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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특별기획│사후 70년 윤동주 정신을 다시 본다] 왜 일본인들은 윤동주를 기리나? 

고요한 외침 속에 살아 있는 양심을 흠모 

글·사진 야나기하라 야스코(楊原泰子)
식민 지배와 전쟁을 반성케 하는 진실의 ‘시어(詩語)’… 한일 양국의 관계 복원 위해 윤동주 정신으로 돌아가야

▎1995년 일본 교토 도시샤(同志社) 대학 교정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 이 시비의 건립 20주년이 되는 올해에는 그의 삶과 죽음을 기리는 유품 전시와 추모 행사가 함께 열렸다.
깊은 민족애, 철저한 지성, 풍부한 서정, 기독교적 관용과 희생의 시인 윤동주가 일본인의 마음을 움직인다. 음울하고 가혹한 시대에 시인은 어떻게 순결한 마음을 지켰는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 시인의 열렬한 사상 속에서 한국과 일본의 민중은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인 윤동주는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고 7년 뒤인 1917년 태어나, 조국의 해방을 반년 남짓 앞둔 1945년 2월 16일에 27세의 일기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의 짧은 생애는 다가오는 광복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민족의 암흑기 속에서 스러져 갔다.

음울하고 가혹한 시대 속에서도 반드시 여명은 오리라 믿고 한국어로 써내려간 아름다운 시들은 윤동주 삶의 징표 처럼 남아 있다. 몇 편 되지 않는 시들이지만 오늘날 국경을 넘어 일본인의 마음에 역사의 아픔을 재차 일깨워주며, 시에 담긴 평화를 향한 애절한 염원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서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이 유명한 ‘서시’는 주어진 삶을 보다 잘 살아가겠다는 신념을 한 편의 시로 훌륭하게 승화시켰다. 일본의 침략으로 고통받는 동포를 향한 마음, 사라질 위기에 처한 조선문화에 대한 애정, 경건한 기독교인으로서의 깊은 신앙심이 담긴 시다. 그러나 저항시나 종교시 중 어느 한쪽만을 지향하지 않았기에 결국 양쪽을 초월해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작품이 됐다.

권력이나 기존의 가치관에 사로잡히지 않는 ‘나’라는 개인의 출발에는 키에르케고르를 숙독했던 윤동주의 실존주의적 사상이 나타난다. 삶을 향한 윤동주 자신의 각오가 시 전체에 걸쳐 있지만, 이후 그의 운명을 덮쳤던 허망한 죽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일본 곳곳에서 이는 추모 열기


▎2월 22일 일본 릿쿄 대학에서 열린 추도 집회 ‘윤동주 시인과 함께 2015’의 1부 행사. 추도 세리머니, 묵념과 시 낭독이 있었다.
도쿄 릿쿄 대학에서 매년 2월 개최되는 추도 집회 ‘시인 윤동주와 함께’에선 참가자 전원이 ‘서시’를 한국어와 일본어로 함께 낭독한다. 올해 참가자들이 남긴 소감 중엔 다음과 같은 것도 있었다. “처음 참가했다. 마음이 힘들던 시기에 신문에서 ‘서시’를 접하고 기운을 얻었다. 그 시를 읽고 올해 모임에 꼭 참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윤동주는 시를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윤동주가 믿었던 ‘시어(詩語)의 힘’이다. 올해는 일본 패전 70주년이자 윤동주 시인 사망 70주기가 되는 해다. 지난 2월 윤동주의 조카인 윤인석 성균관대 교수와 현재 유고·유품 등을 소장한 연세대학교의 협력을 얻어 윤동주의 유고와 장서 등의 복제품을 차용해 후쿠오카·교토·도쿄에서 순회전시회를 열었다. 이 세 지역에서는 매년 2월 윤동주 시인 추도집회가 열린다. 이번 순회전시회는 각 집회 주최측에서 독자적으로 세운 계획에 따라 실시됐다. 수많은 사람이 전시회장을 찾아 윤동주 시인의 시와 생애를 접하고 역사의 진실과 마주할 기회를 가졌다.

후쿠오카에선 1995년 2월 한일합동 윤동주 50주기 위령제가 열렸다. 이를 계기로 그해 12월엔 ‘윤동주의 시를 읽는 후쿠오카 모임’이 탄생했다. 그날 이후 매달 시를 한 편 선정해 시 속에 담긴 메시지를 풀어온 이 모임은 올해 2월 226회째를 맞이했다. 매년 2월 16일 윤동주 시인의 작고일 전후로 구 후쿠오카 형무소 인근 공원에서는 추도회가 열린다. 올해엔 규슈 대학 대학원의 후지하라 게이요 교수의 협력을 얻어 실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일련의 행사를 실시했다. 2월 5~9일 규슈 대학 니시진 플라자 전시홀에서 ‘윤동주 시인 사망 70주년, 윤동주의 시를 읽는 후쿠오카 모임 20주년 기념사업-윤동주의 시를 읽는 2015년’이라는 윤동주 유품 및 유고 전시회를 개최했다. 2월 8일 ‘윤동주 시인 추도 70주년 기념회’에는 윤석인 교수의 강연 ‘백부 윤동주와 그를 사랑한 사람들’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후쿠오카 시에선 지난 2월 16일 윤동주 시인의 시비 건립을 추진하는 시민단체가 발족했다. 한국어 교사와 문학연구자 등 한일 민간교류를 이어온 사람들은 “이웃나라 젊은이의 미래를 앗아간 식민 지배와 전쟁을 반성하고, 잘못을 반성하겠다는 맹세를 새로이 하는 장소로 만들고 싶다”고 주장하고 있다.

교토 도시샤(同志社) 대학에선 전후 50주년·윤동주 50주기였던 1995년 2월 16일 ‘윤동주 시비 건립위원회’가 결성됐다. 도시샤의 한국 출신 졸업생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도시샤동창회 코리아클럽’과 ‘윤동주를 기리는 모임’, ‘학교법인 도시샤’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사람들의 협력을 얻어 이룬 성과였다. 도시샤 대학 이마데가와 캠퍼스 내에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져 그 후 매년 2월 윤동주 시인의 작고일 전후로 헌화식이 열리고 있다.

5일 동안 세 번이나 찾아온 방문객도 있어


▎2월 8일 일본 규슈 대학에서 열린 ‘윤동주의 시를 읽는 후쿠오카 모임 20주년’ 행사. 시인의 큰 조카인 윤인석 성균관대 교수의 강연 ‘백부 윤동주와 그를 사랑한 사람들’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올해 모임 안내장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담겼다. “이 시비는 시나 윤동주 시인의 삶을 통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견지하며, 한일 양국을 시작으로 세계의 평화와 우호친선, 나아가 남북의 평화통일을 바라며 세워졌습니다. 그 상징으로서 시비 양측엔 한국의 국화 무궁화와 북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국화 진달래가, 그 서쪽엔 도시샤 대학의 창립자인 니지마 죠가 좋아하던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습니다.”

올해엔 2월 13~17일 구내에 있는 할리스이화학관 도시샤 갤러리에서 윤동주의 유고·유품 전시회가 개최됐다. 2월 14일엔 ‘윤동주 시의 처녀성’을 주제로 고은 시인의 강연이 열렸다. 고은 씨는 윤동주의 시세계를 언급하며 ‘처녀성’이 그의 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본질이라고 말했다.

교토에선 도시샤 대학 외에도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 위원회’, ‘시인 윤동주를 기리는 교토 모임’이 우지가와 주변에 ‘윤동주 시인 추도와 화해의 비’ 건립을 추진 중이다. 우지가와는 윤동주 시인이 생애 마지막으로 사진을 촬영한 장소다. 또 추도 집회와 학습회뿐 아니라 시인의 판결문 공개 운동에 착수해 성과를 내고 있다.

도쿄 릿쿄가쿠인전시관(릿쿄 대학 구 도서관)에선 2월 21~25일 5일 간 ‘윤동주 시인 사망 70주기 유고·유품 순회전시회’가 개최됐다. 전시회장은 윤동주 시인 재학 중의 도서관이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주제는 ‘윤동주 시인의 27년 생애’로 사진이나 자료를 근거로 출생부터 옥사까지 시인의 27년 생애를 조명했다.

윤동주의 원고, 수기로 남긴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릿쿄 대학 재학 중 대학 마크가 들어간 편지지에 써서 친구 강처중에게 보낸 시 5편, 사망 시 남긴 장서(모두 복제품) 등을 전시했다. 또 시인이 릿쿄대 재학 중에 만난 교수들의 사진, 다카다노바바 역 앞 하숙집의 지도 등도 소개했다. 많은 사람이 전시회장을 찾았다. 개최 기간 5일 동안 3번이나 찾아온 방문객, 장서 복제본 속에 남겨진 필기를 꼭 봐야겠다는 열의 넘치는 방문객도 나타나 주최측을 놀라게 했다.

릿쿄 대학에선 2010년부터 ‘윤동주 국제교류장학금(윤동주의 후배인 한국 유학생을 위한 장학금)’을 지급한다. 지난해엔 이 장학금을 받은 두 명이 졸업작품 주제로 윤동주 시인을 선정했다. 권민석 씨는 영상작품 ‘쉽게 씌여진 시’를, 오유진 씨는 소설 ‘사랑의 전당’을 제출했다. 전시회에선 소설 ‘사랑의 전당’이 전시됐고, 영상작품 ‘쉽게 씌여진 시’는 전시회장의 모니터로 상영해 많은 사람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올해 전시회나 모임에선 릿쿄대 이외에도 도쿄 내 대학에 유학 중인 한국인 유학생들이 협력했다.

2월 22일엔 추도 집회 ‘윤동주 시인과 함께 2015’가 열렸다. 행사 1부엔 추도 세리머니, 묵념과 시 낭독이 있었다. 올해엔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로 시를 낭독했다. 행사 2부엔 <윤동주 평전>을 쓴 한국 작가 송우혜 씨가 ‘윤동주 시인이 꿈꾼 세상’을 주제로 강연했다. 약 300명이 강연에 참석해 송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행사에 참석한 한 40대 남성은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윤동주 시인의 시를 사망 70주기가 된 지금에야 알게 됐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민족 문화 수호, 교양을 갖춘 철저한 지성, 풍부한 서정성, 기독교 가치관 등 그의 시는 다양한 면모로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일본 사회가 배타적으로 일그러져가는 현재, 세계가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충돌하는 현재, 그의 말과 염원처럼 넓은 마음씨가 보다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길 바랍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이 행사에 참석했다는 60대 여성은 이번 전시회에서 릿쿄 대학 마크가 새겨진 편지지에 쓰인 ‘쉽게 씌여진 시’ 원고를 보고 새삼 윤동주 시인이 살았던 시대의 분위기를 느끼게 되었다고 말했다.

비극의 시인을 우리 가슴에

“그가 일본에서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몇 년간 저는 평화를 요구하는 행동을 제 나름대로 모색해왔습니다. 하지만 윤동주 시인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살면서 느낀 고통과 슬픔, 사랑을 실감하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송우혜 씨의 귀중한 강연을 들으며 시인의 강한 의지를 새삼 알게 됐습니다. 그 의지를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고자 합니다.”

올해 70주기를 맞아 한국의 여러 언론사 기자가 취재차 방문했다. <아사히신문>은 ‘한일국교정상화 50년, 비극의 시인을 우리 가슴에’란 제목의 사설에서 일본 각지의 윤동주 시인 관련 활동을 소개하고 한일 외교관계를 언급했다. 이 사실은 한국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됐다.

시인이 일본 주요 언론사 사설에 소개된 것은 처음이 아니다. 사망 60주기였던 2005년 2월 13일 <니시니혼(西日本)신문>은 ‘그는 언제나 수평선 저편에-윤동주 시인 60주기’란 제목으로 사설을 게재했다. 내가 알기로 이번은 두 번째다. <니시니혼신문>은 당시 사설에 이렇게 썼다. “올해는 전후 60주년, 한일국교정상화 40주년, 한일 우호의 해다. 이 시점에 올해로 60주기를 맞이한 윤동주 시인의 삶과 죽음을 돌이켜 보는 것은 한일 양국의 우호관계가 더 깊어지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2005년 도쿄·교토·후쿠오카의 윤동주 시인 추도 모임에서도 송우혜 씨가 순회강연을 다녔다. 나도 강연에 동행하다가 후쿠오카에서 <니시니혼신문>의 사설을 읽었다. 한류 열풍도 있고 해서 한일관계가 진전되리라는 희망을 가졌지만 10년이 지난 오늘날 마음처럼 되지 않는 한일관계를 보면 마음이 울적하다. 올해 <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윤동주 시인의 눈에는 현재 한일관계가 어떻게 비칠까?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은 과거가 된다. 70주년의 해를 어떻게 만들어가느냐는 지금 살아 있는 우리의 몫이다.”

시인의 시를 읽을 때면 아름다운 서정성은 물론, 외적인 권위나 한 시대의 가치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로운 광채가 느껴진다. 또한 그는 보기 드물게 시와 생애가 일치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시의 토대는 양심을 거스르지 않는 깨끗한 삶이다. 그런 삶이 바로 기품과 서정성을 낳는 원천이 아닐까 한다.

보편적 가치, 흔들림 없는 사상 가진 시인


▎윤동주 시인의 시 ‘별 헤는 밤’의 육필 원고. 윤인석 교수가 2013년 연세대에 영구 기증한 유품 중 하나다.
보편적인 이해를 얻지 못하는 주장은 결국 사라질 운명에 처한다. 항상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고 흔들림 없는 사상을 가졌던 시인의 작품은 7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서도 빛 바래는 일 없이 불멸성을 간직한다. 시인의 삶과 그 불멸의 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여기에 있다.

시인의 발자취를 조사하면서 그를 만났던 일본인의 증언을 샅샅이 수집하고 다녔다. 그 증언에서도 시인의 따뜻하고 성실하며 관대한 인품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1942년 4월 릿쿄 대학에서의 동양철학사(‘쉽게 씌여진 시’에 나오는 늙은 교수 우노 데츠도의 수업이다) 수업이 끝난 뒤 시인은 종교학과의 이시가와 도시오 씨에게 “저는 조선에서 왔지만 이 대학에서 공부하고자 하니 좋은 교수를 소개해달라”고 말을 걸었다. 이시가와 씨는 다카마츠 고지 교수를 소개해줬고, 시인은 이 교수의 집을 방문한 듯하다. 또 이시가와 씨는 “히라누마(윤동주) 씨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다”며 “릿쿄 대학 옆 성공회신학학교의 구로세 야스로 주교 집에서 열린 다과 모임에도 종교학과 학생과 함께 참석했다”고 말했다.

도시샤 대학 영문과 수업을 기타지마 마리코 씨와 둘이서만 수강하게 되자, 시인은 옆 자리에 앉은 마리코 씨를 보며 “둘만 있다가 (교수한테) 질문을 당했을 때 틀리면 부끄럽다”고 말을 걸었다. 항상 조용하고 내성적이었지만 함께 공부하는 친구와 대화할 때는 주저함이 없었다. 외국에서도 성실하고 적극적이었던 청년 윤동주의 모습이다.

시인은 일본 유학 후에도 많은 시를 썼다고 생각되지만 체포 당시 장서 등과 함께 특별고등경찰에 압수당해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일본유학 중에 쓴 시 중에서 릿쿄 대학 마크가 새겨진 편지지에 쓴 시 5편이 남아 있는 전부다. ‘하얀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 ‘흐르는 거리’, ‘쉽게 씌어진 시’, ‘봄’ 등 시 5편은 서울에 있던 친구 강처중 씨에게 편지와 함께 보내졌다. 강씨는 편지를 버리고 시를 몰래 숨겨 가지고 있었던 덕분에 5편의 시가 기적적으로 남았다.

쉽게 씌어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1942년 6월 3일)


시인은 릿쿄 대학 재학 중 다카다노바바역 근처에서 릿쿄 대학 학생 백인준 씨와 함께 하숙했다. ‘쉽게 씌어진 시’에선 전쟁 중인 도쿄에서 비 오는 날 밤 고향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입장을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는 언어로 의연하게 표현했다. 자신이 사는 하숙집 방을 ‘남의 나라’라 표현한 이 한마디에 일본에서 유학하던 한국 학생의 복잡한 심정이 훌륭하게 압축돼 있다. 시인으로서의 투철한 시선이 느껴진다. 많은 문인이 펜을 꺾고 침묵해야 했던 시대에 시인은 결코 절망하지 않고 시로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려 했다. 이 시가 쓰여진 날짜는 릿쿄 대학에 유학 온 지 2개월 정도 지난 1942년 6월 3일로 되어 있다. 친구 강처중 씨는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발문에 이렇게 썼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이 마주앉아 주는 것이었다…. 옹색한 친구들은 곧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렸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 전당포 나들이를 부지런히 해야 했다.”

친구들의 증언과 부합하는 우에모토 마사오 씨의 증언을 통해 온화하고 정 많은 윤동주 시인의 일상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일본인 친구와 교류할 때는 마음속 깊이 숨겨뒀던 애증 섞인 갈등이 떠올랐던 것은 아닐까.

피땀으로 쓴 시는 시대와 국경을 넘는다

1943년 7월 14일 시인은 교토 하숙집에서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됐다. 책상 위엔 귀국편 표가 남아 있었다. 사촌형 송몽규도 7월 10일 체포됐다. 당시 일본의 전황은 악화일로인 가운데 치안유지법에 의거한 탄압은 갈수록 심해졌다. 1941년 5월 15일 실시된 개정 치안유지법은 한층 엄격해지면서 ‘준비행위’를 했다고 판단되면 검거가 가능했다. 사실상 누구라도 범죄자로 만들 수가 있었다. 윤동주 시인은 이 악법으로 체포됐다.

강한 민족의식, 역사의식을 감추고 있었으나 격렬한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것도 아니었고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올곧게 살아온 이 마음씨 착한 청년의 전도를 무참히 짓밟은 것이다. 시인이 체포된 지 10일이 지난 7월 24일부터 조선총독부의 고이소 구니아키 총독은 징병제 장려 및 추진을 위해 간도를 시찰하기로 돼 있었다. 특별고등경찰이 감시 중이던 윤동주 시인과 송몽규 씨의 귀국은 위험하게 여겨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체포됐다고 생각된다.

윤동주가 쓴 시는 내성적이다. 소리 높여 저항하는 시가 아니다. 그러나 사용이 금지된 민족 고유의 문자 한글로 시를 썼다는 것만으로도 조용하면서 강한 저항이었다. 전쟁 전 일본의 국체사상에 따르면 자각적으로 사상을 갖는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시인처럼 풍부한 지식과 사상을 지닌 유학생은 관헌측이 보기에 아주 공포스러운 존재였으리라. 시인의 자세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저항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시인이 고난을 겪는 와중에 피땀으로 쓴 시는 시대와 국경, 언어의 벽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키에르케고르를 읽었던 시인은 모든 것은 권력자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출발한다는 실존적 사상을 가졌다. 또한 시인은 시의 언어가 결코 언어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사회의 문제에 맞설 힘이 있다고 믿었다. 또 시인은 시대의 증언자라는 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시 속에 담긴 고요한 외침은 한반도를 넘어 같은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아시아 사람의 생각을 대변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 외침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일 간을 가로막는 장벽을 허물기 위해 먼저 과거에 대한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서로를 배려하는 관용적 상상력이 있다면 장벽을 넘어 보다 깊이 상대방의 구석구석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그 가능성을 온 몸으로 입증했다. 한국과 일본 국민 모두 그 사실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하다. 윤동주의 정신으로 돌아간다면 양국관계의 밝은 미래는 반드시 복원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된다.

야나기하라 야스코(楊原泰子) - 1946년생. 릿쿄 대학 문학부 사학과 졸업. 약 20년 전부터 윤동주 시인이 일본에 남긴 발자취를 조사하고 체포 시 압수당한 장서 찾기를 계속하고 있다. 2008년 릿쿄대 졸업생, 교직원과 함게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는 릿쿄 모임’을 설립하고, 시인의 기일인 2월 16일 전후로 ‘윤동주 시인과 함께’를 매년 개최해 왔다.

201508호 (2015.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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