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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니체, '나'를 깨우는 아포리즘 20 

“더없이 깊은 심연에서 더없이 높은 것이 나왔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뚫고 들어가고, 파내며, 밑에 들어가서 뒤집는 사람… 관조적 삶이나 종교에 대해서도 수치스러운 기원을 가차없이 폭로

▎니체가 크게 감탄하고 좋아했던 이태리 토리노의 보도. 매끈한 검은색 화강암으로 포장된 모습이다
니체는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경외되고 심지어는 숭배되기까지 했던 모든 것과 결별했다. 그것은 ‘화약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전투’이기도 했다. 그는 사상의 금맥을 캐내기 위한 내면 탐구에 몰입했다. 보석과 같이 간직해야 할 니체의 아포리즘 20개의 광휘!

1. “나는 방황하는 자이자 산에 오르는 자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 보면 인생은 방랑이고, 인간은 방랑자다. 그 방랑 속에서 인간은 알든 모르든 결국 자기 자신을 체험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내 어떤 숙명을 맞이하게 되든, 내 무엇을 체험하게 되든, 그 속에는 반드시 방랑의 산 오르기가 있으리라,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을 체험할 뿐이니.”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산으로 올라가는 길고 긴 방랑길에서 그 산이 더없이 깊은 바다에서 솟아올랐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고 자기 자신을 긍정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2. “이 높디높은 산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 일찍이 물어본 바 있다. 그때 나는 그들이 바다에서 솟아올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증거가 산에 있는 돌과 산정의 암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더없이 깊은 심연으로부터 더없이 높은 것이 그의 높이까지 올라왔음에 틀림없으렷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히말라야 대설산의 암벽과 돌들이 남긴 흔적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자리가 아주 먼 옛날엔 망망대해였다는 것이다. 거기에 땅과 땅이 부딪치고, 바람이 불고 불꽃이 일고 용암이 분출하고 세월이 흐르는 사이 바다가 산이 된 것이다. 긴 세월이 지나 바다가 산이 되고 산이 바다에서 솟아난 것처럼 무의식의 바다, 충동의 바다, 본능의 바다를 망각한 채 내 자신의 산으로 오르는 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운명이라 해도 좋을, 자신의 바다의 심연으로 내려가 보지 못한 자는 자신의 산에 오를 수 없다. 니체의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본다. 더없이 깊은 심연에서 더 없이 높은 것이 나왔다!

3. “선과 악이라고 불리는 진부한 망상이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문득, 그 동안 좋아했던 것, 그리하여 열렬하게 추구의 대상이 되었던 가치들에 멀미를 느낀 적은 없는가? 어느 날 문득, 그동안 옳다고 믿었던 가치들이 내 안에서 가치를 상실하여 시신으로 치워지는 것을 경험한 적은 없는가? 어느 날 문득, 그동안 그르다고 믿었던 가치들이 ‘나’와 함께 놀고 있는 것을 발견해본 적이 있는가? 그동안 옳다고 믿었던 가치들, 그동안 그릇된 것이라 믿었던 가치들은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그때 곱씹게 되는 문장이 차라투스트라의 저 선포다. 선과 악이라고 불리는 진부한 망상이 있다!

4. “오, 형제들이여! 인류 미래를 위협하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큰 위험은 어떤 자에게 있다고 보는가? 선하다는 자와 의롭다는 자들에게가 아닌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선하다는 자들, 의롭다는 자들을 믿지 않으며, 민주주의적 취향과 예절을 갖춘 평균인(Nivellirer)을 증오한다. 일반적으로 평균인은 특정문화에 잘 적응되어 합리적인 시민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이다. 니체가 그 평균인을 증오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성찰의 고독을 모르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고독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며, 고독하게 자기 자신을 대면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5. “벗이여,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너는 독파리 떼에 물려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지 않은가. 달아나라. 사납고 거센 바람이 부는 곳으로!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너는 하찮은 자들과 가엾은 자들을 너무 가까이에 두고 있다. 저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앙갚음에서 벗어나라! 저들이 네게 일삼는 것은 앙갚음뿐이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납고 거센 바람이 부는 곳은 광야다. 광야는 시끌벅적한 곳이 아니라 사나운 곳이고 위험한 곳이며 무엇보다도 고독한 곳이다. 고독한 광야와 대비되는 시끌벅적한 곳은 장터다. 니체에 따르면 장터는 “성대하게 차려입고 요란을 떠는 어릿광대로 가득”한 곳이다. 그 장터에서는 자기성찰이라는 위대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창조하려 하는 자는 홀로 거센 바람이 부는 광야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야 한다.

고독은 인간을 내면화한다. 내면화된 인간은 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돌본다. ‘나’는 왜 긴장과 불안을 안고 사는 것인지, ‘나’의 분노는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왜 ‘나’에게는 세상에 욕할 일이 천지인지, 그는 그의 신체 속에 깃든 그의 생각과 느낌을 존중한다. 그것이 차라투스트라가 내 사상과 생각과 느낌 배후에 존재하는 ‘알려지지 않은 현자’라 했던 바로 그 ‘자기’다.

6. “형제여, 너의 사상과 생각과 느낌 배후에는 더욱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다. 이름 하여 그것이 바로 자기다. 이 자기는 너의 신체 속에 살고 있다. 너의 신체가 바로 자기이기도 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70년 프로이센 군대의 의무병으로 입대하기 직전 누이 엘리자베트와 함께 묵었던 스위스 발메네그 지역의 알펜클럽 호텔. / 사진제공·글항아리
신체는 무시해도 좋은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의 전체성이라고 해도 좋을 자기가 거주하는 집이며 바로 자기다. 그럼으로 신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감정, 즉, 기쁨과 슬픔, 행복과 고통, 존경심과 경멸감, 해방감과 분노, 사랑과 두려움은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쁨과 사랑 등 긍정적인 감정뿐 아니라 분노나 우울, 두려움과 경멸 등 부정적인 그림자 영역의 감정들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그대가 만날 수 있는 최악의 적은 항상 그대 자신”이라고 했을 때는 바로 이 그림자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7. “나는 섬긴다. 너는 섬긴다. 우리는 섬긴다. (…) 화 있을지어다. 으뜸가는 주인이 고작 으뜸가는 시종에 불과하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섬겨야 한다고 설교하는 자를 믿지 않는다. 그것은 강요된 섬김이다. 강요된 윤리는 위선적 공동체가 좋아하는 왜소한 덕이다. 니체가 위선적 공동체에 분노하는 것은 본능이 왜소한 덕에 지배당하는 거기에서 인간의 감성과 의식이 병들기 때문이다. 늑대를 순화하여 집개로 만드는 그들은 인간을 겸허하게 만들고, 얌전하게 만들어서 사람조차 쓸모 있는 가축으로 만들 줄 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8. “높은 급여를 통해 그들의 비참한 삶이 본질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 임금이 높아진다고 해서 그들이 당하고 있는 비인격적인 노예화가 지양되는 것은 아니다. 아, 인격이 아니라 나사가 되는 것을 대가로 하나의 값을 갖게 되다니!” (<아침놀>)

돈이 신이 되고 자본주의가 성전(聖殿)인 이 시대엔 자본주의적 언어 속에서 인격이 형성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평균인의 삶이 척도가 되어 높은 급여를 받는 샐러리맨이 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고, 지속적으로 그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샐러리맨으로 적응하는 것이 인격의 값이 된 것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9. “나는 어제 비제의 걸작을 스무 번째 들었습니다. (…) 카르멘을 들을 때는 언제나 나 자신이 다른 때보다 더 철학적인 것 같고, 더 나은 철학자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그너의 경우>)

비제의 음악이 좋은 이유는 악하고, 세련되었으며, 숙명적이기 때문이다. 카르멘이 아름다운 것은 사랑의 비극적 숙명성을 그대로 녹여내고 있기 때문이다. 선(善)을 강요하지 않고, 몰락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음악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니체는 “음악가가 되면 될수록 더욱더 철학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다. “이 음악은 명랑합니다. 그 명랑함은 아프리카적입니다; 그것은 숙명을 이고 있으며, 그 행복은 짧고 갑작스럽고 가차 없습니다.”

10. “여기 앉아, 인간을 만든다./ 내 형상을 따라/ 나와 닮은 한 종족을,/ 그는 괴로워하고, 울고,/ 즐기고 기뻐한다. 그리고 존중하지 않는다!/ 마치 나처럼.” (<비극의 탄생>)

니체는 괴테의 시를 인용하며 프로메테우스를 옹호한다. 프로메테우스의 인간 창조는 자기 형상을 따른 것이다. 자기 형상을 따라 자기와 닮은 종족을 만들었다는 것은 자신을 믿었다는 것이고, 자기 자신에 귀 기울였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을 보지 않고 자기 바깥세상만 본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믿지 않으면 직관의 힘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고, 자기 자신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예술은 없다.

자신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자신의 작품에 귀 기울일줄 알고, 자신의 작품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그 작품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의 직관은 본능적으로 그가 만든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안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불이었다.

신에 대한 모독으로 프로메테우스는 코카서스 산장 절벽에 포박 당한다. 모독당한 제우스는 독수리를 보내 포박당한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 먹게 한다. 그러니까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는 삶에 대한 열정이 싱싱해질수록 고통 또한 끝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기꺼이 고통을 감당하려는 의지와 용기 없이 스스로의 문화를 쟁취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11. “대지가 내 껍질을 삼키듯이/ 내 안의 뱀은 대지를 갈망한다./ 벌써 나는 돌과 풀 사이를 기어/ 굶주림에 몸을 비틀며 나아간다./ 내가 항상 먹어온 것을 먹기 위해/ 너 뱀의 음식이여, 너 대지여!” (<즐거운 지식>)

뱀은 내 안의 욕망이다. 뱀은 에덴의 질서에 따르지 않고 자기의 질서를 만든다. 뱀은 관념을 살지 않고 대지에 살며 편견을 먹지 않고 흙을 먹는다. 대지를 갈망하는 뱀은 ‘나’를 ‘나’답게 하는 내 안의 생명력이다.

12. “모든 아름다움은 생식하게끔 자극한다.” (<우상의 황혼>)

그래서 니체는 금욕을 순결한 것으로 파악하는 기독교에 대해 “삶에 대한 원한”을 토대로 하고 있는 종교로 파악하는 것이다.

13.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있는 자에게는 사람 자체가 빨간 뺨을 가진 짐승이다. 수치심, 수치심, 그것이 인류의 역사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물들과 비교하여 인간이 특별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특별하지 않다. 다른 존재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그저 빨간 뺨을 가진 짐승일 뿐이다. 빨간 뺨을 가진 짐승이 만물의 영장인 양, 세계를 휘젓고 다니면서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는 수치심의 역사다.

14. “이 대지는 피부로 덮여 있다. 그런데 이 피부는 여러 가지 병으로 신음하고 있다. 그 병 가운데 하나가 ‘인간’이라는 존재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의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 니체 목사의 묘비.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는다”고 써있다. / 사진제공·글항아리
니체는 사물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부정한다. 스스로 우월하다 믿어버리는 인간의 성향에 대해서는 그것을 ‘병’이라고까지 진단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오류는 인간을 여타의 사물과 구별하여 특별하게 대접하는 데서 온다. 그것은 사물의 이치도, 세상의 이치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권력이고 편견이고 병이다. 그것이 병인 이유는 그것으로 인간 스스로가 사물들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15. “인간과 사물 - 인간은 왜 사물들을 보지 못하는가? 이는 인간 자신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사물들을 은폐한다.” (<아침놀>)

16. “이제 지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모든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지금? 우리는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직도 위와 아래가 있는 것일까? 밤과 밤이 연이어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즐거운 지식>)

니체를 허무주의자라고도 한다. 니체가 본 그 허무는 슬픈 드라마를 한편 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지구처럼 방향축을 잃어버리는 혼돈이고 죽음이다. 우리는 뒤로 앞으로 밑으로 모든 방향으로 추락하는 거기에 있다. 거기에서 화두를 목숨처럼 챙기고 있는 선승처럼 그 막막하고 위험한 상황을 오롯하게 대면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니체의 허무주의는 시작된다.

17.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 지금까지 세계에 존재한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자가 지금 우리의 칼을 맞고 피를 흘리고 있다.” (<즐거운 지식>)

니체는 꿈 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은 생이 또 얼마나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건지를 꿰뚫은 철학자다. 그는 물처럼 흘러가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유한한 생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영원하고 무한한 신을 버렸다. 신을 죽이고,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18.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 뒤돌아보는 것,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위험하며 멈춰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편견과 아집의 태양이었던 신을 살해한 존재는 삶에는 목적이 없다는 것을, 삶은 목적 없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안다. 그 과정은 화려하게 빛나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 과정은 차라리 몰락 위에 있는 과정이고, 그러므로 위험한 과정이다. 오죽 하면 심연 위에 있는 밧줄일까. 과정의 인간은 그 밧줄을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위험하고, 멈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19.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위험과 몰락이 인간의 조건임을 아는 자, 그런 사람만이 자유로운 허무의 춤을 출 줄 안다.

20. “날지도 못하는 사람은 대지와 삶이 무겁다고 말한다. 중력의 악령이 바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력은 지구가 끌어당기는 힘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가 중력의 악령이라고 할 때 그것은 지구가 대기권 안의 사물을 끌어당기는 물리적 힘이 아니라 무리본능을 지닌 최후의 인간들의 선량한 가치체계를 일컫는 것이겠다. 그것이 중력인 이유는 벗어나기 힘든 강력한 것이기 때문이며, 악령인 이유는 인간의 의지를 사로잡고 흔들고 말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에 따르면 중력의 마술에 걸려 자기의지를 상실한 인간은 중력의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노예적 인간이지 자기를 사랑하는 주권적 개인은 아니다.

이주향 - 1963년 서울 출생으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이후 전공을 바꿔 동대학원 철학과에서 공부하며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현대사회가 직면한 고민을 일반인의 눈높이에서 풀어내 시청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저서로는 <나를 만나는 시간> <사랑이, 내게로 왔다>, 논문으로〈니체와 예수, 그리고 금강경> 등이 있다.

201604호 (201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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