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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근대화의 피땀 어린 100大 ‘경제문화재’ 탐구 

기업가정신, 진취적 기상의 원형 찾는다 

대한민국 신화를 만들어낸 개혁 의지와 패기는 어디로? 경제근대화 과정에서 우리 국민이 이룩한 위대한 유산의 도전정신을 발굴·기록해야

▎광복 70년 한국의 경제성장은 ‘인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적’이란 찬사를 듣는다.
국내외 곳곳에는 경제현대화의 과정에서 건설되거나 창조된 유형, 무형의 상징물이 많이 남아 있다. 이는 상호견제의 관계에 있는 자본과 노동이 협력한 결과이며, 지도자와 국민이 일치단결해 이룩한 기념비적 성과물이다. 선정과 보존, 교훈과 재미를 이끌어내는 콘텐트 구축작업이 시급하다.

광복 70년 대한민국의 경제는 비약적인 성장을 일궜다. ‘인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적’이란 극단적 찬사도 이젠 진부하게 느껴진다. 국내총생산 GDP는 지난해 1485조원으로 무려 3만1천 배 증가, 세계 13위 경제 규모로 성장했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 50년간 올린 수익률은 1만8200배. 대한민국은 이보다 1.7배나 더 가파르게 성장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아프리카의 가봉, 콩고보다 적었던 1인당 국민총소득은 420배나 늘었다.


▎동아건설이 완공한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해외 소재 한국의 경제문화재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업적이다.
고속성장의 궤적은 그러나 정점에 도달한 느낌이다. 어느새 OECD 주요국 중에서 잠재성장률 하락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로 전락했다. 국가채무는 530조원, 가계부채는 1100조원을 돌파했다. 중국과 미국으로부터 불확실성의 먹구름이 동시에 밀려들고 있고, 대기업·중소기업 모두 이대로 무너지는 게 아닌지 걱정하고 있다.

누적돼온 문제들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자영업의 위기는 일상이 되어, 가게 문을 열어도 3년 이상 생존하는 비율은 절반으로 떨어졌다. 10%를 넘는 청년실업률은 IMF 외환위기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보다 근원적인 성찰과 해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초심으로 돌아가는 ‘원점 정신’의 강조인데, 허창수 전경련 회장의 지난 7월 한 포럼에서의 발언도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허 회장은 “한강의 기적을 만든 자신감과 도전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며, ‘무에서 유 창조’의 원동력인 혁신 마인드를 되찾자”고 제안했다.

“리스크를 짊어질 용기와 배짱이 필요”

최근 ‘일본식 세계불황론’을 개진해 화제가 됐던 홍성국 대우증권 사장도 ‘엄혹한 상황’에 조응하는 ‘강인한 마인드’를 주문한다. 홍 사장은 “‘노 리스크 노 리턴’의 일본식 패턴으로는 정부도, 기업도, 개인도 해법이 없다”고 진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리스크를 짊어질 용기와 배짱”이란 점을 강조하고 있다.

‘세계적 불황’, 그것도 ‘장기적 불황’이란 진단을 기정사실화하면서 문제를 돌파하기 위한 새로운 창조적 도전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인호 한국무역협회 회장은 최근 가장 중요한 경제 주체인 기업의 역할을 강조하며 “국내외 경제상황 타개를 위해선 경제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개진했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얼마 전 국회연설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무기력의 극단을 질타했다.

“기업도, 정부도, 정치권도, 심지어 언론과 시민사회조차 도전과 열정보다는 기득권에 기댄 관성과 책임 떠넘기기가 팽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대한민국의 신화를 만들었던 그 개혁 의지와 패기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지금 우리가 겪는 현실의 위기보다 더 심각한 위기는 우리가 이 위기를 헤쳐나갈 지혜를 모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지혜를 실천할 용기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호 <월간중앙>과의 특별 인터뷰에 응한 강석훈 새누리당 의원은 더 높은 차원의 응전을 주문했다.(76쪽 인터뷰 기사 참조) 강 의원은 “위험에 도전하는 차원에 더하여 ‘혁신하려는 의지’, 막다른 길마저도 기회로 여길 수 있는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의 혁신정신이 덧붙여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의 의지가 강조된 새로운 경제 마인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바로 앙터프레너십(entrepreneurship), 기업가정신이다.

기업가정신, 진취적 기상의 용광로는 정작 우리 자신 안에 있다. 지난 70년 한국 경제발전과 전개의 배아(胚芽)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이야기다. 국내외 곳곳에는 경제현대화의 과정에서 건설되거나 창조된 유형, 무형의 상징물이 많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역대 정부가 주창한 경제정책이 창출한 모든 성과물이 포함된다. 이름하여 한국 현대사의 ‘경제문화재’다. 수출과 무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한국의 경제현대화 과정이 집약된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강석훈 의원은 “대한민국의 경제 현대화 과정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하나의 드라마”라며 “이는 상호 견제하의 관계에 있는 자본과 노동이 협력한 결과이며, 지도자와 국민이 일치단결해 이룩한 기념비적 성과물”이라 규정했다.

그간 경제근대화의 큰 흐름 속에서 명멸했던 인물과 상징적 구조물, 문물과 제도 변천의 혁혁한 역사는 단편적으로만 조명을 받았을 뿐이다. 이 위대한 유산을 관통했던 시대정신을 포획해 후대에 전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은 거의 시도되지 않았다. 이웃나라 일본은 경제산업성이 주도하여 지난 2007년 33개의 근대화산업유산군과 575개의 개별 근대화 산업유산을 선정, 발표했다. 경제산업성은 이 프로젝트를 위해 ‘산업유산활용위원회’를 설치하고, 일본 각지에 현존하고 있는 산업유산을 공모했다.

위원회는 공모에 응한 각 지역의 산업유산의 실태와 보전·활용 상황을 조사했다. 2007년 33건의 ‘근대화산업유산군’과 이에 관련된 ‘근대화산업유산 스토리’를 공표하는 등 콘텐트 구축작업을 완료했다. 일본 정부는 홍보활동, 보존방법과 활용방법의 구체화, 33건 이외의 새로운 근대화산업유산군의 발굴 등 근대 유산 프로젝트와 관련한 후속작업을 힘있게 추진하고 있다.(72쪽 기사 참조)

진보와 보수세력 모두에 자문 구해야

<월간중앙>은 2016년 신년호부터 한국 현대사의 ‘경제문화재’ 중 대표적인 것 100개를 선정해 이를 집중 취재해 보도할 예정이다. 객관적인 선정작업을 위해서는 여야 정치권과 학계, 경제계, 정부 관련 부처의 적극적 자문이 필요하다. 진보와 보수를 총망라하는 공정하고 적극적인 자문을 통해 불필요한 정치적 해석을 사전에 예방할 복안이다. 일본 사례에서 보듯 ‘근대화유산 활용위원회’나 ‘지식인위원회’, 또는 보다 통합적인 ‘선정과 활용, 홍보위원회’의 구성이 필요하다는 것이 <월간중앙>의 입장이다.

‘경제문화재’는 경제근대화 초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왕성했던 기업가정신을 국민대중과 경제인에게 촉구하고 진작하는 프로젝트다. 오래전 만들어진 경제근대화의 유산들은 이제 당시 상황을 증언할 핵심인사들을 찾기조차 힘든 상황을 맞았다. 이미 사망하거나 고령을 이르러 증언이 어려운 이도 상당수다. 콘텐트 구축 작업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이유다.

‘경제문화재’의 범위는 협소하게 규정할 필요는 없다. 명멸했던 인물과 상징적 구조물, 문물과 제도 변천을 모두 다룰 수 있다.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도 포함시키는 너른 시각이 필요하다. 무역입국을 통해 성장한 한국경제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매우 혁혁한 성과를 거두며 의미 있는 경제문화재를 양산했기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 회장을 역임한 한덕수 전 국무총리는 “경제문화재 탐구를 통해 구축된 콘텐트는 자라나는 세대에게 최고의 경제·역사 교과서가 될 것”이라며 “정부와 경제계, 언론과 국회가 힘을 합쳐 추진해야 할 중요한 과업”이라 강조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월간중앙>이 미리 선정해본 10개의 경제문화재를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1. 청와대 구관 수출진흥확대회의 - 무역입국의 꿈 태동한 ‘집념의 산실’


▎1967년 열린 박정희 대통령 주재 수출진흥확대회의.
1965년부터 박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가 매달 열렸다. 이 회의엔 정부와 여당을 비롯해 경제단체와 금융기관·종합상사·연구기관까지 100명이 넘게 참석했다. 수출 전망과 증대 방안을 보고받고 수출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일 방안을 도출하는 자리였다.

참석자들은 수출의 애로사항을 검토하고 수출을 늘릴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했다. 수출업자들이 수출을 늘리기 위해 무엇 무엇이 필요하다고 요구하면 박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관계자가 답변을 하게하고 어지간하면 들어주라고 했다. 자금공급을 늘려주고 각종지원을 더 해달라는 요구가 주종을 이루었다. 재정안정계획 때문에 자금을 빠듯하게 운용해야 하는 금융당국은 항상 수세에 몰렸다. 수출목표를 책임지는 상공부는 수출업자와 한편이 되어 재무부의 긴축 때문에 수출을 못한다고 공세를 퍼부었다. 재무부는 수출한다고 돈을 풀면 인플레가 되어 수출기반을 망친다고 반격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수출지원도 필요하지만 물가안정도 생각지 않을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리고는 재무장관을 청와대로 따로 불러 손으로 빨래를 쥐어짜는 시늉을 하며 “너무 쥐어 짜지만 말고 좀 풀어줘”하고 설득했다고 전해진다. 이 회의는 지금은 헐려 없어진 청와대 구관에서 열렸다.

2. 포항제철 제1고로 - 타이타닉호 1천 척 쇳물 생산한 ‘민족 고로’


▎포스코 제1고로에서 쇳물이 나오는 모습.
1968년 5월 포항 영일만 바닷가에 연건평 198㎡(60평)짜리 2층 가건물이 들어섰다. ‘롬멜 하우스’라 불린 포항제철 건설본부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사막의 여우’로 불리던 독일 롬멜 장군의 야전사령부처럼 황량한 곳에 버려진 처지라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창립 요원은 34명. 제철소 시설을 실제로 구경이라도 해본 이는 박태준을 포함해 단 두 명이었다. 현장을 찾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라고 혼잣말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포항제철소의 터줏대감 제1고로가 아직도 가동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1973년 6월8일 조업을 시작으로 두 차례 보수를 거친 뒤 1993년 2월부터 다시 조업을 재개했으니, 지금까지 22년 동안 쉬지 않고 쇳물을 쏟아낸 셈이다. 첫 조업시기부터 41년 동안 1고로가 생산한 쇳물은 모두 4700만 톤. 이는 타이타닉호 크기의 선박을 1천 척 이상 만들 수 있는 규모라고 한다. 1고로는 포스코가 만든 첫 쇳물생산 설비여서 ‘민족 고로’ 또는 ‘경제 고로’라는 별칭도 얻었다. 제철소의 고로는 특성상 고열·고압 때문에 내화물 마모 등으로 15년 이상 수명을 유지하기 힘들다. 포스코는 1고로의 장기 가동이 가능한 것은 철저한 설비관리로 안정적인 조업상태를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 포스코가 내외의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제1고로의 초심만 견지한다면 능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3. 경부고속도로 - 77명의 희생으로 완수된 ‘국토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 회덕인터체인지 1977년의 모습.
박정희 정부는 1968년 2월 1일 경부고속도로 공사에 착수, 2년 5개월만인 1970년 7월 428㎞의 도로를 완공했다. 총 공사비 429억원으로 세계 역사상 가장 적은 돈으로, 가장 빠른 기간에 완성한 도로였다. 이 엄청난 능력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우리는 할 수 없다”는 체념의 굴레를 벗어난 계기가 됐다. 고속도로 개통으로 1962년 울산 공업단지가 만들어 낸 많은 상품이 서울-부산을 오가며 수출되기 시작했다. 남한 전체가 ‘일일생활권’ 안에 들어왔다.

공사 시작 전 야당의 반대가 심했다. 이 도로의 중요성을 통찰하는 의원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공업입국·수출진흥의 국가 대동맥이 될 것이란 점을 예측하지 못했다. 공사 기간 중 77명이 희생당했다. 장비도 부실했고, 폭약 사용에도 서툴렀다. 그들의 희생으로 대공사가 완료됐다. 공사를 맡았던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의 업적도 컸다. 그 공로를 인정받은 정 회장은 후일 “조선소를 만들라”는 박 대통령의 권유를 받았다. 고속도로 건설이 세계 제1의 조선국이 되는 단초를 열었다.

4. 고리 원전 1호기 - 에너지공급 신기원 이룬 ‘최초의 상업 원자로


▎고리원전 1호기.
고리 1호기는 1971년 11월 착공해 1978년 4월 운전을 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용 원자로다. 2007년 6월 수명 만료로 가동이 중단되었으나, 2008년 1월 정부가 10년간 재가동을 승인해 다시 운영됐다. 그러다 올 6월 영구 정지가 결정돼 2017년 6월부터 가동이 정지된다.

고리 1호기는 설비용량 58만㎾로, 1969년 계약협상 당시 국내 총 발전설비용량 184만㎾의 31%를 차지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건설 공사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비 429억원의 3배가 넘는 1560억원이 투입됐다. 당시엔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사업으로 기록됐다. 건설기간 중 우여곡절도 많았다. 우선 석유파동으로 인한 물가상승 압박을 받았다. 영국의 발전기계 발주처에서 노동자가 장기간 파업해 공기가 연장됐다. 1977년 6월 26일 3만7천㎾의 출력으로 고리1호기에서 생산한 전기가 흐르기 시작했고, 이듬해 4월 29일 역사적인 상업운전이 이뤄졌다.

5. 서울 지하철 1호선 - 서민 애환 싣고 달리는 ‘지하 명물 1호’


▎1974년 8월 15일에 준공된 서울지하철 1호선.
한반도에서 지하철이 생긴 것은 오히려 북한이 먼저다. 1961년에 착공된 평양지하철(부흥역~붉은별역)이 1973년 9월에 완공, 개통된 것이다. 서울 시내에는 1968년까지 노면전차가 운영됐으나, 1968년 11월 30일에 운행이 중단돼 철거됐다.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지하철은 서울시 지하철 1호선 서울역~청량리 7.8㎞ 구간으로, 1971년 4월 12일 공사가 시작돼 1974년 8월 15일 개통하게 됐다. 세계 최초 지하철 개통 이후 약 110년 만의 일이다.

1971년 착공식 때는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 육영수 여사도 나란히 참석했다. 박 대통령과 육 여사는 이후 시간만 나면 지하철 공사현장에 들렀다. 1974년 8월 15일 준공식 날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육 여사가 광복절 행사에 참석했다 흉탄에 맞아 서거한 것이다. 오전 10시 광복절 행사를 마친 뒤 박 대통령과 육 여사는 서울 청량리역사로 자리를 옮겨 준공식에 참석할 계획이었다. 준공식은 대통령 부부가 참석하지 못한 채 행해져야 했다. 축하해야 할 준공식 자리였지만, 국상(國喪)이었다. 현장의 근로자들 모두 많이 울었다고 한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은 서민의 애환이 늘 가득한 곳이다. 김민기의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15년 동안 7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 서울에 온 옌벤 처녀가 다양한 군상과의 만남을 통해 서울의 진면목을 발견해가는 과정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지하철 1호선 건설을 시작으로 ‘출퇴근의 혁명’도 이뤄졌다. 오늘도 서울시민은 지하철 안에서 울고, 또 웃는다.

6.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 중공업 성장의 서막 알린 ‘조선한국 프로젝트’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선박 진수식.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승부수는 유명하다. 1971년 9월 현대중공업 건설을 위한 차관 도입을 위해 세계적 선박 컨설턴트사 A&P 애플도어의 찰스 롱바톰 회장에게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여준 장면이 압권이다.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앞서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다”는 말로 추천서를 받아냈다. “배에 하자가 있으면 원금을 돌려주고 계약금에 이자까지 주겠다”는 자신감으로 아직 건설되지도 않은 조선소의 유조선을 두 척이나 팔았다. 이렇게 1974년 탄생한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는 국내 중공업 분야 성장의 서막을 알렸다.

한때 점유율 1위에 올랐던 한국 조선업계는 저가 공세를 편 중국에 밀려 2012년부터 1위 자리를 내줬다. 바다에서 석유나 가스를 시추하고 생산하는 최첨단 고부가가치 설비인 해양플랜트는 조선업의 미래 먹거리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설계와 주요 장치는 모두 외국에서 사와 조립하는 수준이어서 오히려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조선업계는 지금 해양플랜트 설계 능력을 키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고 정주영 회장의 배짱과 뚝심을 바탕으로 지혜를 모으면 재기의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한다.

7. 가발공장 여공 - 뛰어난 솜씨, 인내의 정신 발휘한 ‘무형의 문화재’


▎1960년대 가발공장 여공들의 모습.
가발은 아이러니컬하게 한국 근대화를 이끌던 아이콘이었다. 완제품 인모 가발을 수출한 것은 1962년부터다. ‘고장 난 시계나 머리카락 삽니다’는 1960~70년대 동네 골목마다 흔히 들을 수 있던 소리였다. 이 머리카락들은 물론 가발회사에 팔려나갔다. 가체를 만들었던 한국 여성들의 뛰어난 솜씨로 다양한 가발이 미국으로 수출됐다. 1970년에는 가발 품목이 전체 수출의 10%를 차지했다. 가발공장이 수백 개에 달했으며 가발회사 여공 수는 2만 명을 상회했다.

당시 미국이 수입한 가발 중 50%가 한국산이었다. 화학 섬유로 만든 가발도 있었지만 인모를 당해내지 못했다. 당시 S통상은 최대 가발생산업체로 최 모 사장은 1971년 종합소득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가발공장에 다니던 여공들에 대한 대우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1970년대 이후 가발산업은 차츰 사양화 길을 걸었다. 노동집약 산업의 한계였다. 최근 들어 가발산업이 다시 급성장하고 있다. 매출이 2004년 500억원에서 2014년 1조2천억원을 넘어선 것으로 업계는 추정하고 있다.

3차원 스캐너, 형상기억 등 기술과 디자인이 접목된 새로운 패션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럼에도 1960~70년대 여공들의 뛰어난 솜씨와 헌신, 인내의 정신은 반드시 기록돼야 할 무형의 경제문화재다.

8. 전태일 분신과 평화시장 - 노동자 각성 일깨운 ‘한국 노동운동의 성지’


▎서울 평화시장의 전태일 동상.
1970년 전태일 분신사건은 나라 안팎에 큰 충격을 줬다. 서울대 법대생들은 전태일 유해를 인수해 학생장을 거행하겠다고 나섰고, 상대 학생 400여 명은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전국 대학가에서는 전태일 추도식이 열렸고,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서울대는 무기한 휴업령을 내렸다. 이 전태일 분신사건으로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탄생했고, 이후 1970년대에만 2500개의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전태일 분신은 한국 노동운동사의 새로운 전기를 연 계기가 됐다. 양과 속도를 강조한 경제개발 과정에서 축적된 여러 모순이 폭발한 것이었다.

1960년대 후반 봉제공장 800여 개가 밀집해 있던 평화시장엔 2만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다. 대부분 농촌 출신의 14~24세 여성이었다. 환기장치 하나 없고 햇빛조차 들지 않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하루에 14시간 이상 허리도 펴지 못하고 일했다. 2천 명이 화장실 3개를 함께 사용할 만큼 환경이 열악했다. 평당 4명 정도의 노동자가 원단 더미에서 나오는 포르말린 냄새와 옷감에서 쉴 새 없이 나오는 먼지를 마셔가며 눈앞에 켜 있는 백열전등에 눈이 충혈된 채 일해야 했다. 좁은 작업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만든 다락방 때문에 작업장에선 허리도 펴지 못하고 걸었다.

전태일이 산화한 뒤 평화시장의 다락방이 철거되기 시작했다. 평화시장에서 인근 시장으로 또는 주택가로 옮겨가는 공장이 늘어났다. 1980년대 중반쯤엔 평화시장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이젠 그런 공장들도 중국산 제품에 밀려 대부분 문을 닫는 실정이다. 전태일과 비슷한 시기에 일했던 노동자는 지금 평화시장에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9.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 ‘5대 불가론’ 극복한 ‘삼성 도전정신의 상징’


▎경기도 화성 소재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내부.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1974년 당시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였던 이건희 삼성 회장이 사재로 한국반도체 부천공장의 지분 50%를 인수하면서 시작됐다. 삼성 측은 “당시 이 회장이 직전 겨울 혹독한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반도체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며 회사를 인수했다”고 설명했다.

1983년 고(故) 이병철 회장이 ‘2·8 도쿄선언’을 통해 반도체산업에 대규모 투자의사를 밝혔다. 주변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일본의 미쓰비시 연구소가 한국의 작은 내수시장과 빈약한 기술 등 5가지를 지적하며 ‘5대 불가론’ 보고서를 낼 정도였다. 같은 해 삼성반도체가 64K D램 개발계획을 내놨을 땐 삼성 내부 직원들까지 반대했다. 이 회장은 반대보고서를 작성한 직원 모두를 64K D램 개발팀으로 발령냈다. 당시 삼성반도체의 기술력은 디지털시계에 들어가는 반도체 칩을 생산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64K D램은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해 겨울 삼성은 불과 6개월만에 64K D램의 생산·조립·검사까지 모든 공정을 완전히 개발했다.

고비 때마다 시장 흐름을 내다본 결정이 주효했다. 대표적인 게 D램의 생산 방식 중 트렌치(Trench) 방식과 스택(Stack) 방식이 대립하고 있을 때 삼성은 과감히 스택 방식을 선택했다. 삼성과 달리 트렌치 방식을 선택한 일본의 도시바 등은 이후 경쟁력 악화로 경쟁에서 밀렸다. 1990년대초 D램 업계 최초로 200㎜ 웨이퍼 양산을 결정한 것도 과감하고 효율적인 투자로 평가받는다. 선두업체가 투자를 주저하고 있을 때 과감한 선행투자를 진행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92년 삼성전자는 메모리반도체 분야 세계1위로 우뚝 올라섰고 23년째인 올해까지 1위를 유지하고 있다.

10. 개성공단 - 경제협력 넘어 통일시대 견인할 ‘민족의 장터’


▎개성공단의 한 신발 제조공장에서 작업에 열중하는 북한 근로자들.
2004년 12월 15일 개성공단의 가동이 시작됐다. 현대아산과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 사이에 개발합의서가 체결(2000년 8월 22일)된 지 4년 4개월, 분단 59년 만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북한이 몇 차례 개성공단 출입을 제한하고 한국 정부가 적대적 대북정책으로 돌아서는 등 우여곡절을 겪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중대한 의의를 지닌 민족경제사의 현장이다. 개성공단은 단순교역이나 위탁가공 등 초보적 수준에 머물렀던 이전의 경제협력수준을 넘어섰다. 직접투자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혔다. 물자와 자본뿐 아니라 인적 교류의 영역도 과거와 차원이 달라졌다.

북한에 있어 개성은 군사요충지란 점을 주목해야 한다. 군사적 위협감은 남북 모두에게 마찬가지지만, 현실적으로 북한의 안보위기의식은 남한보다 예민하다. 개성을 남한 기업의 ‘특구’로 설정한 것은 김정일만이 결정할 수 있었던 사안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개성공단 분양·가동 현황은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125개 기업이 입주해 공장용지 입주율이 43.1%에 달한다. 북측 근로자 5만3947명과 우리 측 815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북측 근로자의 학력은 고졸이 84%, 전문대졸 7.6%, 대졸 8.4%로 나타났다. 북측 근로자는 40대가 39.6%로 가장 많았으며, 30대 30.1%, 20대 20.5%, 50대 9.1% 순이었고 평균 연령은 38.5세였다. 여성이 68.2%였으며 남성이 31.8%였다. 또 하루 평균 430명이 방문하고, 차량은 하루 328대가 오간다. 또 2006년 이후 26억6천만 달러의 누적 생산을 했으며 수출은 2억6천만 달러에 이른다.

북측 근로자의 높은 교육 수준 및 손재주, 동일 언어 사용, 낮은 이직률을 고려할 때 상대적으로 저렴한 인건비가 개성공단의 강점이다. 물류비용이 저렴하고 토지 분양가가 낮다. 무관세·세제 혜택, 경협보험·교역보험 등 당국의 정책적 지원도 풍부하다. 전력·가스·용수 공급, 폐수·폐기물 처리, 통신, 도로 등 최적의 인프라가 완비돼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에 개성과 같은 경제특구가 5∼6개 정도 더 생기면 남북 관계는 거의 혁명적 수준으로 변화가 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201510호 (201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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