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역사를 작가의 사상으로 표현한 예술예술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은 대부분 한때 세상을 놀라게 했으나 세월의 위력과 망각의 법칙에 따라 관심 밖으로 사라진 ‘진부한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또한 고유한 장르를 뒤흔드는 장외(場外), 또는 외계(外界)의 야생적인 에너지에서 비롯된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의 서두에서 작가가 밝혀놓은 ‘증언’으로서의 글쓰기가 그것이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체르노빌에서 가까운 곳에서 태어나 자랐고, 제2차 세계대전과 체르노빌 참사 이후의 현장에서 거대한 은폐와 억압에 맞서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현역 기자로 투쟁적인 삶을 살아온 작가가 20년 동안 수행해온 인터뷰의 ‘증언들’로 이루어져 있다. 책을 펼치면 처음부터 끝까지, 그곳에 남겨진 여성들의 목소리들로 메아리친다.“발렌티나 파블로브나 추다예바, 중사, 고사포 지휘관: 나는 시베리아 출신이야…. 무엇이 나를, 나 같은 여자애를 머나먼 시베리아에서 전선까지 가게 했나요? 소위 ‘세상 끝’에서 말이지. 어떤 프랑스 기자와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 기자가 나한테 ‘세상 끝’에 대해 묻더군.(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화기는 쏘지 않는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박은정 옮김, 문학동네)“나는 침묵하는 법을 배웠어…. 사람들이 물었어. ‘남편은 어디 있나요?’, ‘네 아버지는 어디 계시니?’. 그리고 어떤 앙케이트에서나 ‘가족이나 일가친척 중에 포로로 잡혔던 사람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지. 사실대로 적었더니 학교 청소부로도 안 받아주더군. 당신 같은 여자를 어떻게 믿고 바닥 청소를 맡기느냐는 거야…. 전쟁 전에 나는 교사였어.”(위의 책, “엄마, ‘아빠’가 뭐예요?”)이러한 작업은 소설일까? 이번 노벨문학상 선정은 문학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몇 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는데 하나는 문학을 통한 정치적 입장 표명이고, 다른 하나는 소설이라고 부르기 애매한 장르적 특성이다.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을 통해 알렉시예비치의 증언기록 작업은 문학, 그것도 작가의 의지에 따라 ‘소설’로 공식화된 셈이다.문학은 현실이나 역사적인 사건들을 작가 고유의 사상과 감정을 정제된 문장으로 통해 표현한 언어 예술이다. 문학의 범주에서 소설(fiction)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사실(fact)에 허구(虛構)가 작동된 것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다큐멘터리는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허구의 개입 없이 사실적으로 기록한 논픽션이다. 전기, 르포르타주, 인터뷰(증언)들이 거기에 속한다.소설의 측면에서 볼 때, 다큐멘터리는 소설화하기 좋은 질료들이다. 소설 이전의 내용이 소설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픽션의 장치, 곧 에피소드의 선택과 배치를 통해 서사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장외든 외계든, 고유한 장르 속으로 진입해 들어오기 위해서는 정통이 필요하다. 작가가 자신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목소리-소설’로 명명한 근거는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에 있다. 호메로스의 고대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인물과 여정이 현대 소설 속에 끊임없이 회귀하듯,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제시한 ‘다성의 목소리들’이 비극적인 인간조건을 문자 행위로 위무하는 진혼(鎭魂)의 극(劇)이자 사태의 정곡을 찌르며 진실을 드러내는 소설을 향하고 있어 이채롭다.
함정임 -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이화여대 불문과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쳤다. 소설집〈버스, 지나가다〉〈네 마음의 푸른 눈〉, 장편소설〈춘하추동〉〈내 남자의 책〉, 예술기행서 〈인생의 사용〉〈나를 사로잡은 그녀, 그녀들〉〈소설가의 여행법〉〈먹다 사랑하다 떠나다〉, 번역서〈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행복을 주는 그림〉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