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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함정임의 ‘바닷가 서재’]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인간의 목소리가 소설이 되기까지 작가의 ‘증언’ 같은 문학세계 

함정임 소설가, 동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6년 4월 나는 프랑스문학을 전공하는 대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나는 책을 사면 첫 장에 날짜와 서명을 남기는 버릇이 있는데, 카뮈의 <페스트>에는 1월 27일, 스탕달의<적과 흑>에는 3월 5일,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에는 4월 29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오래된 전공 책들을 펼쳐보며 1980년대의 어느 봄날, 스무 살 어름의 나로 돌아 가게 만든 것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다.

이 작가는 인구 1천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유럽의 소국(小國) 벨라루스 출신이다. 벨라루스는 폴란드, 독일, 러시아의 영토로 둘러싸여 약소국의 슬픈 피지배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독립국가로 출발하게 된 것은 1989년 동서체제 붕괴 2년 후인 1991년에 이르러서다. 우여곡절이 많은 신생 국가로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이 뚜렷하지 않았던 벨라루스가 한 여성 작가의 필력으로 새 역사의 시작, 새 문학의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람 앞에 모든 길이 놓여 있다. 고결한 곳으로 향하는 길과 비열한 곳으로 향하는 길, 천사로부터 짐승에 이르는 길. 회상이란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 현실에 대한 열정적인, 혹은 심드렁한 서술이 아니다. 그것은 서술을 거슬러 올라간, 과거의 새로운 탄생이다. 무엇보다 새로운 창작물이다. (…) 도스토옙스키가 던진 물음. ‘사람은 자신 안에 또 다른 자신을 몇 명이나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그 다른 자신을 어떻게 지켜낼까?’ 이 물음을 이제 나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다(일기장에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박은정 옮김, 문학동네)

도스토옙스키의 말대로, ‘사람은 자신 안에 또 다른 자신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샤먼이라고 부른다. 작가라는 존재는 자기 안의 샤먼을 호출해내는 데 능통한 족속이다. 작가가 소설에 무수한 사연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호출해내는 행위는 곧 ‘영적인 대리자(샤먼)’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샤먼은 내면의 뒤틀린 자아를 구원하고, 세상의 무수한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치유한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도스토옙스키의 전언을 통해 샤먼으로서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내가 한반도 이남의 서울에서 전공서적인 <페스트>와 <적과 흑>과 <마담 보바리>를 도서실에서 뒤적거리고 있을 때, 아니 그곳이 어디든 마음은 민주화를 향한 열망으로 들끓었던 광장과 거리로 나가 있던 시절, 벨라루스와 아주 가까운 체르노빌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가혹한 재앙이 발생했다. 인터넷이 등장하지 않은 시절이었고, 당장 우리 앞에 놓인 민주화라는 대의에 사로잡혀 세상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기에 체르노빌의 재앙은 빠르게 과거의 무덤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체르노빌의 증인이다. 무서운 전쟁과 혁명이 20세기를 대표한다고 하지만 체르노빌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사고가 발생한 지 벌써 20년이나 흘렀지만, 내가 증언하는 것이 과거인지, 또는 미래인지, 나는 아직도 나 자신에게 묻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 쉽게 진부한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시시한 공포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체르노빌을 새로운 역사의 시작으로 본다.”(‘저자의 독백 인터뷰’, <체르노빌의 목소리>, 김은혜 옮김, 새잎)

문학은 역사를 작가의 사상으로 표현한 예술

예술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은 대부분 한때 세상을 놀라게 했으나 세월의 위력과 망각의 법칙에 따라 관심 밖으로 사라진 ‘진부한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또한 고유한 장르를 뒤흔드는 장외(場外), 또는 외계(外界)의 야생적인 에너지에서 비롯된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의 서두에서 작가가 밝혀놓은 ‘증언’으로서의 글쓰기가 그것이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체르노빌에서 가까운 곳에서 태어나 자랐고, 제2차 세계대전과 체르노빌 참사 이후의 현장에서 거대한 은폐와 억압에 맞서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현역 기자로 투쟁적인 삶을 살아온 작가가 20년 동안 수행해온 인터뷰의 ‘증언들’로 이루어져 있다. 책을 펼치면 처음부터 끝까지, 그곳에 남겨진 여성들의 목소리들로 메아리친다.

“발렌티나 파블로브나 추다예바, 중사, 고사포 지휘관: 나는 시베리아 출신이야…. 무엇이 나를, 나 같은 여자애를 머나먼 시베리아에서 전선까지 가게 했나요? 소위 ‘세상 끝’에서 말이지. 어떤 프랑스 기자와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 기자가 나한테 ‘세상 끝’에 대해 묻더군.(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화기는 쏘지 않는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박은정 옮김, 문학동네)

“나는 침묵하는 법을 배웠어…. 사람들이 물었어. ‘남편은 어디 있나요?’, ‘네 아버지는 어디 계시니?’. 그리고 어떤 앙케이트에서나 ‘가족이나 일가친척 중에 포로로 잡혔던 사람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지. 사실대로 적었더니 학교 청소부로도 안 받아주더군. 당신 같은 여자를 어떻게 믿고 바닥 청소를 맡기느냐는 거야…. 전쟁 전에 나는 교사였어.”(위의 책, “엄마, ‘아빠’가 뭐예요?”)

이러한 작업은 소설일까? 이번 노벨문학상 선정은 문학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몇 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는데 하나는 문학을 통한 정치적 입장 표명이고, 다른 하나는 소설이라고 부르기 애매한 장르적 특성이다.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을 통해 알렉시예비치의 증언기록 작업은 문학, 그것도 작가의 의지에 따라 ‘소설’로 공식화된 셈이다.

문학은 현실이나 역사적인 사건들을 작가 고유의 사상과 감정을 정제된 문장으로 통해 표현한 언어 예술이다. 문학의 범주에서 소설(fiction)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사실(fact)에 허구(虛構)가 작동된 것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다큐멘터리는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허구의 개입 없이 사실적으로 기록한 논픽션이다. 전기, 르포르타주, 인터뷰(증언)들이 거기에 속한다.

소설의 측면에서 볼 때, 다큐멘터리는 소설화하기 좋은 질료들이다. 소설 이전의 내용이 소설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픽션의 장치, 곧 에피소드의 선택과 배치를 통해 서사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장외든 외계든, 고유한 장르 속으로 진입해 들어오기 위해서는 정통이 필요하다. 작가가 자신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목소리-소설’로 명명한 근거는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에 있다. 호메로스의 고대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인물과 여정이 현대 소설 속에 끊임없이 회귀하듯,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제시한 ‘다성의 목소리들’이 비극적인 인간조건을 문자 행위로 위무하는 진혼(鎭魂)의 극(劇)이자 사태의 정곡을 찌르며 진실을 드러내는 소설을 향하고 있어 이채롭다.

함정임 -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이화여대 불문과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쳤다. 소설집〈버스, 지나가다〉〈네 마음의 푸른 눈〉, 장편소설〈춘하추동〉〈내 남자의 책〉, 예술기행서 〈인생의 사용〉〈나를 사로잡은 그녀, 그녀들〉〈소설가의 여행법〉〈먹다 사랑하다 떠나다〉, 번역서〈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행복을 주는 그림〉등을 썼다.

201512호 (201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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