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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 ‘남방불교’의 본산 스리랑카를 가다 

자비의 종교가 뿌리내린 신밧드가 찾던 보석의 섬 

스리랑카=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부처의 치아사리 보관한 불치사는 스리랑카 70% 불교인들이 평생에 꼭 한번 참배하는 곳… ‘구전(口傳) 불교’를 나뭇잎에 처음 기록한 패엽경(貝葉經) 제작해 불경(佛經)의 맹아 싹 틔우기도

▎스리랑카 최대 규모의 제타바나 스투바.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대형 탑이다. 싱할라 왕조의 첫 수도인 아누라다프라 동쪽에 있다. 윗부분이 일부 파손돼 높이가 83m인 현재의 모습도 참배객을 압도하는 크기인데, 4세기 중엽 조성 당시에는 120m가 넘었다고 한다.
스리랑카 콜롬보 공항에 도착한 것은 현지시각으로 4월 14일 오전 4시 30분. 한국에서라면 오전 8시이니까 활동하기에 큰 무리가 없는 시간이다. 그래도 아직 동트기 전의 시간이라 움직임이 어째 어색하다. 공항을 빠져 나오자 뜨거운 공기가 후끈 얼굴을 때린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는 다소 쌀쌀한 날씨였기에 기온 차가 더 크게 느껴졌다. 대낮 온도가 32도를 넘는 데다 하필 이날부터 우기(雨期)가 시작될 수 있다고 안내원이 귀띔한다. 지난 겨우 내내 대장염으로 고생한 터라 답사일정에 차질이 생기고 컨디션 조절에 실패할까 봐 내심 걱정했지만 기우(杞憂)였다. 6일간의 여정 내내 빗방울은커녕 온종일 뜨거운 햇볕이 작열했다. 우리 일행은 틈만 나면 그늘을 찾아다녔다.

비는 스리랑카를 떠나오는 날 내렸다. 공항 가는 길에 여독을 씻어주듯이 비가 내렸다. 8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순례 온 정성을 갸륵하게 여기신 부처님의 가피인가. 일어나지도 않을 앞일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걱정을 많이 하며 사는지를 새삼 되새김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알고 보면 불필요한 것이 너무도 많다. 쓸데없는 탐심(貪心)과 성냄, 그리고 분별하는 마음…. 스리랑카 불교문화 답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작됐다.

이번 답사는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이 <중앙선데이>와 공동 기획한 ‘해양 실크로드 문명 대탐사’ 연재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 주강현 원장이 동행했다. 해양 실크로드와 불교 기사를 <중앙선데이>에 실었지만, 답사 중 보았던 수많은 스리랑카 불교문화에 관한 다채로운 내용을 <월간중앙> 지면을 빌어 소개한다.

인도의 동남단에 위치한 섬나라 스리랑카. 기록이 전하는 2500년간의 결코 순탄하지 않은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인도양의 석양이 아름다운 이 나라는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국토는 6만5610㎢로 대한민국(남한 9만9720㎢)의 3분의2에 못 미치고, 거기에 2000만 명이 조금 넘는 인구(2014년 7월 기준 2186만6445명)이 산다. 지리적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인도양의 한복판에 위치해 예로부터 ‘해양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으로 ‘인도양의 진주’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

마음을 녹여주는 스리랑카인들의 ‘연꽃 미소’


▎스리랑카는 입으로 암송해 전해지던 부처님 말씀이 최초로 문자화돼 집대성된 나라다. ‘팔리어 삼장’으로 불리는 경전이다. 패다라수(貝多羅樹) 나뭇잎에 기록했다고 하여 패엽경(具葉經)으로 불린다.
이 나라는 실제 블루 사파이어를 비롯한 각종 보석 산지로도 유명하다. <신밧드의 모험>에서 신밧드가 보석을 찾아 떠난 섬 세렌디브가 바로 이곳 스리랑카다. 이 나라의 가치를 유럽인들보다 앞서 발견한 아랍인들은 ‘보석의 섬’으로 불렀다. 유럽인들은 이 섬에서 생산되는 후추, 계피, 차 같은 향료에 매료됐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폴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 극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필자가 이번 여정에서 찾은 스리랑카의 진정한 보석은 불교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기원전 3세기 스리랑카에 전래되는데, 인도보다 더 불교의 꽃을 화려하게 피워내어 세계로 확산되는 길을 열었다. 현재 스리랑카 인구의 약 70%가 불교도다. 불교 유적지에서 만난 스리랑카인들은 이방인에게 소박하면서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우연히 눈빛이 마주쳐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옷깃만 스쳐도 그 인연이 작지 않음을 뼛속 깊이 아는 듯했다. 경제적으로는 가난한 나라이지만 거리 곳곳에서 깨끗한 나라라는 인상을 받았다. 도로 포장이 잘 안돼 있어 불편한 점도 있지만 그들의 잔잔한 미소 속에 담긴 여유로움이 그런 불편함을 녹여주고도 남음이 있다.

스리랑카의 미소는 오랜 식민지 경험과 내전(內戰)의 아픔 속에서 피어난 꽃이라서 더 아름다워 보인다. 우리의 역사와도 겹치는 대목이 적지 않아 보인다. 스리랑카의 역사 초기에는 인도의 침략을 많이 받았고, 근대 이후에는 서구열강의 침략과 지배가 이어졌다.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으로 이어지는 릴레이 식민 통치를 448년간이나 받았다. 갈레 지역에 조성된 네덜란드 식민 시절의 유적지에서 만난 쉬랑가(Shirnga·35) 씨가 “식민지 시대를 좋아하지 않는다. 매우 잔인했다”고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1948년 독립 이후에는 30년간 내전이 이어졌다. 인도 남부에서 유래한 타밀족과의 갈등은 고대부터 최근까지 스리랑카 역사 내내 지속됐다. 이 같은 고난의 역사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불교라는 점에서 연꽃의 미소에 비유할 수 있을까. 그들의 자긍심의 근원에 불교가 자리한다. 스리랑카의 보물인 패엽경(貝葉經) 보존사찰 알루비하라 사원의 난다라타나 주지스님은 “식민 통치를 받던 448년간 스님들에게 계를 주는 의식까지 사라졌을 정도로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거치며 스리랑카 사람들 개개인과 가정 속에 전해지는 불교까지 없애버릴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 스리랑카 불교문화를 연구해온 정기선(동아시아 불교의례문화연구소 연구위원)씨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불교는 종교 이상의 의미다. 종교를 넘어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고 했다.

스리랑카는 불교를 믿는 싱할라족의 왕조가 2000년 이상 이어온 나라다. 싱할라 왕조의 첫 수도가 아누라다푸라이고, 두 번째 수도가 폴론나루와이며, 마지막 수도는 캔디다. 아누라다푸라는 스리랑카 고대 불교문화의 출발지이고, 폴론나루와는 중세 불교문화 유적의 보고다. 두 곳 모두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답사는 이 같은 싱할라 왕조의 수도 이전 코스를 따라 진행됐다.

이번 답사 코스는 스리랑카의 성보(聖寶)인 ‘불치(佛齒)’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는 길이다. 부처님의 치아(佛齒) 사리가 봉안돼 있어서 ‘불치사’로 이름이 붙여진 사원이 싱할라 왕조의 마지막 수도인 캔디에 있다. 영어로는 ‘Tooth Relic Temple’, 싱할라어로는 ‘스리 달라다 말리가와(Sri Dalada Maligawa)’라고 한다. 이곳 사람들에게 캔디는 스리랑카의 정신적 고향으로 통하고, 불치사는 일생에 꼭 한 번은 참배해야 할 성소로 여겨진다.

불치는 본래 아누라다푸라에 있었다가 폴론나루와를 거쳐 캔디로 옮겨졌다. 불치가 왜 수도 이전과 함께 옮겨 다녀야 했을까? 불치가 왕권의 상징으로 인식된 것이다. 고대국가에서 종교가 왕실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일은 많이 볼 수 있다. ‘왕실 불교’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한국의 신라와 고려와 마찬가지다. 스리랑카의 경우 20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왕권을 이어가는 데 불치가 핵심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다.

불치(佛齒)의 흔적을 따라서


▎싱할라 왕조 마지막 수도인 스리랑카 중부 캔디 지역에 위치한 불치사. 부처님의 치아 사리가 안치되어 있다. 스리랑카 최고의 성스러운 보배다. 불치 사리를 찾는 순례객이 끊이지 않는다.
왕권의 변화에 따라 수도 이전과 함께 불치사의 위치도 바뀌었다. 첫 수도인 아누라다푸라에도 불치사가 있었고, 두 번째 수도인 폴론나루와에도 불치사가 있었다.

아누라다푸라 도성 내에 ‘달라다게’ 혹은 ‘달라다 말리가와’라고 불리는 유적지에 불치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는 아누라다푸라의 불치사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캔디 지역의 불치사 모습이 아누라다푸라 시대로부터 전해지는 건축 방식을 본뜬 것이라 하니 미뤄 짐작할 뿐이다.

기원전 250년에 처음 스리랑카에 전해진 불교가 뿌리내린 곳이 바로 아누라다푸라다. 부처님 열반 후 200년이 지났을 무렵으로 당시 인도 대륙을 통일한 아쇼카왕의 아들이자 승려였던 마힌다 장로가 스리랑카에 불법(佛法)을 전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아쇼카왕은 무참한 살육 전쟁을 참회하고 불교에 귀의한 후 모두 9개국으로 전법사를 파견했는데 스리랑카에는 아들을 직접 보냈을 정도로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팔리어로 쓰인 스리랑카 고대 왕조 연대기인 <마하완사(大王統史)>에 따르면, 마힌다 장로와 싱할라 왕국 데와남비야팃사왕과의 첫 만남이 아누라다푸라에서 동쪽으로 8마일가량 떨어진 미힌탈레에서 이뤄졌다. 미힌탈레에는 마힌다 장로가 머물던 커다란 바위와 당시 스님들이 집회와 식당으로 활용했던 유적들이 남아 있다. 데와남비야팃사왕은 불교에 귀의한 후 승단의 설립과 사원 건립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이후 싱할라 왕조는 19세기 영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왕조를 유지했다. 전란을 피해 수차례 수도를 옮겨야 할 정도로 고난의 세월을 보냈지만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오랜 기간 왕조를 유지한 배경에는 불교가 있었다.

난다라타나 스님에 따르면 마힌다 장로가 스리랑카에 온 후 비구니 스님이 없는 것을 보고 아쇼카왕에게 비구니 스님과 함께 보리수 나무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후 야쇼카왕의 딸 샹가미타 스님이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 보리수를 스리랑카에 가져왔다. 스리랑카 불교의 또 하나의 자긍심으로 여겨지는 그 보리수가 아누라 다푸라의 스리 마하보디 사원에서 2000년이 넘는 세월의 기억을 간직한 채 지금도 은은한 향기로 참배객을 맞아준다.

난다라타나 스님에 따르면, 이 보리수 나무가 왕실 불교의 성격을 넘어 불교가 일반 서민에게까지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그 이전에도 스리랑카에는 나무를 숭배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이를 본 마힌다 장로가 불교를 확산시키기 위해 보리수 나무를 가져오게 했고, 그것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스리 마하보디 사원에 도착했을 때 그 역사적 보리수 나무는 우리 답사 일행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보리수를 친견하기 위한 행렬이 길게 이어지는 가운데 뜨거운 태양 아래 달궈진 사원의 돌바닥을 맨발로 걸으면서 깡총깡총 뛸 수밖에 없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첫날부터 맨발로 그렇게 뜨거운 돌을 디디고 다녀서 그런지 체력을 유지하는데 좋은 작용을 한 것 같다.

아누라다푸라 동쪽에 위치한 스리랑카 최대 규모의 제타바나 스투바는 참배객의 기운을 압도했다.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대형 탑이다. 현재는 윗부분이 일부 파손돼 높이가 83m인데, 4세기 중엽 조성 당시엔 120m가 넘는 규모였다고 한다. 이 정도의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스리랑카의 저력을 다시 바라보게 했다. 이와 함께 스리랑카 첫 사찰인 이수루무니아 사원도 아누라다푸라의 빼놓을 수 없는 유적인데 일명 ‘록 템플(Rock Temple)’이란 별칭답게 큰 바위와 함께 오랜 세월의 흔적을 지금까지도 잘 간직하고 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팔짱 낀 입불(立佛)


▎스리랑카 두 번째 수도인 폴론나루와 지역의 바위 사원(갈 비하라)에 있는 불상. 거대한 화강암에 조각한 4종의 불상 중 하나다. 부처님의 제자 아난존자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9세기 중반 이후 싱할라 왕국은 전쟁과 혼란을 피해 폴론나루와로 수도를 옮긴다. 폴론나루와는 중세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지역이다. 아누라다푸라에서와 달리 폴론나루와 지역에 건립되었던 불치사의 흔적은 지금도 일부 확인할 수 있었다. 수많은 돌 기둥이 사찰의 규모가 만만치 않았음을 입증한다. 돌 기둥들 안에 세워놓은 불상들은 파괴의 상흔에도 불구하고 화려했던 불교문화의 자태를 상상해볼 수 있게 한다.

이곳의 달라다 말루와 유적군 안에는 아누라다푸라에 이어 새로운 불치사로 기능했던 사원의 흔적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왕궁과 사원이 나란히 함께 인접해 있던 ‘왕실 불교’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타다게, 와타다게, 하타다게 사원 유적에 불치가 모셔졌던 것으로 추정한다. 모두 1층의 석조 구조물과 함께 불상 조각의 유적이 존재한다. 이 가운데 와타다게 유적은 독특한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원형의 사원 중앙에 작은 불탑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에 좌불을 각기 배치했다.

폴론나루와 지역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갈 비하라(Gal Vihara)다. 갈은 바위를 뜻하고, 비하라는 사원을 뜻하니 ‘바위 사원’이다. 거대한 천연 화강암 위에 네 기의 불상이 조각돼 있다. 그런데 스리랑카 역사서 <출라밤사>에는 이곳 바위벽에 본래 세 분의 불상이 조각됐다고 전한다. 바위를 동굴처럼 파고 들어가서 조각한 좌불(坐佛), 바위 표면에 조각한 좌불, 그리고 고요히 열반에 드신 와불(臥佛)이다. 그런데 현재는 세 불상 외에 입불(立佛)이 하나 더 조각되어 있다. 후대에 따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성 연대 등 구체적 기록이 없다고 한다. 스승 붓다를 잃은 제자 아난다의 슬퍼하는 모습이라는 설이 많이 알려져 있는데, 특이한 것은 이 입불의 형태다. 팔짱을 낀 불상이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이 입불 같은 형상을 다른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화려한 불교문화와 더불어 스리랑카 불교의 창의성을 보는 듯했다. 과연 그 입불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불치는 이 나라의 성보(聖寶)로 통한다. 현재 불치사가 있는 캔디 지역이 스리랑카의 정신적 고향으로 간주되는 이유다. 스리랑카 국민들에게 불치사는 일생에 한 번은 반드시 참배해야 할 성소로 여겨진다. 우리 일행이 캔디의 불치사에 도착한 것은 그림자가 꽤 길어진 오후 4시가 넘어서였다. 그럼에도 불치사 치아 사리함에 꽃을 올리고 기도하는 참배객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모두가 진지한 표정이다. 살아있는 부처님을 모시는 것처럼 온 정신을 집중해 예불과 공양을 올린다. 불치사 내부에는 사리함 이외의 불상이 따로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5월 조계종 초청으로 한국에 온 적 있는 불치사 주지 웬다루웨 스님에 따르면, 불치 사리함 앞에서 부처님이 현신하신 것처럼 매일 의례가 행해진다. 또 매년 8월이면 불치를 주제로 한 스리랑카 최대의 축제 ‘페라헤라(Perahera·佛齒祭)’가 열린다. 불치가 불치사 밖으로 나와 거리 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난다라타나 스님은 지금도 100여 마리의 코끼리가 불치제에 참여한다고 했다. 각종 민속 공연도 함께 펼쳐진다. 올해는 8월 8~18일 일정으로 불치제가 열릴 예정이다.

불치 전래의 역사는 1700년 전으로 올라간다. 석가모니 붓다의 열반 이후 나온 사리는 8개국으로 분과되었다. 이때 치아 사리 4과 중 하나가 인도 칼링가 왕국에 이운되었다. 이 칼링가 왕국의 치아 사리가 다시 4세기 초 스리랑카에 전해지게 된다. 즉 AD 310년 이교도의 침공으로 국가 존망이 위태롭게 된 칼링가 국왕 구하시바가 사위 단타와 헤마말라 공주에게 명을 내려 불치를 모시고 스리랑카로 건너가 아누라다푸라 왕조의 메가완나왕에게 전하게 했다. 메가완나왕은 불치를 성대하게 공양한 이후 매년 불치를 모시고 거리를 행진하는 축제를 계획하는데, 이 행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불치제의 기원이다. 코끼리 위에 모셔진 불치는 악단의 음악과 춤 공양을 앞세우고 행진을 한 후 다시 법당에 봉안됐다. 역대 왕은 이 전통을 이어받아 매년 도성을 순회하는 행사를 계속했다. 불치사의 전 주지 티부투와웨 스님에 따르면, 페라헤라를 행하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민중들의 불심 고취와 왕권의 정통성 확보다. 둘째는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비가 잘 내리기를 기원하는 기우제 목적이 있었다.(정기선, ‘스리랑카 불치사의 공양의례 일고’, <淨土學硏究> 24집, 2015년 12월)

구전(口傳) 불교, 패엽경(貝葉經)으로 거듭나다


▎아누라다푸라 지역에 있는 또 다른 보물인 보리수. 스리랑카에 불법을 처음 전해준 이는 아쇼카 대왕의 아들이자 승려인 마힌다 장로이고, 보리수를 가져온 이는 아쇼카 대왕의 딸인 샹가미타 스님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전해질 때만 해도 부처님의 말씀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암송의 천재들에 의한 ‘구전(口傳) 불교’였던 것이다. 구전 불교를 오늘 우리가 보는 문서 형태로 처음 문자화한 곳은 스리랑카로 알려졌다. 캔디에서 가까운 마탤리 지역의 알루비하라 사원에서다. 이곳에서 최초로 문자화된 불경이 ‘팔리어 삼장(三藏)’이다. 알루비하라 사원에 500명의 승려가 모여 패다라수(貝多羅樹) 나뭇잎에 기록했다고 하여 패엽경(貝葉經)으로 부른다. 초기의 나뭇잎 불경 제작 기법이 지금까지 보존돼 전해진다. 스리랑카가 남방불교의 본산으로 간주되는 배경에 최초의 경전 편찬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불기 2560년을 맞는 오늘 우리가 경전을 읽으면서 부처님이 세상에 오신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것은 이들의 공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밖에 아누라다푸라와 폴론나루와와 캔디의 삼각형 중간에 위치한 담불라 지역의 석굴사원도 스리랑카 불교문화의 깊이를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불치 사리가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전해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스리랑카에 가서 2년을 머문 후 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남긴 중국 스님이 있다. 동진(東晉)의 법현(法顯, 337~420) 스님이다. 그가 남긴 <불국기(佛國記)>[혹은 <고승법현전(高僧法顯傳)>]에 불치사와 관련된 기록이 전한다. AD 399년 일행 10여 명과 함께 수도 장안(長安)을 출발한 법현 스님은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인도로 먼저 들어가 약 8년간 불교 유적을 순례하고 산스크리트어를 수학했다. 이후 409년 사자국(獅子國: 스리랑카의 옛 이름)으로 건너가 약 2년간 체류했다. 이어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지역을 거쳐 해로(海路)를 통해 중국 산둥반도로 돌아왔다.

답사 형식은 크게 변화했을지라도 1600년 전 법현 스님이 순례한 구법(求法)의 발자취는 후학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밝혀준다. 법현 스님처럼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서역으로 향한 동아시아 구법승이 적지 않았다. 구법승의 순례가 3세기부터 11세기 말까지 이어졌는데 그중 이름이 알려진 이들만 140여 명에 이른다. 하지만 기록을 남긴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서유기>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현장(玄裝, 602? ~664) 스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신라인 혜초(慧超, 704~787) 스님의 <왕오천축국전> 등이 전해질 뿐이다.

인도를 순례한 이들 가운데 스리랑카에도 적지 않은 스님들이 갔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종합적인 여행기를 남긴 이로는 법현 스님이 유일하다. 법현 스님은 당시 남인도 다마리제국(多摩梨帝國)에서 상인들의 큰 배를 타고 14일 만에 사자국(스리랑카)에 도착했다. 법현 스님은 당시 사자국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인 아누라다푸라의 아바야기리 사원(無畏精舍)에서 2년 동안 머물면서, 불치와 페라헤라 관련 기록도 남겼다. 당시 성 가운데에 불치사가 있었는데 모두 칠보로 만들어졌으며, 불치는 매년 3월 중에 열린 불치제 때 왕실의 불치사에서 무외정사로 옮겨져서 공양되었다고 했다.

동아시아의 역사를 공유하는 우리도 법현 스님의 <불국기>의 존재 자체를 아는 이가 많지 않을 텐데, 이미 1836년에 프랑스의 동양학자 아벨 레뮤자에 의해 프랑스어로 번역해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에 기반해 영어 번역본도 5종이 잇따라 나왔다. 영국의 동양학자 새뮤얼 빌이 1869년 펴낸 <법현과 송운의 여행기>, 허버트 앨런 자일스가 1877년 펴낸 <법현의 여행 또는 불교도 왕국들의 기록>, 제임스 레게가 1886년 펴낸 <불교왕국들의 기록> 등이다. (참조: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엮음, <고승법현전>, 아연출판부, 2013년)

제국주의는 이중적이다. 제국은 불교 전통을 탄압했지만 불교가 유럽에 널리 알려진 것도 그 제국주의 시대였다. 19세기 서양에서 <불국기> 같은 책이 이 정도로 소개되고 있는데도, 당시 조선은 1800년의 정조대왕 서거 이후 망국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동아시아권에서 <불국기> 번역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이뤄지는데 일본이 가장 앞섰다. 한국에서는 1998년 이재창의 <고승법현전>, 2013년 고려대 한국사연구소의 <고승법현전> 등이 출간됐다.

스리랑카 근대불교의 중흥 이끈 다르마팔라


▎캔디 지역 불치사 안 사리함 앞에 모여 기도하는 참배객들. 불치사에서는 매년 불치를 주제로 한 페라헤라(불치제)가 열린다.
이렇게 본다면 과연 우리가 서양보다 불교를 더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제국의 식민 지배를 위해 저들은 식민지 문화를 연구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문화와 문명은 흘러가게 마련이고 또 거기서 새 싹이 돋아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이폰을 만들어내며 새로운 문명의 문을 열어젖힌 스티브 잡스가 젊어서부터 동양문화에 심취했다. 특히 불교와 힌두교는 그의 독창적 직관력의 근원이다. 법현의 인도·스리랑카 순례기의 서양어 번역과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이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폴론나루와 지역의 갈 비하라에서 보았던 팔짱 낀 입상은 답사 기간 내내 필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캔디 지역에 도착했을 때 그 의문의 실마리가 일부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불치사 건물 옆에 세워진 동상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누구일까? 인자한 모습에 팔짱을 끼고 있었다. 어디서 본 듯한데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불현듯 폴론나루와 갈비하라의 입불이 생각났다. 불치사 옆에 세워놓은 동상의 주인공은 스리랑카 근대불교 부흥운동의 핵심 인물인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garika Dharmapala, 1864~1933) 스님이다. 1873년 있었던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논쟁이 불교 측 대변자였던 구나난다 스님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데, 파나두라에서 열린 이 논쟁의 결과는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그는 식민지 시대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다. 제국주의의 불교 탄압에 맞서 스리랑카 불교를 지켜낸 것은 다르마팔라가 제창한 불교민족주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동상이 불치사와 나란히 세워져 있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만큼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폴론나루와에서 본 팔짱 낀 입불의 형태와 다르마팔라 동상이 그대로 오버랩됐다.

불교를 일종의 미신으로 몰아가는 서양 제국주의의 불교 탄압에 맞선 다르마팔라의 불교민족주의 선언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사찰 소유 토지 몰수령을 만들고, 사찰에서의 주민 교육을 금지하고, 사찰 내에서 일반인들이 생활하게 하며 사찰을 파괴했던 제국의 야만은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난다라타나 스님에 따르면, 식민지 시대에 스님에게 계를 주는 의식의 맥까지 끊기는 바람에 스리랑카가 과거에 불교를 전해준 태국과 미얀마의 스님을 초청해서 스리랑카 불교의 맥을 다시 이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식민지 시대가 아닌 독립한 스리랑카 시대에는 어떤가? 불교민족주의와 불교의 사회적 역할 강조는 시대를 초월해 보편적으로 적용 타당한 것인가? 1946년 일부 승려들이 정치 참여를 선언한 이래 스리랑카에선 독립 이후에도 불교와 정치가 밀접히 연결된 모습을 보였다. 정기선 연구위원이 언급했듯이 스리랑카에서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 봐야 하는가, 그래서 불교의 정치 참여도 다른 나라의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관행과는 좀 다르게 봐야 하는 것인가?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보다 잘 사는 나라였던 스리랑카가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런 불명예의 원인은 오랜 내전 탓이다. 앞으로는 달라질 것으로 보이지만, 풍부한 자연자원과 불교유적을 기반으로 관광 특수를 좀 더 풍성하게 일궈내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불행하게도 내전의 한 축은 불교였다. 내전은 민족분쟁이자 종교분쟁이었다. 전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불교를 믿는 싱할라족과 전체 인구의 18%를 차지하며 힌두교를 믿는 타밀족 사이의 갈등이 원인이다. 이 내전은 2009년 싱할라족 불교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내전이 부른 혼란과 상처는 아직까지 남아 있다. 그 상처의 한 단면이 2015년 프랑스 칸영화제 대상을 받은 영화 <디판>에도 그려졌다. 불살생(不殺生)과 자비를 바탕으로 하여 갈등을 포용하는 종교인 불교가 갈등의 한복판에 놓여 있어야 하는가?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스리랑카 불교문화 답사의 또 다른 생각거리다.

정치갈등 포용할 불교의 역할


▎캔디 지역 불치사 건물 바로 옆에 있는 동상. 주인공은 스리랑카 근대불교 부흥운동의 핵심 인물인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 스님이다. 제국주의의 불교 탄압에 맞서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한 인물이다.
개인이 됐든 승가가 됐든 원한을 원한으로 풀 수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 아니던가! 갈등과 원한의 해결을 개인의 자각과 참회에서부터 풀어가는 것이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모두 진정한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얘기다.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해진 이래 타밀족과의 갈등은 스리랑카 역사 속에서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반복됐다.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불법을 지켜온 공덕이 무량해 보인다. 그럼에도 타밀족과의 갈등을 불교적 평화의 방식으로 해소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는 다만 스리랑카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현실과 역사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 남북간 전쟁까지 치렀다. 또 밖으로 중국이나 일본과의 갈등이 있고, 안으로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둘러싼 갈등이 계속된다. 이런 고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한국의 불교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문제를 푸는 불교적 해법은 과연 무엇인가?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내 탓이오’를 제창한 일이 생각난다. 불교의 길을 천주교에서 선점해 보여줬다. 그것은 본래 불교의 길이었다. 문제를 ‘내 탓이오’에서 풀어가는 사례는 불교에 무수히 존재한다. 너와 나 개개인이 모두 그 점을 자각할 때 우리 시대의 질곡을 헤쳐나갈 길이 보이리라.

- 스리랑카=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201606호 (201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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