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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위대한 사상가에게 무슨 죄가 있나 

 

조선 지식인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주희 일생의 집대성… 그에 대한 무관심이 주자학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슬픈 일

주자학은 우리에게 완고한 보수주의의 전형으로 각인돼 있다. 주자학의 화신으로 우리는 노론의 보스 송시열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송시열은 “주자의 가르침을 믿지 않으면 오랑캐다”라고 말한 바 있다. 송시열과 노론이 과연 주자의 말을 독실하게 믿고 실천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겠는가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많다. 그건 분명히 주자의 권위를 빌려 다른 당파를 제거하기 위한 말이기도 했다. 반대 당파를 사문난적으로 몰아붙이며 권력을 잡았고,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그 권력을 놓지 않았다.

500년 조선의 지식인에게 주희(1130~1200)만큼 영향을 미친 이가 또 있을까. 조선에 한정해 본다면, 주희의 영향력은 공자를 넘어섰을지도 모른다. 조선은 곧 주자학의 나라였고, 지식인들은 이를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조선이 배출한 최고의 학자 퇴계 이황은 ‘동방의 주자’라고 불렸다. 격동의 20세기를 거치며 유학의 유산을 다수 파괴한 중국인들이 오히려 주희의 문헌을 찾아 한국에 올 정도였다. 주자학은 강력한 영향력에 못지 않게 그 폐해에 대한 논의가 열정적으로 이뤄졌다.

그렇다면 그 사상을 주창한 주희는 누구인가? 조선 지식인들이 현실을 도외시한 채 공리공론을 일삼다가 망국의 길로 접어든 것은 모두 성리학 때문이고, 그 원류에는 주희가 있다는 인식이 횡행하지 않았던가? 오랫동안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변변한 주희 평전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접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 언젠가 한 대중음악 평론가가 우리나라의 남녀 가객 이난영과 김광석의 평전이 없다고 한탄한 적이 있었다. 주희 평전의 부재는 이난영이나 김광석 평전의 부재보다 훨씬 더 의아한 일임이 분명하다. 주희라는 사나이에 대한 무관심이 주자학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사상가에게 도대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1992년 중국에서 나온 수징난의 <주자평전>은 주희에 대한 본격적인 전기다. 집필에 10년이 걸린 역작이다. 고려에 정착한 주희의 증손 주잠을 시조로 한 신안 주씨 종친회 회장이던 고 주창균 씨가 당시 수징난에게 재정적 지원을 했다는 일화가 숨어 있다. 이번에 십수 년의 산고 끝에 한국어 번역본이 나왔다.

주희는 남송이라는 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에 맞짱을 뜬 사회철학자였다. 네 명의 황제를 섬겼고, 과거에 급제해 지방관을 전전했지만, 정작 조정에서 근무한 것은 46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중앙에서든 지방에서든, 주희는 행정가로서 전력을 기울였다. 세금을 감면하거나 부역을 면제시켰고, 지방관료들의 불법과 보신주의를 질타했다. 그는 도와 이를 논하는 백면서생 이라기보다는, 백성의 삶을 북돋으려는 개혁적 행정관료에 가까웠다.

주희 사상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세운 ‘인본주의 인간학’ 체계는 사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점을 뒀다. 사람을 근본으로 삼고, 인(仁)을 관계의 준칙으로 삼으며, 사람을 사랑(愛人)하라고 강조했다. 이런 숭고한 사상이 어떻게 조선시대의 숨통을 옥죄는 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활용되었는가? 사상은 늘 이데올로기가 되어 특정 계급의 이해에 복무하기 마련이란 점을 일깨운다. 주희는 “내 도는 외롭지 않다(吾道不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회한이나 부끄러움 없는 삶이었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사상은 숱한 추종자를 양산하며 경직되거나 심지어 타락하기까지 했다. 니체의 말처럼 성인의 말은 그래서 ‘전복적인 해석’이 필요한지 모른다.

-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201512호 (201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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