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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리포트] 오래된 헌책방 거리 진보초(神保町) 

어제, 오늘, 내일이 함께하는 마음의 안식처 

글·사진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퍼시픽21’ 디렉터
둥둥 떠다니면서 방향도 없이 흘러가는 현대인에게 아름답고 오래 기억되는 공간… 책 정리·전시하는 160개 고서점의 각기 다른 방식에서 전해지는 오타쿠 문화의 정수(精髓)

▎일본 도쿄의 진보초 고서점가 풍경. 유서 깊은 160개 고서점이 들어선 세계 최대 규모의 밀집형 서점가다.
한 나라의 문화와 문명을 재는 척도로 책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책을 한 자리에 모아둔 도서관은 문화와 문명의 결정판에 해당한다. 고대문명의 출발지인 아시리아·페르시아·그리스가 책을 통해 무역과 정보를 얻어 대제국으로 나아간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서로 다른 말을 번역하고, 각 지역의 어제와 오늘을 한 자리에 모아둔 곳이 바로 고대 도서관이다.

21세기 미국이 세계 문명·문화의 중심이 된 것도 책을 통해 재음미해 볼 수 있다. 워싱턴에 자리 잡은 미 의회도서관(www.loc.gov)이 주인공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초대형 도서관으로 연방정부 소속 직원 수만도 3200여 명에 달한다. 아날로그만이 아니라, 디지털 책에 관해서도 세계 그 어떤 도서관도 넘볼 수 없는 곳이다. 텍스트만이 아니라, 사진·필름·음성 등 인류의 지적 활동에 관련된 모든 정보가 디지털 데이터로 분류·저장돼 있다.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권하지만, 미 의회도서관에서 1년만 머물면 한국 최고수준의 논문을 하나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방’에 대한 글이 최근 한국 신문에서 다뤄졌다. 아름다운 책방을 하나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문화창조’인지 절감할 수 있는 연재물이다. 단순히 책을 파는 장소로서만이 아니라, 문화와 문명의 결정체가 바로 책방이다. 아름다운 책방이 있기에 품위 있는 독자가 있고, 더불어 역사에 남을 작가도 탄생할 수 있다. 닭과 달걀의 문제겠지만, 책방·독자·작가 가운데 어디가 출발점인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제대로 된 작가 한 명을 만들어내기가 노벨과학상 수상보다도 한층 어렵다는 점이다.

노벨과학상은 천재 연구가의 집념과 경륜이라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에 국한된다. 주변의 도움까지 포함해 영역을 넓힌다 해도 대학이나 기업 차원의 성과에 그친다. 역사에 남을 작가는 다르다. 국민과 국가와의 소통 그리고 교류를 통한 총체적 결과물이 작가라는 구체적 형상으로 나타난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표절 시비와 이념 문제로 도배를 한 한국 문단의 모습은 바로 독자인 국민, 작품의 배경인 국가의 얼굴로 직결된다. 서로 공유하고 교류하는 관계임을 감안해볼 때 작가만 특별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에 불과하다. 노벨상 전부를 합쳐도 노벨문학상의 권위에 못 미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일본의 장점을 대변하는 최상의 존재


▎진보초는 외국인을 위한 문화공간이기도 하다. 색다른 이벤트를 통해 외국인의 관심을 끌어 모은다.
고서점은 아름다운 책방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세월이 흐를수록 빛을 더해가는 게 고서다. 정치인, 연예인의 자기자랑이나 일확천금 재벌의 스토리라도 30년이 훌쩍 지나 읽어보면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간 세월의 흐름을 통해 새로운 시각이나 지혜 같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 한 시대를 호령하던 정치인의 통 큰 목소리, 안방 텔레비전을 주름잡았던 드라마 속 주인공이었던 여자 탤런트, 강남 전체를 살 것처럼 돈을 굴린 젊은 실업인….

그들의 과거와 현재가 고서점에 가면 발견된다. 어제의 기억에 대한 오늘의 심판이자, 어제에 이어진 오늘의 현실로서의 공간이 바로 고서점에 해당한다. 새삼스럽게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읊조리지는 않겠지만, 고서점에서 얻은 어제의 기억은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에 대한 전망이나 희망으로 연결되는 열쇠가 될 수도 있을 듯하다. 다시 말해, 고서점이 많을수록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많다고 볼 수 있다. 부연하자면, 고서점이 드물수록 어제와 내일이란 접점을 상실한, 현실로서의 ‘지금 당장’만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고서점은 필자가 일본의 장점을 얘기할 때 거론하는 첫째 호례(好例)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고서점을 가진 나라다. 도쿄(東京)는 물론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고베(神戸)를 비롯한 대도시 대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씩 독립해서 운영하는 고서점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거리 전체를 아우르는, 밀집형 고서점으로 이뤄져 있다. 따라서 고서점가(街)라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일본인이 그러하듯 고서점들도 집단주의에 기초해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일본 고서점의 특징 중 하나로 ‘소규모’를 놓칠 수 없다. 매장 크기는 아무리 커도 10평을 넘기지 않는다. 고서점 이용객이 많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크고 넓은 것보다 작지만 깊고 오래가는 부분에 방점을 둔다. 바로 일본 비즈니스의 전통이다.

도쿄에 위치한 진보초(神保町)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초 밀집형 고서점가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야스쿠니(靖国) 신사와 메이지(明治) 대학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가로세로 약 2㎞에 걸쳐 있다. 진보초 내 고서점의 수는 약 160개 소다. 신간만 파는 곳도 40여 곳 있기 때문에, 전부 합칠 경우 200여 서점이 들어서 있다. 도쿄에는 진보초 외에도 분쿄쿠(文京区), 혼고우(本郷)의 학술지 관련 고서점가, 와세다(早稲田) 대학 주변의 와세대 고서점가 등 크고 작은 고서점가들이 들어서 있다. 도쿄 내 고서점만 전부 합쳐도 서울의 신간서점 수를 능가할 듯하다.

원래 진보초는 에도(江戸)시대 사무라이(侍)들의 숙소로 유명하다. 도쿠가와(徳川) 막부를 지키는 것이 이들의 주된 일이지만, 전국에서 인사차 올라온 지방 권력자들을 호위하던 업무도 병행한다. 이들의 운명은 19세기 말 메이지 천황 체제로 들어서면서 일순간에 사라진다. 월급을 줄 막부가 사라지면서 실업자로 전락한다. 더불어 숙소나 부속 건물도 천황이나 국가 재산으로 넘어간다. 텅 빈 숙소는 메이지 시대부터 시작된 국민 교육의 무대로 활용된다. 초·중·고등학교가 들어서고 메이지와 더불어 센슈(専修), 니폰(日本)과 같은 대학도 세워진다.

진보초 고서점은 그 같은 영고성세를 통해 등장한다. 학교가 세워지면서 주변에 출판사가 들어서고 더불어 책방도 필요해진다. 새 책을 구입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즐겨 찾던 중고 서적 전문서점도 하나둘 등장하면서 오늘날의 서점가가 탄생하게 된다. 가장 오래된 고서점은 1877년 문을 연 ‘유히가쿠(有斐閣)’라는 곳이다. 정치·경제에 특화한 책으로 현재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되면서 창업 이래 6대손(代孫)이 경영하고 있다. 진보초의 맏형(大兄)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 지식인의 중심 역할을 하는 이와나미(岩波) 출판사다. 일본 전체는 물론 진보초의 중심을 지키는 최대·최고(最高)의 출판사가 이와나미다. 20세기 일본은 물론 아시아 전체 지식인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준, 이른바 ‘이와나미 교양’의 진원지가 바로 진보초 한복판에 들어서 있다. 진보적 성향 때문에 한국에서는 ‘빨갱이’ 이념서적 공급처로 알려진 곳으로, 현재도 일본 리버럴리즘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1970년대 유신체제를 비난한 이와나미


▎책의 진열이나 책 내용을 설명하는 형식을 통해 고서점 특유의 캐릭터가 드러난다.
출판사 이와나미가 진보초에 자리잡은 것은 고서점으로 출발한 역사에서 비롯된다. 원래 이와나미는 출판사가 아니라, 작은 고서점에서 출발했다. 유히가쿠보다 36년 늦은, 1913년 진보초의 고서점으로 등장한다. 책을 사고파는 고서점이 책을 직접 만들어내는 지식공급처로 나선 이유는 간단하다. 책 속의 정보를 캐고 분석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보다 근본적인 의문이 생기면서 아예 책을 출판하게 된 것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다가, 아예 서양철학사 전체를 출판하게 된 것이다.

이와나미는 1945년 종전 후에는 민주·자유주의에 기초한, 일본 리버럴 이념의 중심지로 활동한다. 1970년대 ‘박정희 독재’를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출판사가 바로 이와나미다. 1949년부터 창업자의 그늘에서 벗어나 오늘날의 주식회사형 출판사로 변신한다. 한물 간 세상만 바라보는 늙고 지친 모습이 고서점의 전부는 아니다. 전전(戰前)에는 좌익 이념의, 전후에는 일본 리버럴리즘의 중심에 선 곳이 바로 진보초 고서점가의 흔적이다.

진보초와 필자와의 연(緣)은 25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노트북 컴퓨터를 사러 아키하바라(秋葉原)에 간다고 하자, 가깝게 지내던 일본인 친구가 진보초에 들를 것을 권했다.

“아키하바라에 가서 전자제품만 보지 말고, 가는 김에 진보초에 들러 일본의 어제의 모습도 보기 바란다. 조선 역사에 관한 책도 잊지 말고 살펴보길 바란다.” 아키하바라와 진보초는 1500m 떨어져 있다. 지하철로 단번에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다. 최근에는 정도가 덜해졌겠지만, 1990년대 초 아키하바라는 일본을 찾는 외국인의 필수방문지였다. 20세기 전자강국 일본이 자랑하는 최첨단 기기가 아키하바라를 장식하는 간판이었다. 코끼리밥통은 한국인 모두가 구입하던 일제 전자제품의 대명사였다. 코끼리밥통은 알았지만, 고서점가에 대해 전혀 무지했던 것이 당시의 필자다. 친구의 조언에 따라 코끼리밥통 매장에 앞서 진보초에 미리 내렸다.

고서점을 전전하며 느꼈던 당시의 문화충격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오전 11시부터 저녁 7시 문을 닫을 때까지 밥도 안 먹고 돌아다닌 탓에 거의 탈진 상태로 숙소에 돌아온 것도 남다른 경험 중 하나다. 필자가 일본어 공부를 시작한 것은 20대 말이다. 한창 지식욕이 왕성하던 시기였기에 진보초가 보여준 ‘문화의 힘’에 대해 한층 예민하게 반응했을지 모르겠다.

1990년대 초 일본은 제2의 중국붐에 휩싸여 있었다. 1차 중국붐은 1972년 일·중 국교정상화 이후 불었다. 문화적·역사적·정치적 차원의 열기였다. 1990년대 초 2차 중국붐은 실질적 경제적·인적 교류 수준에 주목했다. 진보초 고서점은 중국에 주목하던 당시의 필자에게 일본어로 된 중국 관련 정보가 얼마나 많은지를 확인시켜준 곳이다. 지금도 거의 변한 것이 없지만, 당시 한국에서의 중국에 관한 책은 이념 서적 몇 권이 전부였다. 그나마 중국인조차 악몽으로 여기는 문화혁명 예찬을 기조로 하는 책이 주류였다. 지적 갈증을 미국이나 일본에서 풀 수밖에 없었다.

진보초 고서점가의 경우 중국 관련 신간만이 아니라, 고서도 엄청나다. 횡(橫)으로서의 정치·경제·사회 관련 책만이 아니라, 종(縱)으로서의 역사·문화·인류학적 차원의 책들도 넘치고 넘친다. 가격은 1천 엔대에서 수십만 엔대까지 다양하다. 고서의 대부분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한 1930년대 전후에 나온 것이다. 한족을 비롯한 중국 내 56개 민족에 관한 문화·역사 관련 서적도 즐비하다. 공기론(空氣論)으로 유명한 작가,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가 직접 만든 야마모토서점은 일본 내 중국연구가는 물론 대륙이나 타이완(台湾)의 중국인 학자도 반드시 들르는 중국 관련 고서점의 대명사다. 다른 고서점에 견줘 다소 큰 30평 크기의 매장으로, 야마모토가 평생 모은 책이 매물로 나와 있다. 고서가 아닌, 중국발 중국어 신간이나 중국 관련 일본어 신간을 전문으로 하는 동방서점(東方書店)도 중국 연구의 중심지다. 티베트나 위구르에 관한 자료나 책도 풍부하다.

1920년대 초 불국사 주변의 모습을 담은 고서까지


▎1970년대 만화를 특화한 고서점.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고서점의 주된 수입 중 하나다.
한반도 관련 서적은 문화충격만이 아니라, 필자를 부끄럽게 만든 주범들이다. 중국 서적을 파는 고서점 어딘가에는 반드시 조선이나 고려 심지어 한반도 삼국시대에 관한 책들이 들어서 있다. 이미 19세기 초에 나온 책에서부터 식민지 당시 출간된 시리즈물도 즐비하다. 조선시대 작황상태에 관한 기록에서부터, 각 지역의 민요와 장례 풍습, 양반과 족벌에 관한 연구서도 눈에 띈다. 조선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만든 책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책은 기록이나 통계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듯하다. 고서점에서 2500엔에 구입한 경주 불국사 주변에 관한 에세이집은 좋은 예다. 글의 내용은 극히 주관적이지만 1920년대 초 불국사 주변의 모습을 사진과 그림으로 표현해 객관적으로 전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라 볼 수 있다. 당연하지만 필자가 수집한 고서 가운데 가장 아끼는 책이다.

한 번 연을 맺은 뒤 진보초 고서점가는 도쿄에 갈 때의 필수 방문지로 자리 잡게 된다. 항상 새로운 세계를 발견·발굴하는 심정으로 서점에 들른다. 그러나 필자가 주로 구입하는 고서는 고가(高價)와 전혀 무관한, 100엔, 200엔 단위의 중고품 최저가 책에 불과하다. 30여 개 출판사가 매달 쏟아내는 ‘신쇼(新書)’가 필자의 진보초 방문의 주된 이유다. 신쇼는 손바닥 안에 꼭 들어가는 포켓형 책으로, 대략 두세 시간에 읽기를 끝낼 수 있는 8만 자 내외의 책이다. 하드커버 서적 가격의 절반 이하인 800엔대에 팔린다. 한국에서는 을유 문고와 삼중당에 의해 출간되기도 했지만, 화려한 하드커버와 큰 책으로 치장된 21세기 출판계에서는 거의 멸종상태에 들어서 있다. 외화내빈(外華內賓)이라고 하지만 내용이 부실한 책일수록 책의 크기나 고급 하드커버로 가리려 한다. 신쇼는 거품을 뺀, 120% 내용에만 충실한 책이다.

현대 일본인은 책을 집에 보관하지 않는다. 공간이 협소하기 때문이다. 한 번 읽은 잡지는 지하철에 그대로 두고 내린다. 더불어 일본인은 읽은 책을 리사이클을 통해 시장에 되파는 체제에 익숙하다. 책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원래 가격의 10분의 1 정도는 건진다. 따라서 800엔짜리 신쇼의 경우 고서점에 80엔 정도에 되팔린다. 매장에는 100엔이나 200엔으로 등장한다. 리사이클을 통한 고서점 재등장까지 걸리는 시간이 엄청나게 빠르다. 유명 작가의 신쇼가 나온 지 1주일만 지나면 고서점 중고품으로 나타난다.

신쇼의 범주는 정치·경제·사회·문화·역사 등 세상만사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일본에서 출간되는 신쇼의 종류는 한달 평균 100여 권이 넘는다. 1년이면 1천 권을 넘어선다. 진보초에 몇 년만 안 가도 다양한 주제의 새로운 신쇼를 엄청나 게 만날 수 있다. 따라서 일단 들르면 갖가지 장르의 책을 수십 권씩 살 수밖에 없다. 신쇼는 필자만이 아닌 진보초 고서점가를 찾는 대부분의 공통 관심사이기도 하다. 고서점 대부분이 입구에다 아예 신쇼 진열대를 따로 설치해두고 있다. 고서점 중심길목에는 한 권에 200엔, 인적이 드문 매장의 경우 100엔대가 주류다. 수만 엔짜리 고서만이 아니라 100엔 단위의 신쇼도 고서점가의 주된 메뉴다.

머리로 느끼는 섹스 관련 오타쿠의 천국

고서점은 일본 ‘오타쿠(オタク: 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 문화의 정수를 알 수 있는 현장에 해당한다. 먼저 160개 고서점이 나름대로 특화된 공간이란 점이 진보초 오타쿠 문화의 증거다. 책방 하나하나가 고유의 캐릭터로 무장하고 있다. 정치·경제·역사·문화와 같은 전문 영역에 관한 부분만이 아니라, 책을 정리·진열하는 방법도 조금씩 다르다.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160개의 공간을 하나씩 즐기면서 탐방할 수 있다. 진보초를 비롯한 일본 고서점의 오타쿠 문화는 책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록과 관련된 아날로그 자료, 나아가 디지털 정보의 일부도 판매한다. 아날로그 자료란 그림과 화보를 의미한다.

고서점 품격에 맞는 동양화나 인상파 그림만이 아니라, 벌거벗은 여성의 화보나 섹스에 열중하는 사진집도 고서점가에서 볼 수 있는 풍경 중 하나다. 진보초는 아키하바라와 더불어 섹스 관련 오타쿠의 천국에 해당된다. 직접 상대와 만나 성행위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성적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자료와 정보의 무대가 진보초와 아키하바라다. 몸으로 즐기는 것이 아닌, 성병과는 전혀 무관한 머리로 느끼는 섹스의 현장이다. 그 같은 관점에 주목하는 오타쿠는 진보초와 아키하바라를 성의 천국으로 받아들인다. 두 곳의 차이점은 아키하바라에 비해 진보초에는 컴퓨터용 소프트웨어를 안 판다는 점 하나뿐이다. 섹스 관련 고서점의 메뉴나 장르는 10대 여성에서부터 포르노 전문배우, 동성애자를 위한 남성 등 천차만별이다. 수요자도 나이에 관계없이 다양하다. 진보초 고서점가가 연령을 초월한 공간이 되는 이유 중 하나다. 섹스에 탐닉하는 인간의 본능을 형이상학적으로 풀어주는 곳이 바로 진보초 고서점가다. 여성과 함께 갈 경우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을 듯하지만, 고서점에 진출한 섹스 관련 서적과 정보에 대한 연구를 핑계로 한 번쯤 들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하다.

수첩과 달력 판매대는 연말 일본 서점이 연출하는 풍경 중 하나다. 다양한 종류와 크기의 수첩과 달력이 결코 싸지 않은 가격에 팔린다. 수첩을 예로 들어보자. 날짜별로 핵심만 적는 가로 10㎝ 크기의 메모형 제품, 3년 또는 5년 간 기록하고 정리할 수 있는 대형수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날짜 없이 요일 별로만 기록된 종이 위에 스스로 날짜를 적어나가는 식의 수첩, 1월 5일을 ‘5일 VS 361일’로 푼, 1년을 365일로 나눈 건강체크에 주력하는 제품도 있다. 사용하는 수첩 하나만 봐도 개개인의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진보초 고서점가는 수첩과 관련된 일본인의 캐릭터를 그대로 반영한 현장이다. 책 정리나 전시에 관한 부분이 160여 개 고서점마다 조금씩 다르다. 고서점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가 고유한 캐릭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들이 대충 진열된 것 같지만, 서점 주인 특유의 방식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정리정돈돼 있다. 아무리 값싸고 작은 책이라고 해도 서점 주인에게 물으면 어디에 있는지 금방 찾아낸다. 책 사이에 붓으로 쓴 설명서를 붙여, 책의 내용에 관한 압축 설명도 첨가한다. 신문으로 치자면 기사의 제목을 확실하고도 인상 깊게 남기는 식이다.

수집한 고서의 내용을 통해서도 서점의 캐릭터가 나타난다. 할복자살한 작가 미사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작품만을 다루는 곳, 미스터리나 괴담에 특화하는 매장,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 등 북구문학에 특화하는 식의 서점이다. 이들 고서점은 개별화된 독자와의 관계를 통해 특별한 오타쿠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고서점을 찾을 때는 나름의 예의가 필요하다. 찢어지기 쉬운 종이로 만들어진 비싼 고서의 경우, 구입자의 자세 하나만으로 책 열람 여부를 허락한다고 한다. 책을 꺼낼 때는 반드시 두 손으로, 책장을 넘길 때는 손가락을 책의 지면에 붙이지 말아야 하는 것이 고서를 다루는 기본예의다. 비싼 고서의 경우 가능하면 흰장갑을 끼고 책을 다루는 것이 좋다.

커피 맛은 결코 입맛에 있지 않다. 커피 원두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근거로 신선한 커피를 구입한 뒤 정제하고, 마음에 드는 커피 기구를 구입해 적절한 온도에서 뽑아내는 과정 속에서의 맛과 멋이 커피의 가치이자 진수(眞髓)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만드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향은 커피를 기호품 수준이 아닌, 추억과 기억으로 격상시키는 가장 큰 요소다. 미(美)에 관련된 모든 것이 그러하듯, 하나로 이어진 긴 과정 속에서 느껴지는 오감(五感) 종합체로서의 커피이자 문화다. 진보초 고서점도 마찬가지다. 책, 나아가 잡지, 화보 심지어 섹스비디오뿐만이 아니다. 고서점가를 꾸미고 빛내주는 주변과의 조화를 통해 진보초의 명성과 역사가 한층 더 오래갈 수 있다.

고서점가 더 빛내주는 주변 문화와의 조화


▎고서점 주변 골목 곳곳에 들어선 기사텐(喫茶店). 반세기 전인 1960년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찻집이 많다.
대표적인 것은 고서점가 골목 곳곳에 들어선 ‘기사텐(喫茶店)’, 즉 휴식처다. 담배도 피우고 차도 마시는 곳으로, 고서점가의 품격에 어울리는 장식과 찻잔 그리고 분위기로 꾸며진 곳이다. 커피 한 잔의 경우 보통 찻집보다 200~300엔 비싼, 800엔 정도다. 그러나 사이폰으로 뽑아내는 ‘향’에 특화하는 커피맛을 즐길 수 있다. 진짜 여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일본을 대표하는 문학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에서부터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미시마 유키오의 흔적이 묻은 찻집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최근에는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팬들로 구성된, 진보초 찻집 내 무라카미 흔적을 좇는 투어도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240만에서 500만 그리고 1천만 명이다. 2014년과 2015년의 실적과 2016년 예상되는 중국인 방일 관광객 규모다. 지난해 일본을 찾은 관광객은 총 2천만 명이다. 2016년에는 3천만 관광객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가운데 중국인이 가장 큰 손님이다. 중국인의 싹쓸이 쇼핑을 의미하는 ‘바쿠가이(爆買い)’가 2015년 유행어 대상에 오른 것은 그 같은 분위기를 반증하는 것이다. 방일 관광객이 뿌리는 돈은 1인당 15만 엔 정도라고 한다. 평균 일본인의 1년 간 소비지출액은 124만 엔이다. 관광객 3천만 명은 일본인 400만 명 정도의 소비지출액과 맞먹는다. 가만히 앉아서 인구 400만이 창출할 경제적 효과를 만끽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중국인 관광 열풍의 출발점은 원래 일본이 아닌, 한국이다. 2015년 한국을 찾은 중국인은 611만 명으로 일본보다 111만 명이 더 많다. 그러나 증가속도를 감안해보면 올해 한·일 방문 중국관광객의 규모는 크게 역전될 전망이다.

중국인 관광객 한·일 역전 현상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설명될 수 있다. 진보초에서 만난 북카페 책거리(Chekccori)는 그 같은 배경 중 하나다. 책거리란 책과 거리(街), 또는 한국 막걸리(マッコリ)의 ‘거리’를 합친 조어다. 한국어, 일본어로 된 한국 관련 책 3500여 권을 배치한 곳으로 커피는 물론 막걸리와 한국식 수정과도 마실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 한국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이벤트 무대인 동시에 한국 관련 책을 수입하고 수출하기 위한 문화교류의 현장이다.

도쿄 전역이 중국인의 바쿠가이로 떠들썩하지만, 진보초만은 유일하게 조용하다. 아직 중국인은 물론, 한국인 관광객도 드문 장소다. 그러나 빠른 속도로 외국인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 변신해가고 있는 곳이 진보초다. 고령화와 함께 고서점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관광객과 외국인을 위한 무대로 변신해가고 있다. 쇼핑에 여념 없는 사람이라면 무시할 곳이지만, 뭐라도 하나 배우려고 애쓰는 사람에게는 진보초 만한 곳도 없다. “동대문 관광명소는 기껏해야 한두 시간 코스에 불과하다. 전부 비슷하고 특별한 캐릭터가 없다.” 최근 방한한 유럽의 한 도시계획 전문가가 말한, 한국 제1 관광명소에 대한 평이다. 기분 나쁘게 들리겠지만, 외국 관광명소와 비교해볼 때 틀린 말은 아니다. 먹고 입는 식의, 몸으로 때우는 것도 좋다. 그러나 머리에 남는 추억으로서의 문화와 문명의 힘은 한층 더 오래가고 진하다. 이탈리아나 프랑스는 찾아가면 갈수록 깊은 맛이 더해진다. 관광객을 위한 공간으로서만이 아니다. 둥둥 떠다니면서 방향도 없이 흘러가는 현대인을 위한 마음의 안식처가 바로 진보초와 같은 고서점이다. 아름다운 서점, 오래 기억되는 공간, 편안하고 깊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무대로서의 고서점이다.

- 글·사진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퍼시픽21’ 디렉터

201602호 (2016.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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