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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인터뷰 | ‘증권가의 미래학자’ 홍성국(KDB대우증권 사장)의 위기진단 - “‘위험감수 정신’ 없이 디플레이션 사회 극복 불가능” 

어떤 경제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나라’ 일본의 장기불황… 한국도 고령화 시대에 동반하는 ‘전면적 디플레이션’에 대비해야 

한기홍 월간중앙 기자 사진 전민규 기자

▎홍성국 KDB대우증권 사장은 “소재·철강·기계·조선· 자동차·IT 등 한국의 주력 산업이 세계에서 가장 공급과잉이 심한 분야에 속해 있다”고 분석했다.
홍성국(53) 대우증권 사장이 작년 12월 취임했을 때 증권업계에는 작지 않은 파장이 일었다. 홍 사장처럼 리서치 센터 정통 애널리스트로 사장 자리까지 오른 경우는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 기자들과 친분이 많았고, 그들과 경제 이슈를 놓고 진지한 토론을 자주 즐긴 증권계의 ‘언론통’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를 아는 기자들은 그의 사장 선임 소식을 접하고 ‘적절하고도 의미 있는 선택’이란 반응을 보였다. 로열티가 매우 강한 정통 대우맨 출신이라는 점 외에도, 그가 평소 증권업계의 미래에 대하여 매우 확고한 비전과 전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기자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 고려고와 서강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그는 1986년 대우증권에 사원으로 입사했다. 지점생활 1년 남짓, 법인영업부 근무 4년, 그리고 군복무 기간을 빼면 20여년 이상 투자분석부 등 리서치센터 애널리스트로 일했다. 본인은 ‘영업 10년, 리서치 20년’이란 말로 회사생활을 요약하고 있다. 대우증권 안팎에선 홍 부사장이 리서치센터를 이끌며 대우증권 리서치의 수준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는 평가를 내린다.

홍 사장은 취임 직후부터 대대적인 조직개편과 인사에 손을 댔다. 리테일(소매금융) 재강화를 골자로 한 중장기 전략도 내놨다. 발 빠른 행보였다. 승진, 조직개편, 성과평가 등 6~7개월 걸리는 업무를 단칼에 해치웠으니 말이다. “그중 가장 쉬웠던 게 인사였다”는 것이 그의 소회다. 학연, 지연 이런 것 따지지 않으니 고민할 것이 없었다고도 했다.

홍 사장은 조직 안정에 주력하면서도 대우증권의 장기 10년을 내다 본 전략을 두 달 만에 만들어냈다. 앞서 언급한대로 ‘독보적 PB하우스’를 통한 침체된 리테일(Retail) 재건이 골자다. 인력과 비용은 회사 전체의 60~70%가 투여되는데 비해 상대적으로 성과물은 적었던 리테일을 이대로 둬선 안 된다는 판단이 우선됐다. 성과가 나고 있는 세일즈&트레이딩(S&T), 투자금융(IB), 해외부문에 대해선 신규 비즈니스 창출에 힘을 더 쏟겠다는 입장이다.

최대 주주인 산업은행이 대우증권의 매각에 나선 것에 대한 그의 입장은 담담하다. 매각의 성패가 능력을 평가하는 시금석이 되리라는 일부 전망에 대해서도 그는 손을 내젓는다. “당치 않게 무슨 시금석은….” 대우증권 또는 CEO의 입장에선 매각과 관련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다만 매각 이후의 복안은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다. 10년 이후를 내다보는 경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증권업계의 미래학자’


▎지난 2월 21일 그리스 부채협상 타결 후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 이름이 쓰인 아테네 시내의 한 담벼락 앞에서 거리의 악사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다.
매각을 앞두고 일부 불안감을 갖는 직원들에 대해서도 “비인간적인 구조조정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매각 여부는 대주주인 산업은행이 판단할 문제”라며 “다만 이를 대비한 전략이 독보적 PB하우스 구축이자, 열정과 로열티를 높이는 기업문화”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기업가치가 올라가면 주변 여건에 휘둘리지 않는 경영이 가능해질 것이란 논리다.

홍 사장은 ‘증권업계의 철학자, 또는 미래학자’라는 별호를 얻은 학구파다. 시장분석과 법인영업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센터장의 바쁜 일과 중에도 지속적으로 집필활동에 매진했다. 중구난방의 소재에 손댄 것이 아니라 일관된 주제와 문제의식으로 세계경제를 천착한 ‘노작(勞作)’들을 생산했다. 최근 10년여 기간 동안 그는 <디플레이션 속으로> <글로벌 위기 이후> <미래설계의 정석> 등의 경제서적을 2~3년마다 한 권씩 내놨다. 발군의 글 솜씨로 창조적인 통찰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 저작물이다. 한 해 보통 200권에 달하는 그의 엄청난 독서량이 빚은 결과물이다. 작년 가을엔 <세계가 일본된다>라는 신간을 통해 ‘전환형 복합불황’이란 신조어를 만들었다. 세계경제의 음울한 디플레이션 전망을 일본의 사례를 들어 하나의 패턴으로 정리한 책이다.

<세계가 일본된다>는 거대한 담론이다. 세계의 경제 흐름을 정치·사회·문화 측면의 ‘대격변’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상 유례없는 인구의 감소, 이에 따른 고령화의 시대에 동반하는 디플레이션 시대로의 진입을 음울한 톤으로 전망하고 있다. 저성장, 저소비, 저저축, 저투자의 시대다. 일본에서 지난 수십 년간 진행된 끝 모를 불황과 급격한 사회변동이 빠른 시일 내에 모든 국가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한국도 거의 같은 궤적으로 일본의 전철을 밟게 되는 것 아닌가. 그는 이런 질문을 던지며 경제 주체 모두에게 주목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 우리는 성장과 팽창의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앞으로는 지구 전체가 성장의 한계에 부딪히며 제로섬 사회 혹은 마이너스섬 사회로 전환될 것이다. 현재 겪고 있는 낯선 풍경은 이제 일상화될 것이다. 그렇다면 빨리 우물에서 나올 궁리를 해야 한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물이 바다로 흘러든다는 물의 순환 원리를 모른다. 지구상에 처음으로 출현한 1억8천만 년 전 쥐라기 시대 이후 개구리는 똑같은 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바닷물의 농도와 물의 순환 과정에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홍 사장에게 이 같은 변화의 거대한 추이와 롤모델에서 반면교사로 추락한 일본의 상황, 그리고 우리 경제 주체의 올바른 대응법을 물었다.

일본을 ‘이상한 나라’로 정의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25년째 답보하고 있다. 인구도 줄고 국가의 세출 규모도 줄어든다. 평화 시에 인구가 매년 100만 명 이상 줄어든다는 건 미증유의 사태다. 인류 역사상 평화 시에 이런 경우는 없었다. 30년 후에는 4200만 명의 인구가 줄어들어 1억 3천 명에 육박하던 인구가 8천 5백만 명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모든 경제 지표 앞에 ‘저(低)’자가 붙는다. 저성장, 저소비, 저금리, 저투자, 저대출이다. 가임기의 여자가 단 한 명도 없는 군이 생겼을 정도다. 이게 국가인가? 경제지표로만 보면 일본은 정상 국가가 아니다. 어떤 경제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 해법도 찾기 어렵다. 정말 이상한 나라가 되었다.”

소비를 안 한다는 건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저대출이란 건 뭔가. 빌린 돈을 갚기만 한다는 것인가?

“돈을 빌릴 때 금리가 낮거나 아예 이자가 없다면 누구나 자금을 대출받아 투자에 나선다. 그래서 일본의 25년간 경제정책의 핵심은 금리를 내리고 돈을 푸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가계나 기업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금리가 25년 동안 지속돼도 돈을 빌려가지 않았다. 오히려 빌린 자금을 갚는 데만 열중했다. 결국 일본 사회는 투자를 해봤자 수익을 얻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1%의 금리에도 기존 부채를 갚기만 하고 있다. 경기 진작을 위한 정부의 금리인하 정책이 먹히지 않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상한 나라다.”

“중국도 공급과잉 위기 온다”


▎닛케이 지수 전광판이 걸려 있는 일본 도쿄의 한 증권사 앞을 지나가는 시민. 우울한 일본 경제 전망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하다.
일본의 경제상황에 ‘전환형 복합불황’이란 개념을 붙였다. 어떤 뜻인가?

“전환형 복합불황은 일본이 겪은 25년간의 장기 불황과 급속한 사회 변동이 초래한 미래의 세계를 지칭하는 용어다. 지금까지 ‘전환(transition)’은 긍정적인 뜻으로 많이 썼다. 이제부터는 반대다. ‘전환’의 의미는 성장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 ‘복합’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가 포함된다는 뜻이다. ‘불황’은 이 어두운 전조의 출발에서 나타나는 심한 경기침체를 암시하고 있다. 연결해서 표현하면 ‘과거와의 단절을 기반으로 사회 모든 분야가 매우 어려워진다’라는 의미로 만든 말이다.”

증권사 사장이 ‘성장시대의 종말’이란 상황을 강조하는 것은 직업정신과 배치되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지 않다. 해법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에서 나온다. 많은 나라가 일본형 불황을 따라가고 있는데 그걸 모르거나, 애써 외면한다. 대책은 나중 문제고 현실 파악이 우선이다. 대체 일본이 어떤 상황인가? 일본으로 가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회피하고 모면하려고 해선 안 된다. 증권사 사장은 더욱 그래선 안 된다.”

‘세계가 일본 된다’는 가정은 좀 비약이 아닌가 하는 비판도 있겠다.

“비약일 수도 있지만 그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정확하게 일본의 궤적을 따라간다는 말은 아니다. 큰 틀에서 보면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경제가 반짝 살아나는 미국이나 미래의 패권국 중국도 마찬가지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일단 유럽이 일본을 닮아간다. 특히 남유럽이 심각하다. 2009년 하반기 그리스를 시작으로 2011년 상반기에는 남유럽 대부분의 국가가 재정위기에 빠졌다. 이른바 PIIGS 국가(포르투갈·이탈리아·아일랜드·그리스·스페인)의 출현이다. PIIGS 국가의 경제상황은 엄청난 자금 방출에도 불구하고 1997년경의 일본의 처지를 되풀이하고 있다. 주가 하락에 이어 LTV 비율(주택담보대출 비율)이 80%가 넘는 부채투성이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다. 유럽의 전반적인 모습이 일본과 비슷하다. 예컨대 65세 이상 고령화 비율이 20%를 다 넘기고 있다. 그렇다고 노후 준비가 잘돼 있는 것도 아니다. 현재 경제가 살아나고 있는 미국도 장기적인 전망은 역시 일본의 전철이다. 우선 고령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 1946년에서 1964년 사이에 태어난 미국의 7700만 명의 베이비붐 세대가 2011년부터 연금과 의료 보조금을 받기 시작하면서 재정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중국은 어떤가?

“짧게 보면 향후 중국의 문제는 지나친 투자에 따른 공급과잉이다. 거의 모든 산업에서 공급과잉이 나타난다. 공급과잉이 심해지면서 ‘도시화’라는 카드를 내놨지만 시장의 반응은 곧 싸늘해졌다. 그동안 중국은 경제성장률이 대출 증가율보다 항상 높았다. 그러나 지금은 대출증가율이 경제성장률보다 높다. 자금의 배분과 경제활력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뜻이다. 다행인 것은 중국 중앙정부의 재정은 아직 튼튼하다는 것이다. 당분간은 지방정부의 부채를 줄이면서 중앙정부가 투자를 늘리는 형태로 구조조정이 진행될 전망이다. 그러나 2020년대 중반 이후 인구가 감소하고 고령화사회가 진전된다면 중국도 결국 전환형 복합불황에 빠져들 것이다.”

“문제는 미래형, 대책은 과거형”


▎홍성국 사장은 매년 200권에 달하는 다양한 방면의 독서를 통해 세계 경제의 현상과 해법을 정치, 사회, 역사문화적 차원에서 검토·제시하고 있다.
인류가 어떻게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됐을까? 왜 일본화가 진행되는 건가? 전환형 복합불황이 전 국면에서 발현되고 있는 만큼 그 원인과 배경도 다양할 듯하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21세기 인류의 모습이다. 딱히 일본이 잘못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제일 먼저 발생했지만 원인과 배경은 인류가 공통으로 안고 있다. 먼저 인구 감소, 환경오염, 공급 과잉 등의 요인을 들 수 있다. 부채 사회가 진전되면서 사회 양극화가 진행되고 국제적으로는 글로벌 불균형이 야기된다. 여기에 이런 현상을 극복할 기술적 혁신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 또한 문제다. 이기적이고 나약한 방향으로의 인간성의 변화, 리더십의 위기 등을 꼽을 수 있다. 하나 같이 일본의 문제만이 아닌 세계 공통의 문제다.”

이중에서 ‘공급과잉’이 눈에 띈다. 디플레이션의 직접적 원인 아닌가? 한국경제에서 공급과잉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나?

“한국의 주력 산업이 세계에서 가장 공급과잉이 심한 분야라는 걸 직시해야 한다. 소재, 철강, 기계, 조선, 자동차, IT 등이다. 옛날에 10년 가던 기술이 이젠 6개월밖에 못 간다. 그 다음엔 뭘 할 거냐는 문제에 직면한다. 모든 게 공급과잉이다. 창업하라고 하는데 마땅히 할 것도 없다. 눈에 보이는 게 다 공급과잉이니까. 식당, 빵집, 커피전문점 다 공급과잉이다. 심지어 언론사마저도 공급과잉 아닌가? 우리 세대가 젊었을 때 택시잡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는데 지금은 거리에 온통 빈 택시다. 빌딩도 계속 늘어나지만 새로운 입주수요가 창출되기 때문은 아니다. 그냥 빌딩을 옮겨다니는 것에 불과하다. 인구 감소가 공급과잉이란 두려운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 지구의 모든 시스템은 인구가 늘어나는 걸 전제로 하고 있는데, 그 시스템이 무너지니까 모든 분야에 그 파장이 미치게 된다. 이런 상황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대처해야 한다.”

‘공급과잉’, 물자가 풍요로워진다는 것인데 이것이 또 인류에게 재앙이 될 수 있다니 아이러니다. 21세기에 공급과잉이 빚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생산성의 발전이다. 그 토대는 과학기술이다.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말도 공급과잉에 일조했다. 사회주의 경제 시절 얼어 붙었던 동유럽과 중국이 새로운 생산기지로 등장한 것이다. 그 두 개의 지역은 아프리카나 남미 등지에 비해 교육수준이 높고 자원도 풍부하다. 역사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공황과 전쟁이 거의 없었다는 데에 기인한다. 전쟁을 통한 생산력의 파괴는 이제 불가능하다. 중국과 아세안 지역의 생산력 증대를 향한 엄청난 욕망도 상승 작용했다. 개별적으로는 나무랄 수 없는 역사적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좋은 동기가 좋은 결과를 잉태하지 않는다. 아이러니라고 볼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과도한 애정이 자식을 비만으로 만드는 것에 비교할 수 있을까?”

글로벌 불균형, 인간성의 변화, 리더십의 위기 등도 장기불황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흥미롭다.

“미국이 제조업에 투자를 많이 해서 수출·수입 간 무역 균형을 이루게 되면 아시아권 국가에는 큰 위기가 닥칠 것이다. 미국의 무역 불균형이란 틈새 안에서 일종의 평형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다. 패권국가와의 경쟁에서 장기적으로 눈여겨봐야 할 중요한 측면이다. 소크라테스나 공맹의 시대에도 청년들은 늘 한심했다고 하지만 우리 시대 청년들의 위기 극복 능력에는 좋은 평점을 주기 어렵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마마보이인 데다 자폐적인 유희에 탐닉하는 경향이 있다. 어른들의 기우라고만 보기 어렵다. 우리 리더십의 문제는 지나치게 낙관적이거나, 큰 틀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정부 대책이 ‘과거형’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미래의 변화에서 오는 문제를 과거의 해법으로는 풀 수 없다.”

“아베노믹스는 마약의 주입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정부의 경제 리더십을 평가한다면?

“최경환 부총리는 작년 한 세미나에서 한국의 현재 경제 상황을 설명하면서 ‘잃어버린 20년의 5년차쯤에 와 있다’고 주장했다. 최 부총리가 한국의 정치인과 경제관료 등 리더 그룹 중 가장 먼저 한국의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언급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최 부총리의 언급에서 한국에서도 일정 부분 전환형 복합불황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뉘앙스를 느꼈다. 그러나 총체적인 해법은 경제적 처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미 말한 대로 원인은 매우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 시스템과 구성원의 사고방식을 혁신할 수단과 방법이 꾸준하게 모색되어야 한다.”

경제의 양적 부양을 기조로 하는 한·일 양국의 정책, 아베노믹스와 초이노믹스를 비교한다면?

“일단 사이즈 측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2013년과 2014년 아베노믹스로 푼 돈은 무려 120조 엔이다. 일본의 GDP가 500조 엔이니까 24%에 달하는 규모다. 초이노믹스가 푼 돈은 40조원으로 GDP의 3% 수준에 불과하다. 같은 경제 규모로 상정했을 때 아베가 우리보다 8배의 돈을 더 푼 것이다. 맥락에서는 유사한 정책이지만 사이즈에서는 비교가 안 된다.”

아베노믹스의 성과는 어떻게 나타날까?

“일본 경제는 현재 아베 총리가 주는 마약을 맞고 있는 단계로 볼 수 있다. 일본의 재정적자는 GDP 대비 250%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유럽에서 문제아 취급받는 그리스가 180% 정도다. 그리스보다 재정 상태가 나쁜 상태에서 환율을 조정했다. 수출업체는 좋지만 중소기업이 다수인 수입업체는 죽는 거다. 일본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중소기업이 훨씬 많은 고용을 한다.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이다. 환율 조정은 중소기업의 돈을 대기업으로 이전하는 효과를 불렀다. 더 중요한 것은 아베노믹스가 나온 시점이 재산이 가장 많은 단카이 세대(1946년생에서 49년생 사이)가 은퇴하는 시기와 맞물려 반짝하는 효과를 빚은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시간이 지나면 소비를 줄이는 은퇴노인의 심리에 굴복할 것이다. 아베노믹스의 모순은 소비 늘리고 금리가 올라가면 엄청난 재정 부담이 생긴다는 것이다. 금리가 1%만 올라도 정부가 지금보다 두 배 이상의 이자 부담을 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출이 계속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건 보통 심각한 딜레마가 아니다.”

1980년대까지 일본은 세계 경제사에서 유례 없는 대단한 성과를 거뒀다. 우리의 롤모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 일본이 지금 우리의 반면교사로 전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은 자신의 성공에 도취했다. 성공의 관성에 집착했던 것이다. 자신들이 성공시켰던 사회와 미래의 사회를 동일시했다. 리더그룹은 일본의 산업이 성장시대에나 적합한 아날로그형 산업에만 집중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고가 지속됐다. 그때부터 위기를 맞은 자동차, 조선, 화학, 정유, 철강 등 수출 주력 사업은 1990년대 초반에 이미 경쟁력을 상실했다. 정부의 내수부양으로 건설업 등은 불황이 다소 지연되었을 뿐, 전체 경제보다 주요 산업 부문이 먼저 쓰러지고 있었다. 전반적인 구조조정 과정이 한국과 너무도 흡사하다. 그래서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이다.”

미국 경제는 2008년 금융위기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지 않나?

“미국의 상황 역시 특정 정책의 성공으로 보면 안 된다. 미국인이 아시아권 사람들과 다른 유목민적 특성에서 찾아보는 것도 유익한 접근법이다. 유목민은 아니라고 판단되면 다 버리고 떠난다. 2008년 금융위기는 분명 ‘미국 발’이었는데 왜 당사자인 미국은 살아났을까? 2008년 이전 미국인의 평균 저축률은 2∼3%에 불과했다. 위기가 오니까 저축률이 두 배로 늘었다. 문제의 본질이 부채에 있다는 걸 금방 깨달은 것이다. 부동산 업자도 연간 적정 주택 신축규모 170호를 40만호로 줄여버렸다. 잘못된 관행은 금방금방 고치는 게 미국 시스템의 특징이다. 2008년 직후 한 달에 20개씩의 지방은행이 부도를 맞고 사라졌다. 정부가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 아베 이전 일본 정부의 찔끔거리는 정책과 달리 미국의 정책은 아주 과감하다. 패권국의 기축통화 메리트, 미국의 과학기술도 지금의 경제 회생에 큰 역할을 했다. 지금 경제는 양적 성장의 시대가 아니다. 빅 데이터, 드론, 바이오, 로봇, 우주 등 신성장 동력의 과학기술을 모두 미국이 선도하고 있다. 미국 특유의 유목민문화와 결합해서 일정한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미국도 장기적으로는 전환형 복합불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 상황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전환형 복합불황을 국가·기업·개인 차원에서 각각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그건 나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해법이 총체적인 진단과 모색, 그리고 실천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답형 문제가 아니라 근원적인 성찰과 단호한 실천이 따라야 풀리는 문제다. 미시적인 것으로만 봐선 안 된다. 인구가 처음으로 줄어든다는 게 얼마나 큰 사건인가? 특별한 종이 개체 수를 줄인다는 것은 서식환경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하나의 팁은 있다. 30년 후를 상정해서 정책을 입안하고 투자하라는 것이다. 예컨대 핀란드의 정부 부처 미래부가 하는 일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저금리 시대라 투자할 곳이 없다. 위험 자산 비중을 높이고 전문가 도움을 받아 해외투자에 도전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노 리스크 로 리턴’의 일본식 패턴으로는 정부도 기업도 개인도 해법이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리스크를 짊어질 용기와 배짱이다. 이런 태도가 전환형 복합불황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글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 사진 전민규 기자

201504호 (201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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