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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日常반추’] 우울한 날에는 공항으로 가보라 

공항은 습관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는 비습관의 장소 … 다채로운 여흥과 볼거리가 무의미한 삶을 일깨우기도 

장석주 전업작가
우리의 삶은 온갖 기다림으로 채워져 있다. 기다림은 대체로 지루하다. 하지만 그 지루함은 평소 그냥 지나치던 삶을, 그리고 습관으로 조직된 일상을 새로운 눈으로 성찰하도록 이끈다. 공항은 기다림을 상습화하는 곳이지만, 고갈된 삶에 열정과 의지라는 불꽃을 일으킨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때 공항으로 가자!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 있는 공항은 비상한 활력과 흥미진진한 볼거리가 펼쳐지는 곳이다
공항은 비행기와 더불어 생겨났을 것이니, 분명 현대적 산물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비행기를 통한 여행에 나서면서 공항은 보다 친숙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작가이자 철학자인 알랭 드 보통은 어느 날 한 회사에서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전화를 건 사람은 알랭에게 “런던에서 가장 큰 공항의 두 활주로 사이에 자리 잡은 최신 탑승객 허브인 제5 터미널에 주재 작가 한 명을 일주일 동안 초대하기로 결정했다”라고 통지한다. 그는 공항에 한 주간 상주하며 여행, 일, 여행객의 상호관계 등에 대해 근접거리에서 관찰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영국의 히드로 공항은 다른 국제공항과 마찬가지로 유리와 강철 구조물로 이뤄지고, 높이 40m, 길이 400m나 되는 어마어마하게 큰 구조물이다. 그 크기가 축구장 네 개가 들어갈 만한 규모라면 짐작할 수 있겠는가? 알랭 드 보통은 공항 터미널에 대해 “우아함과 논리가 지배하는 훌륭하고 흥미로운 피난처”(<공항에서 일주일을>, 16쪽)라고 쓴다. 혼돈과 불규칙성이 가득한 세계에서 터미널은 어떻게 그토록 매혹적인 피난처가 될 수 있었을까? 자, 알랭드 보통을 따라 현대적 삶이 펼쳐지는 공항 안으로 들어가보자.

공항은 일상에서 가장 먼 가장자리에 있다. 공항이 일상에서 가장 먼 가장자리인 것은 평생 동안 공항을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채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입증한다. 세계의 오지에 사는 많은 사람은 아직도 비행기를 단 한 번도 타보지 못한 채 생을 끝낸다. 지난 세기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항공여행에 나서고 공항을 제 집 문턱을 넘듯이 드나들지만 공항 너머는 비일상의 영역이다. 공항은 일정한 습관들에 의해 지배되는 일상과 예기치 않은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비일상의 경계에 있다. 공항은 국경을 넘는 문턱이고, 이곳과 저곳을, 이 나라에서 저 나라를 가르는 경계이자 사이의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날마다 새로운 여흥과 볼거리가 펼쳐진다.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 ‘공항’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을 취재한 뒤 <공항에서 일주일을>을 펴낸 알랭 드 보통.
공항에 처음 발을 내디딘 순간, 사람들은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서 잠시 어리둥절해 한다. 이곳에서는 습관의 질서가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당혹감을 느끼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일상이란 일정한 습관들의 반복이다. 아침에 일어나 침구를 개키고, 청소하고, 아침식사 준비를 한다. 식사 뒤에는 설거지를 하고, 밀린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는다. 그 뒤 마트에 나가 반찬거리를 사고, 은행에 들러 공과금을 낸다. 일상에서 물건 정리나 청소, 식사 준비는 날마다 반복되는 습관이다. 사람들은 일상을 지배하는 습관의 효율성을 거의 잊은 채 살아간다. 습관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하찮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습관은 하찮고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습관은 사람들이 대수롭게 여기지만 나름대로 중요한 일들을 수행한다. 선택이 수행하는 기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시간을 순서대로 배열하고 통합함으로써 생활 리듬과 양식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무수한 기로에서 갈팡질팡하지않도록, 반복되는 상황에서 다양한 대안을 떠올리느라 골머리를 썩지 않도록 돕는다.”(빌리 엔·오르바르뢰프그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 일어나는 흥미로운 일들>, 147쪽)

습관은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둔다. 즉 헛된 시간의 소모를 막아주는 경제적으로 매우 효율적인 장치다. 그러나 공항은 습관의 중력이 미치지 못하는 장소다. 우리가 공항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낯선 열기에 휘말리고 무중력 지대로 진입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공항이 습관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는 비습관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한 세기 전 샤를 보들레르는 “열차야, 나를 너와 함께 데려가 다오! 배야, 나를 여기서 몰래 빼내어다오! 나를 멀리, 멀리 데려가다오. 이곳의 진흙은 우리 눈물로 만들어졌구나!”라고 썼다. 21세기 시인이라면 열차나 배 대신에 어디 먼 곳, 여기가 아닌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비행기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공항의 출발과 도착 라운지는 나라 밖으로 떠나는 자들과 나라 밖에서 돌아오는 자들로 북적인다. 여행객들은 여행의 열기에 사로잡혀 불안과 설렘을 동시에 느끼며 출발 라운지에서 서성인다.

미디어 스크린들은 여러 항공사의 비행기 출발과 도착, 지명과 시각 정보를 시시각각으로 알려준다. 이 정보들은 미디어 스크린에 점멸하며 빠르게 바뀐다. 파리·런던·로마·베를린·프랑크푸르트·모스크바·이스탄불·아테네·뉴욕·샌프란시스코·텔아비브·상트페테르부르크·마이애미·아부다비·홍콩·베이징·상하이·도쿄·서울 등등. 출발과 도착 지명들이 떠오르고, 출발과 도착 시각이 표기된다. 목적지에 대한 더 이상의 세부 정보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도시명과 도착과 출발 시각 정보만을 알려준다.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는 매표구에서 티켓을 끊고 비행기를 탄다면 몇 시간 뒤 지금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도착할 수 있다. 공항은 실현되지 않은 여행의 가능성을 향해 활짝 열려 있고, 우리를 먼 곳으로 데려가주겠다고 약속한다. 공항에서는 누구나 쉽게 “순간마다 우리가 매달리는 다른 삶에 대한 이 모든 약속이 불러일으키는 막연한 노스탤지어에 빠져들게 한다”고 말한다.(알랭 드 보통, 앞의 책, 49쪽)

공항의 출발 라운지는 어딘가로 떠나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들은 어딘가 들뜬 기색을 보여준다. 그들이 여행의 열기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출발 라운지의 거대한 공간은 현대 세계 운송의 중심답게 신중하게 사람들을 관찰할 기회, 타자의 바다에서 자신을 잊을 기회, 눈과 귀가 제공하는 무한한 이야기의 단편들을 바탕으로 상상을 펼칠 기회를 예고”(알랭 드 보통, 앞의 책, 45쪽)한다. 여행의 열기는 “동작과 감정과 물성이 결합한 형태”(빌리 엔·오르바르 뢰프그렌, 앞의 책, 110쪽)로 나타난다. 여행의 열기에 들린 자들은 가만히 있지 못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주변을 서성이거나 짐을 풀어 살펴보고 내내 안절부절못하는 행태를 드러내는데, 그것은 여행이 초래하는 불안과 과도한 긴장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항은 검색의 심연


▎공항은 현대의 온갖 테크놀로지를 통해 보안이 확보되는 장소다. 2012 런던올림픽 당시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무장한 보안요원들이 검색을 강화하고 있다
공항은 결코 안락한 장소가 아니다. 대개의 공항은 강철과 콘크리트, 그리고 강화유리들로 된 거대한 구조물이다. 공항은 현대의 온갖 테크놀로지가 집약되고, 전자 장비들이 동원되어 보안이 확보되는 장소다. 모든 공항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통제와 감시가 이루어진다. 공항은 항시적으로 위험이 내재된 공간이고, 공항 시스템은 항시적으로 재앙에 대비하는 형태로 진화한다. 공항을 통과하는 승객과 수하물들은 잠재적으로 위험군으로 여겨진다. 공항에 설치된 여러 개의 막(膜)을 통해 불순물들은 걸러진다. 구체적으로는 공항의 입국 심사대와 세관이 그 역할을 감당한다. 밀입국자, 테러리스트, 검역을 받지 않은 생물들, 마약류, 총포류, 폭발물들이 걸러져야 할 불순물이다.

공항은 게이트를 통과할 때마다 검색을 하고 승객과 물품을 거르거나 차단한다. 비행기에 탑승하려는 승객의 신체는 보안 검색대를 지날 때 금속탐지기로 검색당하고, 전신 스캐너로 신체 전체가 영상 분석을 당한다. 공항 이곳저곳에는 감시 카메라가 작동하고 보안요원들은 특정한 공간에서 24시간 내내 들여다보며 승객들의 움직임을 감시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2004년에 내놓은 영화 <터미널(The Termainal)>은 이런 사정을 잘 보여준다. 톰 행크스가 주인공 빅토르 나보르스키 역을 맡았는데, 그는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가 자신의 고국이 전복되자 졸지에 국적불명 상태가 되어 미국 입국이 거부당한다. 나보르스키는 미국으로 나갈 수도 없고 고국으로 귀환할 수도 없어 JFK 국제공항에 갇히는 처지가 된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머리 위의 감시카메라가 따라 움직이며 전자음을 낸다. 그의 모든 움직임이 공항의 감시체계에 의해 포착되고 감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터미널>은 공항 전체가 첨단 지각 기술의 집약체이고, 일종의 ‘지각적 기계(perceptual machine)’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곳(공항)에서 신체는 보고 보이고 조사하고 만져지는 과도한 규정의 맹공을 견뎌야 한다. <터미널>에서 보듯 공항은 검색의 심연이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야 하는 신체를 움직이게 하고 살피고 걸러내는 재귀적이고 (재)생산적인 투시적 관행의 건축학적 매트릭스다.”(크리스토퍼 샤버그, <인문학, 공항을 읽다>, 194쪽) 세계의 공항들은 그런 방식으로 신체들을 위험군과 비위험군으로 분류하고 배열한다. 특히 항공 역사상 가장 큰 재앙으로 꼽을 만한 2001년 9·11 사태 이후 미국 정부는 테러에 대비해 공항 검색을 강화함으로써 공항은 ‘검색의 심연’으로 바뀐다.

공항에는 새벽에 도착한다. 새벽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공항은 분주하다. 일과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항공사 직원들은 벌써 창구에 나와 승객들을 맞고, 청소부들은 공항 바닥과 화장실 따위를 청소하느라 바쁘며, 쇼핑몰들은 문을 열고 손님 맞을 채비를 하고, 스낵바들은 새벽의 승객들이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샌드위치를 먹는다. 방금 긴 비행을 하고 공항에 도착한 여행객들은 긴 여행으로 심신이 지친 상태다. 그들의 심신은 피로에 절어 마치 데쳐놓은 채소처럼 흐물흐물하지만 신체의 감각들은 예민하게 깨어 있다. “피로에도 불구하고 감각은 완전히 깨어나 모든 것을 흡수한다. 빛, 도로 표지, 바닥 광택, 피부색, 쇳소리, 광고…. 마약을 한 상태이거나, 갓난아기 또는 톨스토이가 된 것처럼 감각이 날카롭다. 갑자기 고향이 다른 어디보다 낯설게 느껴진다. 이제까지 돌아다녔던 다른 땅에 의해서 세세한 모든 것들이 상대화되었기 때문이다.”(알랭드 보통, 앞의 책, 173쪽)

공항에 도착하면 여행객들은 수하물을 찾기 위해 컨베이어 장치 주변으로 몰려든다. 우리와 함께 비행기에 실려 온 수하물을 찾는 것으로 여행은 끝난다. 공항에서 수하물 찾는 곳은 여행의 종점이다. 여행객들은 긴 여행 끝에 마침내 수하물을 찾는 곳에 도착해 서 있다. 수하물을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 장치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샘소나이트 여행 가방들이 쏟아져 나온다. 마치 거대한 검은 위가 가방들을 꾸역꾸역 토해내고 가방들은 컨베이어 벨트를 줄지어 지나가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비슷비슷한 여행용 가방들 속에서 용케도 자신의 가방을 낚아채서 그 자리를 떠난다. 그 앞에서 알랭 드 보통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우울감에 빠진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공중의 현실과 지상의 현실 사이의 엄연한 차이 때문이다. 비행기 안에서 저 아래 펼쳐진 해안과 숲을 보낸 시간이 가벼운 몽상의 시간이었다면,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선 시간은 물질적 현실과 마주쳐야 하는 무거운 시간이다. 그 본질적 이중성 앞에서 우울감과 현기증을 느끼는 것이다. “수하물 찾는 곳과 비행기라는 대조적인 두 영역은 어떤 본질적 이중성을 상징한다. 물질과 영혼, 무거움과 가벼움, 몸과 영혼의 이분법이 존재하는 느낌이다.”(알랭 드 보통, 앞의 책, 185쪽)라고 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름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에 탑승한 여행객들은 비물질의 영역인 하늘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수하물을 찾는 곳은 지상이고, 물질계에 속하는 곳이다. 여행객들은 하늘과 땅, 영혼과 물질이라는 이중성 앞에서 자아 분열을 겪으며 경미한 우울감에 빠져든다.

살아 있다는 것은 기다린다는 것이다. 삶은 온갖 기다림으로 채워져 있다. 기다림의 속살은 기대나 소망의 좌절과 지체로 이루어지고, 그래서 기다림은 속절없이 불행에 예속된 삶의 안감이다. 공항은 기다림을 상습화한다. 공항의 검색대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자신이 타고 갈 항공편을 기다리고, 터미널 도착 라운지에서 세계 저편에서 비행기를 타고 올 누군가를 기다린다. 공항은 기다림을 공적이고 정치적으로 만든다. 공항은 기다림에 의해 양생되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공항에는 상상하는 것보다 더 다양한 기다림의 생태학이 존재한다. 기다림은 무위로 채워져 있다. 무위의 겉모습은 무기력이다. 기다리는 자들은 그 무위 때문에 무기력해 보인다. 하지만 이 무위는 역설적이다. “기다림은 지루함과 불안감과 무기력감을 일으키지만, 바로 그런 감정들을 상쇄할 수 있는 뜻밖의 가능성을 제공하기도 한다.”(빌리 엔·오르바르 뢰프그렌, 앞의 책, 140쪽) 무위란 하지 않음의 함의다. 무위가 외면적으로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되 그 아래 숨은 움직이는 내면성의 발견이다. 그런 까닭에 무위는 대지가 은폐하고 있는 자연스러운 의지적 자기실현이다. 기다림은 대체로 지루하다. 지루함의 실체는 현재에 갇힌 기분이다. 기다림은 기다리는 주체를 지루함에 빠뜨리지만, 그 지루함 때문에 평소 그냥 지나치던 삶을, 그리고 습관으로 조직된 일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성찰하도록 이끈다.

기다림에 대하여


▎공항에서 수하물을 찾는 곳은 여행의 종점이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여행객들이 자신의 짐을 찾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기다림으로 채워진다. 사람들은 매표소에서 기다리고, 고속도로 요금소에서 기다리고, 병원 대기실에서 기다린다. 기다리는 장소들은 데이비드 비셀이 명명한 바에 따르면 ‘수용 공간’이다. 이 수용 공간은 “사람을 유치하도록 설계된 공간으로, 신체를 비활성 상태로 유도하여 일시적 정체의 형태를 띠게 하는 곳”(빌리 엔·오르바르 뢰프그렌, 앞의 책, 31쪽에서 재인용)이다. 배고픈 자는 식사 때를 기다리고, 배관공을 기다리고, 인터넷 설치 기사를 기다리고, 임신부는 출산을 기다리고, 감옥에 갇힌 사람은 출소를 기다리고,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프로야구 개막일을 기다린다. 기차역과 공항의 매표소에서 줄서기나 탑승시각을 기다리는 일, 극장이나 야구경기장, 그리고 병원 대기실에서 줄서기 따위에서 기다림은 매우 일반화된 일이다.

기다림을 수동적이고 부차적인 일로 본다면 기다림은 부동의 공허한 상태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기다림은 매우 역동적인 사건이다. 사람들은 기다리는 동안 온갖 사소한 행위들을 하며 기다림의 지루함을 이겨낸다. 기다림의 형태들은 얼마나 다양한가! 사람들은 기다림이 초래하는 지루함과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갖가지 행동을 취한다. 제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기도 하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서성거리기도 한다. 혹은 휘파람을 불거나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기다림의 생태는 장소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번식한다. 그럼에도 기다리는 시간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나 깊이 있는 사유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다림을 일상의 습관적 행위로 분류해서 그럴 만한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기다림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이 철학적 지각에까지 이르는 일은 난망하다.

기다림은 기다리는 자를 불안과 조바심에 빠트린다. 기다림이 ‘무의식적인 권력 게임’이라는 것, 기다림에 의해 권력의 서열이 드러난다는 것은 명확하지만 의외로 덜 알려진 사실이다. 약자가 자발적으로 먼저 와서 기다리고 강자는 늦게 나타난다. 가부장제 질서가 완고한 사회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기다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도덕적 우열과는 무관한 일이다. 단지 관계에 더 중요성을 부과하고 관계에 거는 기대와 열망이 더 큰 사람이 더 오래 기다린다. 항상 서열이 더 낮은 쪽이 더 오래 기다린다. 연애할 때 더 많이 오래 기다리는 쪽이 더 사랑하고, 상대적으로 사랑의 약자다. “관계에 대한 갈망에 더 깊이 빠진 쪽이 상대를 더 오래 기꺼이 기다리는 것”(빌리 엔·오르바르 뢰프그렌, 앞의 책, 128쪽)은 분명한 진실이다. 종종 기다림은 갈등을 빚는다. 오래 기다린 자는 기다리게 한 사람에게 “왜 이렇게 사람을 기다리게 만들어”라고 항의한다.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만든 시간에 대해, 그렇게 무용한 시간을 쓰며 기다린 행위에 스며든 모멸감에 대해 항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 전체가 기다림에 옥죄인 것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 것이다.

기다림이 부정적인 평판을 얻은 것은 이 시간이 헛된 시간이고, 아무 생산도 없는 죽은 시간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기다릴 때 일어나는 물리적 동작의 제약이나 신체의 비활성 상태 때문에 종종 이런 오해가 생긴다. 기다리는 시간이 곧 소모적인 시간만은 아니다. 기다리는 시간에도 아주 작지만 긍정적 가치의 생산이 이루어진다. “기다리는 시간은 바쁜 삶에서 잠시 벗어나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을 기회가 되기도 한다. 시간이 곧 돈인 경제사회에서 기다림은 일시적인 해방감을 안겨준다. 그리하여 기다리는 장소는 명상의 공간이 되고 기다리는 행위는 뜻밖의 통찰로 이어진다.”(빌리 엔·오르바르 뢰프그렌, 앞의 책, 121~122쪽)

기다리는 시간은 더디고, 공허하고, 무의미한 시간만은 아니다. 기다리는 동안 일상의 의무들이 유예된다. 이것은 기다리는 동안 기다리는 주체에게 돌연 자유가 주어진다는 뜻이다. 간혹 기다리는 시간의 감미로움이 기다리는 주체의 시공간을 장밋빛으로 물들인다. 설사 기다림이 무산되었을 때조차 기다리는 주체의 행복감과 즐거움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못한다. 기다림 그 자체가 목적으로 승화해 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공항에서


▎공항에서 펼쳐지는 볼거리 중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이륙의 순간이다. 인천국제공항 터미널 전경.
공항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익명성이 번성하는 곳이다. 여행객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공항에 상주하는 사람들조차 스쳐 지나가는 익명의 존재이다. 공항에서는 누구의 삶도 누적되지 않는다. 오늘날 공항에서는 아주 번잡한 현대생활의 소우주가 펼쳐진다. 이 소우주는 가장 안전한 장소 중의 하나지만 어딘가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줄기 불안이 스며있다. “공항은 언제나 비상상황에 놓여 있다. 공항의 구조는 한결같이 재앙에 대비한다.”(크리스토퍼 샤버그, 앞의 책, 106쪽) 공항에 떠도는 모호한 불안의 정체가 드러난다. 공항의 시스템과 구조는 잠재적 재앙에 대비하는 형태로 구조화한다.

공항은 주거나 취침 같은 실존의 요소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공항은 비장소(non-place)이기 때문이다. 공항이 고속도로 휴게소와 마찬가지로 비장소로 규정되는 순간 그것은 실존이 아니라 공연이 펼쳐지기에 적당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공항은 머물고 삶의 배양을 하는 실존이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장소다. 공항은 첨단 테크놀로지가 구현된 인공낙원이고 날마다 다채로운 인간 종들의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다. 이 공간적 모호성 안에는 자연이 발붙이지 못한다. 자연은 처음부터 배제된다. 공항의 번잡함 속에서 자연을 갈망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주 절박하게 숲과 강물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초현대성의 비장소에서 날마다 익명의 사람들이 모여 펼치는 여흥과 볼거리들이 그런 하찮은 갈망 따위는 이내 지워버린다.

비상한 활력과 흥미진진한 볼거리들이 펼쳐지는 공항 드라마 중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탑승과 이륙의 순간에 나타난다. 모든 것이 그 순간을 위해 집중한다. 그 찰나는 빨리 지나간다. 주의하지 않으면 그 극적인 순간을 놓치기 일쑤다. 탑승과 이륙이 끝나는 순간 공항의 드라마도 끝나고 무대는 서둘러 막을 내린다. 그렇다고 공항이 한가해지는 법은 없다. 공항은 매우 분주하고 번잡함 속에서 다음 승객들을 위한 무대를 마련한다. 비행기 결항이나 수하물 분실 따위는 공항 드라마 중에서 가장 작고 사소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삶이 무미하다고 느껴질 때 나는 공항 철도를 타고 인천국제공항으로 간다. 공항에 특별히 볼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한나절을 빈둥거리며 공항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책을 읽는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모르지만, 낮은 소음들이 웅웅대는 공항은 이상적인 독서 공간 중의 하나다. 그것마저 지루해질 때 공항 내부를 어슬렁거리거나 끊임없이 옆을 스쳐가는 여행객들과 무심히 자기 일에 몰두하는 공항 근무자들을 관찰한다. 어쩌면 공항 자체가 매우 흥미진진한 하나의 텍스트인지도 모른다. 한나절을 공항에서 보내고 공항 내부의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식사까지 한 뒤 집으로 돌아온다. 아아, 공항에 오기를 잘했다. 공항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여흥과 볼거리들이 고갈된 삶에의 열정과 의지라는 불꽃을 일으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항을 다녀온 뒤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여행에의 욕구도 어느덧 진정되는 것이다.

장석주 - 전업작가.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 당선으로 등단했다. <월간문학> 신인상(1975년)과 해양 문학상(1976)을 수상했다. ‘고려원’ 편집장을 거쳐 청하출판사를 운영했다. 지금까지 시집, 비평집, 인문서 등 70여 권을 펴냈다. 대표 저서로 <일상의 인문학> <마흔의 서재> <철학자의 사물들> 등이 있다

201504호 (201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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