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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특별기획│사후 70년 윤동주 정신을 다시 본다] 판결문에 드러난 윤동주의 민족의식 

“조선민족인 자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패망에 복무하라” 

송우혜 소설가·<윤동주 평전> 저자
일제 통치를 고유 민족문화 절멸의 위기로 파악 … 재판정서 조선 독립 열망과 소신 가감 없이 쏟아내

▎일본 유학 첫해인 1942년 여름방학에 귀향한 윤동주(뒷줄 오른쪽). 왼쪽이 윤동주 조부의 육촌 동생인 윤길현이다.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 왼쪽이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의 동생인 윤영선이다. 오른쪽은 윤영선의 조카사위인 김추형
서정의 시학은 치열한 저항의 사상을 품고 있었다. 그의 ‘독립운동’ 사실을 심각하게 의심했던 한때의 흐름은 무지와 오류의 소산이었다. 독립운동가 윤동주의 초상은 일제의 취조문서, 판결문 안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남아 있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 통로가 있다. 한 시대를 이해하는 방식 역시 그러하다. 여기 일제 강점기에 일본 사법당국이 한 조선 청년에게 선고한 판결문이 있다. 시인 윤동주(尹東柱)는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도오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 유학 중이던 1943년 7월 14일에 ‘조선독립운동’의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4년 3월 31일에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형(미결구류일수 120일 산입)>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2월 16일에 옥사했다.

1970년대 중반 한국 문단에 돌연 이상한 열풍이 불었다. 국민시인으로 정립된 윤동주의 위상을 깎아내리고 그의 ‘독립운동’ 사실을 심각하게 의심하는 조류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즉각 대세가 된 것이다. 그즈음 한 문학잡지에서 ‘윤동주 특집’을 마련했는데, 거기 글을 쓴 당대의 내로라하는 논객 10명 중 무려 8명이 그쪽이었다.

“윤동주는 평생 공부만 한 학생이었는데, 언제 독립운동을 했다는 건가!”

“재판에서 불과 ‘징역 2년형’을 받았다는데, 그가 진짜 독립운동을 했다면 그 정도로 끝났을 건가?”

이렇게 전개된 그들의 논지를 보면서 필자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독립운동사를 깊이 공부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 동안 독립운동사 관계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고, 또 우리 집안 어른인 송몽규(宋夢奎) 선생의 행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고종사촌형(윤동주보다 3개월 먼저 태어남)이자 평생의 동료였고, 또 같이 유학하고 있던 교토에서 같은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재판 받고 함께 후쿠오카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나란히 옥사한 분이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윤동주를 알려면, 반드시 송몽규를 먼저 알아야 한다. 송몽규의 과거 경력을 알지 못하면 윤동주의 독립운동 사실을 의심하는 게 당연할 정도로 송몽규와 윤동주는 서로 매우 밀접하게 얽힌 삶을 살았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운명적 만남


▎1944년 3월과 4월 각각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윤동주와 송몽규에 대한 일제 법원의 판결문.
송몽규는 1917년에 9월에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명동학교 교사이던 부친 송창희 선생이 윤동주의 고모와 결혼하고 처가살이를 하고 있을 때여서, 그와 윤동주는 한 집에서 석 달 간격으로 태어났다. 그는 18세였던 1935년 초에 용정에 있는 4년제 미션계 중등교육기관인 은진중학교를 중퇴하고, 중국 남경에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 한인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 군관학교는 항일무력투쟁을 치를 한국 독립군 장교들을 양성하기 위한 것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최초로 공식 설립된 임정 직할 군관학교였다.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요청에 의해 중국 장개석 정부가 전적인 지원을 했는데, 체제상 중국정부가 운영하는 낙양군관학교의 ‘한인반(韓人班)’이라는 형식으로 1934년 2월에 개교했다. 그러나 한인군관학교의 존재를 알게 된 일본정부의 강력한 항의로 개교한 지 1년 8개월여 만에 문을 닫았다. 당시 한인군관학교에 관한 정보가 모두 일본 정보당국에 노출된 까닭에 폐교 이후 중국 각지로 흩어진 학생들이 속속 일경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신문을 받으면서 무참한 고통을 겪었다.

송몽규도 1936년 4월 10일에 중국 제남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일제 공안당국은 중국에서 체포한 학생들을 모두 조선의 본적지 경찰서로 압송하여 가둬 놓고 취조했기 때문에, 북간도 명동촌 출생인 송몽규도 그해 6월 27일에 부친의 본적지인 조선의 웅기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는 그해 8월에 청진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신문 받다가 9월에 웅기경찰서로 다시 보내져서 9월 14일에 석방되었다. 중국에서 일경에 체포된 이후 만 5개월여 동안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일제 공안당국에 의해서 갖은 고통을 겪은 것이다. 그가 그 시기에 겪었던 참혹한 고통을 알려주는 증언이 있다. 같은 집에서 살았던 윤동주의 누이동생 윤혜원 권사님의이야기다.

“몽규 오빠는 경찰서에서 풀려나 집에 돌아온 후로는 가슴이 자꾸 안으로 구부러든다면서 항상 어깨를 반듯이 하여 가슴을 펴느라 신경을 썼지요. 그래서 가슴 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잘 때 베개를 베지 않고 잤어요.”

당시 송몽규가 재판을 거쳐 감옥에 가지 않고 석방된 데는 이유가 있다. 당시 북간도는 만주국 영토에 속했다. 따라서 법 논리상 만주국 국민인 송몽규가 중국에 가서 군관학교를 다닌 것을 일본국 법률로 처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방된 이후 그는 즉각 일본 공안당국의 ‘요시찰인(要視察人)’ 명부에 올랐고, 늘 철저하게 감시당했다. 그 시대에 ‘요시찰인’이라 하면 “말만 들어도 우는 애가 울음을 그친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악명 높았던 고등계 형사들의 밀착 감시 대상이었다.

1938년 봄, 윤동주와 송몽규는 연희전문학교(이하 ‘연전’)의 입학시험을 치르러 서울에 올라갔다. 그해 2월에 윤동주와 송몽규는 용정에서 각기 5년제와 4년제 중학교를 졸업했다. 이들이 이때 나란히 중학교를 졸업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송몽규는 1935년 초에 중국에 가서 임시정부 군관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학교가 폐교된 뒤 1936년 4월에 제남에서 일경에 체포되었고, 조선으로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다가 그 해 9월에 석방되어 북간도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직접 겪은 한인군관학교사건을 통해 조선인이 독자적인 무력항쟁으로 일본을 이겨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계획은 성공 가능성이 너무도 희박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는 방향을 바꿔서 대일항쟁의 수단과 방법을 문화 쪽에서 찾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했다.

송몽규는 본래 문화 쪽의 기질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은진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8세 때, 본국 서울에서 발간되던 <동아일보>의 1935년도 신춘문예의 ‘콩트’ 부문에 응모하여 당선했을 정도였다. 당시는 신문사 수도 적었고 신춘문예 제도의 권위가 대단했던 때라서 당선은 매우 큰 명예였다. 그런데도 그는 당선의 영광을 초개처럼 던지고 그해 초에 중국으로 가서 임정 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일본 공안당국의 감시망 속으로


▎이준익 감독과 배우 강하늘, 박정민이 만나 윤동주의 삶을 그린 영화 <동주>가 올해 개봉됐다. 윤동주로 분한 강하늘이 섬세한 감성의 시인 역을 맡아 열연했다.
이제 문화투쟁으로 방향을 바꾼 그는 자신이 진학해야 할 상급학교로 서울의 ‘연전 문과’를 선택했다. 두뇌가 매우 뛰어났던 그는 4년제 출신이 치르는 특별입학시험을 통해서 연전 문과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면 2년에 걸친 학업 공백을 1년 줄일 수 있게 된다. 윤동주 역시 1938년 2월에 ‘중학교 졸업생’이 되어 그해 4월 두 사람은 나란히 연희전문에 입학했다.

연전 4년의 재학기간 동안, 윤동주와 송몽규는 매우 알차고 만족스러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들이 연전을 졸업한 날은 1941년 12월 27일, 졸업식 석상에서 송몽규는 우등상을 탔다. 본래 학제로는 1942년 3월에 졸업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감행한 선전포고 없는 진주만 기습으로 미일전쟁(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뒤라서 ‘전시 학제 단축’이라는 명목으로 졸업 시기가 3개월 당겨졌다. 조선 천지를 뒤흔든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령’이 1940년 2월부터 실시되고 있었지만, 윤동주와 송몽규는 연전을 졸업할 때까지 그에 응하지 않았다.

당시 두 사람은 일본에 유학하여 공부를 더하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일본 유학을 위해서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은 ‘창씨개명’ 신고였다. 그들이 연전에 가서 창씨개명계를 계출한 결과, 이름이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와 소무라무게이(宋村夢奎)로 바뀌었다. 그 무렵 윤동주는 창씨개명계를 연전에 계출하는 데 따른 격심한 고통과 고뇌를 아프게 담은 저 유명한 시 ‘참회록’(1942. 1. 24)을 썼다.

그들이 이미 졸업한 연전에 창씨개명계를 계출한 이유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지 않으면 일본에 건너가는 허가장에 해당하는 ‘도항증명서’ 등의 서류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압박과 압력을 못 이긴 각 가문에서 창씨개명을 하여 일본식 이름을 당국에 신고한 결과, 공문서 상에서 해당 가문에 속한 사람들 전체의 공식 이름이 바뀌었다. 따라서 연전에도 창씨개명계를 계출하여 일본식 이름으로 일치시키지 않으면, 호적등본 등의 공문서와 연전 서류상의 이름이 서로 다르게 되어 상급학교 진학이 불가능했다.

윤동주와 송몽규가 목표로 삼은 대학은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이었다. 극심한 학벌 차별 사회였던 당대의 일본에서 ‘제국대학’은 최고의 권위였고, 특히 현재 수도인 도쿄에 있는 도쿄제대(東京帝大)와 과거의 수도였던 교토에 있는 교토제대는 제국대학 중의 제국대학으로서 그 명성이 하늘을 찔렀다. 일본의 수재들도 그 두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7, 8년에 걸친 재수까지 불사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들은 출신교가 비정규 코스에 해당한 ‘전문학교’라서 정규 코스 출신자들의 입시에 앞서 먼저 시행되는 특별입학시험 대상인 ‘선과(選科)’ 지망생으로 입시를 치렀다. 출신교가 비정규 코스일 경우, 연전에서는 ‘별과’라는 칭호로 구분했는데, 일본의 대학들에서는 ‘선과’라는 칭호를 써서 구분했다. 현재 일부 연구자들이 그 시대에 일본의 대학들에서 사용된 ‘선과’라는 칭호는 요즘의 ‘청강생’과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전혀 사실과 다르다.

응시 결과 송몽규는 문학부 사학과 합격, 윤동주는 불합격이었다. 그 역시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그 시대의 일본 대학 입시제도를 잘 알고 있던 문익환 목사는 “당시 연전 출신인 송몽규가 경도제대 입시에 합격한 것은 하늘의 별 따기를 한 것”이라고 술회했다. 교토제대 입시에서 실패한 윤동주는 도쿄로 가서 성공회 계열의 기독교 대학인 릿쿄대학(入敎大學) 입시에 응시하여 영문학과에 합격했다. 출신교가 비정규 코스인 ‘연희전문학교’였기 때문에 본과보다 합격이 더 어렵고 힘든 ‘선과’ 지망생으로 응시하여 합격한 것이다.

그들이 합격한 대학에 입학한 날은 송몽규가 1942년 4월 1일이고 윤동주는 1942년 4월 2일이었다. 그러나 윤동주의 릿쿄대학 시절은 한 학기로 끝났다. 2학기에는 교토에 있는 기독교 대학인 도오시샤대학(同志社大學) 문학부로 전학했기 때문이다. 송몽규가 있는 교토로 간 윤동주, 그것은 요시찰인으로서 늘 감시되고 있던 송몽규에 대한 일본 공안당국의 감시망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과 같은 일이었다.

“징병제를 민족 무력 양성에 활용하자”

이 시기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실시를 눈앞에 두고 있던 매우 특수한 비상시였기 때문이다. 일본정부는 1937년 7월에 시작한 중일전쟁과 1941년 12월에 시작한 미일전쟁으로 장기전을 치르면서 날이 갈수록 전쟁 수행에 힘이 부쳤다. 군수물자가 너무도 부족했고, 무엇보다도 전투원 부족 현상이 매우 심각했다. 그간 일본의 전체 가정에서 병사들을 뽑아 보낸 결과 가족 중에서 해외의 전쟁터에서 죽은 전사자나 다친 부상자가 없는 집이 없을 만큼 인적 피해가 막심했다.

일본정부는 전투원 절대 부족 현상을 식민지의 조선인을 징병하여 해결하려는 정책을 세웠다. 그간 식민지 출신들은 믿을 수가 없어서 병사로 뽑지 않았는데, 이젠 워낙 다급해서 그런 문제점조차 꺼릴 상황이 아니었다. 일본정부는 1942년 5월부터 ‘조선인 징병제’ 실시 추진에 관한 정책 방향과 규정들을 단계적으로 발표하며 선전하다가, 1943년 3월에 드디어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를 1943년 8월 10일부터 시행한다”고 공표했다.

당시 친일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그 정책을 두고 “조선인들을 자기들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세우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매우 분노했다. 그러나 송몽규는 전혀 달랐다. 대일무력항쟁에 투신하려고 임정 군관학교에 가서 군사훈련을 받았으나 여건 미비로 중도에 실패한 경력이 있는 그는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매우 반기고 찬양했다. “조선인은 종래 무기를 알지 못했지만 징병제도의 실시로 새로운 무기를 갖춘 군사지식을 체득하게 되면 장래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이 패전에 봉착하게 될 때 민족적 무력 봉기를 결행하여 조선 독립을 실현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제도는 조선 독립을 실현하는 데 일대 위력이 될 것이다”라는 논리에서였다. 송몽규는 적극적으로 그런 논리를 주변에 퍼뜨렸다. 보다 많은 조선인들이 자신과 같은 관점에서 그 제도를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윤동주는 그에 적극 찬동했다.

송몽규의 그런 행위는 당연히 그를 밀착 감시하고 있던 특고경찰의 감시망에 걸려들었다. 당시 일본 공안당국이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앞두고 가장 우려했던 것이 바로 조선인들이 그런 식의 대응을 하려고 들 위험성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그것은 너무도 위험하고 너무도 불온한 대응이었다. 그래서 그런 소신을 가진 자들을 사회로부터 강제 격리시키기로 결정했다.

1943년 7월 10일. 교토에서 드디어 사건이 터졌다. 조선인 징병제 실시 날짜가 공표된 1943년 3월로부터 불과 4개월이 지난 그때, 조선인 징병제 실시가 시작되는 날인 1943년 8월 10일을 불과 1개월을 앞둔 그때, 일본 특고경찰은 송몽규를 체포했다. 7월 14일에는 윤동주를 비롯한 다른 관련자들도 체포되었다.

윤동주·송몽규, 독방에서 복역하다 차례로 옥사


▎숭실중학교 시절의 윤동주(뒷줄 오른쪽). 가운데 안경 쓴 이가 윤 시인의 동창생 문익환 목사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9개월에 가까운 기간 동안 구속된 상태로 특고경찰의 취조와 검사의 신문을 받은 끝에 교토지방재판소에서 각기 따로 재판을 받았다. 윤동주에게는 1944년 3월 31일에 ‘징역 2년형(미결구류일수 120일 산입)’이 선고되었고, 송몽규에게는 1944년 4월 13일에 미결구류일수 산입이 전혀 없는 ‘징역 2년형’이 선고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출옥 예상일은 ‘윤동주 1945년 11월 30일, 송몽규 1946년 4월 12일’이었다. 그들의 출옥 예상일을 전해들은 북간도 고향에서는 ‘윤동주 징역 2년 형, 송몽규 징역 2년6개월 형’을 선고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후쿠오카 감옥으로 이송되어 독방에서 복역하다가 차례로 옥사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송몽규는 1945년 3월 7일에 운명했다.

우리 국민의 의식 속에는 일제 강점기의 사법체계에 대한 오해가 있다. 일제 사법당국이 조선독립운동에 관한 사건이라 하면 덮어놓고 엄청난 중형을 가했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한때 ‘윤동주 시인이 <조선독립운동> 관련으로 <징역 2년형>을 받았다’는 사실을 두고 “형량을 보니 별것 아니었겠군!”하는 반응이 큰 공감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막상 일제 재판정에서 선고된 형량은 우리의 통념을 깨는 경우가 많다. 특히 사상범죄의 선고 형량이 예상 외로 가볍다. 그러나 사상 범죄라 해도 일제 공안당국이 사건을 만들어 신문을 거쳐 투옥하는 과정에서 잔혹한 고문으로 불구자가 되거나 사망자가 나오는 일이 흔했다.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독립운동사 관계 판결문들을 모아 놓은 <독립운동사자료집>을 읽어보면 놀라게 된다. 재판정에서 당당하게 처신한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던 반면, 그보다 더 많은 판결문의 주인공들이 재판정에서 자신의 독립운동 사실을 부인하거나 후회하면서 선처를 바라고 있었다. 너무도 힘들었던 그 시대의 고통과 역경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윤동주에 선고된 판결문은 어떠한가.

윤동주와 관련된 일제의 공문서는 두 가지다. 하나는 특고경찰(특고)이 그를 체포하여 취조한 결과를 정리한 ‘취조문서’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재판한 교토지방재판소의 ‘판결문’이다. 특고의 취조문서는 이 사건을 ‘재경도(在京都)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고 명명했는데, 사건 개요 설명이 “중심인물인 송몽규는…”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읽어보면 실로 눈과 마음이 모두 시원할 정도다. 그 악명 드높았던 특고의 신문을 받으면서도 송몽규나 윤동주 모두 의연하고 당당하기 그지없다. 특고를 상대로 자신들이 갖고 있던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과 대책과 소신을 가감 없이 쏟아놓았다.

취조문서와 판결문에 등장하는 이 사건 관련자는 모두 7명이다. 그들 중에서 1943년 12월에 교토 검사국으로 송국된 사람은 송몽규, 윤동주, 고희욱, 3명이었다. 그러나 특고의 수사관행으로 보아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특고에 잡혀가서 크게 고생한 뒤 석방되었을 것이다. 윤동주에게 선고된 판결문을 상세히 살펴보자.

1. 윤동주가 조선 독립을 원한 까닭

“…(윤동주는) 일찍이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고 있었는데 …우리(일본)의 조선 통치의 방침을 보고 조선 고유의 민족문화를 절멸(絶滅)하고 조선민족의 멸망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여긴 결과, 이에 조선민족을 해방하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제국(일본제국)통치권의 지배로부터 이탈시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밖에 없으며…”

2. 조선 독립을 위한 방법론

“조선민족의 현재 실력 또는 과거의 독립운동 실패의 자취를 반성하고 당면 조선인의 실력과 민족성을 향상하여 독립운동의 소지(素地)를 배양하도록 일반 대중의 문화 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3. 현재 일본 상황에 대한 인식

“대동아전쟁의 발발에 직면하자 과학력이 열세한 일본의 패전(敗戰)을 몽상(夢想)하고 그 기회를 타서 조선독립의 야망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망신(妄信)하여 더욱더 그 결의를 굳히고”

4. 조선인 징병제 실시에 관한 생각

“조선에 있어서의 징병제도에 관하여 민족적 입장에서 상호 비판을 가하고 그 제도는 오히려 조선독립 실현을 위해 일대 위력을 가할 것이라고 논단(論斷)하고”

“조선인은 종래 무기를 알지 못했지만 징병제도의 실시에 의하여 새로 무기를 갖고 군사지식을 체득함에 이르게 되어 장래 대동아전쟁에 있어서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때, 반드시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 민족적 무력 봉기를 결행하여 독립 실현을 가능케 하도록 민족적 입장에서 그 제도를 찬양하고…독립 실현에 공헌하도록 각자 실력 양성에 전념할 필요가 있음을 서로 강조하고”

5.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에 관한 인식

“조선 내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이 폐지됨을 논난하고 조선어 연구를 권장한 뒤에, 소위 내선일체 정책을 비방하고 조선문화의 유지, 조선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독립이 필수인 까닭을 강조하고”

6. 일본과 조선 사이의 차별 압박 지적

“조선의 교육기관 학교 졸업생의 취직 상황 등의 문제를 포착하고 내선(內鮮) 간에 차별과 압박이 있다고 지적한 뒤 조선민족의 행복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독립이 급한 일이라는 뜻을 역설하고”

7. 미일전쟁(=대동아전쟁, 태평양전쟁)에 대한 대응자세

“대동아전쟁은 항상 조선독립 달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고찰함을 요하며, 이 호기(好機)를 잃으면 가까운 장래에 조선이 독립할 가능성을 상실하고 마침내 조선민족은 일본에 동화되고 말 것이므로 조선민족인 자는 그 번영을 열망하기 위하여 어디까지나 일본의 패전을 기해야 하며”

8. 조선독립의 당위성에 대하여

“조선총독부의 조선어학회에 대한 검거를 논란한 뒤, 문화의 멸망은 필경 민족을 궤멸시키는 것임을 역설하고 예의 조선문화의 앙양에 힘써야 한다고 지시하고”, “조선의 고전예술의 탁월함을 지적한 뒤에 문화적으로 침체해 있는 조선의 현상을 타파하고 그 고유문화를 발양시키기 위해서는 조선독립을 실현할 수밖에 없는 까닭을 역설하고”, “동인(장성언)의 민족의식 강화를 돕고자 자신이 소장한 <조선사 개설>을 대여하고 조선사를 연구하도록 종용하고”

판결문에 드러난 윤동주의 모습과 자세는 너무도 당당하고 의연하여 눈이 부실 지경이다. 판결문에는 “판시 사실은 피고인의 당 공정(公廷=재판정)에 있어서의 판시와 같은 취지의 공술(供述)에 의하여 이를 인정한다”라고 기재되어 있어, 그가 재판정에서 판사들을 상대로도 위와 같은 발언을 했음을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다. 그의 동료 송몽규의 경우 역시 윤동주와 똑같았음이 그에 대한 판결문으로 증명된다.

취조 시 발언과 재판정에서 발언 일치

윤동주가 가졌던 미일전쟁에 관한 의식과 대응자세를 당대 조선사회의 유명한 지도층 인사였던 J박사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너무도 크게 대비된다. 그들이 재판 받은 날은 공교롭게도 불과 하루 차이였는데, J박사는 지인에게 미일해전에서 일본이 군함을 많이 잃은 것 같다고 말한 것이 문제가 된 사건에서 “자신은 이미 황국신민화, …유언비어 운운”하면서 그런 사실을 아예 부인했다. 반면, 윤동주는 일본의 특고경찰과 검사와 판사들 앞에서 “조선독립을 위해서는 대동아전쟁(미일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윤동주의 문학이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한국문학사를 환하게 빛내고 있는 존재이듯, 독립운동가로서의 그의 존재는 참혹했던 일제 강점기 말의 한국독립운동사를 밝고 환하게 빛내고 있다.

송우혜 - 1947년 12월 5일 서울 출생. 서울대 간호학과 중퇴, 한국신학대 신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성 야곱의 싸움’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등단 이후 꾸준히 역사소설에 관심을 기울였다. 소설집으로 <남도행>(1985)을 비롯, 인간의 삶과 돈의 문제를 다룬 <저울과 칼>(1990), 병자호란 당시 사대부가문 여인의 삶을 그린 <하얀 새>(1996) 등이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완성한 <윤동주 평전>은 최고의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201508호 (2015.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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