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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살롱] ‘칸이 사랑한 남자’ 영화감독 박찬욱 

“세대 거듭해도 기억 될 작품 만들고 싶어” 

김포그니 기자 pognee@joongang.co.kr
동성애 다룬 문제작 영화 <아가씨>를 둘러싼 논란에 답하다... ‘남성 위한 레즈비언 판타지’인가, ‘여성의 성장을 담은 멜로물’인가?

▎제69회 칸 국제영화제의 레드카펫에서 박찬욱 감독과 배우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번 경쟁 부문에 초청된 박 감독의 신작 <아가씨>는 전 세계 176개국에 판매돼 한국영화 역사상 최다 판매기록을 경신했다. / 사진·중앙포토
박찬욱 감독(53)의 별명은 ‘칸느 박’이다.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칸 영화제에서 초청하는 ‘단골손님’인데다가 명감독도 한 번 받기 어렵다는 주요 수상만 벌써 두 번째이기 때문이다.


▎사진·중앙포토
2003년 영화 <올드보이>로 제57회 칸 국제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데 이어 제62회에서는 영화 <박쥐>(2009)로 심사위원상을 거머쥐며 그는 세계적인 명감독의 위상을 굳혔다.

박 감독은 1963년 서울의 한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963년은 문화에 새로운 청사진이 제시됐던 ‘혁명의 해’로 불릴 만하다. 젊음의 우상 ‘비틀스’가 데뷔했고 ‘파격의 상징’ 미니스커트가 처음 등장했다. 음란서적으로 규정됐던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공개 출판되며 문학은 검열의 대상으로부터 탈출했다.

자유로운 사상이 태동됐던 이 시기에 세상의 빛을 본 그 역시 손만 뻗으면 책이 잡힐 만한 인문학적인 환경에서 자라났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영화감독이 되기 전까지는 평론가로 활동했다. 이런 경험적 토대가 그로 하여금 ‘근친상간’, ‘카톨릭 신부의 사랑’ 등 금기(禁忌)에 도전하는 스토리텔링과 정교한 미쟝센을 통해 ‘박찬욱’ 특유의 작가주의를 구축하도록 했다.

늘 파격의 소재를 발굴해왔던 그가 7년 만에 신작 <아가씨>를 내놓았다. 이번에 그가 택한 금기의 이야기는 ‘레즈비언의 사랑’이다.

국내 상업영화로는 최초로 동성애를 그린 탓일까? 영화에 등장한 동성의 정사(情事) 장면을 두고 ‘남성을 위한 레즈비언 판타지’라는 비판과 ‘동성애를 진정성 있게 그렸다’는 호평이 엇갈리며 개봉 초반부터 논란이 분분하다.

“굴복하지 않는 여성을 가장 좋아해”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 억울한 누명을 쓰고 13년간 감옥에 있어야 했던 주인공 금자 씨는 출소 후 복수를 꿈꾼다. 박 감독은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여성 캐릭터를 좋아한다. 그런 의미에서 만든 작품이다”라고 말했다.
외설과 예술의 기로에 놓인 문제작 <아가씨>에 대한 박 감독의 생각은 어떨까? 북촌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나 약 2시간 동안 자세한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만난 박 감독은 기존의 날카로운 인상에서 좀 더 푸근하고 여유로워진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7년 전 영화 <박쥐> 개봉 당시보다 흰머리가 늘어 놀랐다”고 하자 그는 “집안 전통이다. 그래도 아버지나 큰아버지에 비하면 (흰머리가) 늦게 나는 편이다”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화 <스토커>(2013). 열여덟 살 생일에 갑작스런 사고로 아빠를 잃은 소녀 인디아의 매혹적인 성장 일화를 다뤘다. 평소 “종속적이던 여성이 독립 주체로 성장하는 스토리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박 감독의 주요 작품 중 하나다 .
가족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다고 들었어요. 종교적 경험이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한국 가톨릭이 그렇게 엄숙한 분위기는 아니에요.(웃음) 열심히 다니는 신자도 아니었고요. 미사 때 신부의 조수 노릇을 하는 걸 ‘복사’라 하는데, 그런 것도 안 해봤어요. 다만 가톨릭의 어떤 이미지가 제 작품에 영향을 준 건 맞아요. 이를테면 순교자의 형상이라든지, 예수가 처형당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고난, 고문, 순교, 피의 이미지와 종교적인 음악 등이 그렇죠.”

그래서인지 ‘박찬욱의 영화는 바로크(baroque)적이다’라는 평도 있어요. 자유분방하면서도 기괴한 양상이 엿보인다는 거죠.

“부정하기 어렵네요. 그로테스크하고 폭력적인 것에 대한 어떤 희열을 표현한 후 그런 감성이 곧바로 숭고한 것으로 전환되는 연출을 좋아해요.”

영화 <아가씨>에서는 주인공 아가씨와 하녀가 비밀과 욕망을 둘러싸고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감을 보여준 끝에 두 여성의 동성애는 곧 ‘숭고한’ 성장으로 전환된다. 박 감독은 <친절한 금자씨>(2005)에서 살인 복역 후 복수를 꿈꾸는 여자, <박쥐>(2009)에서 뱀파이어가 된 유부녀 등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를 창조해낸 데 이어 이번에도 <아가씨>를 통해 당당하게 동성과 사랑을 나누고 부조리에서 탈출하는 여성의 ‘특별한’ 연대를 그려냈다.

평소 여성의 ‘성장’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스토커>에 이어 신작 <아가씨>에서도 이 부분을 다뤘잖아요.

“종속적이던 여성이 독립 주체로 성장해서 탈출하는 스토리를 좋아해요. 언급했던 작품 모두 소녀가 성장하는 이야기를 다뤘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소녀 3부작이라고 부를까’ 하고 농담조로 말한 적도 있어요.”

특히 파이팅 기질이 있는 여성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씨, <박쥐>의 태주, <아가씨>의 숙희를 보면 남성을 농락하고 현실을 타파하죠. 실제 취향도 그런 쪽인가요?

“현실에서 저는 순응조의 나약한 소시민이라서요….(웃음) 하지만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해요. 특히 여성이 그러면 더 후련하고 멋있는 맛이 있는 것 같아요. 관객도 그런 여성을 원하는데 아쉽게도 충무로에는 여성 위주의 영화가 별로 없어요. 그래서 ‘나라도 만들자’는 생각이 들었죠.”

영화 <아가씨>에서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된 일본귀족 아가씨 히데코와 아가씨의 재산을 노리는 백작, 그리고 백작으로부터 ‘아가씨를 유혹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제안을 받은 하녀가 등장한다.

어릴 적 부모를 잃고 후견인인 이모부의 엄격한 보호 아래 있다는 사실 외에 많은 것이 베일에 싸인 아름다운 히데코는 모두의 욕망의 대상이 되어 곧 깨질 듯 위태로워 보이지만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비밀스러운 면모로 긴장감을 높인다. 반면 투박하고 당돌한 성격의 하녀 숙희는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돼 보호받는 아가씨와는 달리 날것의 생생한 매력을 발산하는 소녀다. 도둑의 딸로 태어나 장물아비에게 길러진 고아인 그녀는 아가씨의 재산을 가로채려는 백작의 계획에 가담하지만 점차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빠져들고 만다.

레즈비언 정사장면, ‘교감’ 담으려 노력했다


▎신작 <아가씨>는 당당하게 동성애를 나누고 부조리에서 탈출하는 여성의 ‘연대(連帶)’를 그려낸 작품이다. 주인공 아가씨와 하녀는 비밀을 둘러싸고 팽팽한 심리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서로 사랑에 빠져버리고 만다.
그런데 주인공 히데코가 생각보다 수동적이어서 아쉬웠다는 평도 있어요. 탈출도 하녀 숙희의 도움을 받은 데다 복수도 직접 하지 않았으니까요.

“처음부터 강한 여성이었다면 ‘성장했다’는 의미가 없지 않겠어요? 더군다나 히데코는 유년 시절부터 억압받았던 소녀에요. 일생의 8할을 이모부 코우즈키로부터 부적절한 방식으로 통제받아왔는데 그 트라우마를 단숨에 이겨내기는 쉽지 않았을 거예요.

일례로 히데코를 괴롭혀왔던 음란서적을 숙희가 찢어버리려 하자 오히려 그걸 말리죠. 이후 낮은 담을 넘어서 도망칠 때도 그녀는 망설여요. 이모부의 망령에 꼼짝 못하는 히데코, 그리고 그것을 깨뜨려주는 구원자로서의 숙희. 이런 ‘여성의 연대’를 통해 차츰 억압을 극복한 히데코는 나중에는 매우 무서운 여성으로 변합니다. 그게 바로 성장이죠.”

그는 인터뷰 내내 담담한 어조로 “여성을 이해하는 건 한 인간을 이해하는 길”이라며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냈다.

남성으로서 여성인물을 표현해낼 때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제 자신이 남성으로서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마찬가지로 ‘내가 여성이었다면 (여성인물을) 더 잘 표현했을 텐데’라는 생각도 안 해봤고요. 그저 한 명의 예술가로서 극중 인물을 창조하는 것일 뿐이죠.

물론 정서경 작가한테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감독 입장에서는 정 작가가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그녀가 뛰어난 작가이기 때문에 조언을 구한 거예요.”

레즈비언의 정사를 ‘유미적(唯美的)’으로 표현해냈다는 호평도 있는 반면 남성의 관음적 시선에 치우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어요.

“글쎄요, 어떤 장면이 남성의 시선으로 연출됐다는 건지 궁금한데요?”

이를테면 정사과정에서 “아가씨, 가슴이 되게 귀여워요”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런 건 보통 남성의 판타지죠. 여성의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또 성적인 긴장감이 고조될 때 갑자기 쇠구슬이 등장하잖아요. 그순간 여성관객 일부는 ‘어, 저거 되게 아플 텐데?’ 하고 느꼈다는 거죠.(웃음)

“그 장면을 굉장히 관능적으로 바라본 분도 있어요. 정사 과정에서 히데코와 숙희가 이용한 구슬이 실제로도 많이 사용되는 ‘그런’ 장난감이거든요. 히데코가 학대당하는 과정에서 사용됐던 ‘고문’ 도구이기도 하죠. 이게 종국에는 쾌락의 도구로 전환되면서 그녀의 해방을 표현했고요.”

억압받던 여성이 정사를 통해 독립된 주체가 되었음을 나타냈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일종의 축하 세리머니죠. 히데코와 숙희의 두 번째 정사는 아무런 억압이 없는 상태에서 ‘순수한 놀이’마냥 그려져요. 그런 의미에서 쇠구슬이 장난감을 상징하는 좋은 도구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두 여성의 은밀한 정사가 충격적인 구도로 연출된 점도 시선을 모았는데요.

“‘왜 정사장면을 그렇게 찍었느냐’는 질문이죠?(웃음) 솔직히 말하면 모든 장면을 충격적으로 찍고 싶은 게 저의 바람이에요. 앉아서 얘기만 하는 장면에서도 관객이 놀랐으면 좋겠어요. 다만 파격의 연출을 하더라도 그 안에 의미가 담겨 있어야겠죠. 이번 작품의 경우 두 여성의 ‘교감’을 담으려 노력했어요.”

데칼코마니처럼 완벽히 대치된 자세가 나오잖아요. 그건 어떤 의미인가요?

“극중에서 숙희와 히데코는 하녀와 상전(아가씨)이잖아요. 관객 입장에서 그 신분의 간극을 더 절감할 수 있도록 일부러 아가씨와 하녀 역에 각각 스타배우와 신인배우를 기용했어요. 이 여성 캐릭터가 주체성을 갖고 ‘사랑’이라는 공동의 의지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점차 계급차는 해소되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동등한 관계가 됐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대칭구도로 찍었어요.”

‘386세대’의 이방인, 영화인 되다


▎사 진·중앙포토
동성애를 그린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 레아 세이두는 “남성 감독 앞에서 전라 상태로 동성애 정사를 표현해야 하는 과정이 힘들었다”라고 했는데요. <아가씨>를 촬영하면서 여배우의 이런 사정을 고민해봤는지 궁금해요.

“아무래도 레즈비언의 사랑인 만큼 촬영과정에서 여배우가 느낄 수 있는 불편함을 최소화하려 노력했어요. 이를테면 배우가 연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저를 비롯해 남성스텝은 전부 나가있도록 했죠.”

촬영은 어떻게 했나요?

“무인카메라로 (촬영)했어요. 여배우의 심신 회복을 돕기 위해 대기실에 좋은 향도 피워놓고요.”

<아가씨>에서 여성이 쾌락을 얻는 과정에서 백작이나 코우즈키 같은 남성인물은 철저히 배제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남성 없이도 여성은 쾌락을 느낄 수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어요. 애초에 여성의 사랑을 남성의 시선으로 그려냈다는 지적을 받지 않기 위해 굉장히 노력해서 만들었어요.”

‘386세대’의 남성은 한국사회에서 가부장적인 캐릭터로 인식돼왔는데요. 박 감독은 또래 세대와 ‘결’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아요.

“저의 아버지는 권위적인 인물이 아니었어요. 부모님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성장했죠. 다만 대학시절 ‘386세대’의 이방인과도 같은 삶을 살았어요, 데모에 참여해 돌도 던져봤지만(운동권) 조직에 몸을 깊게 담았던 학생은 아니었죠.”

최근 변영주 감독은 영화 <아가씨>에 대해 “지적이고 섬세한 시나리오, 보여주고자 하는 모든 것을 명백히 조율하는 연출력, 영화는 대중적이며 탁월하고 배우들은 경이롭다. 장르적 완결성과 정치적 올바름이 공존하는 올해 최고의 영화”라고 극찬했다.

페미니스트로 유명한 변영주 감독이 이번 작품을 두고 ‘올해 최고의 영화’라고 평했는데요.

“변 감독께 인정받았다는 게 저한테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몰라요. 그분은 페미니스트시니까 아무래도 더 기쁘죠.”

세계 무대에서도 수 차례 인정받았잖아요. 이제는 주변평가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데요?

“공 들여서 만든 영화인데 안 좋은 얘기를 들으면 힘 빠지고 실망하는 편이거든요. 저도 사람인데 작품이 지지 받지 못하면 슬프죠. 혹평을 들으면 여전히 상처도 받고요. 그래서 ‘누가 네 칭찬했더라’고 말해주면 그것만 찾아 읽어요.”(웃음)

“나는 멜로 감독, 낭만주의적 사랑을 꿈꿔”


▎박 감독은 <아가씨>의 주인공 김민희(왼쪽)와 김태리(오른쪽)에 대해 “김태리는 신인답지 않게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 깜짝 놀랐다. 김민희는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명배우다”라고 칭찬했다. / 사진·중앙포토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쾌감을 느낄 때는 언제인지 궁금한데요?

“배우가 연기를 잘할 때죠. 연기는 감독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벌어지는 마법과 같아요. 배우의 연기 덕분에 생각도 못해본 특별한 장면이 카메라에 담길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짜릿하죠.”

이번 영화에서는 어떤 배우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나요?

“하녀 역을 맡은 배우 김태리 씨가 자살 시도하는 아가씨를 붙들고서는 질질 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일본 귀족의 딸 역할에 특별 출연해주신 배우 문소리 씨의 연기도 대단했고요. 극중에서 백작에게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고 나서 모욕감을 느꼈지만 내색하고 않고 책을 들여다보는 눈빛이 소름 돋더라고요. 정말 대단한 배우에요.”

배우 김민희 씨의 대변신도 관객의 눈길을 끌었어요.

“히데코는 세상물정 모르고 보호해주고 싶은 여성이면서 잔인한 면모도 지녔어요. 이런 점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배우로 김민희 씨가 제일 먼저 떠올랐어요. 사실 그녀가 처음부터 연기력이 뛰어났던 배우였다면 관심이 안 갔을 거예요. 그런데 최근 영화 <화차>를 보고 배우로서 놀라운 성장을 발견했고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에요.”

창작자로서 극중 인물에 자신의 내면을 투영할 때도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캐릭터가 자신과 가장 닮았다고 생각하나요?

“<박쥐>에서 배우 송강호 씨가 맡았던 신부 역이요. 찌질한 면이 무척 저와 닮았죠.(웃음) 화장실 창문으로 몰래 들어가서 유부녀한테 ‘나와 함께 도망치자’며 궤변을 늘어놓는다든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그놈을 내가 혼내줄까요?’ 하고 강한 척한다든지.”

재밌네요.(웃음) 작품을 통해 구현하고 싶은 인간의 감정이 있다면요?

“낭만주의적인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그런 감정, 노력하고 투쟁해서 쟁취하는 식의 사랑 이야기를 좋아해요.”

언제쯤 그런 사랑 얘기를 작품으로 만들어볼 계획인가요?

“이미 만들지 않았나요? 영화 <올드보이>도 어떻게 보면 사랑에 대한 작품이죠. 영화 말미에 주인공 오대수가 자신의 기억을 지우려는 시도를 해요. 사실 내용상 사족이나 다름없어요. 그런데도 그 장면을 굳이 넣은 이유는 아마도 제 자신이 장르와 관계없이 사랑이라는 걸 표현하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오대수가 기억을 지운 게 어째서 사랑이지요?

“사랑하는 여성이 알고 보니 친딸이었다면 그 관계를 종료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오대수는 그걸 어려워하죠. 그냥 계속 사랑하고 싶어 해요. 결국 해결책은 그 여성이 자신의 친딸이라는 걸 몰랐던 상태로 돌아가는 것 말고는 없어요. 그래서 최면을 통해 기억을 지워요. 제대로 지워졌는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친딸이 오대수를 껴안고는 “사랑해요, 아저씨”라고 하자 그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죠. 바로 그 장면이 제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벌어지는 궁극의 사랑이에요.”

금기를 어긴 게 궁극의 사랑이라는 뜻인가요?

“네, 세상의 ‘윤리’라는 것을 팽개친 사랑이니까요. 물론 그게 옳다고 할 수 없고 지지할 수도 없겠죠. 인간사회의 기초를 깡그리 깨부순 ‘근친상간’이라는 금기에 도전한 사랑이니까. 그렇지만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숭고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표현이 부적합하다면 지독하게 강한 마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굉장한 멜로 감독이셨네요, 알고 보니.

“스스로 늘 주장하고 있죠.”(웃음)

극도의 ‘탐미주의’가 영상으로 태어난다면 아마도 박 감독의 작품일 것이다. 베니스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엘레나 폴라키는 <아가씨>에 대해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 아름답게 담긴 영상미를 담은 영화”라고 호평했다.

박 감독의 영화를 두고 ‘극도로 예쁜 영상들이 엽서처럼 한데 묶인 것 같다’는 평도 있어요.

“모든 프레임을 엽서처럼 만들려고 의도했던 건 아니에요. 미적(美的) 장치를 영화의 목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인물의 감정을 예리하게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보는 게 더 맞지 않을까요? 보편적인 아름다움만을 추구하고 싶지도 않고요. 추한 것에도 얼마든지 ‘예쁨’이 있을 수 있어요. 미(美)는 상대적인 거예요.”

상대적인 미가 잘 표현된 작품을 소개한다면요?

“일례로 영화 <복수는 나의 것>에서 한 인물이 달동네에서 가족과 동반자살하는 장면이 나와요. 소위 가난한 인물의 거주 공간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도 ‘못사는 사람의 집은 아마도 추할 거야’라는 식의 고정관념에 의지해 찍고 싶지 않았어요.

실제로 달동네에 가면 아름다운 풍경이 존재해요. 가난하고 비통한 자의 불편한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이 아름답게 그려질수록 관객 입장에서는 괴로움을 더 크게 느끼죠. 때로는 감독 입장에서 그런 용도로 아름다움을 사용하기도 해요.”

줄곧 ‘문제작’을 연출해왔는데 앞으로는 좀 평이한 작품을 만들어볼 의향은 없나요?

“늘 끌리는 대로 작품을 만들어 왔어요. 혹평을 피하기 위해 애쓴 적 없고요. 물론 혹평을 들으면 여전히 아프지만.(웃음) 만약 제 영화가 관객으로부터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는다면 오히려 당황스러울 것 같아요. ‘내가 뭘 잘 못 만들었나?’ 하고요.”

화가 고흐는 “어떻게 하면 수채화를 잘 그릴 수 있을까? 오늘도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말했다. 천재적인 예술가였으나 그는 늘 겸손했고 성실했다.

박 감독에게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으로 ‘앞으로의 꿈’을 물어보았다. 칸과 베니스 등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주요 부문의 수상을 휩쓴 한 유명 감독은 이렇게 답해왔다.

“다음 세대에도 기억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늘 그래왔듯이 오늘도 내일도 노력할 겁니다.”

- 김포그니 기자 pognee@joongang.co.kr

201607호 (201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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