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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종의 한자 이야기 ⑥패배(敗北)] 패배를 발판삼아 도약할지니 

물건을 두드려 망가뜨린다는 패(敗)와 도망친다는 배(北)의 결합… 건전한 정치문화 조성 위해 재·보선서 참패한 야당의 분발 필요 

유광종 출판사 ‘책밭’ 고문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4월 30일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에서 4·29 재보선 패배에 대해 입장을 밝힌 뒤 본청을 나서고 있다.
승부를 가리는 마당에서 남에게 지는 게 패배(敗北)다. 손에 뭔가를 쥐고서 물건을 두드려 망가뜨린다는 뜻의 敗(패),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北(배)의 글자가 합쳐졌다. 옛 한자세계에서는 北(배)와 사람의 등을 가리키는 背(배)는 통용됐다.

그런 패배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모든 승부에서 지는 것이 전패(全敗)이겠고, 아예 겨룸이라고 얘기할 수준에도 못미치는 게 완패(完敗)다. 경기 결과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慘酷)하다면 그런 패배는 참패(慘敗)다. 요즘에는 운동경기 등에서 스코어를 한 점도 얻지 못한 채 무릎 꿇는 것을 영패(零敗)라고 한다.

최근 벌어진 재·보궐선거에서 야당 새정치민주연합이 여당인 새누리당에 졌다. 네 군데의 선거구에서 한 석도 차지하지 못했으니 야당에는 완패(完敗)이자 전패(全敗), 또 참패(慘敗)다. 아깝게 진 경우라면 석패(惜敗), 분패(憤敗)다. 후자에 우선 눈길을 던져보자.

‘憤(분)’이라는 글자는 내 마음의 결기가 어떤 결과를 지켜보다가 못마땅함 때문에 모종의 감정으로 일어나기 시작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그것이 쌓이면 울분(鬱憤)으로 변하는데 분노(憤怒) 등의 단어로 전화(轉化)하면서 흔히는 ‘노여움’의 동의어(同義語)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글자를 ‘노여움’만으로 풀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공자(孔子)가 스스로를 평가한 대목이 있다. ‘발분망식(發憤忘食)’이다. ‘열심히 공부하면서 끼니 때우는 것조차 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발분(發憤)은 ‘분을 내다’다. 결국 憤(분)이라는 것이 문제인데, 뭔가 더 이루고자 애를 쓰면서 마음을 다잡는 행위다. <논어(論語)>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열어주지 못하고, 애태우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는다(不憤不啓, 不悱不發)”는 말이다.

배우려는 자가 뜻한 바를 세워 열심히 나서지 않으면 가르치는 사람으로서는 그를 깨우칠 방도가 없다는 뜻이다. 아울러 스스로 표현하기 위해 이리저리 궁리를 하지(悱) 않으면 말을 해줘도 알아먹지 못한다는 얘기다. 자신을 더 나은 상태로 이끌어 간다는 뜻의 ‘계발(啓發)’이라는 단어는 예서 유래했다.

결국 스스로 몸이 달아 열심히 자신의 수준을 끌어 올리려 애쓰는 것이 憤(분)이다. 그래서 분발(憤發)이라는 조어(造語)가 가능하며, 의지를 내서 강해지려 힘쓰는 모습을 ‘발분도강(發憤圖强)’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승패내병가지상사(勝敗乃兵家之常事)

따지고 보면 사람의 삶 역시 각종 싸움이 끝없이 이어지는 과정이다. 그 때문인지 늘 싸움, 그리고 그 결말인 승리와 패배를 매우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만든다. 한자의 세계에서도 그 점은 뚜렷이 드러난다. 특히 싸움에서의 패배가 지니는 가혹함을 강하게 경계하는 분위기다.

싸움에서 이기면 왕, 지면 도적놈이다. 이긴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은 거의 전부다. 반대의 경우는 비참하다. 전부를 얻는 일, 또는 모든 것을 상실하는 일이다. 한자로 적으면 成王敗寇(성왕패구)다. 싸움에서 이루면(成) 왕(王)이요, 진다면(敗) 도적놈(寇)이라는 식의 엮음이다.

싸움의 승패는 사람을 그렇듯 모질게 몰고 간다. 섬돌 아래의 죄수, 즉 階下囚(계하수)라는 말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잘나갈 때, 싸움에서 패하지 않았을 때 그를 높은 자리의 손님, 즉 座上客(좌상객)으로 모시지만 싸움에서 진 사람을 두고서는 섬돌 아래의 죄수로 취급한다는 말이다.

싸움에서 물러날 때, 그리고 나아갈 때를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제 자신의 역량을 과대하게 평가해 아무런 생각 없이 나아가면 패배에 직면한다. 늘 조심스럽게 상대와 나의 조건을 헤아려 나아가거나 물러서야 한다. 스스로를 과대하게 평가하는 군대는 곧 驕兵(교병)이다. 교만한(驕) 군대(兵)라는 뜻이다. 이런 군대는 반드시 패배에 직면한다. 驕兵必敗(교병필패)라는 성어가 여기서 나왔다.

작은 틈으로 샌 물이 천리의 방죽을 무너뜨린다. 싸움에서 군대가 맞이하는 패배는 여러 가지다. 그렇듯 물이 방죽을 무너뜨리는 기세에서 맞이하는 패배는 참담하다. 그를 潰敗(궤패)라고 적는다. 궤멸(潰滅)적인 패배다. 넘쳐나는 큰물에 모두 휩쓸려 내려 모두를 잃는 엄청난 패배다.

一敗塗地(일패도지), 一敗如水(일패여수)라고 적는 성어도 있다. 한 번 싸움에서 짐으로써 처참하게 망가지는 군대의 이야기다. 一敗塗地(일패도지)는 싸움에서 진 군대의 군인들 시신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참담한 광경을 표현한 성어다. 인체 오장육부의 하나인 간(肝)과 뇌(腦) 등이 땅에 널려 있다는 뜻의 肝腦塗地(간뇌도지)를 이용한 표현이다. 물이 흘러 넘쳐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한 경우를 적을 때는 一敗如水(일패여수)다.

싸움에서 늘 이기면 連戰連勝(연전연승)이다. 그 반대는 連戰連敗(연전연패)다. 중국에서는 屢戰屢敗(누전루패)라고 적는다. 참담한 패배를 잇달아 벌였으니 그 장수는 목이 잘리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지면서도 계속 싸운다’는 식으로 보고문을 고쳤다고 한다. 屢敗屢戰(누패루전)로 말이다. 그래서 황제로부터 “저 장수 참 용감하다”고 칭찬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중국에서 전해진다.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일은 군대에서는 늘 있는 법이라고 했다. 勝敗乃兵家之常事(승패내병가지상사)라는 말에서 나왔다. 우리의 정치도 늘 싸움의 연속이다. 상대가 있고, 라이벌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느 전쟁 못지않게 우리 정치판의 싸움은 매우 격렬하다.

2015년 봄 재·보선에서 크게 패한 야당은 제대로 발분(發憤)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을 결여해 민심으로부터 선택을 받지 못했는지 잘 따져봐야 한다는 얘기다. 그로써 실패를 발판으로 삼아 도약하면 다행한 일이다. 우리의 정치문화를 성숙시키기 위해서도 건전한 야당은 반드시 필요하다. 야권의 노력을 기대한다.

유광종 -<중앙일보> 베이징특파원, 중국연구소 부소장, 논설위원을 지냈다. 대학에서 중어중문학을 전공한 뒤 홍콩에서 중국 고대 문자학을 연구한 중국 전문가로 <중앙일보> ‘분수대’ 칼럼를 3년여 동안 집필했고, ‘한자로 보는 세상’도 1년 동안 썼다. 저서로 <연암 박지원에게 중국을 답하다> <장강의 뒷물결> <제너럴백-백선엽 평전> <지하철 한자여행 1호선> 등이 있다. 현재 출판사 ‘책밭’ 고문으로 일한다.

201506호 (201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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