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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니체의 비극적 삶과 사랑 

번갯불처럼 살다 운명에 스러지다 

장석주 문학평론가
큰일에서나 작은 일에서나, 단지 긍정하는 자가 되고자 했던 사람… 생애의 마지막 10여 년간 퇴행과 광기 속에서 고통받아

▎사진제공·글항아리
1889년 1월 3일 아침 이탈리아 북부 도시 토리노에 머물던 한 철학자가 산책을 하러 하숙집을 나섰다. 그 무렵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 건너편 마부 대기소에서 한 마부가 말에 채찍질을 해대고 있었다. 철학자는 느닷없이 비명을 지르며 광장을 가로질러 채찍질을 당하고 있던 말에게 달려갔다.

“그만 채찍질을 거둬라!” 그는 말의 목을 부둥켜안은 채 울부짖다가 이내 곧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정신착란이 철학자를 덮친 뒤 행인이 몰려들었다. 소식을 듣고 나온 하숙집 주인이 발광한 철학자를 집으로 옮겼다.

학대당하는 말에 자신을 투사하듯 울부짖었던 철학자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였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술 취한 농부들이 말에게 채찍질을 해대는 악몽을 꾼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죽은 말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니체가 <죄와 벌>을 읽었을 개연성이 높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연민이 니체의 무의식에 전이됐던 것은 아닐까? 학대당하는 말을 본 찰나 이 연민이 그만 무의식을 찢고 나온 것은 아닐까? 이날 저녁 니체는 의식을 되찾지만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동공은 풀리고 의식은 혼미했으며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하숙집에서 피아노를 두드리면서 광란의 몸짓으로 노래를 부르는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때마다 하숙집 주인은 경찰을 불렀다. 소동이 가라앉으면 니체는 소파에 웅크린 채 출판사에서 보내온 <니체 대 바그너>라는 책의 교정쇄를 들여다보았다.

죽음, 생(生)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친구들인 에르빈 로데(맨 왼쪽), 카를 폰 게르스도르프와 함께. 맨 오른쪽이 니체다. / 사진제공·글항아리
빛 속에 서서 어둠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일광이 어둠을 감추기 때문이다. 약동하는 삶의 중심에 서서 죽음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삶의 약동이 죽음을 삼키기 때문이다. 죽음은 미래의 것,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 미래의 가능성으로만 있다.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죽음을 두고 “주체가 그 주인이 될 수 없는 사건이다”라고 말했다. 에피쿠로스 철학에 따르면 죽음이 여기에 있을 때 당신은 여기 없다. 또한 죽은 뒤에는 죽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한 주체가 삶과 죽음을 동시적 사건으로 경험할 수 없다.

실존으로서의 죽음, 존재를 무화하는 죽음. 사람은 이런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죽는 순간 우리는 멈춤 없이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간다. 그럼에도 우리는 죽음에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죽음이 존재의 파괴이기 때문은 아니다. 죽음은 미지 그 자체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 수동적 존재인 까닭이다.

니체는 살아 있음을 기뻐했다. 그는 생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생명을 쇠잔으로 이끄는 것들을 거부하고 삶을 긍정하며 “매사에서, 큰일에서나 작은 일에서나, 언젠가 때가 되면 나는 단지 긍정하는 자가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것이 삶이더냐?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을 외치면서 생을 기꺼이 끌어안았다.

니체의 책을 한 줄도 읽지 않은 사람조차 니체를 ‘신이 죽었다’고 선언한 철학자로 기억한다. 니체 철학에서 신은 죽어야 하고 그 죽음은 인간에 의한 살해다. 결국 신의 죽음과 함께 신적인 것을 토대 위에 세워진 유럽의 가치체계들은 무너졌다. 신의 죽음이 돌이킬 수 없게 되자 유럽 문명은 황혼에 잠겼다.

가치 체계의 전도와 함께 허무주의의 그림자가 유럽을 뒤덮었다. 니체 역시 그 그림자를 밟고 서서 아침놀이 밝아오는 예감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허무주의가 빗장을 열고 들어와 인간을 덮치자 예언자 니체는 허무주의의 그림자, 그 어둠이 잉태한 여명을 기다렸다. 그는 삶의 비극적 조건을 응시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죽는 순간 자신의 삶이 “가면을 쓴 희극에 지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네로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를 흉내 내며 “나는 배우로서 죽는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니체는 그것이 배우의 허영에 불과하다고 낮춰봤다.

반면 니체는 죽음 앞에서 침묵을 지킨 티베리우스 황제를 앞서의 인물과 달리 높이 평가한다. 아마도 니체는 그가 감춘 말이 “삶이란 긴 죽음에 불과하다”라고 유추했던 것 같다.

니체의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미다스 왕은 현자 살레노스에게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살레노스는 답한다. “인간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존재하지 말았어야 한다. 이미 태어났다면 어서 빨리 죽어야 한다.”

신은 죽었지만 삶은 되돌아온다. 존재는 유한한 시간을 살지만 그 찰나는 곧 영원이다. 시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원환(圓環)을 돌며 반복한다. 현재는 흘러가는 순간들이 아니라 영원 그 자체다. 삶은 영원히 반복되는 궤도 위에 놓인다. 만물은 영원히 회귀하며 우리도 회귀한다.

“모든 순간은 바로 앞서 지나간 순간을 삼켜버리며, 모든 탄생은 헤아릴 수 없는 존재들의 죽음이다.” 니체는 모든 가치의 전도를 시도했다. 망치를 들고 무수한 우상들을 깨며 ‘영원회귀의 철학’을 펼쳤던 이 놀라운 철학자는 어떤 죽음을 맞았을까?

구원(久遠)의 연인, 루 살로메


▎죽기 1년 전인 1899년 화가 한스 올데가 찍은 니체의 모습. 바이마르 외곽의 니체 기록보관소에 머물렀을 때다. / 사진제공·글항아리
니체의 생애 전체에 걸쳐 사랑한 여자는 작가 루 살로메(Lou Salome)가 거의 유일하다. 살로메는 프랑스에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한 유대계 귀족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1882년 니체는 살로메를 처음 본 순간 첫눈에 사랑을 느꼈다. 그해 여름 살로메는 니체의 초대로 그의 별장에 한 달간 머물렀는데, 이때 살로메에게 즉흥적으로 청혼했다. 살로메의 지성과 육체의 매력에 찬탄하며 그는 “우리가 어느 별에서 내려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은 운명이다”라고 고백했다. 그때 니체의 나이 서른여덟 살, 살로메는 스물 한 살이었다.

살로메에게 반한 사람은 니체만이 아니다. 작곡가 바그너, 시인 릴케,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 극작가 하우프트만, 심리학자 프로이트 등 당시 유럽의 대표적인 지성이 루 살로메에게 매혹당했다. 살로메에 대해서 한 작가는 이렇게 기록했다. “루가 방 안에 들어서면 마치 태양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살로메는 취리히 대학에서 비교종교학과 예술학을 전공한 재능 있는 작가였다. 빼어난 미모를 가졌던 그녀는 열여덟 살 때 자신에게 지적 세례를 퍼부은 마흔세 살의 기혼자 헨드릭 길로트에게 빠진다.

아직 앳된 소녀인 살로메는 막 피어나는 여성의 생동감으로 스승에게 다가간다. 살로메는 스승의 서재에서 그의 무릎에 앉아 넘쳐흐르는 사랑을 퍼붓지만, 나중에 길로트가 청혼하자 냉정하게 거절하고 떠난다.

“그의 방에서 일하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그녀를 포옹하면서 사랑을 고백하고 아내가 되어달라고 속삭였다. 루는 깜짝 놀랐다. 다시금 한 세계가, 이성과 정신의 세계가 무너졌다. 한 신(神)이 또다시 쓰려졌다. 모든 것이 변했고, 그녀의 애정은 순박성을 잃었다.”(H.F. 피터스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 루 살로메의 생애>)

살로메는 니체와 만나기 석 달 전 니체의 제자이자 친구인 파울 레의 청혼을 거절했다. 니체의 청혼마저도 거절했음은 물론이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속박되는 걸 원치 않았다. 오히려 파울 레의 청혼을 거절하면서 ‘두 남자와 한 여자의 관계’를 요구했다. 파울 레는 니체를 떠올렸고 곧 바로 살로메를 니체에게 소개했다.

그 무렵 어느 사진관에서 세 사람이 마차를 사이에 두고 사진을 찍었다. 굉장히 상징적인 사진이었다. 살로메는 두 남자의 뒤에 서 채찍을 들고 서 있다. 쉽게 말 해 마차 앞의 두 남자는 ‘말’로, 뒤에 선 살로메는 채찍을 들고 말을 조련하는 ‘조련사’로 연출된 것이다. 이런 구도를 생각해낸 사람은 바로 니체였다.

베를린으로 돌아간 살로메가 파울 레와 동거를 시작하면서 이 기묘한 삼각관계는 깨지고 말았다. 두 사람의 동거 소식을 들은 니체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살로메는 동거 중 마흔한 살의 카를 안드레아스라는 동양 언어학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안드레아스가 “결혼해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며 자살 소동을 벌였던 탓이다. 결국 살로메는 ‘섹스는 하지 않고, 다른 남자와의 교제를 허락한다’는 조건으로 안드레아스와 결혼했다.

이때 살로메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파울 레는 충격과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4년 후 바닷가 절벽에서 자살을 택했다. 살로메는 동거인이나 결혼 상태에 있는 이와는 육체관계를 갖지 않고 오히려 그 밖의 관계에서 성적으로 분방한 태도를 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니체는 살로메와의 사랑을 ‘우주적 사랑’이라고 느끼면서 “광란하는 미치광이의 제정신으로, 저주받은 자의 전형적 광기로” 사랑에 빠져들었다고 회고했다. 알다시피 니체의 사랑은 무참하게 거절당했다. 사랑이 컸던 만큼 상실감도 엄청났다. 구원(久遠)의 연인을 잃고 이듬해 살로메에게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필생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완성했다.

1989년 1월 3일, 니체가 토리노 거리 6번가 광장에서 한 마부가 말에 채찍을 휘두르는 광경을 보고 발작을 일으킨 것은 과연 ‘채찍을 든 여성’ 살로메와 아무 관련이 없었던 것일까? 살로메를 조련사로, 자신을 말로 투사한 니체의 무의식이 그 찰나 폭발한 것은 아니었을까? 니체는 그 뒤로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쓰러져 정신병원을 드나들다가 여생을 마쳤다.

철학자, 정신병원에 가다


▎1871년 여름 니체는 누이 엘리자베트와 함께 스위스 남쪽 루가노의 베르너 고지에서 휴가를 보냈다. 아래 보이는 건물은 실트호른 호텔이다. / 사진제공·글항아리
니체가 정신착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동료 오버베크가 토리노의 하숙집에 도착했다. 하숙집 소파에 의기소침하게 웅크려 있는 니체의 안색은 창백했고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다. 정신착란 직후에 자신을 ‘디오니소스’ 혹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고 서명한 편지를 잇달아 지인에게 보냈다.

오버베크는 한 정신과 의사에게 니체의 편지 두 통을 보여줬더니 급히 정신병원에 입원시켜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부들부들 떨며 소파에 앉아 있던 니체는 친구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피아노를 부서질 듯 두드리며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괴이한 춤과 몸짓을 보이던 니체는 소파에 다시 말없이 쓰러졌다. 음산한 어조로 ‘내가 신의 후계자’라고 중얼거렸다.

이튿날 오버베크는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니체를 데리고 정신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 니체는 잦은 두통과 발작을 일으켰지만 이내 곧 유쾌하고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의사는 그의 병명을 ‘진행성 마비’라고 진단했다. 니체는 진료 과정에서 “노상에서 아무나 포옹하고 키스하며 담 벽을 기어오르는 것을 가장 즐겼다”고 털어놨다.

니체는 시도 때도 없이 먹을 것과 여자를 내놓으라며 울부짖고 난동을 부렸다. 전형적인 조광증의 증세였다. 잦은 정신 발작을 일으키며 10년을 더 연명한 끝에 1900년 8월 25일 인간 니체는 죽었다. 그러나 철학자 니체는 토리노 광장에서 정신착란을 일으켰을 때 이미 사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니체가 토리노에 도착한 것은 1888년 4월 5일이다. 토리노에서의 마지막 가을을 맞은 니체는 자신의 뇌에 덮친 뇌연화증과 비극적 파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처음이자 마지막인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에 착수했다.

토리노의 가을은 음울하면서도 황홀했다. 니체는 이 무렵 친구 오버베크에게 쓴 편지에서 “위대한 추수의 계절이다. 모든 순조롭고 잘 될 거야”라며 낙관적 예측을 적었다. 이따금 니체는 거울을 보며 자신 안의 반신과 괴물을 응시했는데 그것은 그가 환상과 열정으로 가열”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가열은 망상을 낳았다. 1888년 2월 12일 니체는 자신의 친구 라인하르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과대망상적 자기 판단을 적었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내가 이 시대의 제 1의 철학자라고 해도 전혀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닐 걸세.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한 존재여서, 나는 지난 천 년과 앞으로 올 천 년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이고 운명적인 사건일 것이네.”

니체는 수중에 돈이 떨어지면서 우울증과 조증을 번갈아 겪었다. 파울 도이센과 메타 폰 잘리스와 같은 친구들이 돈을 보내줘서 겨우 하숙비를 치르고 최저생계비로 삶을 꾸리면서도 자신이 이 시대의 제 1의 철학자라는 자긍심, 더 나아가 지난 천 년과 앞으로 올 천 년 사이에 최고의 철학자라는 확신은 꿋꿋했다.

1988년은 니체의 ‘위대한 해’였다. 그의 창조적 능력은 최대치로 고양됐다. 정신의 늠름함 속에서 저서 <우상의 황혼> <바그너의 경우> <안티크리스트>를 잇달아 써냈다. 1888년 10월 15일 니체는 하숙집에서 마흔네 번째 생일을 맞았다. 건강 상태는 불안정했다. 병의 징후는 숨어 있던 통에 겉보기에만 멀쩡했다. 정신착란의 전조(前兆)는 없었지만 그건 태풍 전야의 고요였다. 니체는 불안정을 누른 채 저서 <이 사람을 보라>의 초고를 써나갔다.

장마기에 구름장 사이로 반짝하고 햇빛이 비치듯 니체도 길가 의자에 앉아 한가롭게 거리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 마시기를 즐겼다. 그는 옷맵시에도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옷은 토리노의 평판 좋은 재단사에게 맡겼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점을 드나들면서 신분 높은 외국인으로 환대받는 즐거움을 누렸다. 이 무렵 친구 메타 폰 잘리스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이곳 토리노의 가장 특이한 점은 내가 이곳의 모든 가판대에서 느끼는 완벽한 매력이다. 나는 눈빛으로도 마치 귀족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 사람들은 문을 열어주고 식탁을 미리 준비해놓는 행동을 지극히 존중하는 투로 한다. 내가 큰 상점에 들어가면 그들의 인상은 금방 변한다.”

사람들의 호의와 친절이 자신에게서 발산되는 매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컸다. 제 눈빛이 매력적이고 호감을 산다고 생각했다. 시장에서 부인들이 과일을 권했고 행인은 인사했다. 아마도 이때가 니체가 인생에서 가장 큰 풍요와 완전함을 누린 시기가 아니었을까?

“여기에서는 하루하루가 끝없는 완전함과 풍요로운 태양 속에서 밝아오네.” 니체는 명랑성에 사로잡혀 오후의 춤추는 빛과 색을 즐기는 가운데 가끔 바보 같은 행동을 떠올리며 반 시간 이상 웃기도 했다. <이 사람을 보라>를 끝내고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내가 왜 삶의 비극적 파국을 서둘러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적었다. 니체가 발광하기 직전에 쓴 것이다. 자기 앞에 다가온 파국의 운명을 알았던 것일까?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는다. 새해가 시작된 지 불과 사흘 만에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스스로 진리가 되어라”


▎니체는 1884년 여름을 스위스 질스마리아의 높은 산에서 은둔 속에서 보냈다. 당시 묵었던 니체의 침실이다.
니체가 미쳤다는 소식은 금세 퍼졌다. 출판업자 C.C.나우만은 니체의 책이 장사가 될 거라고 예견했고 1890년 절판한 니체의 책들을 발간했다. 장사꾼의 예견대로 책은 불티나게 팔렸다. 니체의 저서 <즐거운 학문>에서 신이 죽었다고 선언한 자는 다름아닌 미친 사람이었는데 바로 그 저자가 미친 것이다. 사람들은 이 부분을 특히 흥미로워했다.

<즐거운 학문>이 세상에 나온 것은 1882년이다. 니체가 “영원을 위한 어떤 운명을 최초로 정식화했던 3편의 말미에 있는 화강암처럼 견고한 문장”이라고 평했던 그 책이다. 니체는 미친 사람(Der tolle Mensch)의 입을 빌어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누가 우리에게서 이 피를 씻어줄 것인가? 어떤 물로 우리를 정화시킬 것인가? 어떤 속죄의 제의와 성스러운 제전을 고안해내야 할 것인가?”


▎독일 작센 주의 뢰켄 생가에 조성된 니체의 가족 묘소. 니체와 그의 부모, 남동생이 묻혀 있다. / 사진제공·글항아리
신의 죽음에 따른 정화, 속죄의 제의와 성스러운 제전을 누가,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인간에게 남겨진 의무다. 신은 정신적 토대를 이루는 최고의 가치이자 모든 생명과 물질의 제 1원인이다. “신이 죽었다!”는 선언은 가치의 전도(顚倒), 가치의 영도(零度)의 선언이다. 니체는 미쳐버림으로써 미친 사람에 자신을 겹쳐냈다. 미친 사람은 신을 찾던 사람이었다. 신을 죽인 것은 인간의 공모에 의한 것이다.

“이 교회가 신의 무덤과 묘비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신은 죽었으므로 신께 경배를 드리는 교회는 신의 무덤이고 묘비가 서 있는 곳이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다!”

미친 사람은 신을 살해하려는 의도가 없다. 신을 살해한 건 신의 권능을 믿지 않는 인간들이다. 신을 살해하고도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미친 사람은 “그들은 이와 같이 끔찍한 일을 저질러버린 것이다!”라고 외친다. 신의 살해는 ‘더없이 추악한 자’들 혹은 병약한 자들이다. 기존의 진리와 가치에 대한 부정은 필연적으로 니힐리즘에 닿는다.

신이 부재하는 자리는 부득이 인간이 대신한다. 그는 ‘위대한 건강’을 지닌 인간, 인간의 조건을 넘어선 인간, 자기 극복을 체현인 존재가 아니면 안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위버멘쉬(Ubermensch)가 바로 그 존재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위버멘쉬가 등장하기를 우리는 바란다. 이것이 언젠가 위대한 정오를 맞이하여 갖게 될 최후의 의지가 되기를!”

신이 죽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이다. 세계는 낡고 태양이 지자 세계는 황혼에 물든다. 오래된 것에 대한 믿음은 의심으로 바뀌고 세계는 더 믿을 수 없고 더 낡아간다. 이 사건의 전모를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은 붕괴, 파괴, 몰락, 전복을 받아들인다.

신의 죽음은 등불이 꺼진 것에 견줄 수 있다. 인류의 등불이던 기독교와 도덕적 계율이 곤두박질을 치고 세상은 어둠으로 덮인다. 낡은 세계는 저물었는데 새로운 진리·전망·가치체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제 앞의 어둠을 스스로 밝혀야 한다. 이 어둠이 니힐리즘이다. 니힐(nihil)은 존재의 가치가 탕진된 상태, 즉 아무것도 아님에 이른 것을 뜻한다.

신의 죽음 후 세계는 허무주의의 검은 구름으로 뒤덮인다. 사람은 초자연적 가치가 아닌 삶에의 긍정과 생성적 의지로 초극해야 할 숭고한 의무를 갖게 된다. 니체는 새로운 가치의 근거로서 스스로 진리가 되어야 할 자로 차라투스트라를 창조했다.

자기연민, 원한 따위의 부정적인 것을 넘어서서 영원회귀라는 최고의 긍정 형식을 찾아낸 자, 위버멘쉬다. 사람은 신의 죽음을 모른 채 신을 경배하고 하늘을 욕망한다.

“그런 자들은 생명을 경멸하는 자들이요, 소멸해가고 있는 자들이며 이미 독에 중독된 자들인 바 이 대지는 그런 자들에게 지쳐 있다. 그러니 아예 저 하늘로 떠나도록 저들을 버려두어라!”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에게 “실로 사람은 더러운 강물과도 같아. 몸을 더럽히지 않고 더러운 강물을 모두 받아들이려면 사람은 먼저 바다가 되어야 하리라. 보라, 나 너희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이 위버멘쉬가 바로 너희들의 크나큰 경멸이 그 속에 가라앉아 몰락할 수 있는 그런 바다다.”

위버멘쉬는 어둠에 빠진 무리에게 선물이요 복음이다. 사람이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라면, 위베멘쉬는 그 자기 초극의 결과다.

‘영혼’을 넘어 ‘신체’를 향해

위버멘쉬는 자기 원한과 부정성을 넘어서서 영원회귀 사상이라는 최고의 긍정 형식 속에서 찬연하게 나타난다. 그는 웃음과 춤을 아는 자, 세계에 위대한 정오라는 선물을 마련한 자다. 그는 미래의 인간, 예언자, 자유정신의 창조자다.

정신과 신체가 하나다. 니체는 저서 <선악의 저편>에서 “실제로 정신이 가장 닮은 것은 위(胃)다”라고 썼다. 서구에서는 신체가 이성이나 영혼보다 열등한 그 무엇이라고 여겨왔다. 반면 니체는 신체를 열등하다고 깔보는 생각을 뒤집었다.

“지난날에는 영혼이 신체를 경멸하여 깔보았다. 그때만 해도 그런 경멸이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영혼은 신체가 야위고 몰골이 말이 아니기를, 그리고 허기져 있기를 바랐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신체와 이 대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와 인간을 연결하는 교량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깨어난 자, 깨우친 자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밖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것도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고.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 가축 떼이자 목자이다. 형제여, 네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 작은 이성, 그것 또한 너의 신체의 도구, 이를테면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에 불과하다.”

니체는 이성의 부속물로 전락해 있던 신체를 복권시키며 그 의미를 새롭게 새겼다. 신체가 이성의 도구가 아니라 이성이 신체의 도구라고! 자아라는 것도 신체가 드러내는 실물로서의 구체성에 견준다면 하나의 유령이다. 나라는 유일성의 존재 근거라고 받아들여지는 자아는 하나의 허상이자 일종의 문법적 가설이다.

“우리의 개체적 동일성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우리의 자아는 실상 잡다한 작용의 집합일 뿐이다. 열렬히 애써서 얻어진 모방의 결과일 뿐이란 말이다. 우리 안에 본래적이며 개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은 사실 우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느끼고, 바라고, 생각했던 것의 창백한 반영일 뿐이다.”(야니스 콩스탕티니데스, <유럽의 붓다, 니체>, 139쪽)

삶의 생성적 주체는 자아가 아니라 신체다. “신체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정신이라는 것이 그저 그렇게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불멸’이란 것도 한낱 비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체란 무엇인가? “신체는 항상 니체적 의미에서 우연의 산물이고, 가장 놀라운 것, 사실상 의식과 정신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으로 보인다.”(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87~88쪽) 들뢰즈는 “신체가 형태화된 인간의 총체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환원될 수 없는 다수의 힘들로 구성돼 있다”고 말했다. 생명은 예외 없이 힘에의 의지를 갖는다. 신체는 힘의 의지라는 위계의 복합성으로 이뤄진다. 따라서 ‘자유정신(Der freie Geist)’이 발현하고 작용하는 원점도 바로 신체다.

이 자유정신은 무엇에 예속됨 없이 스스로의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그것을 획득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새로운 것의 창조는 새로운 가치 평가요, 아울러 몰락과 파괴를 수반한다. 그러므로 자유정신을 가진 자는 ‘가치의 변천, 곧 창조하는 자의 변천’을 타고 넘어간다.

아름다운 축제를 기다리며


▎이탈리아 토리노의 아름답고 도도한 풍광. 니체는 토리노에서의 광증 이후 10여 년을 정신병원에서 지내다 사망했다. / 사진·중앙포토
차라투스트라가 숲에서 나와 도시에 들어서며 군중과 만난다.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그는 이 비천한 무리에게 삶에의 긍정과 타고난 기쁨, 천부적 본성으로서의 의지를 심어주려고 한다.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에 걸친 밧줄이다. “나는 번갯불이 내려칠 것임을 예고하는 자요, 구름에서 떨어지는 무거운 물방울이다. 번갯불, 그것이 곧 위버멘쉬다.”

위버멘쉬는 먹구름을 뚫고 내리치는 번갯불이다. 니체는 신이 죽음 이후 허무주의를 넘어서 건강과 자기초극의 의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자유정신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위버멘쉬는 그런 자유정신의 주체가 될 만한 존재였다.

자신을 “지난 천 년과 앞으로 올 천 년 사이에 존재하는 운명적인 사건”이라고 했던 철학자! 음식을 까다롭게 가려 먹고 금욕주의자로 산 철학자는 무시무시한 광기 속에서 탐식하고 여자를 구해달라고 울부짖었다.

일찍이 대학에서 고전 문헌학을 가르치던 이 교양인이 괴물로 변한 것에 다들 경악한다. 생애의 마지막 10여 년간 퇴행과 광기 속에서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던 이 교양인은 1900년 8월 25일 정오경에 숨을 거뒀다. 그의 시신은 사흘 뒤 고향 뢰켄의 부모 무덤 곁에 묻혔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불확정적이다. 어떤 사람은 일찍 죽고, 또 어떤 사람은 늦게 죽는다. 어느 시기에 죽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실패나 결핍이 아니라 완성이다. 잘 산다는 것과 잘 죽는 것은 하나다. 죽음을 축제로 만드는 것이 삶의 완성이다. 자유정신을 갖고 살 것, 웃음과 춤을 배울 것! 그리고 삶을 무한 긍정하면서 죽음이라는 아름다운 축제에 대해 더 많이 배울 것!

장석주 - 전업작가.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 당선으로 등단했다. <월간문학> 신인상(1975년)과 해양문학상(1976)을 수상했다. ‘고려원’ 편집장을 거쳐 청하 출판사를 운영했다. 지금까지 시집, 비평집, 인문서 등 70여 권을 펴냈다. 대표 저서로 <일상의 인문학> <마흔의 서재> <철학자의 사물들> 등이 있다.

201604호 (201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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