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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100대 ‘경제문화재’ 탐구와 혁신적 경제 마인드 

기업가정신으로 세계 일류 전통 되살리자 

경제성장 과정을 애정 어린 시각으로 바라보는 성숙한 관점 필요… 경제 부흥 70년 유산에는 한국인의 DNA에 각인된 기업가정신 배어 있어

▎제조업과 중공업 중심의 경제개발 과정에는 기업가정신의 정수를 담은 막대한 양의 스토리가 축적돼 있다.
경남 거창군에 있는 거창고등학교는 명문대 진학률이 높다. 이 때문에 매년 입시철이면 언론에 소개되곤 한다. 전국 일반고등학교 중에서 수능성적은 4위에 달했고(2013년), 소위 SKY(서울대 ·고려대·연세대) 진학자 수가 정원의 30%를 넘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거창고 교육은 인성이 중심이다. ‘안 하는 걸 잘하고’, ‘놀면서 잘하는’ 학교다.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책임지도록 교육한다. 특히 직업을 선택할 때 그런 취지를 더욱 강조한다. 그래서 더욱 화제가 되고 있는 학교다.

거창고의 교육 철학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다. 바로 ‘직업 십계명’이다. 거창고 3대 교장이었던 고(故) 전영창 선생의 가르침을 열 개의 문장으로 요약했다고 한다. 그런데 십계명에는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등 파격적인 말뿐이다. 심지어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직업을 선택하라’는 말도 있다. 치열한 경쟁사회의 통념을 완전하게 뛰어넘는다. ‘직업 십계명’은 다음과 같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내가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을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은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가, 약혼자가 결사반대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사뭇 비장하기도 하고, 블랙 코미디 같은 역설도 담겼다. 기독교 계열의 학교이기에 성경에 나오는 ‘좁은 문’을 직업 선택의 지침으로 삼지 않았을까 싶다. <마태복음> 7장(13∼14절)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는 예수의 말씀이 나온다. ‘왕관이 아닌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는 말은 좀 지나치게 느껴진다. 그러나 여기엔 도전정신 충만한 청춘의 기백이 서려 있다. 한국사회에서 점차 실종되고 있는 기업가정신의 본령에도 가깝다. 단어 몇 개만 바꾸면 ‘기업가정신 십계명’으로 활용할 수 있을 정도다.

공무원과 임대업 사이를 배회하는 청춘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왼쪽)과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우리 경제계 기업가정신의 화신인 두 거물은 근대화 과정의 영웅으로 기록된다.
지난해에 교육과학기술부가 고등학교 학생, 학부모 4천 명을 대상으로 장래희망 직업을 조사했다. 우리나라 고등학생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은 교사였고, 학부모가 가장 선호하는 직업은 공무원이었다. 교사와 공무원은 물론 좋은 직업이지만, 학생과 학부모가 ‘가장’ 선호하는 직업이 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리스크’보다는 ‘안온함’을, ‘도전’보다는 ‘안주’를 택한 결과다. 교사와 공무원, 이 두 직업의 공통점은 신분과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된 직업이라는 것이다. 불안정한 우리 사회에 대한 공포심도 반영돼 있다.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 십계명에 비춰볼 때 도전의식과 역동성이 지나치게 떨어진다.

한 초등학교 교사가 들려준 얘기다. 이미 오래전부터 인생의 목표를 묻는 질문에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돈 많이 버는 것’이라고 합창했다. 세월이 꽤 흐른 요즘 초등학생의 장래 희망 중 가장 많은 것이 부동산 임대업이 되었다. 빌딩을 갖고 싶다는 것이다. 부연 설명까지 곁들인다니 결코 농담이 아니다. 아이들은 “상가 한 채만 있으면 유명 브랜드 아파트에 살고, 멋진 자동차 타고 다니며, 평생 월세 받아먹고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 상가는 부모로부터 물려받는다는 것이 전제라고 한다. 청춘의 미래 자화상이 어릴 적부터 공무원과 임대업 사이를 배회하는 모습으로 추락한 모습이다.

한국경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다.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은 하향곡선 위에 있다.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가정신이 사라진 것이 위기를 부른 가장 큰 이유다. ‘세계경제 침체의 여파’란 오랜 변명은 더 이상 통하기 어렵게 됐다. 세계경제의 구조적 위기는 장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변수가 아닌 상수라는 얘기다.

소비가 위축된 탓이라고도 하나 피상적인 관찰일 뿐이다. 기업의 투자 의욕이 사라지면서 일자리가 생기지 않는 게 일차적인 원인이다. 결국 성장의 동력이었던 기업가정신이 실종된 데에서 출발한다. 오늘날 세계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알리바바, 텐센트 같은 기업들은 1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거나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기업이었다. 불과 10년 사이에 엄청난 성공을 달성한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창업 실패에 대한 재도전이 어려운 환경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2015년 현재 한국의 기업가정신지수는 OECD 34개 회원국 중 중하위권인 22위다. 세계기업가정신발전기구가 120개국을 대상으로 태도(창의성), 제도(법·규제) 등을 기초로 기업가정신 수준을 평가한 결과다. 기업인 호감도가 가장 낮은 나라가 또한 한국이다.

세계적인 경제학자 피터 드러커는 1999년 전 세계에서 기업가정신이 가장 활발한 나라로 대한민국을 언급한 적이 있다. 15년 전 세계 일류 기업가정신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전문가들은 ‘한 번 실패한 후 재도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우리나라의 사회·경제적 인프라를 지목한다. 실패를 통해 진화, 발전, 성공에 이르는 기업가정신의 실종이다.

기업가정신이 후퇴한 것은 “중요하다”고 말만 할 뿐 제대로 가르치고 북돋지 않았기 때문인 측면도 있다. 일본 효고(兵庫)현에는 모노쓰쿠리(ものづくり·장인)대학이 있다. 장인정신을 새로운 시대의 기업가정신으로 육성해가기 위해서다. 이 지역 중학생은 반드시 모노쓰쿠리 체험관에서 실습교육을 받아야 한다. 올해 초 삼성그룹의 사내 방송에 출연한 요덴 다이조 모노쓰쿠리대 총장은 “요즘 청소년은 컴퓨터에만 관심이 있어서 뭔가를 만드는 놀이를 하지 않는다”며 “실습을 통해 장인이나 연구자가 되는 길을 체험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중학생 때 사업을 시작한 위자드웍스의 표철민(30) 대표는 “어려서부터 종이 접기든, 모형 비행기 만들기든 새로운 걸 만드는 습관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김진영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 부모는 자식이 의사·공무원 등 안정적인 직업을 갖길 원하지만 중국 부모는 위험이 따르더라도 자기 사업을 할 것을 권한다”고 지적했다. 제2의 알리바바를 꿈꾸는 중국 창업 열풍의 근간에 창업을 장려하는 가정교육이 있다는 얘기다. 최승노 자유경제원 부원장은 “도전이 우대받고 기업가정신이 칭찬받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돼야 저성장의 크레바스를 넘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가정신과 창업에 의해 살아나는 미국경제


▎1976년 현대차의 첫 수출은 포니자동차로 시작됐다. 2015년 현대자동차는 판매 목표를 내수 69만 대, 수출 117만9천 대로 잡을 만큼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20세기 초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목격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초과 이윤의 소멸에 따라 사라지는 게 아니라 발전해나갈 수 있다고 봤다. 기업가들이 불경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제품, 신기술, 신공정을 개척하는 이른바 창조적 파괴에 끊임없이 도전하기 때문이다. 슘페터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지탱하는 힘이 기업가정신에서 나온다고 봤다.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은 이병철·정주영 등 1세대 기업가들의 도전정신 즉, 기업가정신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기업가정신이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으니 경제가 활력을 잃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창업자 세대의 기업가들이 물러났지만 이들의 뒤를 이은 2, 3세대의 기업가정신은 선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탓이라고 봐야 한다. 상속과 경영권 승계에만 골몰하거나 수성(守成)하는 데 그치는 게 오늘의 기업 현실이다. 기업가정신을 찾아보기는 어렵고 위험이 수반되는 대규모 투자에 나서지 않는 게 당연하다. 최성범 우석대 신방과 교수는 “기업가정신의 약화 현상을 모험정신을 보상해줄 대가가 적어진 탓이라고만 설명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미국과 같은 고도 경제의 경우에도 구글, 애플, 페이스북 등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한 기업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미국 경제는 기업가정신과 창업에 의해 지탱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즈니스 스쿨 밥슨 칼리지가 최근 내놓은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미국의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자신의 기업을 운영한다고 답한 비율은 14%에 달했다. 이는 1999년부터 관련 조사를 시작한 이후 최고치로, 인구 수로는 무려 2400만 명에 달한다. 물론 이들 기업가가 모두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처럼 굴지의 기업을 연 것은 아니다. 이들 기업가 가운데 6.5%는 월급쟁이로 있으면서 소규모로 개인사업에 종사한다. 눈길을 끄는 것은 기업가 가운데 55∼64세의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무려 11%에 이른다는 점이다. 주요 선진국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비율이다. 경제회복기에 기업가가 늘어나는 것은 생존을 위해 자영업을 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기회를 잡아보겠다”는 도전정신이 충만하다는 의미다. 청년부터 노인층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기업가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표면적으로는 국내의 창업 열기도 다시 달아오르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지난해 신설법인 수는 8만4697개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종전 기록이었던 2013년 7만5578개 보다 12%나 늘었다. OECD가 지난해 국가별 생계형 창업 비중을 집계한 결과 한국은 1위였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한국의 지난해 창업 유형 중 생계형 창업 비중은 63%로 조사 대상 29개국 중 가장 높았다. 혁신 등이 필요한 기회추구형 창업 비중은 21%로 최하위였다. 창업과 기업가정신이 맞물려 돌아가는 미국과는 전혀 다른 패턴이다.

중국에서도 ‘도전의 아이콘’이 넘쳐난다


▎1. 포스코의 전남 광양 자동차 강판연구소에 전시된 자동차 모형. 포스코가 개발한 초고강도 강판은 차체 무게를 10% 줄여 연료비를 3~7% 줄여준다. / 2. SK는 지난 9월 ICT 기반 창조경제와 세계시장 공략을 통해 미래성장을 이끌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사진은 SK하이닉스 임직원이 이천 공장에서 반도체 장비의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
기회추구형 창업이 줄면서 기업 생태계의 역동성도 사그라지고 있다. 2003년부터 2013년까지 한국 500대 기업 명단의 변화는 이런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10년 동안 새로 500대 기업 명단에 이름을 올린 순수 창업회사는 46개였다. 창업한 지 20년이 안 된 회사는 14개였다. 14개의 신규 기업 중 신기술과 신사업을 바탕으로 한 혁신형 기업은 네이버와 넥슨 정도밖에 없었다.

최성호 경기대 교수는 “도전과 모험정신이 가장 왕성해야 할 청년층이 식당 같은 일반서비스 창업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며 “성장 가능성이 크고 경제 선순환에 기여할 수 있는 기술형 창업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진혁 한국기업가정신센터 센터장은 “과거에는 생산성을 쥐어짜는 시대였다면 지금은 창의성이 중요한 시대”라며 “과거의 추격형 기업가정신을 뛰어넘는 공유형 기업가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임 센터장은 기업가정신의 덕목 중 하나인 회복탄력성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회복탄력성은 창업 후 실패나 위기를 겪었을 때 극복하고 다시 재기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국내 창업자들은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기회 창출형보다 실업 등 외부 요인 때문에 불가피하게 창업을 선택하는 생계형이 더 많다. 이럴 경우 회복탄력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설명이다. 임 센터장은 “실패를 인정하고 새로운 시도의 발판으로 삼게 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과 달리 해외에선 혁신형 창업이 활발하다. 미국 경제 주간지 <포천>이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 중 46%가 지난 10년간 교체됐다. 이 기간에 미국 50대 기업 중 66%가 종적을 감췄다. 애플과 아마존, 구글, 테슬라 같은 젊은 기업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도전의 아이콘’이 넘쳐나고 있다. 지난해 중국에 신규 등록한 업체 수는 총 1292만 개로 2013년보다 14.2% 증가했다. 최용민 한국무역협회 베이징지부장은 “중국 내 모바일·인터넷 사용인구가 5억 명이 넘을 정도로 전자상거래가 급증하고 해외에서 유학생과 외국 자본이 동시에 유입되면서 창업 저변이 크게 넓어지고 있다”며 “정부가 행정규제 완화에 적극 나서고 있는 점도 창업 열기를 달아오르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의 경제위기 극복을 낙관적으로 보는 근거이기도 하다.

혁신성 측면에서도 한국은 샌드위치 신세가 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은 새로운 혁신기업을 세워 더 멀리 도망가고 중국 등 개발도상국은 기술 개발을 통해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제자리걸음이다. 대기업은 10년 넘게 신성장동력 발굴을 외치고 있지만 뚜렷한 미래 사업을 찾지 못하며 수년째 똑같은 메뉴를 반복하고 있다. 벤처기업은 혁신보다는 원가 절감을 통해 단기 이익을 늘리는 데 집착하고 있다. 정준 벤처기업협회장은 “대기업은 안전한 사업만 하면서 현실에 안주하고, 벤처기업은 혁신성을 잃고 있다”며 “국가 전체적으로 미래 성장동력을 발굴하기가 더욱 힘들어 졌다”고 지적했다.

한국 기업의 반혁신 비판하는 외국인의 시각


▎지난 5월 7일 박근혜 대통령이 삼성전자 반도체 평택단지 기공식에 참석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대화하고 있다.
결국 한국경제의 활력 감소는 고도성장을 이끌어 온 재벌들이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이전의 활력을 상실한 반면, 이들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기업가들이 등장하지 못한 탓이라는 결론으로 귀착된다. 지난 5월 일본의 경제주간지 <니케이비즈니스>는 ‘한국재벌의 위기’라는 기획기사에서 “한국 대기업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부족한 도전정신과 오너 리스크”라고 지적했다. 이 기사는 2011년 한국의 재벌기업에 스카웃되었다가 최근 퇴사한 엔도 씨의 경우를 통해 한국 기업의 부족한 도전정신을 이렇게 질타하고 있다.

“엔도 씨가 계약 종료(퇴사)를 결정한 이유는 이 기업이 새로운 것에 전혀 도전할 수가 없는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그룹 오너는 사업 방향성을 제시하지만 구체적인 전략은 각 사업 부문장에게 맡겼다. 그러나 부문장들은 실패할 경우 위에서 내려질 벌을 두려워해 현장에서 나온 새로운 제안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리스크를 감수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 결과 혁신이 일어나지 않고 특징도 없는 범용 제품만 개발, 양산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기업 등 신흥국의 등장과 함께 기존 기술을 짜깁기한 이 회사 제품의 경쟁력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한국 기업의 혁신 마인드 부족을 질타한 ‘한국 기업 비판서’를 낸 외국인도 있다. 한 대기업의 프랑스 법인을 10년간 이끈 에리크 쉬르데주(59) 씨다. 이 전직 법인장이 지난 7월에 출간한 <한국인은 미쳤다>는 책을 통해 한국 기업의 경직된 문화를 정면 비판했다. 시장의 움직임을 읽고 미리 혁신하는 데 서툰 한국 기업 전반에 대한 일침이기도 하다.

“하루 10시간에서 12시간 근무, 토요일 근무에 일요일도 회사 사람과 만나 정보를 교환한다. 한국인에게 회사 바깥의 삶은 없다. 영하 12℃의 한겨울이었지만 승진 파티는 야외에서 이뤄졌다. 폭탄주를 마시고 또 마셨다. 아랫사람의 ‘No!’는 허용되지 않고 실적 또 실적으로 회사는 굴러간다.”

마냥 비판만 하지는 않았다. 그는 한국 기업의 성공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비합리성’에 기반한 측면이 크다고 본다. 하지만 얼마나 지속가능할까. 그가 던진 질문이 아픈 이유다. “하지만 아무도 그(최고경영자)에게 다른 노선을 제안하지 못했고 거대한 기함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대가는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급변하는 경영환경에도 불구, 혁신 불감증으로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나온 예사롭지 않은 비판이다. 삼성전자는 올 상반기 매출이 3년 만에 100조원 아래로 떨어지며 비상이 걸렸다. SK는 그룹 전체 매출이 지난 2011년 155조원에서 지난해 165조원으로 3년 동안 6% 성장했는데 그나마도 대부분은 SK하이닉스가 이끌었다. 자동차 업계는 엔저를 업은 일본 경쟁사, 품질과 브랜드 측면에서 우위에 있는 독일 경쟁사들과 전 세계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정유업계와 석유화학업계는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고부가가치 시장 진입을 시도하고 있지만 미국·일본·유럽 선두기업들과의 격차가 아직 상당하다. 일례로 차세대 소재로 각광받는 탄소섬유 시장의 세계 점유율은 일본이 50%를 넘는 반면 우리나라 업체들은 불과 3%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업계에서는 추정했다. 조선·철강 업계는 경기침체와 중국의 영향으로 불황에 허덕이고 있다.

반기업가 정서와 제조업 경시 풍조는 이제 그만


▎지난 8월 21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제1전시관에서 열린 부산창조경제혁신센터 주관 ‘러블리 블랙’ 디자인쇼.
위기의 늪을 건너기 위해서는 혁신적 기술과 제품을 내세워 글로벌 시장을 주도할 힘을 갖춰야 한다. 전문가들은 기업가정신을 되살려 공격적인 연구개발(R&D)과 인수합병(M&A)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그동안 세계 6위까지 R&D 투자규모를 늘려왔지만 기술무역수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 기업별로 보면 몇몇 대기업만 R&D에 충분히 투자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김갑수 KAIST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2013년 국내 전체 R&D 투자액 46조5599억원 중 7개 대기업의 비중이 55.7%(25조9534억원)에 달했다. 7개 기업은 삼성·LG전자, 현대차, 삼성·LG디스플레이, 기아차, SK하이닉스였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기업은 규모를 막론하고 대부분 R&D 투자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일례로 국내의 한 대표적 화학 기업의 R&D 투자규모는 매출 대비 0.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 교수는 “글로벌 경쟁에 익숙한 몇몇 기업을 제외한 다수의 대기업이 기존 사업, 안정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비(非)혁신 사업에 안주하는 바람에 국가 경쟁력 자체를 약화 시키고 있다”며 “국내외 기업끼리 더 치열한 경쟁을 하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기업들도 자연스럽게 R&D 투자를 늘리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업가정신의 발양을 위축시키는 요인 중엔 반기업가 정서와 제조업 경시 풍조가 있다. 둘 다 과거 역동적 성장시대를 폄하하는 동일한 의식구조에서 나왔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기업이 무너지면 국가도 같이 무너진다. 우리 경제의 성장 과정을 애정 어린 시각으로 바라보는 성숙한 관점이 필요하다. 여기엔 보수와 진보, 여와 야도 없다. 우리 국민이 있을 뿐이다.

1967년 서울 종로 세운상가에 제조업체 하나가 서울사무소를 열었다. 이 회사의 울산 공장에선 포드에서 들여온 ‘코티나’를 조립했다. 하루 10대가량, 1년에 3천 대 생산이 고작이었다. 현대자동차는 이렇게 시작했다. 69년 학군단(ROTC) 공채로 입사한 이충구 전 현대·기아차 연구개발본부장(사장)은 “기술이랄 것도 없이 볼트·너트를 끼워 맞추던 수준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났다. 현대차그룹은 연간 800만 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글로벌 ‘빅 5’ 업체로 우뚝 섰다. 그 밑거름은 엄청난 노력과 근성이었다. 80년대 중반 ‘독자 엔진’ 개발에 나섰을 땐 제휴업체였던 일본 미쓰비시가 훼방을 놓았고, 독일 부품업체 보쉬는 ‘3류 회사’라며 거래를 거부했지만 결국 목표를 달성했다.

광복 70년, 최빈국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 강국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 이면엔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한 창업자와 잘살아보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기술자·근로자들의 땀방울이 있었다. 반도체·조선·건설업 등도 비슷한 성장의 길을 밟으며 세계적 산업으로 컸다.

광복 직후 1인당 소득은 ‘60달러대’로 아프리카 소말리아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들 ‘주력 산업’ 덕분에 어느새 ‘3만 달러’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나는 한국이 두렵다>의 저자 제프리 존스(전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회장) 김앤장 변호사는 “한국 주력산업의 경쟁력은 해외에서 더 알아준다”며 “이들이 더 자유롭게 경쟁력을 발휘하게 도와 미래 70년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우리 기업이 구사해왔던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빠른 추격자)’ 전략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세상에 없는 제품·서비스를 내놓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시장 선도자)’가 아니면 생존이 어렵다.

주력산업으로 성장한 제조업의 유산 탐구


▎지난 10월 8일 경북 경산시 경일대학교 교내 시제품 제작소(I MAKE)에서 창업동아리 ‘마이크로 아카데미’ 학생들이 3D프린터에서 부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마르코 아눈지아타 제너럴일렉트릭(GE)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3D 프린팅·자동화센서 같은 첨단 정보기술(IT)을 융합해 한국 제조업 경쟁력을 한 차원 높여야 한다”고 주문한 바 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산업연구실장은 “어려움을 크게 겪는 조선·철강·석유화학 등부터 고부가가치 위주로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내 주력 기업들도 이런 상황을 파악하고,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포스코 광양제철소에선 친환경 신공법을 통한 ‘고강도 강판’ 개발에 승부를 걸었다. 현대차의 경기도 의왕 중앙연구소는 IT를 결합한 ‘무인주행기술’을 무기로 다듬고 있다.

송병락 서울대 명예교수는 “경제사적으로 볼 때 자동차·건설 등은 지속적으로 키워야 하는 산업”이라며 “이를 소홀히 하면 결국 그리스 같은 나라로 전락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근 서울대 경제연구소장은 “제조업이 융합하는 추세인데 ‘규제 칸막이’가 여전하다”며 “정부부터 ‘퍼스트 무버(선도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월간중앙>이 내년부터 연재를 시작하는 <근대화 70년 100대 ‘경제문화재’ 탐구>도 지난 70년간 한국의 주력산업으로 성장한 디지털과 제조업의 유산을 밑바닥부터 취재해 연구하자는 취지다. 그 위대한 유산에는 한국인의 DNA에 각인된 기업가정신, 그 진취적 기상의 원형이 배어 있다. 한국경제의 강점으로 부각한 디지털 산업과 함께, 부가가치를 높인 제조업은 한국 경제 향후 10년의 성패를 가름할 핵심 분야다. 국민, 기업인과 근로자가 하나되어 이룩한 성취에 경의를 표하는 일이 바로 ‘100대 경제문화재’ 탐구 프로젝트다.

-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201511호 (201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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