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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해외건설 ‘빅 5’ 역사에서 배우는 기업가정신 

“리스크 짊어지는 긍정적 사고가 혁신의 단초” 

올해 역대 해외건설 수주 누적액 7천억 달러 돌파… 지구 곳곳 너른 대양과 대지에 블루 오션을 개척한 전통 이어와

▎두산중공업이 2009년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시 남부에 건설한 쇼아이바 3단계 해수담수화플랜트 전경. 하루에 88만t의 담수를 생산해 이슬람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 지역에 공급한다. / 사진·중앙포토
1977년 9월 청와대에서 무역진흥 확대회의가 열렸다. 중동 진출 성과에 대한 관련 부처의 보고가 있었다. 당시는 무역진흥 확대회의가 끝나면 박정희 대통령이 3부 요인, 관계 장관, 경제단체장 등과 오찬을 나눴다. 중동진출 성과가 예상을 뛰어넘는 호조를 보이고 있을 때다. 박 대통령은 몹시 기분이 좋았다. 오찬 도중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에게 이렇게 물었다.

“정 회장, 중동에서 성공을 거둔 이유가 무엇이오?” 정 회장은 특유의 입심으로 부담 없는 답변을 했는데, 그 대답이 걸작이었다.

“각하! 제가 공부를 제대로 했습니까, 대학을 나왔습니까, 영어를 할 줄 압니까? 그리고 현대 간부가 세계 일류의 외국 회사에 비해 기술이나 경영면에서 우수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저나 회사간부가 잘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건 전적으로 근로자의 공입니다.” 박 대통령도 “정 회장 말이 맞아”라고 맞장구를 쳤다.

1970년대 중반 개발시대의 기적, 특히 도약의 결정적 계기가 됐던 중동 진출은 지휘자 박정희 대통령, 기획입안자 오원철 청와대 경제수석, 행동대장 정주영 현대창업주의 역할 분담으로 이뤄졌다. 수만 명의 근로자가 다른 한 축의 주역이었지만 그들은 대체로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박 대통령과 정주영 회장은 당시 근로자들의 막중한 역할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두 사람 모두 ‘밑마닥의 삶’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경륜의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제1차 오일쇼크 직후인 1974년 한국경제는 위기에 봉착했다. 경상수지 적자는 20억2270만 달러에 달했다. 1년 만에 6.6배로 불어났다. 변변한 수출품도 없었다. 달러를 구해오지 않으면 국가부도는 피할 수 없었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한국경제를 구한 건 해외 건설이었다. 1960년대 태국과 베트남 등지에서 건설공사 경험을 쌓은 국내 건설사는 1970년대 오일쇼크가 터지자 중동으로 향했다. 첫 테이프는 삼환기업이 끊었다. 1973년 12월 따낸 알룰라~카이바 고속도로 건설 공사로 2400만 달러를 수주했다.

오일쇼크를 오일 달러로 극복하다


▎1977년 현대 중공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오른쪽 두 번째).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영애 박근혜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맨 오른쪽)의 모습도 보인다. / 사진·중앙포토
1974년 박정희 대통령과 우리 경제의 위기 관리팀은 왜 중동 진출에 집착했을까?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 장예준 상공부 장관의 회고담이 당시의 위기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먼저 김정렴 실장의 회고다. “1973년 3억 달러였던 경상수지 적자가 오일쇼크로 74년엔 20억2천만 달러로 치솟았습니다. 이자가 비싼 단기차관까지 꿔다가 이를 막았는데 이러다간 살 길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중동의 오일달러에 사활을 건 거죠. 대단히 절박했습니다.”

1998년 <중앙일보> 기자에게 털어놓은 장예준 전 상공장관의 회고도 비슷한 맥락이다.

“박 대통령이 크게 질책할 때는 대개 장관을 바꾼다는 신호죠. 우리나라가 1970년대에 딱 한 번 수출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해가 있었어요. 73~74년 오일쇼크의 파도를 얻어맞은 75년이었죠. 퇴임을 각오했는데 박 대통령은 ‘못했지만 오일쇼크가 있었으니 이번엔 봐주겠어’라고 웃으시더군요.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고 답했지요.”

1989년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한복판에서 벌어진 리비아 대수로 공사장. 사막 모래는 무거운 덤프트럭엔 치명적인 함정이었다. 작열하는 태양, 살인적인 갈증과도 싸워야 했다. 향수를 달랠 선술집조차 없었다. 선진국 근로자는 혹독한 근무조건 때문에 손사래를 쳤다. 자금력도 기술력도 열세였던 한국 건설회사가 중동시장을 뚫을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영어를 잘 몰라도 영어로 된 공사 지시서를 줄줄 읽어냈다. 개미처럼 부지런한 근로자가 무기였다.

1976년 ‘20세기 최대 역사(役事)’로 불렸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은 계약금액이 9억4천만 달러에 달했다. 당시 정부 예산의 25%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운도 따라줬다. 76~81년 주베일 산업항 공사 당시 10m 높이의 철골구조물을 바지선에 실어 1만6천㎞ 거리에 있는 사우디까지 19번 왕복했다. 보험도 안 들었는데 태풍을 딱 한 번 만났을 뿐이다. 당시 중동에서 일했던 고영회(57) 대한변리사회 회장은 “철근을 묶는 데도 한국인은 독창적인 결속법을 만들어냈다”고 회고했다. 77년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한국인 해외 건설노동자 등이 그려진 그림을 ‘한국인이 오고 있다’는 제목과 함께 표지에 장식했다.

해외 건설 경험은 국내 고속도로·발전소·제철소·댐 같은 기간 시설을 짓는 데도 밑거름이 됐다. 1980년대 한국경제의 성장을 이끈 중화학공업 발전에도 해외 건설이 모태 역할을 했다. 건설사가 해외에서 수주해온 각종 플랜트 설비 공사가 국내 중화학공업 회사에 특수를 안겨줬다. 해외 건설 덕에 일어선 중화학공업은 1970년대 연평균 20%에 달하는 성장률을 기록하며 1980년대 자동차·전자업종 성장의 견인차가 됐다.

한국경제의 오늘은 해외 건설의 위대한 활약에 크게 힘입었다. 기술과 자본을 축적하고, 좁은 국토를 벗어나 지구 곳곳 너른 대양과 대지에 블루 오션을 개척한 전통이다. 올해 6월 말 현재 역대 해외건설 수주 누적액이 7천억 달러를 돌파했다. 1965년 현대건설이 해외건설 시장에 첫 발을 내디딘 지 50년 만에 이른 성과다.

해외건설업계에서는 보통 5대 ‘빅 컨스트럭션’을 꼽는다.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1965년·현대건설), 리비아 대수로(1983년·동아건설),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1976년·현대건설),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1993년·삼성물산·극동건설), UAE 후자이라 담수 플랜트(2003·두산중공업) 등이다. 하나같이 어려운 공사였다. 과정에는 당연히 혁신적 공법과 새로운 비즈니스 마인드가 필요했다. 결국엔 강렬한 기업가정신이 사업을 성공시켰다.

“경험과 신용, 시공의 노하우를 얻었다”


▎리비아 대수로는 중국의 만리장성, 이집트 피라미드와 함께 지구상에서 인간이 창조한 가장 위대한 공사로 꼽힌다. / 사진·중앙포토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가 그 시작이었다. 태국 남단 말레이시아 국경 인근의 두 도시 파타니와 나라티왓을 잇는 92㎞의 2차선 고속도로 건설. 1966년 1월 착공, 1968년 3월 준공됐다. 무모한 도전임이 분명했다. 당시 현대건설에는 아스콘(아스팔트 콘크리트) 기능공도 없었고, 구조물의 ‘뒷채움’이라는 말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통나무로 만든 떡메를 들고 소교량 암거의 뒷채움을 하려 덤벼들자 아연실색한 미국인 감독관이 욕설을 퍼부었다는 일화도 있다.

현대건설이 처음 태국에 가지고 갔던 장비는 재래식 도로공사에서 사용하던 구식의 노후장비였다. 그나마도 절대다수가 부족했다. 불도저, 로더 등 일부 장비는 신제품을 구입하였는데, 기능공들이 사용방법을 몰라 석 달도 채 못 가 고장이 났다.

태국은 비가 많은 나라여서 모래와 자갈이 항상 너무 젖어 있어, 그대로 섞을 경우 함수량이 맞지 않아 아스콘이 제대로 생산되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을 2~3개월간 고심한 후에야 알아내어 건조기에 자갈을 넣고 말리려고 했으나 건조기의 온도가 잘 올라가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정주영 사장이 와서 보더니 “건조기에 비싼 기름 때가면서 말릴 게 뭐 있느냐, 골재를 직접 철판에 놓고 구워라”라고 지시했다. 과연 건조기를 이용할 때보다 생산능률이 두세 배까지 올랐다.

당시 정 사장은 한 달이면 1주일은 태국에 와서 살다시피 했다. 기후 등 여러 가지 악조건으로 공사가 부진했기 때문에 그가 오면 으레 현장 직원들은 야단을 맞았다. 토취장에서부터 현장까지의 작업로에는 운반하던 돌들이 몇 개씩은 떨어져 있기 마련인데, 그는 차를 타고 가다가 혹시 그런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질 못했다. 차에서 내려서 손수 돌들을 한쪽으로 치우곤 하는 통에 현장 직원들이 쩔쩔 맸다.

새벽 4시에 현장에 나와서 기계를 돌렸을 정도로 의욕이 강했다. 힘이 장사인 젊은 근로자들도 기계를 한번 돌리고 나면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힘에 부치는 작업이었다. 사장부터 이처럼 솔선해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 기술자들은 큰 자극을 받았다.

현대건설은 낙찰가(522만 달러)의 절반을 훨씬 넘는 300만 달러의 손실을 봤다. 그러나 당시 정 사장은 껄껄 웃었다. “현대건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과 신용, 시공의 노하우를 얻었다”고 자부했다. 태국에서의 경험이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귀중한 자산으로 활용됐다.

50년이 지났지만 현지에선 지금도 이 도로를 ‘따논 까올리(한국 도로)’라 부른다. 당시 공사에 참여한 한국 근로자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가 워낙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라티왓은 연중 낮 기온이 30도를 넘는다. 매일 열대성 소나기 스콜이 쏟아진다. 땅을 다져놓으면 비가 쓸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때까지 건설 경험도 거의 없었다. 국내에서 3㎞ 거리의 비행장 활주로 몇 개를 다져본 게 전부였다. 미국인 감독관은 공사 초기부터 현장에 파견된 현대건설 임직원을 불신에 가득 찬 눈초리로 바라봤다. 정주영 사장은 “25개월 안에 끝내겠다”며 공사를 따낸 뒤 약속을 지켰다. 현장에 참여했던 백동명(74) 전 현대건설 전무는 “태국 고속도로 공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악전고투의 현장이었다. 훗날 한국 건설회사들이 중동시장에 나가 쟁쟁한 해외 경쟁사를 물리치고 공사를 수주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고 회고했다.

“리비아 대수로는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


▎1967년 태국 파타나-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현장. 현대건설이 최초로 수주한 해외건설 공사로 이때의 경험은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십분 활용됐다. / 사진·중앙포토
리비아 대수로는 중국의 만리장성,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함께 지구상에서 인간이 창조해낸 가장 위대한 공사로 꼽혔다. 그래서 한때 ‘위대한 인공강(GMR: Great Man-made River)’이라고도 불렸다. 퍼올린 지하수는 송수관을 통해 지중해 연안의 도시와 농촌에 보내졌다. 거대 규모의 ‘녹색 혁명’ 사업이었다.

1983년 동아건설과 대한통운 컨소시엄은 선진국의 대형 건설사들을 제치고 37억5244만 달러에 1단계 공사 수주에 성공했다. 1단계 공사는 동남부 지역에 1874㎞의 수로를 건설하는 것이다. 1984년에 착공해 1991년 완공됐다. 1단계 공사에만 연인원 1100만 명이 동원됐고, 건설 중장비는 550만대가 투입됐다. 1단계 공사 착공식에서 참석한 카다피가 “이 공사는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극찬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동아건설·대한통운 컨소시엄은 1단계 공사 성공에 힘입어 64억5852만 달러에 2단계 서남부 지역(1730㎞) 공사도 따내 1996년 8월에 공사를 갈무리했다. 대한통운 관계자는 “리비아 대수로 1·2단계 공사는 해외건설 수주 50주년을 맞은 지금도 역대 해외 수주액 10위 안에 나란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며 “시공 과정에서 수많은 혁신이 이뤄진 사업인 만큼 그 성과를 치밀하게 연구·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쌍둥이 건물, 20세기 세계 최고층 빌딩. 88층, 452m 높이의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 타워’에 붙어 있는 수식어들이다. 페트로나스 타워는 지하 4층 지상 88층 빌딩으로 미국 시카고의 시어즈 타워(Sears Tower, 110층)보다 층수에서는 18층 낮다. 그러나 높이는 상층부 첨탑을 포함해 시어즈 타워(443m, 옥상의 안테나 제외)보다 9m가 높은 452m로 당시 세계 최고층 건물의 자리를 유지했다. 2003년 10월 대만 타이베이에 높이 508m, 101층짜리 ‘대만 파이낸셜센터(타이베이101)’가 들어서면서 최고층 빌딩의 자리를 물려줬다.

이 트윈 빌딩은 한국과 일본 건설사가 공동으로 건설했다. 삼성물산과 극동건설이 2번 타워를 건설했고, 일본의 하자마 건설이 1번 타워를 맡았다. 당시 한·일 건설기술의 자존심을 걸고 상대보다 빨리 건설하려 경쟁했다. 일본 업체보다 한 달가량 착공이 늦었지만, 우리 건설사가 29개월 만에 10일 먼저 완공에 성공했다. 두 건물을 잇는 스카이브릿지(sky bridge)도 삼성물산이 맡아 화제를 모았다. 미국 CNN에서 타워의 브릿지 연결 행사를 생중계하는 등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페트로나스 트윈타워 건설 당시 삼성물산은 한 개의 층을 4∼5일 만에 올리는 공정계획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셀프 클라이밍 폼(Self-climbing Form) 기술(공법)을 적용했다. 셀프 클라이밍 폼 공법은 한 층의 공사가 완료되면 기존 거푸집을 타워크레인의 도움 없이 유압잭을 이용해 위층으로 올라가게 하는 자동시스템이다. 공기단축과 함께 작업 대기 시간 감소로 원가절감의 강점이 있는 공법이다.

여기에 80메가파스칼(㎫·1㎫은 단위면적 ㎠당 10㎏의 하중을 견딜 수 있는 강도)의 고강도 콘크리트를 개발하고 적용했다. 지상 380m까지 한 번에 콘크리트를 쏘아 올리는 기술이다. 세계 최고 빌딩 UAE 두바이 부르즈칼리파 시공 당시 기술보다 업그레이드됐다. 층당 3일 공법, 지상 604m까지 콘크리트 압송, 세계 최초 인공위성을 활용한 수직도 관리 등의 최신 공법이 두루 적용됐다.

페트로나스 트윈타워가 완공된 지 15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말레이시아 국민들은 시공사 삼성물산을 ‘신뢰의 기업’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 같은 신뢰를 토대로 삼성물산은 말레이시아에서 건축 분야뿐 아니라 플랜트에서도 약진하고 있다. 페낭(Penang)주 프라이(Prai) 지역에 최대 용량 1071㎿급 복합가스터빈 발전소를 건설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말레이시아 동남부 펜거랑 지역에 20만㎥의 LNG 탱크 2기와 연간 500만t의 LNG 기화송출설비 시설을 짓는 LNG터미널 공사도 수주했다.

해수 담수화 플랜트 세계 1위


▎삼성물산이 시공한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 트윈타워의 야경. 세계 최신의 건축공법이 두루 활용된 혁신의 결정체였다. / 사진·중앙포토
중동의 허브로 불리는 두바이. 불모의 사막에서 초록의 도시로 화려하게 변신하게 된 배경이 있다. 엄청난 양의 물을 공급하는 담수화 플랜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두산중공업이 완공한 후자이라 담수화 플랜트에서는 하루 150만 명이 사용할 수 있는 45만t의 물이 생산되고 있다. UAE 전체 담수 생산의 26.5%에 해당하는 규모다. 두산중공업은 2001년 당시 담수화 플랜트로는 사상 최대인 8억 달러에 이 공사를 수주해 2003년 12월 준공했다. 100% 자체 기술로 플랜트를 건설한 의미도 컸다. 이 공사를 계기로 명실상부 담수화 플랜트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됐다. 담수 공장의 핵심인 증발기를 경남 창원에서 제작해 후자이라로 직접 옮겨오는 ‘원모듈 공법’을 세계 최초로 개발, 적용했다. 공기를 6개월 이상 단축시켰고 제작·분해·재조립 과정을 없애 품질의 향상도 이뤄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아랍에미리트(UAE) 후자이라 담수플랜트, 사우디아라비아 쇼아이바 담수플랜트 등 중동지역 담수플랜트 수주의 거의 대부분을 따내며 세계 시장 점유율 1위(40%)로 올라섰다. 지난 30년 동안 중동 지역에서 수주한 해수담수화 프로젝트는 사우디·UAE·쿠웨이트·오만·카타르 등 중동 전역 총 27개 프로젝트로, 담수 생산용량은 580만t 규모다. 이들 프로젝트에서 생산되는 물은 하루 2천만 명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해수담수화 플랜트의 방식은 크게 다단증발(MSF), 다단효용(MED), 역삼투압(RO) 방식 등 세 가지로 나뉘는데 두산중공업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 세 가지 방식의 기술과 실적을 모두 보유한 기업으로 꼽힌다.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유전지대 주베일의 산업시설을 위한 신항만 건설공사. 1976년 6월 현대건설이 맡게 된 이 공사는 수주 자체부터 기적에 가까웠다. 공사 정보를 입수한 것은 불과 입찰 7개월 전. 당초 입찰자격 기회도 없었던 현대건설은 사우디 정부를 설득한 끝에 10번째 응찰자가 됐다. 결국 현대건설은 세계 유수의 건설사를 제치고 9억3천만 달러의 낙찰가로 공사를 수주했다. 엄청난 돈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해외건설 한 해 수출 규모가 8억3천만 달러 정도에 불과했던 시기였다.

한국이 당시 사실상 국가부도였다는 것은 국민만 모르고 있었지 세계 시장에서는 이미 다 알고 있었던 시기다. 국가 부도 일보직전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할 때마다 외환 문제를 다그쳤다. 각국 주재 외교관은 돈 꾸러 다니기에 급급했다. 경제부총리가 해외 은행마다 다니면서 구걸하고 최대 3천만 달러를 꾸어 왔는데, 이 돈을 부도를 막는 데 다 털어 넣어야만 했을 정도로 외환이 고갈됐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 수주를 위한 현대건설과 우리 정부의 노력은 하루하루가 전투나 다름없었다. 박 대통령은 유양수 주 사우디 대사에게 거의 매일 훈령을 보내 입찰 성공을 독려했다.

공사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3.48㎞의 해상 유조선 정박시설을 비롯해 호안·방파제·안벽공사 등 해상과 육상을 아우르는 종합공사였다. 규모도 컸지만 공사의 난이도도 대단히 높았다. 수심 10m의 바다를 길이 8㎞, 폭 2㎞로 매립해 항구와 기반시설을 만들어야 했다. 50만t급 유조선 4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항구의 조성은 시도는 물론 구상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은 한국 건설업의 모태(母胎)


▎현대건설이 건설한 사우디 동부 유전지대 주베일의 신항만. 이 공사를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외화는 1970년대 중반 제1차 오일쇼크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 사진·중앙포토
모든 기자재는 울산 조선소에서 제작해서 수송했다. 그런데 가야 할 길이 보통 길이 아니었다. 세계 최대의 태풍권인 필리핀 해양을 지나 동남아 해상, 몬순(계절풍)이 부는 인도양을 거쳐서 걸프만까지 가야 했다. 일명 대양 악천후 바닷길 수송 작전이었다. 12만t짜리 기자재를 무려 19차례나 뗏목과 같은 바지선(밑바닥이 평평한 화물 운반선)으로 끌고 가 시공했다. 사람들은 이 작전을 ‘뗏목 수송작전’이라 불렀다.

도전을 선택한 정주영 회장은 결국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이면서 현대의 급성장을 이끌었다. 세기의 공사였던 주베일 산업항 공사의 경제적 효과는 한 기업을 넘어 국가적인 파급력도 대단했다. 1977년 3월 사우디 라스알가르 항만과 그해 6월 쿠웨이트 슈아이바 항만, 1978년 1월 두바이 발전소 수주까지….중동 지역의 대형 공사를 연거푸 따낸 것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975년 중동에 진출한 이후 1979년까지 현대건설은 무려 51억64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정 회장이 중동건설 진출 당시 박 대통령에게 했다는 말은 신화처럼 전해진다. ‘리스크를 기꺼이 짊어지는 긍정적 사고’가 바로 혁신이었다는 점을 웅변하는 말이다.

“중동은 1년 내내 비가 안 오니까 쉬지 않고 일해 공사 기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낮에는 더우니까 자고, 공사는 밤에 하면 됩니다. 공사할 땐 모래가 있어야 콘크리트 시멘트를 만드는데, 지천으로 깔린 게 모래니 좋고, 물은 유조선을 만들어 빈 탱크에 가득 실어 나르고, 돌아올 때는 석유를 담으면 됩니다.”

-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201511호 (201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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