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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함정임의 ‘바닷가 서재’] 삶의 시계를 멈추게 하는 것들 

단편으로 만나는 멜빌, 모파상, 그리고 헤밍웨이의 세계 

함정임 소설가, 동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바닷가 서가(書架)에는 눈길이 닿는 데마다 그들이 있다. 멜빌, 모파상, 그리고 헤밍웨이. 낮이나 밤이나, 집에서나 멀리 떠나 잠시 머무는 낯선 곳, 지나가는 길에서나 나는 자주 그들과 만난다. 그들은 내 문학적인 삶의 시계(視界)에서 벗어나지 않는 구성원들인데, 그들과의 만남은 제각각, 따로따로 진행된다. 이런 식이다. 뉴욕 맨해튼 월스트리트에서는 멜빌만을 생각한다.

“내 사무실은 월가 xx번지 건물 2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무실의 한끝에서는 건물의 맨 밑에서 꼭대기까지 수직으로 관통하고 천장에 채광창이 난 넓은 환기통로의 하얀 내벽이 내다보였다. (…) 그의 책상은 작은 곁창 가까운 곳에 놓게 했다. 원래 그 창으로는 칙칙한 뒤뜰과 벽돌들이 내다보였지만 잇따라 건물들이 올라서는 바람에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약간의 빛만 새어 들어왔다.”(허먼 멜빌, <바틀비>, 김훈 옮김)

자본의 정점 월스트리트에서 욕망을 거세한 채 창백하게 죽어간 ‘바틀비’라는 기이한 인물을 만난 독자라면, 맨해튼의 초고층 마천루 틈새를 걸어가는 내내 그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파리와 노르망디 지방의 몇몇 고장과 이어 영불해협 연안의 포구들을 돌아볼 때에는 모파상의 소설 공간에 집중한다.

“땅은 초록빛으로 한없이 길게 뻗어 있었고, 하늘은 지평선 가장자리까지 파랬다. 노르망디 지방의 농장들은 작은 숲의 너도밤나무 띠 속에 갇혀 있었다. 가까이에 있는 낡아 빠진 울타리를 열자, 마치 드넓은 정원을 보는 것 같았다. 그곳의 농부들처럼 뼈가 드러난 오래된 사과나무들에 전부 꽃이 피어 있었기 때문이다.”(기 드 모파상, <밀롱 영감>, 최정수 옮김)

노르망디 지역이란 파리 북부에서 영불해협에 이르는 대평원을 가리킨다. 칼바도스라는 사과 발포주로 명성이 높고, 카망베르 치즈의 원산지다. 이 평원을 가로지르는 것이 파리 도심을 둘로 나누며 흐르는 센 강이다. 이 강줄기를 따라 인상파 화가들이 화구를 들고 배를 타고 나갔고, 강 하구 영불 해협 연안의 포구들은 이들의 화제(畵題)가 되었다. 이러한 여정 속에 마네의 뱃놀이 풍경들과 모네의 <해돋이 인상>이 그려졌는데, 모파상의 단편들은 이들 화폭 속 인물들의 사연을 서사적으로 펼쳐놓은 것으로 읽을 수 있다. 하나의 어휘와 문장, 단락, 이미지, 나아가 주제는 그곳이라는 현장성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습속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지닌다.

“헨리 간이식당의 문을 열고 사내 둘이 들어섰다. 그들은 카운터에 자리를 잡았다. ‘뭘로 갖다 드릴까요?’ 조지가 그들에게 물었다. ‘모르겠는데.’ 한 사내가 말했다. ‘자넨 뭘 먹고 싶나, 앨?’ ‘글쎄,’ 앨이 말했다.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창 밖의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카운터에 자리를 잡은 두 사내는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어니스트 헤밍웨이, <살인자들>, 하창수 옮김)

뉴욕에서 멜빌, 파리와 노르망디에서 모파상의 소설적 장면들에 사로잡힌다면, 시카고와 파리, 아프리카와 쿠바에서는 헤밍웨이의 족적을 뒤쫓는다. 헤밍웨이는 선원으로 대서양을 품었던 멜빌과 역시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안가에서 태어나 프랑스 해군성에 근무한 경력으로 남부 지중해까지 섭렵한 모파상의 생애 이력을 뛰어넘어 북아메리카에서 유럽, 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범위한 궤적을 보여준다. 위에 제시한 <살인자들>은 그가 태어나 스무 살까지 살았던 시카고라는 도시의 정서를 배면에 깔고 있다.

그는 언론사 비정규직 해외통신원 자격으로 파리에 머물며 진실한 한 문장 쓰기라는 혹독한 자기 절제와 관리로 일체의 군더더기 없는 단문 형식의 ‘하드보일드’ 문체를 개발했다. 그 결정체가 바로 <살인자들>이다. 소설은 200자 원고지 50매 분량으로 앉은 자리에서 15분 정도면 독파할 수 있다. 그러나 눈으로 읽는다고 끝은 아니다. 행간에 가라앉고 주름져 겹쳐 있는 의미를 파악해내기에는 두세 번 이상의 정독이 필요하다.

빙산의 일각같이 절제된 문체, 헤밍웨이

이른바 알고 있고, 갖고 있는 정보(자료, 사연)를 다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빙산의 일각처럼 극도로 절제해서 일부만 드러내는 것이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창작 스타일의 특징이다. 내면 묘사를 배재한 사실적인 문장은 사건의 행위만을 비추어주는 카메라 눈(eye)의 역할로 가독성을 준다.

청부살인업자가 식당에 들어와 음식을 주문하며 나누는 대화를 통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행위의 이후를 암시하고, 그것으로 긴장감을 증폭시켜나간 것이 <살인자들>이 거느린 상황인데, 헤밍웨이가 체득한 시카고, 뉴욕 맨해튼 마천루의 모델로 자본화가 첨예하게 대두되었던 시카고, 갱스터들의 총알이 항시 장전되어 있는 시카고의 특수한 분위기와 맞물려 있음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다. 11월 바닷가 서재에 멜빌, 모파상, 헤밍웨이를 동시에 초대한 것은 인류문학사에 단편소설 양식을 구축한 그들의 원점을 되돌아보고, 지금 이곳의 단편소설 양상과 의미를 환기해보기 위함이다.

멜빌은 19세기 전반기(1819년) 뉴욕시에서 태어났고, 모파상은 그보다 30여 년 뒤(1850년) 노르망디의 작은 포구 마을 투르빌쉬르아르크에서 태어났고, 헤밍웨이는 그들이 죽은 2~3년 뒤(1899년) 시카고 교외 오크파크에서 태어났다. 나는 20여 년 넘게 유럽과 아메리카, 아프리카를 향해 떠나고 돌아오는 삶을 반복해왔는데, 그러다 보니 우연이든 필연이든 이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떠돌고, 머문 공간들과 맞닥뜨리는 경우가 많았다. 작품들의 공간 속으로 직접 들어가 작가와 인물들이 처한 환경과 내면을 짐작해보는 여정을 지속해왔는데, 내가 터득한 것은 작가의 기질과 이력, 특히 작가가 종사한 업종과 체류한 공간에 따라 소설의 내용과 형식, 서사의 호흡과 규모, 문체가 좌우된다는 점이다.

모파상은 체홉, 도데와 함께 세계 단편소설 미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만큼, <비곗덩어리> 외 66편의 단편은 삶의 찰나적인 장면을 초점화해 그려내는 데 탁월한 안목과 기술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멜빌은 성서와 신화의 구조를 작품 깊숙이 깔고 당대의 문명과 인간의 숙명을 비판적으로 그리는데, <선원 빌리버드> 외 6편은 단편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분량이 길고, 심오한 주제를 담고 있어 중편 양식에 해당된다. 헤밍웨이는 <킬리만자로의 눈> 외 31편을 통해 한두 페이지 분량의 숏-컷(<다리에서 만난 노인> <혁명당원>)에서부터 중편 또는 경장편으로 분류되는 <노인과 바다>까지 다양한 호흡을 보여준다.

읽으면 쓰게 되고, 쓰면 더 읽게 된다. 혹시, 누가 아는가? 멜빌, 모파상, 헤밍웨이의 이 단편들을 매개로 새로운 작가가 탄생하게 될지. 12월, 미지의 작가를 기다리는 신춘문예의 계절이 다가왔다.

함정임 -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이화여대 불문과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쳤다. 소설집〈버스, 지나가다〉〈네 마음의 푸른 눈〉, 장편소설〈춘하추동〉〈내 남자의 책〉, 예술기행서 〈인생의 사용〉〈나를 사로잡은 그녀, 그녀들〉〈소설가의 여행법〉〈먹다 사랑하다 떠나다〉, 번역서〈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행복을 주는 그림〉등을 썼다.

201511호 (201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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