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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58)] 애민·실사구시의 유학자 간재(艮齋) 이덕홍 

귀갑선 설계도 그린 ‘퇴계의 그림자’ 

퇴계가 이름·자·호 지어준 유일한 제자, 12년간 스승 곁에서 강의·언행 기록
병학·산학·역법 등 실용 학문에 탁월, 임진왜란 때 적 조총 제압 전략 제시도


▎간재의 후손인 이재곤(오른쪽)· 이재탁 씨가 오계서원 강당 건물 명륜당 앞에 섰다. / 사진:송의호
퇴계 이황은 300명이 넘는 뛰어난 제자를 길러냈다. 많은 문인 중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가장 오래 받은 이는 누구일까? 도산에 가까이 살았던 월천 조목과 간재 이덕홍이었다. 특히 이덕홍은 퇴계의 장손인 이안도와 아침·저녁으로 만난 동갑내기였다. 간재는 선생의 학문이 최전성기에 이른 마지막 12년을 지근거리에서 오롯이 함께했다. 간재가 월천 조목,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과 더불어 퇴계의 고제(高第)로 불리는 까닭이다. 11월 15일 도산서원에서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이 지냈던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를 찾아갔다. 간재 종택은 도산온천을 지나 서북쪽으로 18㎞쯤 떨어진 태조봉 아래 외내마을에 있었다. 460년 전 간재가 도산서당을 오갔을 길이다.

간재가 선생을 찾으며 공 들인 것은 학문 도야였다. 1561년 도산서당이 완공되자 간재는 선생을 모시고 암서헌·탁영담·농운정사 등지에서 공부했다. 그는 스승의 시를 차운하고 때로는 선생이 머무른 청량산·월란암·용수사 등지에서 책을 읽었다. 또 스승 곁을 떠나 강학할 때는 편지로 가르침을 받았다. 간재는 21세에 공부의 선후를 묻는 편지를 시작으로 마음공부, 사단칠정, [가례] [대학] [중용] [심경] 등의 궁금한 내용이나 어려운 대목을 질문했다. 퇴계는 편지를 받으면 그때마다 제자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간재는 성리학을 깊이 파고들었지만 형이상학에 매몰되지 않았다. 그는 성리학과 함께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병략(兵略)과 산학(算學), 역법(曆法) 등도 천착했다.

간재 종택으로 들어섰다. 본채 처마에 ‘선오당’이라는 당호가 걸려 있다. 누마루 아래 축대 층계에 크고 작은 돌 거북 대여섯 개가 보였다. 조금 뒤 바쁜 일정으로 자리를 비운 간재 종손 대신 이재곤 후손이 도착했다. 초등학교 교장으로 최근 정년을 맞이한 그는 간재 선조를 20여 년 연구해 왔다. 이 전 교장은 간재가 퇴계 선생에게 나아간 과정과 학문 세계를 먼저 소개했다. 이야기는 무르익어 임진왜란 시기 간재의 귀갑선(龜甲船)으로 흘러갔다. 그는 귀갑선이 언급된 [간재집(艮齋集)] 등을 준비했다. 문집에 나오는 ‘상왕세자서(上王世子書)’와 ‘상행재소(上行在所) 병도(幷圖)’의 내용은 놀랍다.

“귀갑선은 적을 무너뜨리는 좋은 계책입니다. 그 배는 등에 창검을 붙이고, 머리 부분에 쇠뇌를 숨겨 설치하며, 허리에는 판옥(板屋)을 두고 그 가운데 사수(射手)가 들어가며, 옆으로는 사격하는 구멍을 내고 아래로는 배의 내부로 통하게 합니다. 가운데는 총통(銃筒)과 큰 도끼를 두고 때려 부수기도 하고 철환(鐵丸)을 쏘기도 하며 활을 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합니다. 부딪치는 자는 부서지고 침범하는 자는 무너지니 적선이 비록 많아도 대응책을 쓸 수 없을 것입니다.”

“귀갑선, 세상에 없는 효과 거둘 것”


1592년(선조 25) 11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우부솔(右副率) 간재가 임진왜란 중 왕세자 광해군을 배알하고 올린 글이다. 누가 봐도 당시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떠오를 것이다. 간재는 이어 1593년 1월에는 임진왜란을 피해 의주 행재소에 머물던 선조 임금에게 소(疏)를 올린다. 이번에도 귀갑선을 언급한다. “그러므로 이 목책과 귀갑선을 마련하면 공력(功力)은 적게 들이고 효과는 매우 클 것입니다. 각 관청이 한 달의 공력만 들이게 한다면 아마도 세상에 없는 효과를 거둘 것입니다.” 간재는 임금에게 바다에서 적을 막을 수 있는 유용한 병기로 귀갑선 건조를 건의하고 ‘상행재소’ 끝에 도면인 ‘귀갑선도’를 첨부했다.

그러면 충무공의 거북선은 여기서 유래한 것일까. 이는 학계에서 아직 결론 나지 않았다. 다만 간재가 왕세자에게 글을 올린 시점은 충무공이 해전에서 거북선을 투입한 직후다. 거북선은 1592년 5월 사천 해전에 처음 투입된 뒤 선봉 돌격선으로 조선 수군 승리에 크게 기여한다. 간재도 이 글에서 “근래 듣건대, 호남의 여러 장수가 귀갑선을 써서 적선을 크게 파괴했다 하니…”라며 효과가 있었음을 상기한다.

임진왜란을 만나 비록 간략하지만 거북선의 원형 설계도로 추측되는 귀갑선도를 그렸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당대 교유 관계 때문에 더욱 그렇다. 간재와 류성룡은 퇴계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데다 한 살 차이로 가까운 사이였다. 간재가 제작한 귀갑선도는 류성룡에게 건네져 충무공에게 보내졌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는 퇴계의 문인으로 충무공의 형인 이요신을 통해 전해졌다는 설이다. 하지만 아직 귀갑선도와 거북선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사료는 부족한 실정이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이재곤 전 교장은 “큰 한지에 그린 더 자세한 귀갑선도가 근래까지 종택에 내려와 원본을 본 사람이 있다”며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라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해군사관학교 복원 거북선 건조에 참여했던 정진술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선임연구원은 “거북선의 실물자료는 아쉽게도 전하지 않는다”며 “간재의 귀갑선은 이순신의 거북선과 동일한 형상과 규격은 아니지만 상통한다”고 분석한다. 거북선[龜船]은 역사적으로 [태종실록]에 처음 나타난다. 이후 임진왜란까지 더 이상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다. 정 선임연구원은 “간재의 귀갑선은 귀선 등 특수 군선의 전통을 이어받아 조선 후기 우리 수군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한 거북선에 그 정신을 함께 담았다고 봐야 할 것”이라 덧붙였다.

귀갑선뿐만 아니다. 간재는 군사 전략도 현실적인 대책을 제시한다. 그는 ‘상행재소’에서 적을 제압할 기구로 철타와 활을 강조한다. 적이 조총에 화약을 넣고 불을 붙여 발사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므로 아군이 철타를 들고 돌격하면 적은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적과 거리를 두고 우리가 활을 쏘면 적의 장기인 칼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장수들이 적을 격파할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도망 다닐 때 간재는 이렇게 명료한 병법을 건의한 것이다.

아군이 전쟁에서 펼쳐야 할 진법(陣法)도 제안한다. ‘일본군은 대군을 숨겨놓고 약한 듯이 보여 우리로 하여금 상대를 가볍게 여겨 함부로 움직이게 한 뒤 아군의 후미를 친다는 등 상대의 전술을 분석한 대응 진법을 제시한다. 귀갑거(龜甲車, 거북 모양에 철갑을 입힌 돌격용 전차로 추정) 5~6대를 전면에 배치한 뒤 철타와 능장을 가진 군사로 횡열진을 이루고 사수로 학익진(鶴翼陣)을 형성한다’ 등이다. 그 말미엔 다시 진계도(陣械圖)를 첨부했다. 간재는 또 “왜적을 막는 근본 방략은 적을 육지에 상륙하지 못 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군사적 안목은 가히 병법가 수준이다.

퇴계의 뒷간 가는 시간까지 기록


▎[간재집]에 실린 ‘귀갑선도’(왼쪽 아래)와 ‘침수진목전도(沈水眞木箭圖)’(왼쪽 위). 오른쪽은 ‘진계도(陣械圖)’. / 사진:한국국학진흥원
간재는 임란을 당해 이렇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한 것은 물론 역법과 산학에도 족적을 남겼다. 그는 일찍이 퇴계의 명으로 천상(天象)을 관찰하는 선기옥형(璇璣玉衡)과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기도 했다. 1560년쯤이다. 간재는 그만큼 역법과 천문 지식에도 밝았다. 그가 선대 유학자의 주해에 따라 만든 선기옥형은 일부가 남아 있고, 혼천의는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전한다. 간재는 이어 아전의 농간을 방지하는 효율적인 ‘산법도(算法圖)’도 작성했다. 고제 간재의 이러한 학문 자세를 보면 퇴계학은 결코 사변적이거나 관념적인데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간재에 대한 퇴계의 관심은 처음부터 각별했다. ‘간재연보’에 따르면 그는 18세에 청량산에 머물며 처음 금난수로부터 고문을 배운다. 이어 금난수의 주선으로 간재는 19세(1559년)에 비로소 퇴계 문하로 나아갔다. 이때 퇴계는 간재를 한 번 보고는 ‘덕홍(德弘)’이라는 이름과 ‘굉중(宏仲)’이라는 자(字)를 지어준다. 이어 스승은 이름을 불러 간재를 앞으로 나오게 한다. “그대는 이름의 뜻을 아는가?” 간재가 모르겠다고 하자 스승이 설명한다. “덕(德)자는 행(行)자, 직(直)자, 심(心)자로 이루어진 글자니, 곧 곧은 마음으로 행하라는 뜻이네.” 그리고 8년이 지나 퇴계는 이덕홍이 서재를 짓고 붙인 ‘간재(艮齋)’라는 명칭을 듣고 “간(艮)자가 그친다는 뜻이니 매우 좋다”며 호로 추천한다. 간재는 이렇게 퇴계 문하 309명 제자 중 유일하게 스승으로부터 이름과 자, 그리고 호까지 받게 된다.

간재는 스승의 그런 관심에 보답하듯 선생의 강의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록으로 남겼다. 기록하면서 묻고 답을 들으면 적었다. 그 강의록이 간재가 남긴 방대한 주석서다. 강의록과 함께 간재는 스승의 평소 언행과 동정도 자세히 남겼다. 그 기록물이 1571년 완성한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이다. 제자가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선생의 언행이다.

시묘로 몸을 훼상해 세상을 떠나다


▎경북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 간재종택. 뒷산이 태조봉이다. / 사진:송의호
“선생께서는 글자를 쓰거나 시를 지을 때 한결같이 회암(주자)이 정해 놓은 규칙을 따랐으므로, 고상하고 빼어남이 옛날에 가까워 세상 사람들이 미칠 수 없었다. 우연히 한 글자를 쓰더라도 그 획을 바르게 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글자체가 반듯하고 단정하였다.” “뒷간은 반드시 사람들과 접하지 않는 새벽이나 저녁때 갔다.” 스승의 뒷간 이용 시간까지 들어 있다. 퇴계 언행은 학봉 김성일과 간재가 가장 많은 양을 남겼다. 선생의 언행으로 오늘날 회자되는 많은 이야기가 여기서 나왔다. [간재연보]에는 1570년 12월 7일 “퇴계 선생이 서적을 맡으라고 명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이다. 간재는 즉시 명을 받고 물러나 김부륜과 점을 쳐서 겸괘(謙卦)의 ‘군자유종(君子有終)’을 얻게 된다. 이 점사(占辭)는 올해 ‘선생 서세 450주년 추모행사’의 타이틀이 됐다.

퇴계 사후 간재는 동문과 선생을 추모하는 상덕사(尙德祠) 건립을 의논한다. 1573년에는 이산서원에 퇴계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다. 스승을 잃은 제자는 이후 관직으로 진출한다. 간재는 본래 과거 급제에 뜻을 두었으나 퇴계 문하로 나아간 이후 성리학과 경학에 몰두했다. 1578년(선조 11) 간재는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9명을 천거할 때 집경전(集慶殿) 참봉이란 관직에 처음 제수된다. 당시 추천서에 정구·김장생 등과 함께 이름이 올랐다. 국역 [간재집]의 해제를 쓴 경북대 정병호 교수는 “(자신이) 현인(賢人)으로 천거되자 성리학적 이상이나 이념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 관직에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56세로 삶을 마감할 때까지 종묘 직장, 익위사 우부솔, 영춘현감 등을 이어갔다. 간재 묘비에는 “갑오년(1594년) 겨울 모친상을 당해 여막을 지어 시묘하다가 몸을 훼상하여 돌아가셨다”고 새겨져 있다.

간재가 모셔진 종택 불천위 사당에 들렀다. 지금도 불천위 제사 때는 후손 등 30여 명이 모인다고 했다. 종택을 나와 5분 거리 토일천을 건너 오계서원을 찾았다. 1570년 간재는 토일천을 바라보는 산기슭에 성찰과 휴식의 공간인 오계정사를 지었다. 이후 간재의 아들 선오당 이시는 서당으로 삼아 후학을 기른다. 오계서당은 당시 장흥효의 안동 경당과 쌍벽을 이룰 만큼 명성을 얻었다. 이시의 동생 셋은 나란히 대과에 급제한다. 집안의 전성기다.

그러나 영광은 잠깐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이시의 셋째아우(이강)가 인목대비 폐모론에 휘말려 형(刑)을 받는다. 선오당은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해 저술 등을 불태웠다. 엎친데 덮쳐 오계서당은 큰비에 쓸려 내려갔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간재가 남긴 유물은 서애나 학봉에 크게 못 미친다. 편지만 해도 [퇴계집]에는 간재가 쓴 편지가 50여 편 나오지만 [간재집]에는 선생이 보낸 편지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다. 세월이 흘러 1711년 지금의 자리에 간재를 추모하는 오계서원이 들어선 것이다. 서원은 규모는 작지만 앞으로 흐르는 하천과 산세 등이 아늑했다. 이재곤 전 교장은 “서원 경관이 도산서원을 닮아 ‘소도산’으로 불린다”고 설명했다. 서원 주변에는 퇴계 선생이 이름을 허락한 군자당(君子塘)·활발대(活潑臺) 등이 있다. 낙엽이 수북한 길을 따라 활발대로 오르니 맑은 토일천이 내려다보였다.

도산서원 경관을 닮은 오계서원


▎간재가 퇴계 선생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언행을 기록한 [계산기선록]의 일부. / 사진:한국국학진흥원
오계서원을 나와 묘소를 찾았다. 서원에서 동쪽으로 토일천을 따라 6㎞쯤 떨어진 어란 뒷산이다. 재실 영모암(永慕菴)을 지나 이 전 교장과 함께 가파른 파리봉 자락을 올랐다. 묘비는 마모된 옛 돌과 새 돌 등 두 개가 서 있었다. 예를 표했다. 대사간 이당규는 비문에 “류겸암(류운룡)도 편지에서 ‘스승(퇴계)을 잃은 후 의문이 나고 알지 못하는 게 있어도 문의해 바로잡을 곳이 없으니 청하건대 역학에 관해 물어보고자 합니다’라 적었다. 이는 (그가) 당시 동료들 사이에서 얼마나 인정받았는지 알 수 있다”고 썼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위는 덕에 어울리지 않았고 수명도 인색했다”고 덧붙였다.

행장(行狀)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 우암 역시 “공(간재)이 책을 읽음에 늘 정밀하게 하여 비록 소주(小註)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어도 자세히 분석했으며, 조금이라도 의심나거나 모르는 점이 있으면 선생(퇴계)에게 나아가 바루어 터득한 뒤라야 그만두었다”고 그의 학문을 높이 기렸다. 간재 이덕홍은 치밀한 학문은 물론 가장 가까이서 퇴계 선생의 언행을 살피고 자세히 기록해 후세에 본받을 표준을 남겼다. 그는 또 성리학은 물론 참혹한 임진왜란을 맞아서는 왜적을 바다에서 막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귀갑선을 고안하는 등 병략에도 정통했다. 그의 애민과 실사구시 정신은 조예가 깊었던 성리학과 함께 다시 조명돼야 할 화두일 것이다.

[박스기사] 삶의 자세를 묻고 답한 간재와 퇴계 - 10년간 편지 왕래 통해 얻은 진리 <간재집>에 담아

간재 이덕홍은 공부하다 의문이 생기면 퇴계 선생에게 편지로도 질문했다. [간재집]에는 ‘상퇴계선생’이라는 제목으로 1560년부터 1570년까지 질문과 선생의 답변 11편이 실려 있다. 질문은 공부 자세부터 삶의 근본 의문까지 들어 있다.

간재 질문: 소자가 비록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나태한 생각이 쉽게 생겨 하다 말다 하는 병통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퇴계 답변: [중용]의 ‘널리 배우라[博學之]’부터 ‘남이 열 번 하면 자기는 천 번 노력하라[人十己千]’는 게 바로 기질을 변화시키는 방법이다. 그래서 “이 방법대로 행하기만 하면 어리석은 사람도 밝아지고, 아무리 유약한 사람도 반드시 강해질 것”이라 했으니 게으른 생각이 생겨 하다 말다 하는 병통은 다른 사람이 어찌 그사이에 관여할 수 있겠는가.

질문: ‘사람의 혈기에 허약하고 충실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변: 기(氣)가 허약하다는 것은 그대와 나 같은 이가 해당하네. 혈기가 허약하기 때문에 심기(心氣)도 튼실하지 못해 질병이 쉽게 생기네. 혹 각고의 노력으로 공부하면 심신(心神)이 소진되는 것이 남보다 심하니 반드시 경계해야 하네. 항상 기욕(嗜欲, 좋아하고 즐기려는 욕심)을 절제하고 정기를 보존하며 심력을 지나치게 쓰지 말고 스스로 보완하고 수양해야 하네.

질문: 사람이 으슥한 방구석에 있으면서 어떻게 푸른 하늘을 대할 수 있습니까?

답변: 땅 위가 모두 하늘이니, 그대와 함께 노니는 곳이 어디 간들 하늘이 아니겠는가. 하늘이 바로 이(理)니 진실로 이치 없는 사물이 없고 그렇지 않은 때가 없으니 상제(上帝)를 잠시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네.

질문: ‘학문(學問)’ 두 글자에 관해 묻습니다.

답변: 자기에게 배우고 남에게 묻는 것이네.

질문: 고수(瞽瞍) 같은 아비에게 순(舜)과 같은 아들이 있고, 요(堯)와 순(舜) 같은 아비에게 주(朱)와 균(均) 같은 아들이 있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고수는 순을 미워하고 어리석었으며, 주와 균은 놀기만 좋아함)

답변: 부모의 기(氣)는 바로 천지의 기다. 교감하는 연월일시에 청순한 기운이 있으면 뚫고 와서 사람이 되네. 부모의 선하고 악한 기는 또한 어찌할 수 없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101호 (202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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