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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봉 전문기자의 ‘책과 사람’(7)] 병자호란사 다시 쓰는 구범진 교수 

천연두 겁나 쫓기듯 조기 철군, 청나라 전쟁 기록엔 없다 

지난해 펴낸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코로나19 사태로 다시 관심
“의로운 전쟁이라 했는데 불길한 전염병 유행, 쓰지 않음으로써 역사 왜곡”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만주어 문헌 등 청나라 사료까지 폭넓게 살펴 병자호란 전쟁사 기록인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을 썼다. 잘못 알려져 있던 병자호란 지식을 대거 바로잡았다.
코로나의 기세가 꺾일 줄을 모른다. 중국에서부터 확산돼 전 세계가 신음 중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말이다. 대략 400년 전에도 전염병이 이 땅의 명운에 큰 영향을 끼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역시 중국이 관련돼 있었다. 5000년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한순간으로 기록되는 1636년 병자호란이 바로 그 사건이다. 이 전쟁이 전염병의 영향권에 있었다. 조선 땅을 침략한 청태종 홍타이지가 당시 조선 땅에서 유행하던 천연두에 겁을 먹고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자마자 급거 귀국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청의 사관(史官)들은 역사책에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적어도 병자호란 기간을 다룬 대목에서는 누락했다. 청사(淸史)에서 빠진 은밀한 일을 그동안 우리가 알 길이 없었다.

청나라든 현대 중국이든 어쨌든 중국. 전염병. 은폐.

이 세 가지 조합은 400년 역사를 뛰어넘어 묘한 기시감을 자아낸다. 역사는 역시 반복되는 것인가.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 최고 권력자는 전염병의 공포에 질려 급거 귀국하고도 역사책에는 애써 그런 사실을 숨긴다. 21세기 중국의 ‘현대판 황제’ 시진핑은 코로나19 발생 사실을 뭉개고 있다가 화를 키웠다.

구범진(51)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를 만난 건 그래서다. 구 교수는 홍타이지 조기 귀국설의 저작권자다. 지난해 초 펴낸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까치)에서 그런 주장을 폈다. 전쟁의 승자가 조금 서둘러 귀국했다고 시쳇말로 대세에 지장 있는 건 아니다. 어차피 우리는 전쟁에서 졌고, 굴욕을 감내해야 했고, 역사 기록에 오점이 남았다. 그런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태를 엄밀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우리가 우리의 역사의식을 믿고 의지하는 역사 연구자들이 거칠게 얘기하면 사료를 건성건성 읽었다고 볼 수 있다. 구 교수의 주장이 옳다는 전제하에 그렇다는 얘기다. 책을 읽고 구 교수를 만나 얘기를 들어보니 홍타이지의 조기 귀국 대목 말고도 우리가 알고 있는 병자호란 서사는 미심쩍어 보이는 곳이 적지 않은 것 같았다.

병자호란 청나라 병력 5만 명 넘지 않았을 것


가령 가장 기초적인 사실이라고 해야 할 청나라의 정확한 참전 병력 숫자조차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조선과 명나라의 기록에 따라 그저 “수십만”에서 “30만”까지 편차가 크다. 30만은 그래도 믿을 만한 기록인 [인조실록]의 숫자라고 한다. 하지만 가장 많이 받아들여지는 통설은 12만8000명이다. 병력을 동원한 청나라 사료에도 정확한 숫자가 나와 있지 않다고 한다.

구 교수는 1644년 청나라가 만리장성 동쪽 끝 산해관(山海關)을 돌파해 중원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전까지, 그러니까 그보다 8년 전인 1636년 병자호란 때의 청나라는 12만8000명이라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을 만큼 큰 나라가 아니었다고 본다. 지금까지 국내 연구자들이 잘 들여다보지 않았던 [청태종실록] 등 중국 측 자료를 면밀하게 분석한 결과다. 정규 병력 3만4000명, 만주어로 ‘쿠투러(kutule)’라고 불렀던 허드렛일하는 하인 1만1000명을 합쳐도 4만5000명, 있을 수 있는 누락이나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5만 명을 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12만8000이라는 숫자는 어디서 나왔을까.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책임편찬위원을 지낸 유재성씨가 1986년에 펴낸 [병자호란사]에서 제시한 숫자다. 그런데 훗날 유재성씨는 이 숫자가 아무런 사료 근거 없이 자신이 임의로 집어넣은 것이었다고 밝혔다고 한다. 그런데도 12만8000명이 여전히 통설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연구자들 사이에서 그렇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구 교수의 발걸음은 단순히 의심스러운 사실관계를 바로잡으려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보폭을 최대한 벌려 전선을 넓힌다. 그동안 우리의 병자호란 서사가 참담한 패전의 책임자들에 대해 역사적 단죄를 가하거나, 중국의 굴기(崛起)로 국제질서가 요동치는 21세기 상황에 도움이 되는 지혜나 교훈을 얻으려는 차원에서 명·청 교체기에 발생했던 전쟁(병자호란)의 의의를 밝히는 데에만 너무 매몰됐던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다.

그러다 보니 전쟁은 싸우는 양측의 역사 사료를 두루 살펴야 그 실체가 제대로 드러나는 연구 대상임에도 일방적으로 우리 역사만, 그것도 사료 자체의 신뢰성에 별다른 의심의 시선 없이 들여다본 결과 상식적인 점검의 압력도 견디지 못하는 부실한 전쟁 그림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그 결과물이 12만8000일 것이고, 그런 사정이 있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홍타이지의 조기 귀국일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도원수 김자점의 행적에 대한 구 교수 책에서의 새로운 해석은 단순히 잘못된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 같다. 그동안 김자점은 패전을 자초한 위정자들을 상징하는 존재처럼 여겨져왔다. 그는 평안도 의주를 뚫고 조선 땅에 들어온 청군이 서울에 이르는 길목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평양 남쪽 정방산성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병자년 12월 6일 이후 전방에서 청의 침공을 알리는 봉화가 두 차례나 올랐으나 이를 무시했다고 비판받는다. 청의 기습적인 초고속 진군에 밀려 다급해진 인조가 자신이 갇힌 남한산성으로 구하러 오라는 근왕(勤王) 명령을 내렸음에도 무슨 이유에선지 바로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꾸물거린 것으로 돼 있다. 구 교수는 문제의 병자년 12월 6일 경고 봉화는 타오를 수 없었다고 고증한다. [조선왕조실록]보다 정확한 사료로 평가받는 [승정원일기], 지금까지 병자호란 연구에서 잘 활용되지 않던 만주어 자료인 [내국사원만문당안역주(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같은 자료를 활용해서다. 청의 최선봉대가 8일에야 압록강을 건넜기 때문에 6일 청군의 기미를 발견하고는 봉화를 올리는 일은 성립할 수 없다는 논리다. 김자점의 봉화 무시 주장은 사찬(私撰) 문헌인 [연려실기술], 그러니까 정부 문서에 비해 신뢰도가 떨어지는 개인 문서의 기록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승정원일기]의 내용을 믿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논리다.

왕 지킬 병력, 청나라의 신속·시차 진격에 발 묶여


▎구범진 교수는 그동안 우리의 병자호란 서사가 잘못한 사람을 단죄하는 도덕적 환원론으로 흐른 결과 정작 중요한 전쟁의 실상을 놓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 사진:임안나
김자겸이 근왕명령에 신속하게 응하지 않았던 것도 태만 때문이 아니었다고 본다. 역시 주로 만주어 기록을 활용해서다. 지금까지 알려졌던 것과 달리 청군이 하나의 진군로만 선택한 게 아니라 동·서 두 개 진군로로, 특히 서쪽 진군로의 경우 홍타이지 자신이 속한 부대를 포함해 여섯 개 부대가 여러 날에 걸쳐 시차를 두고 밀고 내려왔기 때문에 산성에 갇힌 김자점이 근왕명령을 받자마자 신속하게 출동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그렇더라도 왕조 국가의 신하 된 자가 죽기를 각오하고 군주를 구하러 군사를 움직였어야 하는 것 아닌가. 구 교수에 따르면 청나라 군대는 상상 이상으로 강했던 것 같다. “여진 군사가 만약 1만 명을 채운다면 (아무도) 대적할 수 없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고 한다. (126쪽)

그렇다면 이런 해석도 가능해진다. 조선의 전쟁 대비는 지금까지 병자호란 서사에 나타났던 것과 달리 그렇게 허술하지 않았다. 조선의 왕과 대신들은 당시 최강의 군대에 맞서 나름 자신들의 할 일을 했다. 오히려 이렇게 봐야 한다는 게 구 교수의 입장이다. 사료를 면밀히 읽으면 병자호란에 관한한 이제까지의 자학·자조적인 서사에서 벗어나 얼마든지 병자호란의 역사를 다시 쓸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애국심이나 국가주의를 고취하는 방향으로 나가자는 건 아니다. 청나라 역사든 우리 역사든 역사적 진실에 보다 가깝게 접근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왜곡과 오류를 최대한 잡아내야 한다는 게 구 교수의 생각이다. 물론 홍타이지의 조기 귀국 은폐 기도도 그런 역사 왜곡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홍타이지는 왜 굳이 천연두로 인한 자신의 조기 귀국 사실을 숨기려 했던 것일까. 절대 권력의 21세기 후계자처럼 전염병에 밀리는 모습이 국가 위신을 손상시키는 일이라고 여겼던 걸까. 당시의 코로나, 천연두는 청나라 사람들에게 어떤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었을까. 코로나 기승의 여파로 온라인 개학을 맞은 캠퍼스는 어딘지 썰렁해 보였다. 그런 궁금증들을 품고 4월 8일 구 교수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병자호란 당시 천연두가 얼마나 심각한 질병이었는지 궁금하다. 혹시 조선 사람들에 비해 청나라 사람들이 유독 전염병에 취약했던 건 아닌가?

“천연두를 우리나라와 중국 대륙 가운데 어디서 먼저 경험했냐 하면 당연히 중국이다. 유라시아 정주지역에서 발견되는 풍토병이다. 한국에는 삼국시대에 이미 들어왔다. 그런데 아시아 동쪽 지역, 만리장성 이북의 초원지대 유목민들이나 수렵·어로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회에서 천연두를 앓았다는 증거는 16세기가 돼서야 나타난다. 정주사회와 접촉이 많아지면서 바이러스에 노출되기 시작한 거다. 특히 어른이 돼서 천연두에 노출될 경우 어려서 걸리는 것보다 치사율이 상당히 높았다고 한다. 청나라를 세운 사람들이 그 지역 출신이다. 천연두는 18세기까지 청나라 역사의 중요한 순간순간에 나타난다. 가령 홍타이지의 아들이었던 청의 3대 황제 순치제(順治帝)는 천연두에 걸리지 않으려고 피두(避痘)를 무척 자주 했지만 결국 천연두에 걸려 죽는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인들은 천연두를 ‘마마’라고 부르며 극도로 두려워했다. 마마의 발생을 신의 뜻으로 여겼다.”

책에 써놓은 것처럼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병자호란은 의로운 전쟁이었는데 마마라는 불길한 신의 뜻을 조선 땅에서 만나자 이를 은폐하려 했던 건가?

“홍타이지는 조선 정벌에 나선 청나라 군대가 하늘의 은혜를 입고 있다고 표현했다. 성스러운 전쟁, 정의로운 전쟁, 신이 도와야 하는 전쟁이었다. 그런데 그런 전쟁 기간 중에 서울에 천연두가 돌아 전쟁을 빨리 끝내고 돌아와야 하는 상황에 처했던 거다. 실록을 편찬할 때 꺼림칙한 일은 쓰지 않는다. 그걸 ‘회호(回護)한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쓰지 않음으로써 역사를 왜곡하는 게 된다. 근대의 역사 교과서가 역사의 진실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가기보다는 대개 정치적으로 쓰이는 것처럼 국가 내러티브를 만드는 역사 편찬작업도 전체 내러티브의 입맛에 맞지 않는 사실들은 빼버리게 된다. [청태종실록]도 마찬가지다. 조기 귀국했어도 전쟁에서 이겼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 않나. 굳이 마마 얘기를 쓰지 않은 거다.”

논문 완성한 다음 결정적인 구절 뒤늦게 발견


▎구범진 교수는 앞으로 국가 이데올로기에 의해 어떻게 역사가 왜곡되는지를 청나라 역사를 중심으로 살필 계획이라고 했다. / 사진:임안나
청 태종이 마마가 두려워 전쟁에 이기고도 귀국을 서둘렀다는 점을 어떻게 찾아보게 됐나. 그 부분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나 같은 연구자들 사이에 천연두가 청나라 역사에 지대한 영향 끼쳤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천연두를 앓아 면역이 생긴 이들을 숙신(熟身), 그렇지 않은 이들을 생신(生身)이라고 구분하는 어휘가 생길 정도로 천연두는 청나라 사람들에게 민감한 문제였다. 조선이 명나라처럼 천연두가 유행하는 땅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홍타이지는 생신이었다. 그런데도 병자호란 때 조선 땅에 직접 들어왔다. 뭔가 이상해 사료를 살피다 정축년 정월 16일과 17일 사이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던 청의 태도가 하루아침에 뒤바뀌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됐다. 이건 뭔가 있는 것 같다고 여겨 천연두 관련 언급들을 뒤지다 보니 정작 전쟁 기간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고 병자호란이 끝난 여섯 달 뒤인 정축년 7월 [청태종실록] 기록에서 홍타이지가 ‘피두선귀(避痘先歸)’, 마마를 피해 먼저 귀국했다고 말하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유레카 모멘트처럼 기쁜 경험이었겠다.

“무척 짜릿했다. 이번 책은 2016년 발표한 논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논문을 다 써놓고 주변에 읽혔을 때만 해도 피두선귀 구절은 찾지 못한 상태였다.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한 것 같다는 반응이 있어 사료를 다시 뒤지다 피두선귀 구절을 발견했다.”

석연찮은 청의 전쟁 태도 변화나 홍타이지의 급한 귀국에 그동안 연구자들이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이유가 있을까?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런 게 있으려니 생각을 안했던 것 같다. 그동안 병자호란 서사는 가령 강화도가 어떻게 점령됐는가에 대한 관심보다 강화도를 지키던 병력이 술 마시고 놀다가 전쟁에 패했다는, 모든 걸 도덕적인 결함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그렇게 책임 추궁과 단죄만 하려 드니까 정작 전쟁의 진상은 못 보게 된다. 그런 역사가 정사가 돼버렸다. 그걸 바꾸려면 사람들의 생각이 사실을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나는 좀 회의적이다. 이 책 한 권으로 바뀔 것 같지 않다. 역사 연구는 천문학 연구와 비슷하다고 보는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패러다임 시프트 같은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신준봉 문화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 1993년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신문사에서 10년 가까이 문학담당 기자로 일하며 본격적으로 문학과 인연을 맺었다. 상식의 눈에는 괴짜인문인들, 그들이 생산한 영롱한 것들을 초롱초롱한 독자들에게 중개하는 일, 제도로서 문학의 생로병사에 관심이 많다.

202005호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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