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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근·현대 건국운동사 - 근·현대 건국 담론(4)] 손병희의 진보회(進步會), 한국 첫 대중 진보조직 탄생 

무능한 황제 대신 민(民)이 나서 국권 수호 

회원 12만 상투 자르고 검은 옷 입는 등 급진 개화 추진
러일전쟁 중 일본 돕는 대신 식민지화 못하도록 막아


▎구한말 프랑스 일간지에 실렸던 만평. 조선 지도를 밟고 있는 일본이 러시아와 링에서 싸우고 있는 가운데 천막 밖의 청나라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1903(광무 7)년 들어 러시아와 일본 간 전운이 짙어지자 고종황제는 ‘중립화’를 추진했다. ‘중립화’를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고자 고종황제는 1903년 8월 현상건을 유럽과 러시아에 밀사로 파견했다. 파리·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을 거친 현상건은 마지막으로 요동반도 여순항에서 러시아 극동총독 알렉세예프와 회견했다. 그 회견에서 알렉세예프는 유사시 2000 병력을 한양에 파견해 고종황제를 보호해주겠다고 밀약했다.

현상건은 1904(광무 8)년 1월 11일 귀국했다. 그즈음 러시아와 일본은 일촉즉발 상황이었다. 전쟁은 시간문제일 뿐 조만간 터질 것이 분명했고 고종황제는 입장을 밝혀야만 했다. 1904년 1월 21일, 고종황제는 현상건에게 명령해 러일전쟁 시 대한제국은 ‘엄정중립’ 입장임을 각국에 알리게 했다. 즉 고종황제는 러일전쟁에 대비해 비공식적으로는 ‘러시아 병력 2000 파병 밀약’을 준비하고 공식적으로는 ‘엄정중립 선언’을 준비했다.

이 같은 준비를 통해 고종황제가 러일전쟁의 승패를 어떻게 예상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우선 ‘엄정중립’이라는 공식 입장에서 본다면 무승부 내지는 장기전을 예상했다고 이해된다. 만약 어느 한쪽의 일방적 낙승을 예상했다면 ‘엄정중립’은 어리석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시아 병력 2000 파병’이라는 비공식 입장에서 본다면 러시아 승리를 예상했다고 짐작된다.

요컨대 고종황제는 장기전 끝에 러시아 승리를 예상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당시 국제관계를 무시하고 두 나라 국력을 단순 비교해 판단하면 그런 예상이 가능했다. 예컨대 인구의 경우 러시아는 대략 1억2000만 정도로 추산됐는데, 이는 4000만쯤으로 추산되던 일본 인구의 3배에 달했다.

장기전 끝에 러시아 승리가 확실하다면 공식적 ‘엄정중립’과 비공식적 ‘러시아 병력 2000 파병’은 최선의 준비가 될 수 있었다. 승패를 알 수 없는 초반에는 ‘엄정중립’을 지키다가 러시아 승리가 확실시되는 후반에 ‘러시아 병력 2000명 파병’을 요청하면 큰 위험부담 없이 승전국과 함께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예상과 준비는 러일전쟁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국제관계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결과였다.

일본 도쿄에 체류하던 손병희는 이런 문제점들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2월 10일 러일전쟁이 공식화되자 손병희는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여러모로 봤을 때 일본 승리가 예상되는데 고종황제는 ‘엄정중립’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손병희는 고종황제가 ‘엄정중립’을 고집한다면 일본이 전쟁 중에 반드시 무슨 일인가 꾸미리라 우려했다. 게다가 지난 청일전쟁 후의 삼국간섭이나 아관파천 같은 일도 없을 것이라 예상했다.

예컨대 일본은 러시아에 선전포고한 다음 날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를 추방했다. 제2의 아관파천을 막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전쟁 중 일본이 대한제국의 보호국화 또는 식민지화를 도모한다면 고종황제는 막을 길이 없었다. 자칫 고종황제가 제2의 아관파천을 시도하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손병희는 대한제국 당국자들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이 파악한 일본 내부 정보를 알리고 대안을 제시했다. 예컨대 총리대신 윤용선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 황제 폐하께서 외국 공사관으로 파천하시려 한다고들 운운하니, 소문이 설왕설래함에 피눈물이 흐릅니다”며 제2의 아관파천을 막고자 했다.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고종의 오판


▎러일전쟁 당시 고종황제는 엄정중립을 선언했을 만큼 국제 정세에 어두웠다.
당시 고종황제가 실제 제2의 아관파천을 도모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공포를 느낀 고종황제가 프랑스나 미국 공사관으로 파천하려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손병희의 편지 내용으로 본다면 그럴 것이라는 소문이 일본에 자자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일본이 무슨 일을 벌일지 예상할 수 없기에 손병희는 이를 막고자 총리대신에게 편지를 썼다.

총리대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무릇 독립의 권(權)은 정부에 있고, 독립의 력(力)은 인민에 있습니다. (…) 개명 이래로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은(民維邦本) 세계 만국이 다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양 강대국이 여러 나라를 정복함이 헤아릴 수 없지만, 민심이 화합한 나라는 손대지 못했습니다”는 내용이다. 이는 ‘민유방본’이라는 유교사상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래 유교사상에서 민은 국가 통치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간주될 뿐이었다.

그런데 손병희는 그 민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해 “독립의 력(力)은 인민에 있습니다”라고 언급했다. 이는 국가 독립의 궁극적 주체 또는 궁극적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는 뜻과 같았다. 그의 인민주권 인식은 1905년 4월 집필하고 다음 해 출간한 [준비시대(準備時代)]와 [향자치(鄕自治)]에서 보다 구체화됐다. 손병희는 [준비시대]에서 “국가는 한 사람이 사유하는 바가 아니요 곧 만민이 공유하는 것”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인민주권을 명확히 했다.

당시 전제 군주제를 표방하던 대한제국에서 인민주권이란 대역무도와 같았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손병희가 총리대신에게 편지를 쓴 까닭은 국권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심 화합’뿐이고, ‘인심 화합’은 인민주권의 실현으로만 가능하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손병희가 언급한 인민은 동학농민이었다. 총리대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손병희는 당시 동학에 호응하는 자가 800만이라고 호언장담했다. 따라서 손병희는 대한제국이 800만 동학농민을 주권자로 인정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으면 국권을 지킬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국권을 지킬 수 없으리라 경고한 것이었다. 손병희는 동학을 국교(國敎)로 공인하는 것이 동학농민을 주권자로 인정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동학농민의 마음을 얻는 방법이라고도 했다.

러일전쟁 확전 원하지 않았던 서구열강


▎고종황제가 1903년 유럽과 러시아에 밀사로 파견한 현상건.
여기에 더해 문명개화를 추진한다면 부국강병이 가능하기에 국권 기초가 더욱 튼튼해질 것이라 했다. 그런 생각은 법부대신 이윤용에게 1904년 3월 15일 자로 쓴 편지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 편지에서 손병희는 러일전쟁에 대한 예상, 전쟁 중 일본이 추구할 책략, 일본의 책략으로부터 국권을 지킬 대책 등을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손병희의 예상이 정확했다. 일본 군부의 요인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내부 정보를 파악한 결과였다.

손병희는 러일전쟁에 대해 “겉으로 보면 이 전쟁이 여러 해와 달을 허비할 것 같으나 그 이치를 미뤄 생각하면 그렇지 않은 까닭이 있으니”라며 단기전을 예상했다. 그 근거는 국제관계에서 찾았다. 러일전쟁이 장기전으로 이어지다가 한쪽이 승리한다는 것은 한쪽의 완전한 패배를 의미하는데, 이를 서구열강이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만일 일본이 러시아를 완전히 격파하면 한반도는 물론 만주까지 석권하게 되는데 서구열강은 이런 상황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일본이 너무나 많은 이권을 챙기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황인종 국가 일본에 백인종 국가 러시아가 완패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예상했다. 반대로 러시아가 일본을 완파하면 거꾸로 러시아가 만주와 한반도를 석권하게 되는데, 이 또한 서구열강이 바라는 바가 아니라고 했다.

따라서 손병희는 러일전쟁이 어중간하게 승패가 결정된 상황에서 서구열강의 중재로 일찍 종결될 것으로 예상했다. 만일 일본이 단기간에 러시아를 격파하면 한반도 이권은 일본이 장악하고, 만주 이권은 서구열강이 분할해 장악하는 방식이었다. 반대로 러시아가 단기간에 일본을 격파하면 만주 이권은 러시아가 장악하고, 한반도 이권은 서구열강이 분할해 장악하는 방식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초전 승리가 확실한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주장했다.

손병희는 일본 역시 서구열강의 속셈을 잘 알기에 전쟁을 단기간에 끝내려 할 것이고, 나아가 대한제국에 대한 책략 역시 단기간에 끝내려 할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일본 당국자들은 서구열강의 중재 전에 대한제국의 통치권·외교권 등을 장악하려 획책할 것으로 우려했다.

그렇게 되면 대한제국은 러일전쟁 중 보호국이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이었다. 손병희는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했다. “인민 가운에 뜻있는 자 수백·수천·수만을 골라 화육(化育)의 안으로 불러들여 무엇으로 이름을 하든지 민회(民會)를 설립하고, 정부가 크고 작은 일을 민회와 더불어 의논해 교섭한다면, 민회의 외교 실력이 비록 완전치 못할지라도 보국안민의 정신은 골수에 젖어 들 것입니다. 이처럼 한 후에 외적이 까다로운 청구 사건을 강요하면 민심이 죽기로 지켜 대항할 것입니다. 그러면 외적에게 어떤 협박을 받을지라도 백성에게 해로울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손병희가 언급한 ‘화육의 안으로 불러들인다’는 것은 동학 대표들로 조직된 민간단체 즉 민회를 공인해 국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의미였다.

민회 설립해 국정 의논 제안


▎구한말 서울 중구 정동의 지도
손병희는 민회를 ‘수백·수천·수만’으로 묘사했는데, ‘수백’으로 구성되는 민회는 국회와 도회, ‘수천’으로 구성되는 민회는 군회, ‘수만’으로 구성되는 민회는 면회로 상정할 수 있다. 손병희가 구상하는 민회는 1905년에 저술한 ‘향자치’에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당시 향(鄕)은 면 단위였고 총 5000개 정도로 추산됐다. 향에는 면회에 해당하는 향회(鄕會)를 구성하고, 일정 자격을 갖춘 향장(鄕長) 1명, 부장(副長) 1명, 평의원 약간 명을 둬 호적과 지적도 관리, 세금 징수, 병역 징발, 도로 정비, 소학교 운영 등 다양한 사무를 자치하게 하는 것으로 했다. 그러면 총 5000개의 향회에 향장 5000, 부장 5000, 평의원 수만이 존재하게 된다.

이 같은 향회를 군과 도에도 시행해 군회와 도회를 구성하면 332개의 군회에는 군장 332명, 부장 332명, 평의원 수 천이 존재하게 되고, 13개의 도회에는 도장 13명, 부장 13명, 평의원 수백 명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 군회와 도회 역시 향회와 마찬가지로 자치를 시행하게 되면 인민이 명실상부 주권자인 동시에 이권 당사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외세가 마음대로 국권이나 이권을 강탈할 수 없게 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손병희의 구상대로 향회·군회·도회·국회가 조직된다면 대한제국은 ‘전제 군주제’에서 ‘자치형 입헌군주제’로 탈바꿈하는 것과 같았다. 그것을 손병희는 “향자치 제도를 지방에 시행해 (…) 군회와 도회로 점차 확대해 국회를 조직하는 데까지”라고 묘사했다.

그런데 손병희가 요구하는 ‘민회’ 즉 ‘자치형 입헌군주제’는 사실상 고종황제의 통치권을 면 단위에서부터 배제하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대한제국 당국자들이 그의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손병희 편지를 받은 윤용선은 요언(妖言)이라며 편지 전달자를 잡아 죽이려 했다고 한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 손병희는 일본과의 군사동맹 불씨를 살리기 위해 군자금 1만 엔을 일본 군부에 헌금하고, 일본 적십자사에도 3000엔을 기부했다. 만약 이런 행위를 친일이나 매국으로 이해한다면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라는 기본 병법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손병희는 보국안민 정신으로 일본 군부와 교류했고 나아가 군사동맹도 주장했다. 일본 군부의 내밀한 의중을 파악하고, 조국의 국권을 수호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국제 정세와 병법에 무지했던 대한제국 당국자들은 손병희의 대책을 수용하기는커녕 이해조차 못했다.

대한제국 당국자들의 무지로 한·일 군사동맹이 불가능해지자 손병희는 동학 자체의 힘으로 국권을 수호하고자 했다. 러일전쟁 직후 손병희는 동학 간부 40여 명을 도쿄로 불러 국권 수호 대책을 논의했다. [의암손병희선생전기]에 그 내용이 소개돼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국안민의 책(策)이 상·중·하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대거 혁명(大擧革命)하여 폐혼입명(廢昏立明)이 그 상책, 둘째는 악정부(惡政府)를 통렬히 씻어내고 새 정부를 조직함이 그 중책, 셋째는 러일전쟁에 관여하여 그 우승을 보아 얻음이 하책이었다.”

동학과 개화파 사상의 통합


▎독립운동가이자 동학 지도자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
이 중 상책 즉 ‘대거 혁명하여 폐혼입명’이란 혁명을 일으켜 혼군을 폐위하고 명군을 세운다는 의미였다. 즉 어리석은 고종황제를 몰아내고 총명한 황제를 새로 옹립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다음으로 중책 즉 ‘악정부를 통렬히 씻어내고 새 정부를 조직함’이란 친러 정권을 타도하고 친일 정권을 수립한다는 의미였다. 마지막으로 하책 즉 ‘러일전쟁에 관여해 그 우승을 보아 얻음’이란 패배가 예상되는 러시아에 경도된 고종황제나 친러 정권 대신, 동학만이라도 일본을 도와 러시아를 격퇴하겠다는 의미였다.

이 같은 세 가지 대책 중 최선은 당연히 상책이었다. 그렇지만 한반도가 전시 상황이라 혁명도 불가능했고 정부 전복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손병희는 부득이 하책을 택해 ‘러일전쟁에 관여해 그 우승 얻음을 도모할 것’이라 천명했다. 그러자 동학 간부들은 “만일 전쟁에 관여해 일본 군사를 방해하면 일본이 반듯이 우리를 해할 것이니 그 결과가 어찌 되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이런 반문에서 당시 동학 간부들은 손병희와 달리 러시아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손병희는 “이때 우리 도인 수십만이 발기해 전쟁에 관여하고 보면 일본이 위급존망의 때를 당해 반드시 안정을 내외에 요구할 것이니, 내가 이때 일본 당국과 한국 정부 개혁의 밀약을 굳게 맺은 후에, 일본을 위해 러시아를 치고 한편으로 국권을 잡은 뒤에 제정(諸政)을 혁신하면 우리나라 재생의 길이 여기에 있을 뿐”이라고 답했다.

즉 동학 수십만으로 민회를 조직해 일본군을 돕자는 의미였다. 전쟁 중에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국이나 식민지로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려 들면 수십만 민회 회원들이 저항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전쟁에서 질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그 기회를 이용해 일본과 담판, 정권을 장악하고 문명개화를 추진해 국권을 수호하겠다는 것이 손병희의 복심이었다. 그 후에 기왕의 민회를 향회·군회·도회·국회로 전환하면 되는 것이었다.

도쿄에서 귀국한 동학 간부들은 손병희의 지침에 따라 대동회(大同會)라는 민회를 조직하고자 했다.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제2의 갑오농민운동이라 의심해 탄압으로 일관했다. 이에 동학 간부들은 대동회를 포기하고 잠시 시간을 갖고 기다렸다.

그러다 7월에 중립회(中立會)라는 민회를 조직하려 했으나 결국 8월에 진보회(進步會)라는 민회를 조직하게 됐다. 진보회는 ‘보국안민을 위해 급급하게 진보하는 조직’이란 의미였고, 동학 내부의 조직이었다. 진보회가 조직됨으로써 대중에 근거한 한국 진보 운동이 본격적으로 출발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도쿄 손병희는 국내 진보회 운영을 이용구에게 전담하게 했다. 먼 이국에서 국내 진보회 문제에 일일이 간섭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손병희는 진보회 강령 4개를 제정해 이용구가 마음대로 운영하지 못하도록 했다. 강령 4개는 첫째 황실을 존중하고 독립 기초를 공고히 할 것, 둘째 정부를 개선할 것, 셋째 군정(軍政)과 재정을 정리할 것, 넷째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할 것이었다. 이 4대 강령은 보국안민이라는 동학사상에 문명개화라는 개화파 사상이 통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처음 손병희는 대한제국의 332개 군 모두에 진보회를 조직하려 했다. 그 진보회를 위아래로 확장하면 면회·도회·국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 332개 군 모두에 진보회가 조직되지는 못했다. 정부 탄압 때문이었다. 1904년 연말 상황에서 진보회는 80개 군에서 조직됐고 총 회원은 근 12만 명이었다. 332개 군 중에서 80개는 대략 25% 수준이었다. 100만으로 추산되던 동학교도 중 대략 10%가 진보회에 참여한 셈이었다. 근 12만 명 진보회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대중 진보 조직이었다.

진보회만 걸림돌, 한반도 공략 쉬워져 ‘양날의 칼’


▎1895년 청·일 전쟁에 종군했던 프랑스 언론인 조르주 비고가 파리로 돌아간 1899년 찍어낸 그림엽서 세트. 그림의 제목은 ‘조선을 둘러싼 일·청·러’(위), ‘러시아와 싸우라고 일본의 등을 떠미는 영국과 미국’(아래).
군 단위로 조직된 진보회에는 회장 1명, 부회장 1명 그리고 10명 내외의 평의원을 뒀다. 이런 조직은 손병희가 ‘항자치’에서 밝힌 향회 조직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런 면에서 80개 군에 조직된 진보회는 일종의 군회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80개 군에 조직된 진보회에는 총회장으로 이용구가 있었고, 전체 군회에 회장 80명, 부회장 80명, 평의원 720명 등 대략 1000명 간부가 있었다. 회원이 근 12만 정도였으므로 간부 비율은 1% 정도라고 추산할 수 있다.

손병희는 진보회 회원들에게 크게 두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는 단발과 흑의였다. 고래의 상투와 백의를 버리고 단발과 흑의를 결행함으로써 세계 문명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였다. 손병희의 지침에 따라 단발에 참여한 인원은 2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둘째는 일분 군을 도와 승리하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러일전쟁에 관여해 그 우승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런 손병희의 지침에 따라 진보회원들은 일본군을 위해 군수물자를 무료로 운반하기도 하고, 철도를 무료로 건설하기도 했다. 진보회의 협력이 크면 클수록 일본군은 진보회에 의존하게 됐고, 그럴수록 진보회의 협력이 필요했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진보회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서 일본은 대한제국을 보호국이나 식민지로 만들 수 없었다는 의미였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진보회가 존재하는 동안에 일본은 대한제국을 보호국이나 식민지로 만들지 못했다. 따라서 진보회를 통해 국권을 수호하려 했던 손병희의 대책은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손병희는 도쿄에 있었고, 진보회는 한양의 이용구가 총회장 자격으로 전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이 총회장 이용구만 포섭하면 대한제국의 보호국화나 식민지화는 오히려 쉬울 수도 있었다. 진보회의 저항만 제거한다면 대한제국 내에서 일본에 저항할 만한 현실적인 세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손병희나 일본에 진보회는 양날의 칼 같은 존재였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104호 (2021.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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