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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경기도경제단체연합회 공동기획③] 이제는 ‘지역공동체’다 

지자체가 차린 상생의 만찬에 노사가 마주앉다 

대화채널 만들고 신뢰 쌓으니 경제위기 속에서도 일자리 오히려 늘어나… 도시와 기업 함께 성장하려면 패권주의 버리고 신뢰 원칙 지켜야

▎삼성전자의 태생지이자 심장부인 수원디지털시티의 전경.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두 개의 고층 건물이 기술연구소다. 수원디지털시티는 축구장 250개 크기에 56개국 3만여 명의 연구인력이 근무하는 국내 최대 R&D 집약지다.
지방자치시대 이후 가장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는 ‘기업유치’가 지역 정치인들의 최대 숙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기업을 얼마나 유치했느냐에 따라 유능과 무능의 판단이 갈린다. 공무원이 기업 위에 군림하며 갖은 규정을 내세워 ‘갑질’을 하는 시대는 옛말이다. 저마다 ‘세일즈 시장’을 자처하며 기업에 러브콜을 보낸다. 기업은 도시를 동반성장의 파트너로 여긴다. 국가에 기대어 사세를 확장하던 시대는 지난 지 오래다. 기업은 도시에 어떤 의미일까? 도시와 기업은 서로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도시와 기업의 상생의 현장에서 답을 구했다.

‘삼성시(市)’?


▎1969년 수원 동쪽 들판인 매탄벌에서 창업한 삼성전자의 최초 임직원 수는 36명이었다. 사진은 1970년 4월 초 완공을 앞둔 수원공장 전경.
2010년 4월 당시 김용서 수원시장이 3선에 도전하면서 내놓은 공약이다. 수원시의 명칭을 ‘삼성시’로 바꾸자는 제안이었다. 일본의 도요타자동차 공장이 있는 고로모시(挙母市)가 명칭을 ‘도요타시’로 바꾼 것에서 착안한 것이다. 물론 현실화하진 못했다. 하지만 의미는 적지 않았다. 수원의 정체성에서 삼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정조대왕이 만든 계획도시’라는 역사적 정체성과 자부심이 강한 수원시민들이 삼성을 지역의 중요한 상징으로 인식한다는 건 꽤 의미가 컸다. 수원시를 ‘삼성시티’라고 부르는 것도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인구 120만 명에 달하는 최대 기초자치단체로 성장한 수원시 발전사에서 삼성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삼성이 수원과 인연을 맺은 지는 벌써 40년이 넘는다. 1969년 삼성전자의 전신인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가 수원 매탄벌(현재 영통구 매탄동)에서 창업하면서 삼성의 수원 시대가 시작됐다. 지금은 삼성전자를 비롯해 삼성전기, 삼성전자서비스의 본사가 이곳에 있다. 삼성디지털시티의 전체 면적은 172만㎡로, 축구장 250개를 모아놓은 크기와 같다. 창업 당시 36명이었던 임직원 수는 3만4천 명으로 늘었다. 원천동과 매탄동을 중심으로 한 수원 동부(영통구)는 삼성 계열사와 협력업체까지 근무인력만 30만 명에 달하는 삼성벨트가 형성돼 있다.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의 명칭인 ‘삼성디지털시티’가 결코 과장된 것은 아닌 셈이다. 수원시 관계자는 “지금도 삼성 월급날에는 매탄동의 음식점들이 최고 매상을 기록할 정도로 삼성이 지역경제에 기여하는 비중이 크다”고 말했다.

지방재정·예술·봉사 등 지역사회 기여도 높아


▎도시는 기업이 활동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어줌으로써 기업을 유치하고 기업은 도시의 경제·문화·복지 향상에 기여함으로써 동반자적 관계를 돈독히 한다.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의 임직원들이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구매하고 있다.
지방재정 기여도도 상당하다. 올해 5월 삼성전자는 수원시에 법인지방소득세 1775억원을 납부했다. 반도체공장이 있는 화성시와 용인시에도 각각 1680억원과 850억원을 납부했다. 삼성이 3개 시에 납부한 법인세를 합하면 4305억원으로 인구 15만 명인 하남시의 한 해 예산(4394억원)과 맞먹는다. 단일기업 중 가장 많은 금액이다. 경기도가 도내 31개 시·군에 있는 기업이 낸 1억원 이상 법인소득세를 잠정 집계한 결과 총 세금수입이 9800억원 대에 달했다. 그중 절반 가까이를 삼성이 부담한 것이다. 올해 처음 부과된 법인지방소득세는 세액공제 전 법인세의 10%를 책정해 사업장이 있는 지자체에 종업원수와 면적 등을 따져 징수한다. 삼성이 지난해 수원시에 낸 취득세 등 지방세는 2110억원이었다. 올해는 2880억원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는 수원시 전체 세수의 약 17%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삼성디지털시티의 핵심 경쟁력은 연구개발기능에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생활 가전제품 생산라인을 지방으로 옮기기 시작하면서 수원은 연구개발기능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재편했다. 지난 2013년 5월에는 수원사업장의 다섯 번째 연구소인 지상 27층짜리 모바일연구소(R5)가 완공됐다. 다섯 개 연구동에서 한국의 전자산업의 새로운 역사가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 번째 연구동인 R1(본관)에선 흑백TV와 컬러TV가 개발됐다. 두 번째 연구동(R2·DMC연구소)은 휴대폰과 D램 반도체 연구 개발이 이뤄졌다. 2001년에 완공된 세 번째인 정보통신연구소(R3)는 차세대 제품을 본격 개발하기 시작해 DMB전화기와 와이브로시스템 등의 최신 기술을 내놨다. R4(디지털연구소)는 초슬림·LDE·스마트·UHD 등 TV의 혁신을 선도해왔다. 다섯 개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인력만 3만3천 명으로 전체 인력의 대부분이 연구개발과 마케팅을 담당하는 고급인력으로 구성돼 있다. 과거의 백색가전 등 생산라인은 대부분 지방으로 이전해 제조인력 비중은 1%에 불과하다. 3만여 명의 임직원 중 71%인 2만2천여 명은 수원을 중심으로 경기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이 내는 지방세만 1천억원이 넘는다. 지금까지 보리스 옐친 러시아 초대 대통령, 장쩌민·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을 비롯해 1천 명이 넘는 국빈이 수원디지털시티를 방문했다. 경기도와 수원시의 인지도 상승과 도시 브랜드 홍보 효과 등 무형의 가치는 값을 매기기 어렵다.

삼성의 기여는 경제적 이익에서 그치지 않는다. 수원은 예술의 도시로도 손꼽히는데, 여기에도 삼성이 토대를 닦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지난 1995년 삼성전자는 수원시립교향악단에 5년간 20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국내에 세계적 수준의 오케스트라를 육성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택한 게 수원시향이었다. 수원시향은 금난새 씨를 지휘자로 영입해 수준을 국내 정상급으로 끌어올렸다. 삼성은 또 30억원을 들여 수원시 인계동 예술공원에 1만5천명 수용 규모의 야외음악당을 건립했다. 이곳은 바로 옆에 있는 경기도 문화의 전당과 함께 경기남부권 공연예술의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기업의 위기 극복에 발벗고 나선 지자체


▎삼성전자 수원디지털시티는 기술유출을 막기 위해 보안이 철저하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연고지의 시민들에게만큼은 예외다.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 삼성전자 임직원과 협력사 가족, 시민들이 이날 하루 완전 개방된 디지털시티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임직원들의 지역 사회공헌활동도 매머드급이다. 수원디지털시티 임직원들이 조직한 봉사팀만 162개나 된다. 3만여 명의 임직원이 연간 봉사활동에 쏟은 시간을 모두 더하면 17만 시간에 달한다. 매년 30여 명의 청각장애 아동들에게 인공와우 수술을 지원하고, 1997년부터 시각장애인정보화교육센터를 운영하며 시각장애인 7500명에게 무료 정보화 교육을 진행했다. 1천여 명의 임직원이 수원지역 아동센터 49곳에서 1600여 명의 아동을 대상으로 과학·예능·체육 등 특기를 살린 재능기부에 참여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기업의 기여를 받는 지역사회는 기업이 활동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어줌으로써 상생을 도모한다. 대표적인 게 평택시의 ‘쌍용차 살리기 운동’이다. 2009년 1월 쌍용자동차의 최대 주주인 상하이차는 경영권을 포기하고 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이에 반발해 노동조합은 파업에 돌입했다. 서울중앙지법이 쌍용차에 대한 회생계획안을 강제 인가하면서 77일간의 파업은 막을 내렸다. 회사는 이 기간 동안 3160억원의 손실을 입었다. 1차 협력사 32곳 중 4곳이 부도를 내거나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25곳이 휴업했다. 2차 협력사 중에는 19곳이 도산하거나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76곳이 공장 가동을 멈췄다. 평택시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지역에서 문을 닫은 중소기업과 자영업소가 1천 곳이 넘었다.

평택시는 쌍용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가자 대대적으로 쌍용차 살리기 운동을 시작했다. 쌍용차 근로자를 비롯해 직간접적으로 연관돼있는 인구는 평택시 인구의 10%인 4만여 명에 달했다. 시는 관용차를 구입할 때 쌍용차를 우선 구매하고 당시 송명호 시장을 단장으로 전담반을 구성해 쌍용차와 협력업체에 대한 행·재정적 지원을 확대했다. 지역 국회의원과 도·시의원, 시민단체들이 참여하는 범시민 대책협의회가 구성됐다. 송 시장은 노사를 오가며 파업사태가 파국으로 치닫지 않도록 설득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동시에 경기지역을 돌며 쌍용차 구매를 촉구하는 세일즈에도 시장이 직접 나섰다. 경기도도 김문수 지사를 위원장으로 한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쌍용차와 평택시 지원에 주력했다. 시의 요청을 받은 농협은 쌍용차와 1300여 개 협력업체에 500억원의 특별자금을 대출 지원했다.

물론 평택시의 이런 노력이 쌍용차를 살리는 결정적 영향을 미친 건 아니다. 하지만 지역 사회가 연고 기업을 살리기 위해 노사의 이해관계를 초월해 협력한 것은 드문 사례였다. 평택시의 한 공무원은 “워낙 많은 시민들이 쌍용차와 관련된 생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단순히 기업 하나가 문을 닫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역 경제는 물론이고 시민들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보니 시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쌍용차가 완전히 살아난 뒤에는 시민들도 ‘우리가 살린 기업’이라는 자부심과 애착이 더 깊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상생 외쳤더니 일자리 생겼다


▎지난 2011년 7월 충북 진천군 노·사·민·정 관계자들이 손을 맞잡고 화합을 다지고 있다.
지자체가 노사의 상생을 유도하고 위기를 함께 극복해낸 사례로는 경북 구미시를 빼놓을 수 없다. 구미공단은 한때 강성노조의 아성이었다. 한국합섬을 비롯해 코오롱, GS칼텍스 등 화학·섬유 업종의 기업들이 몰려 있어 민주노총의 핵심 지역으로도 꼽혔다. 코오롱노조는 ‘전위부대’로 불릴 만큼 강성이었다. 2004년 64일 파업을 시작으로 성북동의 이웅열 회장 자택 점거 등 노사 갈등이 뿌리 깊었다. 한때 1600여 명의 종업원이 연간 6천억원의 매출을 올렸던 한국합섬은 섬유산업이 퇴조하면서 노조가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점거농성을 벌이며 실낱 같은 회생 가능성마저 사라지고 폐업을 맞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 잇단 기업들의 구조조정과 노조의 투쟁, 도산과 법정관리 때문에 지역경제는 크게 위축됐다.

이를 지역의 위기로 여긴 구미시는 2008년 ‘우리 함께(We Together)’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노사화합운동을 전개했다. 목표는 고용안정이었다. 노조에는 과도한 파업 자제를, 기업에는 고용안정을 요구하며 중재자로 나섰다. 442개 업체가 운동에 참여했다. 노사민정협의회도 꾸려졌다. 노사정협의회의 지역 모델인 셈이다. 시는 매년 지원하던 기업운전자금 900억원에다 1086억원의 특별운전자금을 추가로 지원했다. 남유진 구미시장은 “노조를 만나 ‘해고만 하지 않는다면 임금을 동결하거나 삭감하더라도 참을 수 있느냐? 함께 가려면 이 길밖에 없다’며 강성노선을 포기할 것을 설득했다. 기업체 대표들에게는 ‘근로자 한 명 한 명이 다 가장인데 제발 해고는 하지 말아달라’고 설득했다. 결과적으로 서로에 대한 신뢰의 문제였던 것”이라고 말했다.

남 시장의 진심은 통했다. 1년간 캠페인을 벌인 결과 1030명의 일자리가 오히려 늘어났다. 구미시에 따르면 396개 업체가 총 1086억원의 융자를 받았고, 당초 인원 대비 10.2%인 1030명의 신규 고용인력이 증가했다. 또 442개의 추천업체도 7.7%인 856명의 고용인력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구미국가산업단지의 고용인원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구미시 관계자는 “특별운전자금을 지원받는 대신 고용안정에 동참해 단 한 명의 근로자도 해고하지 않은 기업이 442개나 됐다. 여기서 혜택을 본 근로자가 1만1152명이나 된다”고 말했다. 구미시는 1명 더 고용하기 운동을 전개하고, 지역 중소기업의 상품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완제품 팔아주기 운동’으로 확대했다. 이런 구미시의 노력과 성과는 전국 지자체 중에서 경제위기를 극복한 모범 사례로 평가받아 2010년 국무총리 기관 표창에 이어 2011년 대통령 기관 표창을 받았다.

노사의 소통의 창구는 지역노사정협의회다. 지역노사정협의회다. 지역노사정협의회는 경제사회발전 노사정위원회 설치법에 따라 각 지자체마다 두는데 강제는 아니다. 16개 광역시·도를 비롯해 100여 개 지자체에 노사정협의회가 설치돼 운영 중이다. 전라남도가 16곳으로 가장 많고 충남이 15곳, 경기도가 9곳 등이다.

그중에서도 경기도의 경우 노사정협의회 활동이 가장 활발하다. 지난 3월에는 한지혜 경기청년유니온 위원장이 경기도노사정협의회 위원으로 위촉됐다. 국내 유일의 세대별 노동조합인 청년유니온이 지역노사정협의회에 참여한 것은 전국에서 처음이다. 청년유니온은 “청년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공식적인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청년들 스스로 문제 해결방법을 모색해왔는데 경기노사정협의회 참여로 청년문제를 공식적인 자리에서 논의하고 해결을 모색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상생의 테이블 노사정위원회 출범


▎전북 군산에 있는 타타대우상용차는 지난 2011년 노조 출범 이후 13년 만에 처음으로 무분규 임금협상 타결을 이끌어냈다. 2003년부터 사측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꾸준히 진행하고, 노조가 양보하면서 서로 신뢰가 쌓인 덕분이었다.
기초지자체 중에서는 부천지역노사정협의회가 가장 주목을 받아왔다. 부천노사정협의회는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노사정위원회 제도가 도입된 뒤 전국 최초로 제도화된 지역협의체다. 서울과 인천, 경기도를 잇는 부천은 대표적인 공업도시였다. 1987년 이전에 20여 개에 불과했던 부천지역 노동조합은 1987년 6월 이후 급속히 늘어 1990년에 185개, 조합원 수 1만6천여 명까지 확대됐다. 당시 부천지역은 울산·마산·창원지역과 함께 대표적인 노사분규 다발지역이었다. 노동운동을 비롯한 시민사회운동의 활동이 다른 곳보다 활발했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공동화는 기업과 지역경제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는 노조의 몰락을 의미했다. 1997년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노조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강성이었던 민주노총의 세력이 한풀 꺾이자 온건한 한국노총이 주도권을 쥐었다. 한국노총 부천지부는 지역 노조의 80%를 차지할 만큼 영향력을 확장했다. 한국노총 부천지부는 시민사회와 연대를 넓히고 지역 정치인들과 정책연합을 도모하면서 노사정 거버넌스 구축을 주도했다. 그렇게 해서 1999년 5월 31일 부천지역노사정협의회가 공식 발족했다.

초창기에는 노사정 협력과 지역발전을 의논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사측 대표단체는 부천상공회의소였다. 대부분 50인 미만 중소규모 업체가 많아 전경련이나 경총의 회원 조직은 미약했기 때문이다. 2000년부터 조직을 확대하면서 업종별 분쟁조정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노사정포럼, 고용포럼 등 정책 네트워크를 형성해 협력적 노사관계를 지향했다.

첫 갈등 해결 성과는 2000년에 나타났다. 그해 11월 환경기동반노조(청소노조)와 마을버스노조가 잇달아 파업에 들어가면서 노사정협의회가 가동됐다. 분규사업장의 노사 대표를 출석시켜 원인을 조사하고 조정안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타결을 유도해 한 달 만에 파업 사태를 해결하는 데 성공했다. 2001년 9월에는 삼양중기 파업사업장을 방문해 조정안을 제시해 협상 타결을 이끌어냈다. 2004년에는 중앙노사정위원회로부터 모범사례로 선정되기도 했다.

부천노사정협의회의 효과를 반증한 것은 민주노총 산하 노조 사업장의 파업이다. 민주노총은 노사정협의회가 노조 무력화 시도라며 불참했다. 부천지역 민주노총 소속 사업장의 분규는 최소 3개월에서 1년 이상씩 장기화됐다. 유한대학, 일광공구, 성가병원, 유한자동차, 갑을플라스틱, 장애인복지관 등이 장기파업으로 몸살을 앓았다. 당연히 노사정협의회의 조정 개입은 원천 차단됐다.

부천지역노사정협의회의 특징은 고용, 실업, 복지 등 다양한 지역의 사회경제적 의제들을 다루는 전형적인 노사정 3자의 사회적 대화 모형이란 점이다. 다른 지역들의 경우 대개 정부가 주도해 위로부터 만들어진 형식적 대화 테이블 수준인 것과 비교하면 꽤 자발적이고 효율적이다. 지역노사정협의체의 또 다른 대표 모델로 평가 받는 서울시 노사정협의회의 경우 지방공기업의 이중적 지배구조에서 비롯된 교섭구조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기능에 그쳐 부천보다 제한적이다.

갈등조정에서 사회적 공동체로 역할 확대


▎2009년 1월 쌍용자동차의 대주주인 상하이차가 철수하면서 쌍용차가 부도 위기에 몰리자 평택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쌍용차 살리기’ 운동을 전개했다. 쌍용차 살리기 운동 결의대회 참석자들이 거리에서 홍보 활동을 벌이고 있다.
노사정협의체는 이제 지역 노사분쟁의 예방 및 갈등의 조정 기구로 정착되어가고 있다. 노사 갈등을 비롯한 사회적 갈등을 조정·중재하는 기능과 제도가 취약한 한국사회에서 지역 노사정협의회는 지역단위의 주요한 노사분쟁을 지역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조정·해결하는 중층적인 사회적 조정기구의 하나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서울지역의 서울특별시 투자기관 6개 공기업의 임·단협 조정이나, 부천지역 택시노조, 삼양중기 등 노사분규 조정, 충북지역 하이닉스-매그나칩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지역 차원의 중재단 운영 및 사회적 협의 진행, 순천시 현대 하이스코 비정규직 문제 해결 시도 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노사정협의회에는 노사정뿐만 아니라 지역에 따라 시민사회단체가 공익위원으로 참여하고 지역사회가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구체적인 현안 문제들을 의제화하기도 한다. 이는 지역사회의 통합과 주민 참여형 지방자치역량을 강화하는 동력이 된다. 부천지역의 지역단위 노동시장조사나 제조업 공동화 대응전략 수립, 직업훈련 네트워크 구축 등과 경기도의 외자유치·고용창출을 위한 노사정 공동사업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노사정협의회는 운영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으며 지역단위 사회적 합의기구로서의 한계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분권화 미비에 따른 제도적 한계를 들 수 있다. 현재 노사분쟁조정이나 고용정책 등은 노동부와 노동위원회가 권한을 보유함에 따라, 관련논의가 구체적 사업과 연계되지 못하고 소극적인 시정 자문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지역노사정협의회의 역할은 과거와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개별 사업장의 분규와 노사갈등을 중재하고 조정하는 역할이었다면 중소규모 사업장의 파업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요즘 들어선 사회적 의제에 대한 협의 테이블로 진화한 것이다. 최근 지역노사정협의회의 현안은 주로 지역 내 일자리 창출,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 기업의 사회적 공헌과 지역사회의 기업 지원 정책 등 보다 범위를 넓힌 상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면으론 지역노사정협의회의 역할이 약화 축소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시선이 있지만 노사와 지역사회가 한자리에 모이는 사회적 대화 창구가 부족한 현실을 감안하면 이는 미래형 상생 모델로 전혀 손색이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부천에서 오랫동안 노동 운동을 해온 김경협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일자리 창출과 직업훈련 등의 고용문제, 산업구조의 개편, 중소기업 지원 대책 등 지역사회에서 노사가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의제들을 놓고 의견을 좁히면서 신뢰가 쌓이고, 이는 분규가 발생하더라도 서로 대화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된다. 강요된 합의가 아니라 ‘자율적인 참여와 의사결정구조’를 갖고 있다는 게 지역 노사정협의체의 강점이다”라고 말했다.

미래 지역의 키워드는 상생


▎대통령직속 경제사회발전 노사정위원회는 9월 16일 노동개혁에 관한 대타협을 선언했다. 김대환 노사정위원장(왼쪽)이 김동만 한국노총위원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지난 9월 15일에는 부천시가 내년도 생활임금을 시급 6600원으로 결정해 발표했다. 이는 내년도 최저임금인 시급 6030원보다 9.45% 많은 금액이다. 이런 결정을 이끌어낸 것도 부천노사정협의회다. 부천시 생활임금위원회와 전문가 조정을 거쳐 지역노사정협의회가 최종 결정하면 시가 이를 고시하는 절차로 결정됐다. 이에 따라 시 소속 근로자와 출자·출연기관 소속 근로자는 내년에 생활임금을 지원받게 된다. 올해 부천시에서 생활임금을 지원받은 근로자는 42개 부서 총 480여 명이었다. 부천시는 2011년부터 전국에서 처음으로 최저임금보다 높은 생활임금 고시제도를 운영해왔다. 김만수 부천시장은 “생활임금을 최저임금보다 높게 책정하면 근로자들의 소득이 늘어난 만큼 소비가 확대돼 선순환으로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며 “공공부문뿐만 아니라 기업들도 동참하도록 설득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남시도 여기에 동참했다. 성남시는 지난 8월 노사민정협의회를 열어 저임금근로자 생활임금을 시간당 7천원으로 결정했다. 적용대상은 시와 시가 출자·출연한 기관 소속 기간제근로자 790여 명이다. 이는 고용노동부가 고시한 내년도 시간당 최저임금보다 970원 많은 금액이다. 최저임금을 초과한 생활임금은 1만원 권 단위의 지역 화폐(성남사랑상품권)으로 지급한다. 지역 전통시장과 골목상권 등에서 생활소비를 하도록 해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도 함께 누리기 위해서다. 성남시도 노사민정협의회를 통해 민간기업으로 적용 대상을 넓혀갈 계획이다.

수원시는 삼성그룹 계열사들과 ‘기업상생협력단’을 구성했다. 삼성전자, 삼성전기, 삼성LED 등 수원을 연고지로 둔 삼성 계열사들이 참여했다. 신성장산업을 육성하고 일자리 창출 등을 시와 삼성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수원시는 삼성디지털시티 주변의 삼성로 확장사업과 삼성전자 제3연구소 건립, 삼성 주변의 기업환경 개선사업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여기에 삼성은 해외 바이어 등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수원 화성(華城)과 연계한 해외 관광객 유치에 힘을 모으기로 했다. 수원시기업상생협력단은 향후 화성, 용인, 오산 등으로 넓혀 ‘경기남부권 경제공동협의체’로 발전시키는 밑그림을 짜고 있다.

또 수원시는 삼성디지털시티가 자리한 영통지역을 주거·상업·문화시설이 집중된 방사형 자족도시로 개발하는 내용의 2020 도시기본계획 변경안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공업지역으로 묶여있는 디지털시티 주변의 용도지역을 변경해 대규모 주거단지와 상업지구로 개발하기로 했다. 삼성은 8천억원을 투입해 1만 명 규모의 제3연구소를 건립하기로 했다. 단일 기업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R&D연구단지를 예고한 것이다. 또 디지털시티 주변에 삼성 계열사 직원 3만~4만 명을 수용할 대규모 오피스 단지(일명 ‘래미안타운’)를 삼성이 주도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 같은 계획이 완성되면 동수원권은 수원·용인·화성 등 삼성 벨트가 형성된 지자체들의 최대 자족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한때 백색가전 사업이 지방과 해외로 이전하면서 크게 위축됐던 이 일대가 연구·개발 중심의 새로운 경제 전초기지로 급부상하는 셈이다. 물론 삼성이란 단일기업에 대해 경기도와 수원시 등 지자체들이 나서서 ‘삼성시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수원시는 개의치 않는다. 수원시의 한 고위 관계자는 “기업에 대한 특혜 시비보다 그 혜택이 결국 누구에게 돌아갈 것이냐가 더 중요하다. 기업이 활동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어주면 소비력을 갖춘 인력이 늘어나고 이는 지역경제에 대한 기여로 순환하게 된다. 지역과 기업을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울산의 고령화가 보여준 투쟁의 역설


▎노사정위원회의 노동개혁안 대타협으로 울산은 또다시 파업의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자동차·중공업 등 민주노총 산하 거대 노조가 몰려 있는 울산은 과거부터 해마다 반복되는 파업으로 인한 몸살을 앓아왔다.
국내 대표 기업도시, 노동운동의 성지로 꼽히는 울산의 쇠락은 도시기업 구성원들의 역할에 대해 시사하는 바 크다.

지난 8월 한국은행 울산본부는 ‘울산지역 노동력의 연령 구성 변화와 향후 과제’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울산은 2010년에 인구의 7% 이상이 65세를 넘는 고령화사회에 진입했고, 2014년 기준 고령화율은 8.2%로 나타났다. 이는 전국 평균(13%)을 밑도는 수치로 전국 최하위 수준이다.

하지만 일하는 취업자로 범위를 좁히면 얘기가 달라진다. 1998년에는 취업자 연령대 비율이 20대 미만(26%), 30대(36%), 40대(24%), 50대(9%), 60대 이상(5%)으로 20~40대가 가장 많았다. 그러나 2014년에는 20대 미만이 14%, 30대가 23%로 10%포인트 이상 줄었다. 40대는 29%, 50대 24%, 60대 이상 10%로 조사됐다. 새로운 청년인구가 유입되지 않고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다. 한국은행은 특히 제조업, 상용직에서 이런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과거에 울산의 제조부문 대기업, 이를 테면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등에 입사한 정규직 신입 근로자들이 직업을 유지해왔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노령화가 진행될수록 생산성은 낮아지고 임금비용은 높아진다. 이런 구조가 고착된 것은 노조가 견고한 보호막을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울산은 파업의 도시였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춘투(春鬪)’가 연례행사처럼 벌어졌다. 공장은 가동을 멈췄고 근로자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노조의 강력한 투쟁이 근로자들의 ‘밥벌이’를 지켜주는 든든한 방패가 됐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는 새로운 고용을 가로막고 기업의 경쟁력을 깎아먹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이번 한국은행의 보고서가 시사하는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한동안 잠잠했던 울산에 다시 파업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의 노동시장 유연화 협상 타결에 반대해 총파업을 선언했다. 현대중공업을 포함한 조선 업종 노조연대는 현대기아차노조 연대회의와 함께 투쟁에 동참하기로 했다. 울산시 관계자는 “다른 지역의 경우 지역과 기업이 상생을 위한 긍정적인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의 대결문화가 부활하는 것은 지역경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청년과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를 높이는 서비스업 발전과 벤처기업 육성을 통해 제조업 부문의 고령화가 가져올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대안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기업은 도시와 함께 성장해야 한다


▎타협은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패권주의를 버려야만 가능하다. 상대를 공존의 파트너로 인식하는 게 첫 단추다. 지난 8월 31일 부산지역 노사민정 대표들이 ‘상생고용 화합의 비빔밥’을 만들고 있다.
기업이 불황의 늪을 벗어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은 도시일 수밖에 없다. 외국의 사례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는 흐름이다. ‘마케팅의 아버지’로 불리는 필립 코틀러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켈로그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 “앞으로 10년 뒤 글로벌 600개 도시가 세계총생산의 67%를 차지할 것”이라며 “기업은 이제 국가가 아니라 도시와 함께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펴낸 저서 <시장의 미래>(안진환·최정임 옮김, 일상이상)를 통해서다.

필립 교수에 따르면 2025년에 인구 500만~1천만 명을 보유하고 중간소득(중산층과 고임금 계층) 2만 달러 이상인 글로벌도시 26개 중 11개는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등 소위 브릭스(BRICs) 국가를 포함한 개발도상국에, 나머지 15개 도시는 선진국에 위치할 가능성이 높다. 글로벌 도시의 경제력은 국가를 압도한다. 공동저자 매킨지에 따르면 전 세계 8천 개 기업이 세계총생산의 90%를 담당한다. 그리고 이들 다국적 기업을 유치한 600개 도시가 세계총생산의 절반을 차지한다. 결국 기업이 살아야 도시가 살아나고, 도시가 살아나야 국가 경제력이 갖춰진다는 말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각국이 각종 경기부양책을 발표하며 침체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만 불황의 늪은 생각보다 깊다. 필립 교수는 그 원인을 “국가 차원의 경기부양책이 실제 시장에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기업은 도시 지역의 특성을 고려해 생산시설과 마케팅 거점을 구축해야 하고, 도시들은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도시의 바람직한 미래상을 설계하고 시민들에게 성장과 번영을 안겨줄 정책적 결정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가 말하는 기업도시의 11가지 조건은 이렇다. ▷도시의 시장 규모 ▷고소득 가구와 고급 인재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된 물류 역량 ▷도시 정부가 제공하는 다양한 인센티브 ▷산업단지 ▷공급망 ▷중앙정부의 규제완화 정책 ▷사회안전망 ▷기업 친화적인 정치 지도자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 인프라 ▷상업적 강점을 지닌 랜드마크다.

필립 교수의 이론을 국내로 좁혀 적용하더라도 위에서 열거한 조건은 변하지 않는다. 최근 정부가 대기업 주도의 지역경제발전을 이끌 창조경제센터를 전국 17개 지역에 구축 한 것은 ‘기업이 도시를, 도시가 국가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명제를 전제로 한 시의적절한 정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함정을 조심해야 한다. 바로 관료주의와 패권주의의 늪이다. 또 잊지 말아야 할 한가지 기본원칙이 있다. 노와 사, 지역사회의 끈끈한 신뢰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201510호 (201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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