를 가리켜 문자법사(文字法師)라고 부른다. ‘따따부따’ 법사다. 한의학도 그렇고, 사주팔자도 그렇고, 풍수도 그렇다. 이론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문지방’이라고 하는 정신적인 경계를 돌파하려면 신비체험 내지는 종교체험이 있어야 한다. 청곡도 이 신비체험을 했다.

십대 중반부터 그는 전국을 걸어 다니면서 여행했다. 밥도 얻어먹어 보기도 하고 잠도 헛간에서 자보기도 했다. 그러던 도중에 지리산 불일암 터에서 오도(悟道) 체험을 한다. 쌍계사 뒤로 1시간 정도 올라가면 불일암이 있다. 그 밑에는 불일평전(佛日平田)도 있고, 위로는 불일폭포(佛日瀑布)가 있다. 불일암 앞에는 청학봉과 백학봉이 좌우로 둘러싸고 있다.

두 마리의 학이 감싸고 있는 터가 불일암이다. ‘남비청학쌍계사(南飛靑鶴雙溪寺) 북래백학실상사(北來白鶴實相寺)’라고 옛 선인들은 읊었다. 지리산을 두 마리의 학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 두 마리의 학이 모두 불일암 앞에 있으니, 불일암은 옛날부터 회자되던 청학동일 가능성이 높다.

청곡은 20대에 이 불일암 터에서 천막을 쳐놓고 사서삼경을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당시에는 화재로 암자가 소실되어 빈터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비몽사몽간에 수만 명의 귀신이 청곡을 에워싸면서 공격하는 장면이 나타났다. 마침 옆에는 청룡도가 있었다. 청곡은 청룡도를 빼어 들고 그 수많은 귀신의 목을 날렸다.

마지막 남은 귀신이 11∼12세의 어린 동자승 귀신이었다. 칼을 빼어 드니 이 동자승은 책상 밑으로 숨으면서 “제발 살려주세요. 나중에 은혜를 보답할게요”라면서 싹싹 비는 것 아닌가. 살려주었다. 이 체험을 한 후로 산을 내려오니 산천의 정기가 어디에 뭉쳐 있는가가 눈에 보였다. 산에서 나오는 지기(地氣)가 색깔별로 눈에 보였던 것이다. 문지방을 넘고 풍수에 개안(開眼)이 된 셈이다.

지장인을 받고 ‘신통’한 청곡


청곡은 ‘수(水)’의 시대에 진입한 오늘, 물처럼 아래로 내려와 사람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이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계룡산에 가니 전설적으로 전해지던 북진낙지(北辰落地)가 어디 있는지 보였고, 충남 비인에 가니까 풍수 결록(訣錄)에 나오는 부내복종(府內伏鐘)이 보였다. 군산시 임피에서는 ‘개가 엎드려 있다는’ 복구혈(伏拘穴), 진주 덕천강에 가니 오기조원(五氣朝元), 지리산에서는 ‘상서로운 구름에 해가 솟아나는 형국’인 상운봉일(祥雲奉日)이 보였다고 한다. 영안(靈眼), 법안(法眼) 또는 심안(心眼), 도안(道眼)이라고도 하는데 이런 안목이 열려야 풍수를 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금곡 선생도 이런 신비 체험이 있었다. 30대 중반에 공부를 하다가 이유 없이 몸져눕게 되었다. 온갖 약을 써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집에 누워있는데 하루는 손님으로 온 어떤 도인이 맥주를 한 컵 먹어보라고 권했다. 맥주 두 컵을 먹으니까 거짓말처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후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내장이 투시가 되고,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을 먹고 있으며, 그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가 보였다고 한다. 신호등을 건너다가도 걸어오는 사람의 오장육부 중에 어디가 잘못되었는가가 눈에 보였다. 죽었다가 한 번 살아나면서 이런 영안이 생긴 것이다.

청곡은 동자승 귀신을 살려주고 집에 돌아오고 난 석 달쯤 후에 특이한 꿈을 꾸게 된다. 꿈에 그 동자승이 나타난 것이다. 동자승이 청곡을 어딘가로 데리고 갔다. 대궐같이 큰 기와집이었다. 커다란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또 다른 대문이 나타났다. 대문을 여러 개 열고 들어가니까 마지막에는 왕관처럼 생긴 관을 쓴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 모습이 불교의 지장보살 같은 모습이었다. 관을 쓴 지장보살이 나타났다는 게 신기했다. 그 지장보살은 청곡에게 도장으로 찍은 네모진 종이를 하나 건네주었다. ‘지장인(地藏印)’이었다. ‘이걸 가지고 가서 세상에 나가 좋은 일을 많이 하라’는 당부가 있었다.

이 지장인을 받는 꿈을 꾼 이후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내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상대가 어떤 병인지 대강 알 수 있는 능력이었다. 왜 유학자에게 불교의 지장보살인가? 청곡이 사는 만경의 학성강당 터는 진표율사(眞表律師)가 태어난 생가 집터라고 전해진다. 흑룡음수(黑龍飮水) 터이다. 멀리 모악산에서 내려온 맥이 두악산에서 한번 응결하였고, 이 맥이 평야 지대로 내려와 흑룡이 물을 마시는 형국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흑룡 터는 북향으로 좌향이 나온다. 흑룡은 북방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수(水)의 시대에는 융합과 화합이 중요

<삼국유사>에 보면 진표율사는 지장보살의 계시를 받는 것으로 나온다. 변산의 낭떠러지 절벽에 붙어 있는 불사의방(不思義房)에서 기도를 하다가 지장보살로부터 불골간자(佛骨簡子)를 받는 대목이다. 진표율사는 지장신앙과 관련이 깊다. 꿈에 나타난 지장보살이 혹시 진표율사가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환경운동가인 이미경 국장도 몇 년 전에 몸이 안 좋았는데, 청곡의 조언대로 해서 몸이 좋아졌다고 들었다. 위장에 쌓여 있던 담적(膽積)을 풀어내니 장(腸)에 축적되어 있던 숙변이 빠졌던 것이다.

청곡이 주장하는 건강법이 있다. 우선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야만 천기와 지기를 받는다. 우주의 리듬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리듬이다. 그리고 나서는 소리를 내어 경전을 독송한다. 소리를 내어 경전을 외워야만 효과가 있다. 소리 안내면 효과가 적다고 본다. 그리고 목침(木枕)을 사용한다. 목을 자극해야만 목 뒤가 풀리며 머리가 개운해진다. 위로 올라간 상기증을 내리는 데에 단단한 목침이 효과적이다. 앉을 때에도 무릎을 꿇고 앉는다. 이것도 역시 기운을 아래로 내리는 데 효과가 있다.

천·지·인 삼재를 회통하는 원리를 무엇으로 보는가?

“주렴계의 ‘태극도설’(太極圖說)로 생각한다. 태극에서 음양이 나오고, 음양에서 오행이 나왔다. 이 원리가 시간, 공간, 사람에게 모두 통하는 원리라고 본다. 그래서 새벽 4시에 일어나면 태극도설을 소리 내어 암송한다. 30년째 태극도설을 새벽에 암송하고 있다. 풍수의 핵심원리도 음양오행이고, 사람의 병과 치료도 음양오행이다.”

음양오행을 병의 치료에 이용하는 방법은 어떻게 되는가?

“예를 들어 위장에 병이 났다. 위장은 토(土)에 해당한다. 토를 이기는 것은 목(木)이다. 목은 간(肝)이다. 간을 극하는 것은 금(金)이다. 금은 폐장이다. 따라서 폐장인 금을 보호해주는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위장이 좋아진다. 이것을 삼변원리(三變原理)라고 이름 붙였다. 일종의 쓰리쿠션 원리인 셈이다. 심장이 안 좋다. 그러면 위장을 보강하는 약재나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 심장은 화이고, 화를 극하는 것은 수(水)인데 신장(腎臟)에 해당한다. 수를 극하는 것은 토이다. 토는 위장이다. 그래서 위장을 보강한다.”

유가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 목표가 아닌가? 먼저 수신을 하고 그 다음에는 세상에 나가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이다. 특히 치인(治人)이라는 점이 불가나 도가와 다른 점이다. 풍수와 치병도 물론 사람을 도와주는 일이기는 하다. 구한말에 모악산파(母岳山派)였던 강증산이 내걸었던 목표가 광제창생(廣濟蒼生) 아니었던가? 보다 적극적으로 ‘치국평천하’에 참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은 수(水)의 시대에 진입해 있다. 수의 시대에는 융합과 화합이 중요한 가치다. 물처럼 아래로 내려와 사람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이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군림이 아니다. 수의 시대에 맞는 참여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어 고향 산천을 지키며 제자들을 가르쳤고, 모악산 이래로 내려온 도학의 맥을 이어받아 문지방을 넘어선 50대 초반의 청곡이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 기대된다.

201409호 (2014.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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