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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대기자의 ‘지성담론’] 데카메론 ‘정의란 무엇인가’(10)·마지막 회 

갈등의 파국 막는 길 절차적 정의에 있다 

서로의 신념 충돌할 때 개인 욕구 훼손되면 가장 격한 분노
억울한 차별·배제 없는 절차, 의견 달라도 타협 가능성 높아


▎사진:이정권 기자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한 물리학자 중 한 사람인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을 ‘사회정의를 위해 분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성공하려고 하기보다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강영진 갈등해결학 박사 한양대학교 갈등문제연구소장
‘정의란 무엇인가’를 토론했던 지난 20개월간의 과정도 우리의 가치 있는 삶을 위해 분투해야 할 ‘정의’의 실체를 찾기 위해 나섰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혼란한 정국 속에서 다시 ‘공정과 정의’가 시대적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이런 때에 정의의 모습에 대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요.

하나 우리가 그 과정에서 찾은 것은 정의란 하늘의 태양처럼 분명한 실체를 가지고 밝게 빛나는 그 무엇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처럼, 불행하고 고통스러울 때 행복을 갈구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 주변에 온통 불의와 부정의, 부당함이 판을 치고 있다는 자각이 우리에게 정의를 갈구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현실에서 발견하는 것 혹은 현실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부정의·불의·부당함·불공정함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일상화돼 있을 때,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때는 마치 그것이 정상인 양 아무렇지도 않게 지속됩니다.

부정의한 현실에서 정의의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갈등’이 존재합니다. 갈등 양상이 빚어져야 비로소 사람들은 부정의를 부정의로, 부당함을 부당함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갈등은 부정의의 현실이 정의로운 합의에 이르기 위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갈등은 때로 매우 위험합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혐오와 증오, 폭력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부르니 말입니다.

게다가 갈등을 먹이 삼아 자신들의 권력을 추구하고 이권을 챙기는 불온한 세력들은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고, 갈등의 일상화를 부채질하기도 해 영원히 해결될 수 없을 것 같은 분란을 인간사회에 심어놓기도 하지요. 우리나라에선 수많은 사회적 문제와 갈등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 진영으로 쫙 갈려 상대방을 비난하고, 서로 감정적인 부분들을 건드리며, 갈등을 위한 갈등을 야기하는 현 정치권이 어느덧 그런 세력이 돼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 과연 갈등이란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갈등에 대처하는 올바른 태도에 대해 성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해 보입니다. 이제 데카메론 ‘정의란 무엇인가’의 여정을 마무리하면서 갈등에 대해 얘기하려고 합니다. 갈등 해결 전문가인 강영진 선생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인간의 욕구 혹은 필요가 갈등의 핵심 요소


▎한국 사회는 조국 전 법무 장관 거취 문제로 찬반이 갈려 첨예하게 갈등했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모튼 도이치(Morton Deutsch)는 좋은 사회를 유지하려면 세 가지 기본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공평(Equity), 평등(Equality) 그리고 욕구 혹은 필요(Needs)의 충족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공평과 평등의 문제에 대해서 주로 다루었습니다. 거시적인 사회정의의 차원에서는 결국 이 두 문제가 핵심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갈등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의 니즈(Needs), 즉 욕구 혹은 필요야말로 갈등 상황에서 정의의 본질적 내용이며 결정적 요소입니다. 인간은 매우 복잡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서로 가치에 대해 논쟁을 할 때도 실상은 인간적 욕구가 그 바탕이 되어 있고, 이로 인해 결코 타협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갈등에는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경우도 있고, 신념과 가치관이 충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타협이나 절충도 가능합니다. 후자는 좀 더 어렵고 타협이 불가능한 속성이 있지만,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 상호 이해에 도달하면 공존이 가능합니다.


▎ 낙태 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가치관의 차이가 빚어낸 가장 치열한 갈등으로 꼽힌다.
그러나 개인이나 집단이 정상적으로 존재를 유지하고 영위하기 위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인간적 욕구가 억압·좌절·침해되어 벌어지는 갈등, 즉 ‘니즈의 갈등’은 어떤 갈등보다 심각하고 타협점을 찾기 어렵습니다. 분노와 같은 감정적 문제도 바로 이런 욕구의 문제와 연결돼 있어서, 분노가 휩쓴 갈등의 현장은 어떠한 해소책도 먹히지 않게 됩니다. 실제로 요즘 우리나라 정치적 갈등상황처럼 서로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갈등을 끝낼 의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제 인간의 욕구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충족돼야 할 욕구는 생각보다 많고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생물학적 욕구, 의식주의 문제와 휴식이나 생리적 욕구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에 대한 욕구도 있습니다. 안전에 대한 욕구와 정체성 확립,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등입니다. 여기에 인간이면 일반적으로 자아실현과 공정한 대우를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소속감을 느끼고 소통하려는 욕구도 있으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욕구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존중과 존경, 이해와 배려를 받고 싶은 욕구가 있으며, 책임감과 신뢰에 대한 욕구도 있습니다.

[기본적 인간 욕구 이론](Basic Human Needs Theory)을 쓴 영국 학자 존 버튼(John Burton)은 인간(개인과 집단을 포함하는 개념)에게 반드시 충족돼야 할 욕구로 네 가지를 들었습니다. 안전(Security)·정체성(Identity)·자결(Self-Determination)·인정(Recognition)이 그것입니다. 이런 기본적 욕구가 억압되거나 침해당하면 반드시 갈등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유형의 갈등은 억압돼 있거나 침해당한 기본적 욕구가 해소돼야만 비로소 해결된다고 했습니다.

갈등의 양상을 보면 이해관계나 생각의 차이보다 인간의 욕구가 훼손됐을 때 더욱 강경하고 거친 갈등으로 비화됩니다. 예전에 태국에서 한 택시기사가 한 외국인 승객과 우리 돈으로 2000원 정도의 요금 시비를 벌이고 난 뒤 승객이 택시에서 내려 커피를 뿌리자 트렁크에 있던 칼을 꺼내와 마구 찔러 살해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 갈등에선 2000원이라는 이해관계보다 무시당한 분노가 더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관계에서 무시당하는 것, 즉 인정의 욕구가 훼손된 데 대한 대가는 이렇게 참혹한 지경에 이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 즉 내면의 욕구와 필요라는 점을 이해하면서 갈등에 대해 더 얘기해볼까 합니다.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갈등엔 정답 없어


▎부안 방폐장 부지 선정으로 인한 갈등은 절차의 정의를 무시함으로써 결국 계획 자체가 무산됐다.
갈등에 대해 흔히들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갈등은 선악,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름을 인정할 줄 알면 갈등도 많이 줄 거라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심한 갈등사회인 우리 사회는 ‘똘레랑스’, 즉 관용의 정신이 너무 부족해 갈등이 지속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부분적으론 맞는 얘깁니다. 이 말은 관용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갈등도 많다는 얘기입니다.

먼저 ‘다름’의 문제로 벌어지는 갈등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좀 더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의 개인적 욕구와 필요는 사람마다 모두 다릅니다. 사람은 개개인이 갈등의 불씨를 안고 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다름으로 인한 갈등에는 신념이나 종교·성향·문화 차이로 다투는 경우가 해당합니다. 이런 갈등에서는 본질적으로 정의 자체가 크게 이슈가 되진 않습니다. 관점과 기준이 아예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치관 갈등(Value Conflict)에서는 각자 ‘자신의 정의’(a justice of one’s own)를 주장하며 싸웁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정의를 독점할 수 없고, 양쪽을 아우를 수도 없습니다. 문화·종교·이념·취향 등 가치관들 사이엔 옳고 그름이나 선악, 우열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마다 중시하는 우선순위가 다르고 선택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 가치관 차이로 인한 갈등엔 정답이 없습니다. 해법은 하나입니다. 소극적으론 ‘관용’, 적극적으론 ‘상호존중’을 통해 평화 공존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는 일단 준공을 마치고 가동되고 있으나 건설을 둘러싼 극심한 갈등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통상적인 환경-개발 갈등도 그런 예입니다. 환경도 소중하고 개발도 필요합니다. 다만,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어느 쪽을 더 중히 여기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남녀갈등, 세대갈등도 같은 경우입니다.

가치관 갈등의 가장 극심한 사례 중 하나가 낙태갈등입니다. 매년 1월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서는 대규모 시위사태가 벌어집니다. 낙태 찬성 그룹과 반대그룹의 가두행진입니다.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심한 경우, 낙태 반대론자들이 낙태 시술 의사를 쏴 죽이고 병원에 불을 지르기도 합니다. 미국인이 테러리스트가 되어 미국 영토 안에서 미국인을 상대로 테러를 자행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셈이지요.

당사자들은 각자 나름의 정의를 주장합니다. 낙태 찬성자는 자기 신체의 주인인 여성이 선택권을 갖는 것이 당연하고 정의로운 일이라고 합니다. 낙태 반대자는 생명을 무참히 살해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기본 입장입니다.

각 그룹이 중시하는 정의는 그 자체로 온당한 것이고, 따라서 제각기 존중되도록 해야 할 겁니다. 문제는 공동체 차원에서의 정의, 즉 ‘사회정의’입니다. 낙태 찬반 그룹 간 갈등이 심각하게 벌어질 때 사회정의는 어디쯤 있는 걸까요? 이를테면, 낙태 시술을 전면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라는 압력이 거셀 때 정부와 국회는 어떻게 해야 옳을까요?

이렇듯, 제각기 정당성을 갖는 가치가 상충할 때 공동체 차원의 정의(social justice)는 두 가지 측면에서 검토될 수 있습니다.

첫째, 문제가 되는 것은 갈등 자체가 아니라 갈등의 폭력적 양상입니다. 그러므로 신념의 적대적 표출방식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즉, 낙태 반대론자들이 자행하는 ‘반낙태 폭력’이 문제인 것이지요. 낙태 반대 측은 ‘낙태’라는 더 큰 불의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폭력이라고 정당화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고, ‘정의로운 폭력’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해야 할 것은 갈등을 평화롭게 관리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런 갈등과 관련해 사회적으로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상호존중의 자세, 그리고 평화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일입니다. 예컨대, 낙태 찬반그룹은 서로 적대적 모순관계인 것 같지만, 사실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양측의 신념은 정면 상충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밑바닥에는 서로 소중히 여기는 공통분모(common ground)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 생명에 대한 존중입니다. 그런 공통분모 위에서 각자의 가치를 추구하는 일을, 따로 또 같이할 만한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 미국에서 양쪽 그룹 간 대화를 통해 그런 공동노력을 기울인 결과 낙태시술 건수와 반 낙태폭력 모두 크게 줄이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잘못 끼워진 단추는 끝까지 잘못 간다


▎“어딘가에 불의가 있으면 모든 곳의 정의가 위태롭게 된다”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은 갈등을 관리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되고 있다.
우리 사는 세상엔 그런 갈등만 있는 게 아닙니다. 다름 혹은 차이가 아니라 차별 때문에 벌어지는 갈등이 적지 않습니다. 어쩌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정의와 불의가 주로 문제시되는 것도 이런 갈등에서입니다. 이는 차이를 차별로 인식하는 옳지 않은 것이므로 틀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인종갈등·지역갈등·남녀갈등·계층갈등 등이 있겠지요. 예컨대, 미국이나 유럽의 인종갈등은 단지 피부색이 다르고 문화가 달라서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피상적인 관찰일 뿐, 본질은 아프리카계·아시아계 등에 대한 차별과 무시지요. 한국에서의 지역갈등은 단지 북부-남부나 영-호남이 서로 달라서 벌어지는 게 아닙니다. 역사적 배경과 함께 정치·경제적 차별과 배제가 주요인으로 작용합니다.

한국 사회, 특히 공공분야에서 주로 벌어져 온 갈등도 대개 이런 부류에 속합니다. 흔히 환경-개발 갈등으로 분류되는 사례들도 외견상 그런 것처럼 보일 뿐, 자세히 들여다보면 근본 원인은 따로 있습니다. 근래 벌어진 큰 갈등 사례들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부안사태를 한번 예로 들어보지요. 2003년 참여정부가 부안을 방폐장(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부지로 선정하자 군민들이 대거 반발하며 벌어진 사건입니다. 민란, 제2의 광주항쟁이라 불린 이 사태는 1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정부는 지원금만 3000억원을 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도 부안 군민들은 90% 이상이 반대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방폐장 건설은 이전 정부 때부터의 숙원사업이었습니다. 부지를 정하려고 하면 그때마다 지역주민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됐습니다. 그러다 2003년 부안군 위도 주민들이 군의회에 방폐장 유치청원서를 제출합니다. 당시 위도 주민들은 막대한 현금 보상금 약속을 믿고 방폐장 유치에 동의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러자 부안군 주민들은 ‘핵폐기장 백지화 범부안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반대 운동을 펼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군의회와 주민들이 유치신청을 번복했음에도 부안군수는 유치청원서를 정부에 냈고, 정부는 이를 확정했습니다. 이후 주민들을 극렬하게 저항했고, 정부는 홍보전을 통해 주민설득에 나섭니다. 그러나 결국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 후 정부는 주민투표 방식을 도입하고 지원금을 대폭 올렸고, 결국 경주로 낙착되었습니다.

도대체 부안은 왜 이렇게 해결 불능의 상태까지 치달았을까요. 핵심 원인은 ‘배제’였습니다. 부안 군민들에게 의견을 묻고 동의를 얻는 절차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 결정적인 문제였습니다. 방폐장 유치 신청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군수가 돌연 입장을 바꾼 것에 군민들의 배신감과 분노가 치솟으며 부안사태의 기폭제로 작용했던 것이지요. 믿었던 참여정부가 그런 군수의 유치신청서를 냉큼 수용하고 극력 강행하는 데 대한 항거였습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백혈병’ ‘기형아’ 같은 왜곡된 정보에 부안주민들이 현혹돼서 그런 것이라며 환경단체들에 섭섭한 감정을 토로하더군요. 그러나 부안 주민들을 만나보니, 그보다는 부당한 추진과정과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이었습니다. 절차적 정의가 아닌, 절차적 불의가 갈등의 핵심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제주 해군기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군사안보시설이란 점에서 방폐장과 성격이 많이 다르고 결말도 정반대지만, 추진과정이나 갈등 원인은 거의 똑같습니다.

해군 측은 애초에 서귀포시 화순항에 해군기지를 설치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민 반발에 부딪히자 2005년 8월 위미항으로 바꿔 추진합니다. 거기서도 주민들의 반대로 여의치 않자 마지막 종착지가 된 게 강정이었습니다. 2007년 강정마을 주민들이 해군기지 유치를 신청하게 됩니다.

이에 대다수 마을 주민들은 “유치에 찬성하는 일부 주민들만 모여 정한 부당한 결정”이라며 즉각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당초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한 마을총회가 정당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좀 있었는데, 최근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가 조사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을주민 1900여 명의 4.5%인 87명, 그것도 찬성 측 주민들을 모아 놓은 임시총회에서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인 투표가 아니라 참석자의 박수로 해군기지 유치 찬성을 결정한 것은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진행된 총회라 볼 수 없고, 강정마을 주민들의 의사를 충분히 모은 결정으로 보기 어렵다.”(경찰청 인권침해 진상조사위원회,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 사건 심사결과] 9쪽)

이후 강정마을 주민들은 시민단체 등과 함께 반대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기 시작했지만, 2016년 해군 측은 기지를 준공합니다. 해군기지는 자리 잡았지만, 상당수 주민들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불편한 동거’가 계속되는 등 10년 훨씬 넘게 갈등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제주 해군기지 갈등도 부안처럼 주민들 간 찬반 대립이 주요인이 아니었습니다. 안보냐, 환경이냐 하는 가치관 충돌도 핵심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근본 원인은 부안이 그랬듯이, 추진과정의 부당함이 결정적 요인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묵인하기는 부당하고 억울해서 지금껏 싸우고 있는 것이지요. 해군기지 추진과정의 인권침해 사실이 확인되자 지난 7월 민갑룡 경찰청장은 강정마을 주민들에게 직접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이보다 조금 더 복잡한 사안이 제주 2공항을 둘러싼 갈등 사례입니다. 국토부가 성산 일출봉 근처에 제2공항을 짓겠다고 발표한 것이 2015년입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만 4년이 된 지금까지도 제주도의 갈등은 점점 첨예해지고 있습니다.

제2공항 갈등은 외견상 전형적인 환경-개발 갈등의 성격을 띱니다. 가치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입니다. 거기에다 이면에는 얽히고설킨 이해관계의 대립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다름에서 오는 갈등과 이해관계에 따른 갈등의 상황입니다. 이 문제들은 타협점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서 2공항 인근 주민들 사이에는 부안과 강정에서 나타났던 것과 같은 ‘절차의 부당함’에 대한 억울함이 짙게 깔렸습니다. 공항 인근인 성산읍 온평리·난산리·수산리 등지의 주민들에게는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뉴스를 통해 평화롭던 자신들의 터전이 비행기 소음에 시달리는 마을로 변한다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이후에도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 데 대한 억울함과 분노가 쌓인 것입니다.

이런 경우 무엇이 정의일까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관련 당사자들에게, 그리고 공동체 차원에서 정의가 이뤄지도록 할 수 있을까요?

억울한 피해자 한 명이라도 있으면 불의


▎절차의 공정성 실험을 했던 탈원전 공론화위원회.
인간에겐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권리를 행사하려는 기본 욕구가 있습니다.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안은 ‘절차적 정의’를 실행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해당사자들에게 묻고,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 해결방안을 내놓고, 타협하고, 합의하는 과정입니다. 이 기간이 길 것 같지만 실제로 이런 절차적 정의를 무시하고 진행할 때에 드는 시간과 비용, 감정의 낭비까지 따지면 훨씬 효율적이고 일이 잘 진행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절차적 정의’는 생각보다 갈등의 발생을 줄여주고, 원만하게 해결해주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갈등이론에서의 절차적 정의의 원리는 이렇습니다.

먼저 사법 분야에 블랙스톤의 원칙(Blackstone’s formulation)이란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건국기의 최고 현인으로 꼽히는 벤자민 프랭클린은 더 나아가 “백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가 없게 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어딘가에 불의가 있으면 모든 곳의 정의가 위태롭게 된다.”(Injustice anywhere is a threat to justice everywhere.) 어느 사회의 99% 영역이 정의롭게 빛나고 단 1%의 구석에만 불의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면 그 사회는 결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를 갈등 상황에서의 정의의 원칙으로 전환해본다면 “누구도 부당하게 피해를 보아서는 안 된다”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정의의 제1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당한 피해’란 ①법규 또는 계약 등에 의한 사전 동의나 합의 ②합당한 근거 등의 두 가지 조건을 갖추지 않고 개인 또는 집단에 신체·정신·재산·권리상의 손해를 끼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해선 결코 합의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요? 실제로 어떤 사안을 결정하기 전부터 이에 대한 합의를 시도하는 절차 자체가 상당한 효과를 낸다는 것을 입증한 사례로 신고리5,6호기에 대한 공론화 과정을 들 수 있습니다.

공론화에 참여한 시민참여단은 2박 3일간의 숙의 과정을 거쳤고, 93.2%는 ‘최종 결과가 자신의 의견과 다르더라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이 수치는 일반 여론조사와 비교할 때 놀라운 것입니다. 국민대통합위원회(2015년)가 전국 대학생과 고등학생 각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일반 설문조사 결과, ‘다수의 의견이 내 의결과 다를 때 따르겠다’는 응답은 64.9(고등학생)~68.8(대학생)으로 나타났습니다. 법원판결의 경우엔 더 낮았습니다. 4분의 1이 조금 넘는 고등학생(27.2%)과 대학생(29.7%)이 받아들이겠다고 했고, 이와 비슷한 정도의 학생들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당시 공론화위원회의 김지형 위원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법관이었을 때는 실체적 정의를 추구했지만 이번 경험을 통해 좋은 절차 자체가 정의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소모적인 사회 갈등으로 확대된 여러 사건은 실제로 당사자들이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절차적 정의를 통해 결과적 정의를 도출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과정 자체가 차별과 배제를 극복하고, 존중과 신뢰를 받으려는 인간의 내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의 담화와 소통은 유진 하버마스의 이상적 담화의 원칙을 참조해볼 수 있겠습니다. 이 원칙의 첫째는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모든 주체는 대화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어떤 주장에 대해서든 누구나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누구든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도록 허용돼야 하고, 자신의 태도와 열망과 욕구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누구든 강압에 의해 이런 권리의 행사가 억압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공론화가 되는 것이 바로 절차적 정의입니다.

또 우리가 앞서 논했던(시리즈 7회) 원효대사의 화쟁(和諍)의 원칙은 개인 간의 절차적 정의를 실현하게 해줄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화쟁은 대화의 방법론입니다. 즉 서로 정서에 거스르지 않으면서(不違彼情), 이치도 거스르지 않는다(不違道理)는 제1원칙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자신이 반대의 견해를 가졌더라도 최소한 그 가치나 의미는 인정하고, 비난·인신공격과 날선 비판은 삼가며 의견차가 크거나 감정대립으로 흐를 경우는 공식적 회의보다 막후의 협의와 대화를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또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공존(求同存異)하기 위해서는 입장 차이가 벌어졌을 때 성급하게 결정하거나 표결하지 말고, 합의가 힘들면 곱게 지켜봐 주는 것이 낫습니다.

또한 들을 때에는 상대가 그런 주장을 하는 속뜻과 마음을 헤아리려고 하고, 이해가 안 될 때는 비판부터 하지 말고 먼저 그 뜻을 물어보아야 합니다. 또 자신이 말할 때는 가급적 자신이 그런 얘기를 하는 속뜻과 마음을 상대방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각자 다른 욕구들의 분출로 폭발하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절차적 정의란 결국 다름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상대를 존중하는 대화의 방식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 [데카메론 ‘정의란 무엇인가’의 시리즈는 10회로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일보 온라인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사회적·경제적 소외와 불평등 문제를 직설화법으로 다루는 칼럼으로 유명하다.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이며, 해박한 중국 역사와 고전 지식을 바탕으로 [여류(余流)삼국지(메디치미디어)][적우(敵友):한비자와 진시황(나남)]등 중국 역사소설을 썼다. 서울대에서 경제교육학 전공으로 교육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1912호 (201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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