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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뉴 노멀 시대, 니체는 왜 우리를 유혹하는가 

“암울한 시대의 그대여, 위험을 벗삼을지어다” 

이진우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석좌교수
물질적 가치마저도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시대… 그대들의 도시를 베수비오 화산가에 세워라!

▎1861년 니체가 17세 때 견진성사를 받던 날의 사진이다. / 사진제공·글항아리
“한 철학자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마지막에도 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자기가 사는 시대를 자기 안에서 극복하며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가장 격렬한 싸움을 벌이는 대상은 무엇인가? 그를 그 시대의 아들이게끔 만드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바그너의 경우> 서문

비정상이 정상으로 불리는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뉴 노멀(New Normal)’ 시대다. 그동안 우리는 오랫동안 지속된 진보와 성장에 길들여졌다. 기억이 돌아갈 수 있는 데까지 돌이켜 생각해봐도 우리는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던 것 같다. 오늘의 삶이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과거보다는 분명히 나아졌고, 내일이 오늘보다 더 좋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진보 이념에 깊이 감염된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은 다시 ‘정상적으로’ 제 길을 찾아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1867년 라이프치히 대학의 철학 클럽.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니체다. / 사진제공·글항아리
성장이 정상인 곳에서 정체는 비정상이다. 그동안 성장을 선도했던 유럽 국가의 성장률이 제로 근처에 머문 것은 꽤 오래되었으며, 서구의 ‘낡은 국가’를 대신하여 세계 경제를 선도하던 신흥국의 성장률 역시 급속도로 둔화되고 있다. 정체가 일반화되고 일상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해가 거듭해도 우리의 삶과 사회가 좋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꾸준한 성장에 기초한 과거의 경제질서, 즉 ‘올드 노멀’의 관점에서 보면 비성장적인 상태가 지속되는 새로운 경제질서를 ‘뉴 노멀’이라 부른다.

비정상적인 것을 ‘새로운 정상’으로 명명하는 어법은 니체를 연상시킨다. 이제까지 당연하게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서양의 형이상학적-기독교적 가치를 병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폭로한 니체의 전복적인 태도와 많이 닮아 있다. ‘뉴 노멀’ 시대에는 언뜻 모순적이고 서로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뒤섞이고 융화된다. 저성장, 저금리, 그리고 저물가는 고실업, 고부채, 그리고 고위험과 결합한다. 사람들은 이제 ‘고용 없는 성장’, ‘풍요 속의 빈곤’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다.

여기서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사회가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경제적으로 성장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정말 좋아지는 것인가? 정상이 더 이상 정상이 아니라는 인식은 항상 ‘전복의 철학자’ 니체를 불러낸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위기는 ‘시간이 지나면 쉽게 치유될 살만 베인 얕은 상처’가 아니라 ‘뼛속까지 파고든 깊은 상처’다. 이 점을 진지하게 논의하기 위해 ‘뉴 노멀’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세계적인 채권펀드 핌코(PIMCO)의 최고경영자 모하메드 엘 에리언(Mohamed A. El-Erian)이다. 그의 글 제목 ‘뉴 노멀의 방향을 찾다(Navigating the New Normal)’가 암시하는 것처럼 우리 시대는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다. 우리가 방향을 잃을 때마다 니체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물론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라는 예언자를 등장시켜 철옹성같이 견고한 기독교적 가치를 가차 없이 파괴하지만, 그 자신은 결코 예언자가 아니다. 그는 예언자가 아니기 때문에 길 잃은 시대의 길잡이가 될 수도 없다. 시대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여기저기서 출현하는 가짜 예언자들보다 니체가 우리를 훨씬 더 강렬하게 유혹하는 매력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니체를 읽는가?

“상처에 의해 정신이 성장하고 새 힘이 솟는다”


▎니체가 1880년 가을에 <아침놀>을 쓴 마조레 호수 서쪽 기슭의 거리.
니체라는 이름은 불온하다. ‘신의 죽음’, ‘권력에의 의지’, ‘초인’, ‘영원회귀’와 같이 니체라는 이름과 결합된 낱말들은 우리를 또다시 깊은 의심으로 몰아넣는다. 많은 사람은 니체가 한 세기 전에 예언했던 것들이 이미 현실이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신이 죽었다는 말에 더 이상 놀라지 않을 정도로 세속화에 물들어 있으며, 진리를 만드는 것은 오직 권력뿐이라는 인식은 상식이 되었다. 첨단 과학과 기술은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불멸의 영생을 꿈꾸고 있다. 니체가 서양의 역사를 숨겨진 비정상의 역사로 폭로하였을 때 그 충격과 혼란은 대단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비정상적인 상태가 더 이상 아무런 충격도 주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태가 바로 ‘정신적 뉴 노멀’이다.

정신적 뉴 노멀이 하나의 위기로 느껴지는 사람들은 니체를 읽는다. 니체가 광기로 쓰러지기 직전 쓴 책 <우상의 황혼>을 손에 들고 그의 기운을 느껴본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진짜보다 우상들이 더 많다. 이것이 이 세계에 대한 나의 ‘사악한 눈길’이자, 나의 ‘사악한 귀’다.” 진짜보다는 가짜가 판치는 세상, 진리보다는 허구가 훨씬 더 현실적인 세상, 참된 말보다는 거칠고 비천해진 언어가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세상.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뉴 노멀 시대다. 과거에는 정체가 성장을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하였다면 오늘날에는 성장 없는 정체가 일상이 되고 있다. 과거에는 일시적으로 암울하더라도 언젠가는 좋아질 것이라는 개선의 희망이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출구가 없는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암울한 시대를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니체를 읽는다. 그에게서 시대를 치유할 정신을 얻고자 한다. 글머리에서 인용한 것처럼 니체는 “자기가 사는 시대를 자기 안에서 극복하며 시대를 초월”하고자 한다. 어떻게 우리는 뉴 노멀 시대를 극복할 것인가?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상처에 의해 정신이 성장하고 새 힘이 솟는다”는 뜻의 라틴어 격언을 철학적 좌우명으로 삼는다. 니체는 상처 바깥에서 치유의 방법을 구하지 않는다. 니체는 상처 내부에도 치유력이 있다고 믿는다. 상처의 뿌리를 파헤치지 않고 대충 치료하면 덧나기 십상이다. 그래서 니체는 모든 문제를 그 끝까지 파헤치고자 한다. 그것은 지금 그리고 여기서 군림하는 우상들을 캐묻는 것이다. 뉴 노멀 시대의 우상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우리는 니체처럼 망치를 들고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뉴 노멀 시대에는 세계를 구원할 진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예언자도 위험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실천할 영웅도 없다. 자기가 사는 시대를 자기 안에서 극복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우리는 때로는 시대를 거슬러, 그리고 때로는 시대와 함께 우리 시대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시대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미래 사회를 예측한 사람들의 책을 읽지 않고 굳이 니체를 읽는 것인가?


▎지속적인 성장과 진보가 멈췄다. 소위 ‘뉴 노멀’의 시대다. 행복의 기준이 달라져야 한다.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버린 시대, 니체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 사진·중앙포토
니체의 글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첫째, 우리는 니체의 책을 읽으면서 중립을 지킬 수 없다. 니체의 몇 문장만 읽어도 니체가 바로 나에게 친히 직접 말을 건네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니체는 우리를 자극하고 도발한다. 종교적으로 독실한 신자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는다고 상상해 보라. “그가 차라리 광야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그리하여 선한 자와 의로운 자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그는 아마도 삶을 누리는 법과 대지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이렇게 말하는 그를 불편해 한다. 우리는 현대인들이 노예처럼 행동하면서도 노예라는 낱말을 두려워하고 피한다는 그의 비판을 일면 수긍하지만 쉽게 동의하지는 못한다. 이처럼 니체는 우리를 동요시킨다. 그의 글을 읽으면 우리는 이제까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의견과 입장이 문제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둘째, 니체의 사상은 어지럽게 얽혀 있는 서양의 다양한 철학적 전통들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 문제점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빛을 모으는 볼록렌즈처럼 서로 아무런 연관 없이 평행으로 들어간 사상의 빛들은 니체의 관점을 통과한 후한 점으로 모인다. 다른 사람들이 한 권의 책으로 말하고자 한 것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시켜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던 니체의 말은 간단하고, 함축적이고, 예리하다. 니체의 말은 대부분 매우 도전적으로 들리지만 대개 서양 철학의 핵심을 꿰뚫는다.

사유방식과 글쓰기 형식의 매력


▎라이프치히에서 대학을 다닐 때의 니체. 1865년 무렵의 사진이다. / 사진제공·글항아리
니체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의 사상은 ‘그 사상’이 원할 때 오는 것이지 ‘내’가 원할 때 오는 것이 아니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 나오는 이 간단한 말은 근대철학의 핵심적 전제를 정면으로 겨냥한다. 데카르트 이래 생각하는 주체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모든 것을 회의하더라도 내가 회의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회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는 이 간단한 말로 생각하는 주체의 확고부동한 토대를 뒤흔들어 놓는다. 사유의 과정이 먼저이지 않은가? 이 과정에 비로소 주체를 허구적으로 설정한 것이 아닌가? 니체는 이렇게 묻고 또 묻는다.

셋째, 니체의 사유는 근본적으로 의심하고 질문하기 때문에 그의 사상은 체계적이지 않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니체의 사상은 모든 독자에게 개인적으로 말을 건다. 천 명의 독자가 있다면 천 명의 다른 니체가 있는 것이다. 서양 철학사에서 니체만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사상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사상을 하나의 이론으로, 하나의 체계적 사상으로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다. 깊이가 있는 모든 것은 가면을 갖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체계적 사유를 거부하는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개진한다. “나는 체계주의자들을 모두 불신하며 피한다. 체계를 세우려는 의지는 정직성이 결여되어 있다.” 20세기 절대적 진리에 체계적으로 접근하고자 하였던 수많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실패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뉴 노멀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체계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절대적 진리는 오직 전체주의적으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역사적 경험을 한 우리는 체계를 추구하는 모든 움직임에서 전체주의의 냄새를 맡고 의심한다.

넷째, 니체의 마력은 그의 사상이 갖고 있는 심오한 내용뿐만 아니라 그의 사유방식과 글쓰기 형식에서 기인한다. 생각한대로 살고 또 삶을 사유함으로써 삶과 사상을 그처럼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사상가가 니체 외에 또 누가 있을까?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삶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니체는 그 심연을 들여다보면 결코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삶을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한다. 논고, 시, 에세이, 잠언. 그는 낱말을 갖고 음악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도 한다. 뉴 노멀 시대는 메시지보다는 미디어가 훨씬 더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대다. 문체와 양식은 내용을 결정한다. 물론 이 경우에도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양식을 발전시켜야 한다.

니체에게서 형식과 내용, 글쓰기와 사상을 연결시키는 것은 바로 그의 운명적 삶이다.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그 고통을 극복하고 승화시킬 때 삶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철학자가 바로 니체다. 그가 <이 사람을 보라>에서 “나와 내 작품들은 별개다”라고 밝히고 있지만, 그의 삶을 이해하지 않고는 사실 그의 사상을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나 자신의 때도 아직은 오지 않았다. 몇몇 사람은 사후에야 태어나는 법이다.” 오만하게 들리는 니체의 이 말은 사실 자신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절망을 표현한다. 언젠가는 삶에 관한 자신의 사상을 가르치게 될 기관이 필요할 것이라는 니체의 예언이 현실이 되었다. 그럼에도 니체는 여전히 가장 많이 오해를 받고 있는 사상가다.

니체가 죽은 지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니체가 읽힌다. 그것도 가장 많이 읽히는 사상가에 속한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를 왜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고 하였겠는가. 자신은 결코 읽히지 않을 것이라는 니체의 예언과는 정반대로 뉴 노멀 시대의 현대인들은 니체의 책을 즐겨 집어 든다. 왜 그럴까? 니체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알 수 없는 마력 때문일까? 앞서 서술한 것처럼 니체가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사유하고, 이런 극단적 사유를 통해 전통을 끝까지 의심하고, 그렇게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봄으로써,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말을 걸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를 뉴 노멀 시대의 사상가로 만드는 것은 따로 있다. 우리는 지금 그리고 여기서 그가 시대를 앞서 사유하였던 문제를 직접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스스로 이렇게 얘기한다. “나의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은 그 문장을 체험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위한,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니체의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 니체(왼쪽)와 어머니 프란치스카 욀러 니체. 니체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그를 평생 흠모하며 그리워했다. / 사진제공·글항아리
니체가 다음 두 세기의 역사로 예견한 것은 다름아닌 허무주의다.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으로 불리는 뉴 노멀 시대에 우리는 니체가 예견한 허무주의를 체험한다. 허무주의를 체험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니체가 허무주의를 ‘모든 손님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손님’으로 묘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허무주의는 이제 더 이상 무시무시한 손님이 아니다. 허무주의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사라졌다. 허무주의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희극적일 정도로 사람들은 허무주의를 더 이상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 100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니체의 말을 떠올린다. “나는 다가오는 것을 서술한다. 허무주의의 도래. 내가 여기서 서술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서 필연적인 어떤 것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징후는 도처에 있지만, 이 징후를 볼 수 있는 눈들만이 아직 결여되어 있다. 나는 여기서 허무주의가 다가오는 것에 찬사를 보내지, 그것을 탓하지 않는다. 나는 가장 큰 위기들 중의 하나, 즉 인간이 가장 깊은 자기반성을 하는 한 순간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인간이 과연 이 위기에서 회복하는가? 인간이 과연 이런 위기를 지배하는가? 이것이 인간의 힘에 관한 문제다.”

니체에 의하면 허무주의는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결과다. 모든 가치가 의미를 상실하고 탈(脫)가치화된 허무주의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 우리는 이제까지 거의 절대적으로 믿었던 가치를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일까? 왜 니체는 이런 과정을 필연적이라고 단언하는 것일까? 니체의 말을 더 들어보자.

“현대인은 시험삼아 때로는 이런 가치를, 때로는 다른 가치를 믿어보며, 그런 다음 놓아버린다. 살아남은 가치와 내버려진 가치들의 원환은 계속 충만해지며, 가치의 공허와 빈곤이 점점 더 깊이 느껴진다. 이 운동은 멈추지 않는다. 비록 위대한 방식으로 그 운동을 지체시키는 일이 시도된다 할지라도.” 현대인은 절대적 가치를 믿지 않는다. 절대적 가치의 권위가 붕괴된 이후 수많은 가치가 서로 경쟁할 뿐이다. 뉴 노멀 시대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다원주의는 결국 가치의 상대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뉴 노멀 시대의 현대인들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가치가 상대화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타당성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편타당성은 삶에 기여할 수 있는 정신에서 나온다. 그러나 정신적 힘이 증발한 가치는 물질적 가격으로 퇴락한다. 모든 것이 계산할 수 있는 값으로 환원되고, 그렇게 서로 비교될 수 있는 시대가 바로 뉴 노멀 시대다. 현대인들은 정신적 가치의 상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니체가 예견한 것처럼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걱정해서 바뀔 일도 아니다. 이렇게 허무주의는 평범화된다.

이런 허무주의를 견뎌낼 수 있었던 가장 커다란 힘은 어쩌면 성장에 대한 믿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이―정신적으로 개선되지는 않을지라도―물질적으로는 조금씩 나아진다는 믿음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보편화되었다. 허무주의의 평범화와 보편화는 이렇게 현재의 상태가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고, 사회가 발전하고, 우리의 삶이 개선될 것이라는 믿음은 신이 죽은 뉴 노멀 시대의 새로운 신앙이었던 셈이다.

사람들은 가격을 매길 뿐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일인당 국민소득, 국민 총생산액, 생산성, 무역량처럼 계산될 수 있는 가치만 가치로 여겨지는 시대가 뉴 노멀 시대다. 비정상적인 것이 더 이상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설령 물질적 가치의 절대화가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현대인들은 개의치 않는다. 니체는 허무주의가 단순히 정신적 가치의 상실로 끝나지 않고 현재 지배하고 있는 물질적 가치의 절대화로 전환된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냈다.’ 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깜박인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머리말에서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최후의 인간’은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행복일 뿐, 결코 가치가 아니다.

위기의 시대에 가장 깊은 반성이 찾아온다

뉴 노멀 시대의 사람들은 행복을 물질적으로만 해석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이 힘들면, 이 지역을 떠나 따뜻한 기운이 있는 곳으로 떠나는 것이 행복이다. 오늘날의 난민은 대부분 행복을 찾아 떠난 경제적 난민이다. 현대인들은 병에 걸리는 것을 죄악시하는 것처럼 건강을 끔찍이도 추구한다. 그들은 일을 하면서도 일을 좋아하지 않고, 일을 좋아하지 않지만 일종의 소일거리로 일을 원한다. 일이 보람과 기쁨의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안전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부를 추구하지만 실상 부유해지려고 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들은 더 이상 가난해지지 않기만 하면 된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니체에 의하면 뉴 노멀 시대의 현대인들은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조촐한 쾌락을 즐기지만” 그것이 삶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의심도 품지 않고 생각 없이 살아간다.

왜 우리는 지금 니체를 읽는가? 니체가 예언한 위험한 허무주의가 뉴 노멀 시대의 진부한 특징이 되어버린 지금 니체는 왜 우리를 유혹하는가? 니체에게서 뉴 노멀 시대를 극복할 대안을 찾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니체는 우리에게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다. 니체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시대를 스스로 극복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시대를 비로소 체험하게 된 것일까? 우리는 혹시 우리 자신이 니체가 질타한 ‘최후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아닐까? 우리는 드디어 의심을 품게 된 것은 아닐까? 우리는 지속적 성장 자체가 어쩌면 비정상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것으로 착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믿었던 물질적 가치마저도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시대, 그것이 ‘뉴 노멀’ 시대다.

경제적 위기의 심각성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낸 이 용어가 이 시대의 정신적 위기를 가리킨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그러나 이 용어가 정말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의 심각성을 말해준다면, 그것은 니체가 말하는 ‘가장 깊은 자기반성을 하는 기회’일 수도 있다. 자기반성은 의심으로 시작한다. 의심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이 위험이 미래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니체를 읽는다.

“실존의 가장 커다란 결실과 향락을 수확하기 위한 비결은 다음과 같다. 위험하게 살지어다! 그대들의 도시를 베수비오 화산가에 세워라! 그대들의 배를 미지의 바다로 내보내라! 그대와 동류의 인간들, 그리고 그대들 자신과의 싸움 속에 살라! 그대들 인식하는 자들이여, 지배자와 소유자가 될 수 없다면, 약탈자와 정복자가 되라! 겁 많은 사람들처럼 숲 속에서 숨어 살아가야 하는 지겨운 시대는 곧 지나갈 것이다!”

이진우 - 연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대학에서 철학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거쳐 동 대학 총장을, 그리고 한국 니체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2010년부터 포항공과대학교 인문사회학부 석좌교수직을 맡았고, 현재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저서로 <니체의 인생강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찾아서> 등이 있다.

201604호 (201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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