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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경기도경제단체연합회 공동기획①] 기업이 도시의 얼굴이다 

기업을 품은 도시, ‘주식회사’가 되다 

기술집약형 소규모 기업들 모여 새로운 도시 형성 … 대기업 위주 단일 산업단지에 이어 미래형 도시 모델로 주목

▎판교테크노밸리의 하늘이 쾌청하다. 테헤란밸리에서 시작된 벤처신화가 판교에서 재현되고 있다. 판교는 첨단산업의 대표기업들이 집약된 한국판 실리콘밸리로 급부상하고 있다. / 사진제공·경기도
산업단지가 도시 한복판으로 들어오고 있다. 과거 도시와 산업단지는 엄격히 구분지어졌다. 매캐한 매연과 삭막한 굴뚝 공장은 도시의 주변부에서 동떨어진 세계로 존재했다. 하지만 이제 도시와 기업의 경계를 가르는 건 옛말이 됐다. 기업을 중심으로 도시가 생기고 그곳에 문화가 흐른다. ‘잠만 자는 도시’, ‘일만 하는 지역’으로는 도시와 지역, 국가의 지속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기업의 도시화, 도시의 기업화가 진행되는 현장에서 도시와 기업이 공존하는 미래를 가늠해봤다.

1. 미래형 기업도시 판교를 가다 - “ICT산업 메카로 자리매김 중”


▎시흥 송운중학교 학생들이 경기바이오센터의 천연물신약연구소에서 신약 개발 과정을 견학하고 있다. / 사진제공·경기도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성남 판교IC에서 내려서자 왼쪽으로 10층 안팎의 건물들이 줄지어 눈에 들어온다. 건물 외벽을 치장한 짙은 감청색 유리에 햇빛이 반사돼 도시가 빛낸다. 엔씨소프트, 안랩, 다음카카오 등 국내 온라인 생태계를 주도하는 기업들의 이름이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눈에 들어온다.

대한민국 벤처신화의 원천인 서울 테헤란로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판교테크노밸리의 풍경이다. 판교테크노밸리에 들어선 것은 점심식사 무렵. 신분증을 목에 건 직장인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오피스빌딩이 몰려 있는 서울 광화문네거리나 여의도 등지의 회사원들이 정장 일색이라면 이곳은 청바지, 캐주얼 등으로 복장이 자유분방하다. 마치 커다란 대학 캠퍼스의 풍경을 보는 것 같다.

판교신도시는 경부고속도로를 중심으로 동판교와 서판교로 나뉘고, 동판교는 서현로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갈라진다. 판교테크노밸리는 동판교의 북쪽에 위치한다. 베드타운에 불과했던 기존 신도시와는 사뭇 다른 개념이다. 녹지와 주거, 산업이 조화를 이룬 자족형 도시 모델이 바로 판교신도시다. 판교신도시 조성계획이 결정된 지 올해로 꼭 10년째다. 굴뚝 없는 기업형 도시, 한국형 실리콘밸리의 조성은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다.

판교테크노밸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연구개발(R&D). 경기과학기술진흥원 판교테크노밸리지원본부에 따르면 전체 부지 66만1천㎡ 중 43만3천㎡가 연구용지다. 현재는 44개 컨소시엄에 850여 개 업체가 입주했다. 그중 기업 본사가 75.4%를 차지한다. 설립한 지 20년 미만의 젊은 기업이 가장 많다. 대기업도 40개가 넘는다. 분야별로는 IT업체가 330여 개(52%)로 가장 많고 생명공학기술(BT) 70여 개(11%), 문화산업기술(CT)이 61개(9%) 순이다. 신성장동력으로 꼽히는 분야의 선도기업들이 대부분 판교에 둥지를 틀었다는 말이다.


▎판교테크노밸리는 청년문화의 생산지 역할도 하고 있다. 단지 내 광장에서 입주기업들의 동아리와 소규모 밴드의 공연이 수시로 열린다. / 사진제공·경기도
젊은 도시

젊은 회사원이 많다 보니 거주지도 판교신도시 안에 자리 잡는 경우가 많다. 판교의 한 벤처업체에 다니는 강시환(36) 씨는 서판교의 임대아파트에 살면서 회사에 출퇴근한다. 거리가 가깝고 주거환경이 좋은 것을 최고 장점으로 꼽는다. 강 씨는 “동종업체들이 판교에 몰려 있어서 나중에 이직하더라도 판교를 벗어날 일은 거의 없을 것 같다”며 “자녀 교육환경도 좋고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망도 편리해 주변에도 이곳에 정착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판교테크노밸리와 맞붙어 있는 봇들마을아파트 단지는 판교 입주 기업의 직원들이 많이 산다. 경기도가 지난해 말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판교 입주기업 직원 수는 5만8천여 명. 오히려 이들이 거주할 주택 물량이 부족해 판교에서 아파트 전세는 거의 물량이 남아있지 않을 정도다. 대체 주거지로 가까운 경기도 광주와 용인, 수원, 화성 동탄 등도 선호도가 높다. 이미 개통한 신분당선을 비롯해 성남-여주간 복선전철, 대심도 급행전철(GTX), KTX 수서발 노선 등 광역교통망이 더 촘촘해지면 판교테크노밸리의 도시확산 기여도가 더욱 빠르고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판교의 중견 IT 업체 개발자로 일하는 한모(31) 씨는 “예전에는 ‘판교에서 일한다’고 하면 친구들도 마치 아주 먼 지방인 것처럼 무시하곤 했는데 요즘은 좋은 데서 일한다며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한씨는 “유명한 기업들이 판교에 자리 잡으니까 작은 업체들이 따라오면서 지역 이미지를 바꾸고 생활환경도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판교테크노밸리는 조성 비용만큼 제 역할을 하고 있을까? 판교테크노밸리는 5조2705억원을 투입해 경기도가 개발을 총괄했다. 부지 조성에 1조4천억원, 건축공사비가 3조8600여 억원이다. 경기개발연구원이 2006년 3월 분석한 판교테크노밸리 파급효과 보고서에 따르면 생산유발효과와 부가가치유발효과가 각각 13조, 9조7천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전망된다. 고용유발효과도 16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연구원은 예상했다. 경기개발연구원 관계자는 “2006년 보고서여서 현재 상황과 일치하진 않지만 아직 개발이 진행 중인 상황임을 고려하면 오히려 예상보다 파급효과가 더 클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판교테크노밸리 조성사업은 현재까지 80% 이상 진행됐다. 우리나라의 상위 10대 게임업체 중 7개가 입주해 있고, 입주기업의 3분의 2가 첨단분야의 중견기업 이상이다. 올해 말까지 1천여 개 기업이 입주해 종사자 수가 5만 명을 넘어설 전망이다. 기반구축 단계를 지나 클러스터 형성기에 진입한 것이다.

이상훈 경기개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강남 테헤란밸리의 IT중소기업들이 저렴한 임대료를 찾아 서울디지털단지(G밸리)로 이전한 반면, 판교는 IT 대·중견기업이 대거 이전해 신기술 개발과 융합의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며 “현 단계에서 한국 경제에서 가장 역동성과 발전성이 높은 첨단산업지구를 꼽으라면 판교가 일순위일 것”이라고 말했다.

판교테크노밸리에 대한 관심은 영역을 막론하고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정부와 경기도, 성남시 등 지자체는 물론 민간영역에서도 이곳을 최고 투자처로 꼽길 주저하지 않는다. 판교테크노밸리가 몰고 온 변화가 단지 경제적 효과에만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젊고 창의적인 IT 전문인력들을 중심으로 특유의 문화적 정체성이 형성되고 있다. 단지 안에 있는 H스퀘어 광장은 판교의 문화적 중심지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크고 작은 공연이 상시적으로 열린다. 특히 수시로 열리는 입주기업의 동아리 밴드 공연은 판교의 문화적 정체성을 가늠할 수 있는 본보기다.


▎몇몇 대기업이 도시경제를 책임지던 과거의 산업도시가 쇠락하면서 중·소형 기술집약 기업이 모여 클러스터를 형성하는 기업도시 모델이 주목받고 있다. 석유화학·자동차공업도시 울산의 SK이노베이션 울산공장 전경. / 사진·중앙포토
주요 기업들의 복지시설 조성 경쟁도 큰 관심사다. 직장인들 사이에 가장 가고 싶은 회사로 꼽히는 구글과 견줘도 전혀 손색이 없는 식당과 휴게·문화시설이 속속 들어서면서 판교의 기업은 젊은이들 사이에 선망의 직장으로 자리 잡은지 오래다. 온라인에선 판교 기업 탐방을 ‘성지순례’로 추켜 세우며 하나의 놀이문화로 유행하고 있다. 벤처정신인 ‘개방’, ‘공유’가 판교의 문화를 형성하는 근본정신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게임업체 넥슨의 한 관계자는 “연구개발업무가 중심이 되다 보니 보안을 철저히 해야 하지만 시설을 개방하고 공유하는 원칙은 반드시 지키고 있다”며 “창조적 아이디어는 자유롭고 열린 분위기 속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판교밸리의 역동성이 지역문화 바꿔

2017년에는 판교역과 테크노밸리를 잇는 노면전차(트램)가 운행될 예정이다. 짧은 전차가 저속으로 시내를 오가는 이국적인 풍경을 판교에서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경기도와 성남시가 협약을 맺어 도가 사업비 일부와 설계·시공·안전 등 철도기술을 지원하고, 성남시가 구체적인 건설계획과 타당성 확보를 맡기로 했다.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트램은 건설비가 저렴하고 경관 훼손의 문제와 과다설계가 없어 저비용 교통수단으로서 효율적”이라며 “평일에는 직장인, 휴일에는 관광객들의 발이 되어 판교의 관광 명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판교테크노밸리의 역동성은 판교신도시 전체로 확산돼 도시의 문화마저 바꾼다. ‘판교25통’으로 불리는 판교동 553번지 일대는 판교신도시의 대표적 명물 문화거리다. 테크노밸리와 경부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2㎞쯤 떨어져 있다. 1층은 상가, 2·3층은 주택으로 된 건물 160여 채가 들어선 곳이다. 2010년에 조성됐지만 전문상업지구에 밀려 상권으로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저렴한 임대료 덕분에 문화예술인들의 공방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각종 공예품 전시와 연주회 등 작은 행사들이 열리면서 이곳을 찾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난해 봄에는 이곳에서 ‘판교 25통 골목 축제’가 처음으로 열렸다. 첫 해여서 방문객은 2천 명 정도에 그쳤지만 지난 5월에 열린 두 번째 축제에는 8천여 명이 이곳을 다녀갔다.

판교 25통 외에도 새 명소로 떠오른 백현마을 카페거리, 서판교 타운하우스 등 도시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콘텐트가 많다. 판교신도시가 단지 주거 기능만 갖고 있었다면 이렇게 다양한 색깔의 문화 형성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경기도 관계자는 “판교신도시의 성공은 기업을 중심으로 한 자족형 신도시의 이상적 모델을 현실화했다는 점에서 도시개발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며 “입지 조건과 테크노밸리의 개방적 문화가 서로 상승 효과를 일으킨 것”이라고 말했다.

2. 도시와 기업, 상생의 현장 - “도시의 기업화, 기업의 도시화 확산”


▎아우토슈타트는 폴크스바겐의 공장이면서 놀이시설이다. 2006년 개장 이래 10년간 2천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갔다. / 사진·중앙포토
기업이 도시의 경제를 지탱하고 지역 정체성을 만든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기업은 곧 도시의 얼굴과 같다. 사람들은 삼성에서 수원을 떠올리고 현대에서 울산을, 포스코에서 포항을 떠올린다. 대표기업을 유치하고 육성하는 것은 지자체의 가장 큰 과제이기도 하다. 국내에선 수원, 울산, 포항, 창원, 구미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현대자동차 공장이 있는 울산은 국내 부자도시 1위로 늘 꼽힌다. 올해 2월 통계청이 발표한 16개 시·도 소득 잠정치(2013년 기준)에 따르면 울산의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I)은 6042만원으로 2위인 충남(4524만원)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독일의 지방소도시 볼프스부르크는 폴크스바겐이 공장 일대에 자동차테마파크(아우토슈타트)를 조성하면서 세계적인 관광지로 떠올랐다. 아우토슈타트에 있는 신차 출고장의 주차타워. / 사진·아우토슈타트 홈페이지
해외에서도 얼마든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가까운 일본의 도요타시가 그중 하나다. 도요타시에는 도요타자동차 본사와 12개 공장 중 7개가 몰려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 자동차도시인 울산시와 비슷하다. 본래 지명은 ‘고로모(擧母)’ 였다. 1938년까지 옛 이름으로 불렸다. 누에고치의 집산지로 방직산업이 발달했다. 방직산업이 쇠퇴하자 새로운 먹거리를 찾기 위해 기업 유치에 나섰다. 자동차공장 부지를 찾고 있던 도요타를 유치하기 위해 세금을 면제하는 등 파격적인 지원정책을 펼쳤다. 급기야 1959년엔 시 명칭을 아예 도요타시로 바꿨다. 도요타 본사를 중심으로 반경 한 시간 거리 안에 3천여 개의 자동차 부품업체가 몰려 있다. 이런 노력 끝에 도요타시는 재정 자립도가 전국 평균의 두 배를 넘는 일본 최고의 부자도시로 떠올랐다. 지난해 말 기준 도요타시의 실업률은 1%도 되지 않는다.

인구 13만 명의 소도시 독일 볼프스부르크와 독일차의 대명사 폴크스바겐의 공생관계는 벌써 80년이 넘었다. ‘아우토슈타트(Autostadt, 자동차도시)’로 불리는 자동차테마파크는 지자체와 기업이 합심해 만들어낸 야심작이다. 폴크스바겐 본사와 자동차 출고장을 놀이터로 만든 건데, 세계 최대 규모다. 아우토슈타트 프로젝트는 1994년에 시작됐다. 4억3천만 유로가 사업비로 들어갔다. 2000년 6월 1일 개장한 지 10년 만에 관람객 2천만 명을 돌파했다. 그중 외국인 관광객의 비율이 20%를 넘는다. 전 세계의 자동차 매니아들 사이에 죽기 전에 가봐야 할 곳으로 꼽히기도 한다. 독일관광청이 뽑은 독일의 10대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볼프스부르크는 1930년대 중반까지 한적한 시골마을에 불과했다. 1938년 폴크스바겐 공장이 들어서며 지역 경제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 주민의 60~70%는 폴크스바겐 공장과 아우토슈타트 관련 직종에 종사한다. 도시 전체 소비 전력의 3분의 2를 공장 내 발전소에서 생산한다.

대기업이 소도시의 운명을 바꾸다


▎판교테크노밸리는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다. SK플래닛과 넥슨, NHN 사옥이 환하게 불을 밝힌 채 나란히 서있다. / 사진제공·플리커(flikr)
도요타시와 볼프스부르크, 울산시 등의 공통점은 단지 자동차도시란 점에 그치지 않는다. 대기업에 의해 지역경제가 좌우된다는 점이 같다. 시장 환경이 좋을 때에는 지역경제가 호황을 누릴 수 있지만 기업 경영환경이 악화되면 직접적인 타격도 크다.

볼프스부르크시는 폴크스바겐의 경영난으로 한때 위기에 몰린 적이 있다. 1990년 독일 통일 후 시작된 경기침체 시기 폴크스바겐은 자동차 생산량이 25% 줄고 매출이익률이 1%에 못 미쳤다. 기업의 위기는 지역의 위기로 번졌다. 볼프스부르크의 실업률은 9%에서 17%로 껑충 뛰었다. 값싼 노동력을 찾아 해외로 공장을 이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런 위기를 돌파한 게 ‘아우토비전 프로젝트’였다. 폴크스바겐과 시가 공동 출자해 설립한 회사가 자동차클러스터의 일종인 ‘혁신캠퍼스’를 운영하면서 6년간 160여 개 기업을 유치하고 200여 개 기업의 창업을 이끌어냈다. 부품단지를 조성해 일자리를 늘렸고 아우토슈타트로 관광객을 끌어들였다. 아우토비전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6년 만에 볼프스부르크시의 실업률은 17%에서 8%로 줄었다. 지역에 1만2천 개의 새 일자리가 생겼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지역 사회의 전폭적인 협력이 만들어낸 성과였다.

도요타시도 심각한 위기에 빠진 적이 있다. 2009년 일본을 강타한 ‘도요타쇼크’ 때문이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 발 금융위기에 이어 미국에서 대규모 리콜과 불량 부품 문제가 잇따라 터지면서 도요타의 2009년 판매감소율은 전년도의 23.8%에 달했다. 도요타자동차가 감산을 결정하고 수천 명을 해고하면서 도요타시는 최악의 실업난에 빠졌다. 2009년 초 도요타시의 구직 희망자는 전년보다 120% 늘어난 반면 같은 기간에 나온 일자리는 절반이나 줄었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높은 실업률을 기록했다. 도요타시의 법인세 수입은 무려 90%나 줄었다.

국내의 대표적인 기업도시들에서도 이런 현상이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자동차공업도시 울산과 조선해양도시 거제는 거대기업에 의지하는 기업도시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울산의 지역 내 순생산 54조 6740억원 중 13조9470억원(25.5%)은 다른 지역으로 유출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울산에서 생산한 돈이 지역에서 돌지 않는다는 뜻이다. 울산의 개인소득 증가율(2013년 기준)은 0.6%로 전국에서 꼴찌를 기록했다. 가장 높은 인천(4.9%)에 비해 8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데, 물가상승률 등을 고려하면 사실상 역성장에 접어든 셈이다.

‘대기업도시’ 지고 ‘기업집약형 도시’ 뜬다


▎판교테크노밸리의 역동성과 개방·공유의 정신은 판교의 문화적 정체성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단지와 가까운 주거지역에서 열리는 ‘판교25통 거리축제’(위 / 사진·중앙포토)와 최고의 직장으로 꼽히는 엔씨소프트의 구내식당 전경(아래 / 사진·뉴시스).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이 지역 경제의 80%를 차지하는 거제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조선업계가 불황에 접어들면서 두 회사의 수주 규모가 크게 줄어들자 지역 경제도 동시에 위축됐다. 갈수록 국내 자동차 판매 점유율이 떨어지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영업 부진이 계속될 경우 울산도 거제와 마찬가지로 지역경제가 심각한 불황에 빠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하고 있다.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한국경제연구소 부원장)은 “하나의 대기업에 의존하는 기업도시 모델은 기업의 성쇠에 따라 지역경제가 요동칠 수밖에 없다”며 “산업구조를 다양화하고 경쟁력 있는 중소 규모의 기업을 많이 유치하는 게 더 안정적이고 효율적이다”라고 말했다.

대기업 위주의 공업정책을 펼쳤던 과거의 고도성장기와 현재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세계적 추세는 규모가 작은 첨단기업들을 한 데 모은 집적단지화(클러스터)다. 스웨덴의 시스타 사이언스시(시스타)는 산학연 협력의 대표적인 모델로 꼽힌다. 시스타에는 에릭슨, 노키아, IBM, 컴팩, 오라클, 마이크로소프트 등 세계적인 IT 기업과 관련 연구소 1천여 개가 모여 있다. 컴퓨터공학연구소(SICS), 에크레오연구소(ACREO), IT연구소(SITI) 등 국책연구소들도 대거 입주해 있다. 시스타는 1970년대 중반까지 군사훈련장이었다. 당시 설립된 스톡홀름 토지기업 입지회사(SML)는 주거 단지를 건설하고 기업 유치와 클러스터 조성사업을 추진했다. 스웨덴 왕립공과대학과 스톡홀름대학이 연합해 만든 ‘IT대학’은 시스타 입주 기업에 고급 기술인력을 공급하고 연구개발을 지원하면서 이곳이 미국 실리콘밸리에 버금가는 IT클러스터로 성장했다.

북유럽 최초의 과학기술도시로 꼽히는 핀란드 울루(Oulu)시는 1982년부터 기업도시를 추진하면서 도시 자체가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특이한 사례다. 핀란드 정부는 1990년대 초반 국가산업 전략으로 ‘클러스터 정책’을 도입 했다. 행정구역별로 한 개의 공과대학을 세우고 대학을 중심으로 과학도시(테크노폴리스)를 건설하는 장기 프로젝트였다. 모두 19개의 과학도시가 조성됐고, 울루시도 그중 하나다. 노키아, HP, 선 등 250여 개 기업이 입주해 있다. 도시계획 수립 과정에 기업을 참여시켜 의사결정권을 주는 파격적인 행정조치가 이뤄졌다. 또 울루시와 입주기업, 대학, 정부가 참여하는 운영회사(울루테크노폴리스)를 만들어 기업 지원을 총괄하도록 했다. 울루시는 내친 김에 시 자체를 ㈜울루테크노폴리스란 이름으로 핀란드 증시에 상장했다. 과거 대기업 중심의 도시 형성 모델이 ‘기업의 도시화’라면, 울루시는 ‘도시의 기업화’로 변화된 패러다임의 상징이 됐다.

전 세계에서 성공한 기업도시들은 대체로 위와 같은 사례의 형태를 벗어나지 않는다. 도시개발 과정의 청사진을 마련할 때 기업이 참여하고 이후 기업지원 활동에서도 기업과 민간이 참여하는 민주적인 의사 결정구조를 구축하는 것이다.

3. 표류 중인 지방 기업도시에 모범사례 - “‘넥스트 판교’에서 도시의 미래를 찾다”


▎사진·중앙포토
하지만 국내 기업도시 정책은 최근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2004년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의 일환으로 혁신도시와 함께 정부가 추진한 기업도시 개발사업은 10년째 표류 중이다. 2005년 8월에 충주, 원주, 무안, 태안, 무주, 영암·해남 6개 지역이 기업도시 시범사업지로 선정됐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추진되는 곳은 충주와 원주뿐이다. 국내 중견기업과 중국 자본 등이 투자 의향을 밝히고 사업에 참여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업을 철회했다. 산업 클러스터 조성에 중점을 두기보다 골프텔 분양 등 부동산 개발 수익에 중점을 두고 추진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정부는 기업도시 지정 요건을 완화하는 기업도시특별법을 시행하고 붐 조성에 나섰지만 소수 기업에 의존하는 방식의 개발이 실효성을 거둘 수 있을지 미지수다. 업계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전국에 기업 유치를 위해 각종 혜택을 제공하고 비슷한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마당에 굳이 수도권과 멀리 떨어진 지역 개발사업에 뛰어들어 모험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판교테크노밸리의 개발과 운영 방식은 국내 기업도시 조성의 모범 사례로 주목을 받는다. 지난 3월 ‘판교글로벌리더스포럼’이 출범했다. 포럼에는 다음카카오, 엔씨소프트, 위메이드 등 판교테크노밸리의 분야별 대표기업 70여 개와 판교테크노밸리지원본부 등 행정기관이 참여하는 협의체다. 입주기업들이 공동으로 연구개발사업을 진행하고 일자리 창출형 창업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만들어간다. 곽재원 경기과학기술연구원장은 “포럼을 통해 판교테크노밸리의 비전을 기업과 공유하고 세계적인 혁신 클러스터의 성공 모델로 만들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판교의 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판교의 문화콘텐트와 산업 인프라 전망은 여전히 밝다. 테크노밸리가 지금보다 확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와 경기도가 중점적으로 추진하게 될 ‘넥스트 판교’, 창조경제밸리 조성사업이 바로 그것이다.

6월 17일 정부가 발표한 ‘판교 창조경제밸리 마스터플랜’에 따르면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과 시흥동 옛 한국도로공사 부지 43만여㎡에 1조5천억원을 들여 조성한다. 2017년 하반기 준공을 목표로 올해 말 착공하며, 750여 개 기업, 4만여 명이 입주할 예정이다. 판교테크노밸리에 맞먹는 규모다. 단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창업기업이 입주하는 창조공간과 성장단계 기업이 입주하는 기업성장지원센터다. 창조공간은 최대 3년까지 시세보다 80% 정도 임대료를 할인 적용한다. 기업성장지원센터의 임대료도 시세의 70~80% 수준으로 저렴하다.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제1회 판교글로벌리더스 창립포럼에서 참여단체 소개란에 서명하고 있다. 판교포럼은 민관이 합동으로 판교밸리 발전을 모색하는 협의체다. / 사진제공·경기도
제2판교밸리 개발해 한국판 실리콘밸리 완성

제2판교밸리는 경기도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경기도는 판교 밸리를 성공적으로 개발한 경험을 살려 지난해 10월 ‘넥스트 판교’란 사업 명칭으로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경기도와 성남시, 기획재정부, 국토부, 미래부가 참여해 범정부적 사업으로 추진된다. 제2판교테크노밸리가 완공되면 판교밸리에는 1600여 개 첨단 기업과 10만 명이 근무하는 한국판 실리콘밸리로 발돋움하게 된다. 제2판교밸리에는 대학원 오픈랩을 유치해 판교밸리 자체의 인력 양성시스템을 구축하고, 벤처캐피탈이 자유롭게 투자활동을 벌일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할 계획이다. 앞서 소개한 스웨덴의 시스타 사이언스시, 핀란드 울루시의 모델과 유사한 ICT 허브가 되는 것이다. 남경필 지사는 “넥스트 판교 사업은 우리의 미래 성장동력 창출을 위한 혁신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라며 “경기도는 판교밸리 개발 경험을 토대로 넥스트 판교 사업을 선도적으로 추진할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경기도의 넥스트 판교 사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광명시가 ‘제3의 판교밸리’로 개발된다. 대상지역은 시흥과 인접한 광명 서부지역이다. 광명·시흥 보금자리주택지구로 묶였다가 지난 4월 해제된 곳이다. 약 66만㎡ 부지에 9400억원을 투입해 기업의 연구·업무시설과 휴식·문화·여가 시설이 복합된 공간으로 조성할 예정이다. 단지에는 에너지 효율을 최적화하는 차세대 지능형 전력망 시설인 스마트그리드와 사물인터넷 등을 도입해 첨단 지구의 면모를 갖출 계획이다.

판교와 차별화할 업종으로 자동차부품, 기계, 화학, 지능형 로봇 등이 꼽힌다. 판교와 마찬가지로 입주기업의 교류 공간과 금융·창업컨설팅 등 경영 관련 서비스도 병행된다. 경기도 경제투자실 관계자는 “(광명 서부지역의) 첨단연구단지가 조성되면 900개사가 입주해 7만 명 정도의 고용효과를 볼 수 있을 전망”이라며 “생산 유발효과와 부가가치 유발효과가 각각 6400억원, 2800억원에 달해 상대적으로 첨단연구기능과 개발속도가 느린 경기 서부권 발전을 견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판교테크노밸리에서 시작된 기업과 도시의 상생 실험은 이제 막 첫걸음을 뗐다. 청년들의 꿈이 녹아있는 열정의 쇳물이 강을 이루려면 제2, 제3의 판교가 나와야 한다. 엔진이 많을수록 대한민국의 성장 속도는 더욱 빨라질 테니 말이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201508호 (2015.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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