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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초역의 기쁨, 서양고전의 심연 속으로! 

미술·건축·음악 등 예술 분야 텍스트 다량 포함… 한 해 10종 안팎 출간해 10년간 100종의 목록 완성 


가을 출판가에 중후한 기획이 나왔다. 민음사가 내년 창립 50년을 준비하면서 내놓은 ‘생각’ 시리즈다. 고대 그리스·로마 텍스트를 중심으로 르네상스기, 근·현대 주요 텍스트까지 망라하는 고전 번역 프로젝트다. 한 해에 10종 안팎을 출간해 10년간 100종의 목록을 완성한다니 과연 박맹호 회장의 민음사다운 관록과 배짱이다.

동서양 고전 번역에서 우리는 거의 후진국이나 다름없다. 일본에선 키케로의 <우정에 관하여>가 1941년 출간됐고, 1999년부터는 키케로 전집 번역이 시작됐다. 중국은 1979년 키케로 전집 번역을 시작해 2008년 완료했다. 한국에서는 2000년대 들어서야 드문드문 그리스·로마 원전 번역이 시도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 고서적 번역 작업의 답보상태를 보면, 서양 고전 번역의 부진을 개탄할 일도 아니다. 이번 ‘생각’ 시리즈 첫 4종의 책이 한꺼번에 나온 것을 보며, 창고에 처박혀 빛을 기다리는 우리 고전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국가기관과 각 대학이 보유한 총 226만여 점의 고문헌 중 국역된 것은 0.04%, 1천 권 정도에 그친다. 조선조 왕의 비서실에서 작성한 특급 사료 <승정원일기>도 극히 일부만 국역됐다. 현재의 빈약한 예산으로는 100년 후에나 완역된다고 하니 말 그대로 부지하세월이다.

1차 4권의 텍스트 중 페리클레스 연설문을 제외하면 모든 글이 원전의 국내 초역이다. 제1권 <설득의 정치>는 키케로의 대표적인 연설문 7편을 모은 책이다. 키케로는 존속살해, 선거부정, 내란음모 사건 등을 맡아 변론하는데, 여기엔 관련 분야에 대한 당대 지식의 정수, 공동체에 대한 의무감, 깊은 사색 끝에 도달한 궁극의 윤리·정의론이 녹아들어 있다. 제2권 <그리스의 위대한 연설>은 페리클레스, 뤼시아스, 이소크라테스, 데모스테네스 등 그리스 수사학자 4명의 연설을 담았다. 수사학의 모든 기교가 다 들어 있고, 논리의 힘찬 전개로 읽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제3권 <불온한 철학사전>은 프랑스 계몽주의의 핵심 사상가 볼테르의 저작이다. 간통·영혼·식인종·아름다움·지옥·나체·미덕 등의 표제어를 설명하는 하나의 개념 사전이다. 위트와 유머, 풍자적인 단상이 가득 담겼다. 제4권 <음악의 시학>은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하버드대 강의록이다. <불새>와 <봄의 제전>으로 음악계에 충격을 준 스트라빈스키였지만, 정작 창작에서는 전통적 형식미를 강조했다. “예술은 통제될수록 아름답다”라는 지론을 편다.

‘생각’ 시리즈는 앞으로 르네상스기 건축가 팔라디오의 <건축론>,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의 에세이 <가난한 사람들> 등을 출간할 예정이다. 기존의 고전 시리즈가 철학·역사·정치학 등을 중심에 뒀다면, ‘생각’은 미술·건축·음악 등 예술 분야 텍스트를 대거 포함시켰다. 1991년 서울대에 생긴 서양고전협동과정을 거친 연구자들이 유학 후 학문적 성과를 내고 있는데, 이들을 원전 번역자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시리즈 발간의 든든한 토대다.

-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201511호 (201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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