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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16)] 장희빈의 슬픈 혼 서려 있는 대빈궁(大嬪宮) (下) 

왕의 사랑은 식었지만 사후 예우는 초라하지 않았다 

숙종의 명으로 자진(自盡)… 장례·묘지 왕비 버금가는 예우
아들 경종 왕위 오르자 후궁 명호보다 높은 ‘대빈’으로 추존


▎2002~2003년 총 100부 작으로 방영됐던 KBS 사극 [장희빈]에서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 균(곽정욱 분)이 어머니 희빈(김혜수 분)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숙종 15(1689)년 2월 1일 당대 유림의 거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원자정호의 성급함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숙종은 대노했다. 이미 종묘에까지 고했음에도 이제 와서 이를 철회하라는 것은 선대 임금 모두를 능멸하는 행위이자, 왕권에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10년 동안 유지됐던 서인 정권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숙종은 원자정호를 반대하며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조정의 서인 세력을 모두 제거하기로 결심한 듯하다.

다음 날인 2월 2일, 영의정인 서인 계열의 김수흥(金壽興)을 비롯한 삼정승 모두를 파직시킨 후 남인 계열로 교체했다. 승정원(承政院)과 삼사(三司) 등의 요직(要職)도 모두 남인으로 채웠다. 이어서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했다. 기사환국(己巳換局)의 시작이었다. 그 결과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되는 등 18명이 죽임을 당하고 59명이 유배를 떠났다. 이외에도 26명이 파직과 삭탈관직을 당하는 등 100명 이상의 서인들이 처벌을 받았다. 상소를 올렸던 송시열도 숙종 15(1689)년 6월 3일 이배(移配) 도중 정읍에서 사사됐다. 이로써 숙종 6(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장악한 지 10년 만인 숙종 15년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으니, 이를 기사환국이라 한다.

이때 서인 계열의 상징과도 같았던 인현왕후마저 정권의 몰락과 함께 폐서인(廢庶人)이 돼 안국동 사가로 내쳐졌다. 그리고 희빈을 인현왕후에 이어 왕후로 삼겠다고 선언한 후 예조에서 즉시 거행하도록 전지를 내렸다.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어 사가로 돌아간 지 4일 만인 숙종 15(1689)년 5월 6일의 일이었다. 일주일 만인 숙종 15(1689)년 5월 13일 희빈은 드디어 왕후 자리에 올랐다. 중인 신분의 궁녀 장옥정이 마침내 숙종의 세 번째 왕후가 되면서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의 안주인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실제 책봉은 그로부터 1년 반 정도 지난 숙종 16(1690)년 10월 22일에 이루어졌다. 청나라에 왕후가 바뀌었음을 알려야 할 시간도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자의대비, 즉 장렬왕후가 숙종 14(1688)년 8월 26일 승하했는데 3년 상이 아직 진행 중이어서다.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지난해에 이 명이 있었으나, 장렬왕후(莊烈王后)의 상제(祥祭)·담제(禫祭)를 지내지 않았으므로 책례(冊禮)를 치르지 않았는데, 이때 이르러 비로소 도감(都監)을 둬 거행했다([숙종실록] 16(1690)년 10월 22일).

숙종 16(1690)년 6월 16일 원자가 왕세자로 책봉되고 이후 몇 년간이 희빈의 최고 전성기였다. 남인 중심의 조정에 또 한 번의 회오리바람이 불어 닥쳤다. 숙종 20(1694)년 3월 23일 남인의 영수 격인 우의정 민암(閔黯)이 ‘서인 계열의 자제들이 자금을 만든 후 환관(宦官)·폐인(嬖人)과 척가(戚家)에게 뇌물을 써서 거짓말과 허위 풍문으로 조정 대신을 헐뜯고 인심(人心)을 불안하게 해 음험하게 간악한 짓을 시행하려는 계획을 만들었다’는 함이완(咸以完)의 내부고발이 있음을 아뢰었다. 여기에서 폐인은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를 말하며, 척가는 희빈의 오빠 장희재를 말한다. 이에 숙종은 함이완이 적시한 이들을 모두 체포해 의금부로 하여금 엄중히 조사토록 허가했다.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시작된 것이다.

서인 귀환, 남인 몰락 … 밤새 뒤집어진 운명


▎명당으로 손색없는 광주 문형리의 대빈묘 옛터. / 사진:이성우
다음날부터 계파와 관계없이 서인 관련자들이 속속 체포되기 시작했다. 4월 1일까지 계속된 국청에서 ‘서인이 조정을 담당하고 폐비(廢妃)가 복위(復位)되면 중궁(中宮)은 절로 폐위될 것이다’, ‘노당(노론당)은 폐비를 복위시키려 하고, 소당(소론당)은 폐비를 별궁에 옮기려 한다’ 등의 자백도 나왔다. 서인들의 절대적인 위기였다.

하지만 밤 10시 무렵 숙종은 돌연 남인의 좌장 격인 우의정 민암 등 8명을 유배시키고, 영의정 권대운(權大運) 등 14명은 관작 삭탈, 승정원과 옥당의 많은 관료들도 파직시키라는 비망기를 내렸다. 민암의 고변에서 시작된 국청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는 남인들이 의도적으로 서인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남인 관료들의 빈자리는 다시 소론계 서인들로 대부분 채워졌다. 아울러 기사환국 당시 처벌받았던 서인들을 복관시켰다. 사사된 송시열도 물론 복관됐음이다. 민암과 이의징 등은 유배지에서 사사됐다. 역사는 이를 갑술환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서인의 다시 집권하면서 폐서인이 된 인현왕후도 복위됐다. 숙종 20(1694)년 4월 12일 실록의 기록을 보면 숙종과 인현왕후가 서궁(지금의 덕수궁)에 입어(入御)하는 과정을 두고 서로 밀당하는 내용이 나온다. 수차례의 서찰을 주고받다가 결국 숙종이 서궁 경복당에 먼저 와서 도착하는 왕후를 맞이했다. 그러면서 숙종은 “내가 경솔하였던 탓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겸양하여야 하겠는가?”라며 그동안의 미안했던 마음을 전달하고 상궁들로 하여금 당일 침전으로 모셔오도록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복위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왕후였던 희빈은 인현왕후의 복위가 결정되면서 강호(降號: 직위를 낮춤)돼 다시 본래의 작호였던 희빈이 됐다. 4월 21일 인현왕후의 복위를 태묘(太廟: 종묘 정전)에 고함으로써 왕후의 지위가 확정됐으며, 6월 1일 왕비 책봉의 예가 거행됐다. 희빈은 대조전을 뒤로하고 숙원 책봉 무렵 숙종이 창경궁에 지어주었던 취선당(就善堂)으로 돌아갔다. 그 후 별일이 없었다면 장희빈은 숙종의 후궁으로서의 편안한 삶을 영위해 갔을 것이다.

숙종 “후궁은 왕후가 될 수 없게 국법으로 정하라”


▎종로세무서 자리에 있다가 칠궁으로 옮겨온 희빈 장씨의 사당 대빈궁. / 사진:이성우
숙종 27(1701)년 8월 14일 인현왕후가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35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그런데 인현왕후의 사망 원인은 병 때문이 아니라 희빈이 취선당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해 인현왕후를 저주했기 때문이며, 자신도 왕후로 복위되기를 기도하고 있다는 말이 숙종의 귀에 들어갔다. 숙종에게 이 사실을 알린 사람이 다름 아닌 숙빈 최씨였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취선당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발인경로를 논의하는 숙종 27(1701)년 10월 10일의 실록 내용을 보면 “취선당이 건양현(建陽峴)과 명정전(明政殿) 사이에 있으니 선인문(宣仁門)으로 나가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는 병조의 건의가 있었음을 보아 취선당의 위치는 명전전에서 남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양현은 지금의 창경궁과 종묘를 가로지르는 율곡로의 고개를 말한다.

신당의 설치는 사실이었다. 숙종이 희빈의 나인들과 관련자들을 대상으로 신당의 설치 이유 등에 대해 직접 친국을 한 후 대조전 동쪽 침실 안과 섬돌 밑 등지에서 참새·쥐의 뼛가루 이외에도 여러 가지를 증거물로 찾아냈다. 연루자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갑술환국에 연루돼 제주에 유배 중이던 희빈의 오빠 장희재도 이번만큼은 비껴갈 수 없었다. 한양으로 압송된 후 국모(인현왕후)를 모해(謀害)한 죄와 무옥(誣獄)을 일으킨 죄명으로 숙종 27(1701)년 10월 29일 군기시 앞에서 사형당했다.

숙종은 그보다 먼저인 9월 25일 밤 희빈에 대해서도 자진하라는 비망기를 내렸다. 이에 대해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은 ‘세자를 생각해서 희빈을 용서하시라’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진천으로 유배당하는 등 많은 대신이 희빈을 선처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숙종의 결심은 변함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법을 고쳐 앞으로는 후궁이 왕후의 자리에 오를 수 없게 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이로써 후궁이 왕후의 자리에 오르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으로 숙빈 최씨나 영빈 김씨 또한 후궁 자리에 머물러야만 하는 결과를 낳게 된 셈이다.

하교하기를 “이제부터 나라의 법전을 명백하게 정하여 빈어(嬪御: 후궁)가 후비(后妃)의 자리에 오를 수가 없게 하라.” 하였다([숙종실록] 27(1701)년 10월 7일).

다음 날인 10월 8일 숙종은 희빈에게 내전(인현왕후)을 질투하여 모해하려 한 죄로 자진하게 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조정 대신들은 크게 동요했다. 비망기를 내린 9월 25일 이래 10월 8일은 물론 10월 9일까지도 많은 신료가 하교를 재고할 것을 거듭 요청했지만, 숙종의 결심은 요지부동이었다. 숙종은 이같이 결심을 굳히게 된 이유가 종묘사직을 위함이며 결코 즉흥적이 아님을 설명하고 있다.

“내가 처음부터 결정한 뜻은,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생각한 것이다. 만약 이 사람을 살려두어 후일 변고를 일으키고 도리어 세자에게 걱정을 끼친다면, 그 화(禍)가 반드시 클 것이다. (중략) 그러나 세자를 보호하는 방도는 마땅히 지극하게 하지 아니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숙종실록] 27(1701)년 10월 8일).

국장인 5월장보다 하루 부족한 4월장으로 치러


▎경성부시가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빈궁 옛터의 위치. / 사진:이성우
숙종의 하교대로 희빈은 자진했다. 구체적인 시각과 자진 방법은 확인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희빈이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숙종도 사약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지 않으냐고 했지만, 신료들은 세자를 낳아서 기른 생모에게 사약을 내리는 것은 주례(周禮)에서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라며 반대했다. 숙종도 이에 대해 자진하라는 뜻이지 사약을 내리라는 뜻은 아니라고 한걸음 물러섰다. 실록의 내용으로 보아 희빈은 10월 9일 저녁에서 10월 10일 아침 사이 은밀한 어느 시각에 자결이나 집행관(甸人: 전인)에 의해 교형(絞刑)으로 세상을 하직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이 사건을 무고의옥(巫蠱之獄)이라 한다. 무고란 주술을 이용하여 남을 해코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희빈은 비록 숙종에 의해 자진케 되는 운명을 맞이했지만, 실록에 기록된 희빈의 장례 관련 예우는 일반에서 알고 있던 내용과는 다르게 지극히 파격적이고 극진했다. 숙종은 세자와 세자빈에게 특별히 상주 자격으로 망곡례(望哭禮: 직접 빈소와 능묘에 가지 않고 그곳을 향하여 슬피 곡을 하는 의례)를 명하고 일반 후궁의 3개월에 대비되는 3년 상복을 입도록 했다. 장례까지의 모든 절차도 국가 주관의 종친1품 예장(禮葬)으로 치러졌다. 예장은 국장 바로 아래 등급의 장례 절차다. 장지는 왕실 종친과 예조참판이 지관들을 직접 대동해 선정했다. 그곳이 양주군 구지면 인장리이며 지금의 구리시 인창동이었다. 장례 기간 역시 여느 후궁의 3월장 보다 한달 많고 국장인 5월장 보다 하루 부족한 4월장으로 치르되 장례식 전날에 세자가 친림했으며, 수일 전부터 입관 당일까지 궁에서 식을 거행했다.

숙종 28(1702)년 1월 30일 희빈은 한 많은 세상을 뒤로 한 채 자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몇 달 후인 숙종 28(1702)년 6월 11일, 숙종은 희빈의 분묘를 단장하며 분묘 좌우의 경계는 종친1품으로 예장하도록 하고 사방 100보 이내에 경작과 목축을 금지했다. 오래된 무덤과 집을 헐어내고 논밭도 묵히도록 했다. 물론 이에 해당하는 백성들에게는 값을 치러 줬음이다.

그로부터 약 15년 후인 숙종 43(1717)년 12월 7일 강릉의 유생 함일해(咸一海)의 상소가 올라왔다. 희빈의 묘가 용맥(龍脈)은 있으나, 혈(穴)이 없고 수법(水法)도 합당하지 못해 완전한 곳이 아닌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용맥은 산의 정기가 흐르는 산줄기를 말하며, 혈은 그 정기가 모인 자리를 뜻한다. 처음에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상소를 돌려보냈으나, 12일 후인 12월 19일 조정에서 상소의 내용에 대해 다시 논의가 이뤄졌다. 논의 결과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라도 함일해와 여러 지관이 현장을 함께 본 후 천장(遷葬: 이장)의 필요성이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숙종 44(1718)년 1월 9일과 2월 20일 두 번의 추가 간심(看審) 결과 초장지에 하자가 있다고 얘기하는 지관들이 더 많다는 보고를 받은 숙종은 희빈묘의 천장을 명했다.

천장지를 찾고 결정하는데 꼬박 1년이 걸렸다. 최종적으로 수원(水原)의 청호촌(靑好村)과 광주(廣州)의 진해촌(眞海村) 두 곳이 대상지로 올랐고, 숙종은 그중 광주의 진해촌을 낙점했다. 그곳이 지금의 광주시 오포면 문형리다. 숙종 45(1719)년 3월 24일 시작된 천장은 4월 11일 완료됐다. 모든 절차와 예는 초장 당시의 예우 및 과정과 동일하게 진행됐다. 그런데 천장을 위해 막상 인장리의 묏자리를 파 본 결과, 상소나 간심의 내용과 달리 특별한 문제가 없음이 확인되면서 문제를 야기하고 간심에 참여한 함일해와 양익도(梁益燾)는 엄히 문책을 받았다.

인장리 첫 묘지 완전하지 않다는 상소에 이장


▎대빈묘 옛터를 지키는 입구의 느티나무. / 사진:이성우
숙종 46(1720)년 6월 8일 숙종이 승하하고 6월 13일 세자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조선의 제20대 임금인 경종이다. 경종이 즉위한 지 한 달여 만인 7월 21일, 장씨를 추존해야 한다는 조중우(趙重遇)의 상소가 올라왔다. 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후 노론의 극심한 추존 반대 속에 조중우는 사형에 처해졌다. 본격적인 추존 논의는 경종 2(1722)년 1월부터 시작됐으며, 경종 2(1722)년 10월 10일 희빈은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됐다. 경종 2(1722)년 7월 17일 ‘빈(嬪) 자 위에 특별히 하나의 대(大)자를 더하고, 이어서 본관(本貫)을 취하여 모부대빈(某府大嬪)이라 일컫고’라는 실록의 내용으로 ‘옥산부대빈’의 명호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됐는지 알 수 있다. 명호는 본인이나 남편의 관향, 기타 연고지 등의 읍호(邑號)를 앞에 붙여 만든다. 따라서 옥산은 구미시 인동 동, 즉 인동 장씨의 본관이고 인동의 다른 이름이기에 옥산부대빈이라는 명호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경종은 생전에 희빈의 왕후 추숭을 시도했으나 ‘앞으로는 후궁에서 왕후로 승격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숙종의 하교가 있었기에 왕후로 추존할 수 없었으며, 재위 4년 만에 승하함으로써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희빈의 신위는 처음에는 중구 정동 사저에 모셨으나, 이후 옥산부대빈으로 추증 당시 사당을 새로 지어 한성부 중부 경행방(慶幸坊) 내, 지금의 종로세무서가 자리하고 있는 낙원동 58번지에 신위를 모셨다. 그 사당이 대빈궁(大嬪宮)이다. 그 후 흩어져 있던 저경궁, 선희궁, 경우궁의 신위를 각각 육상궁 별묘로 안치하라는 순종 1(1908)년 7월 23일 순종의 칙명으로 대빈궁도 육상궁의 별묘로 이전됐다. 1118평 규모의 낙원동 58번지는 국유로 환속돼 대일 항쟁기 경성측후소가 들어섰으며, 1933년 경성측후소가 이전해 간 후 그 자리에는 종로세무서가 들어섰다.

대빈묘(大嬪墓)의 초장지는 지금의 구리시 인창동에 있었으나, 광주시 문형리를 거쳐 지금은 서오릉 경내의 한쪽 구석에 있다. 서오릉의 다른 무덤들과 비교하면 홍살문이나 정자각은 물론 석호(石虎)나 석양(石羊), 석마(石馬)와 같이 능(陵)이나 원(園)에서 볼 수 있는 수호 동물조차 보이지 않는다. 겨우 망주석이나 장명등, 문인석 정도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규모도 협소하고 묘역도 초라하게 느껴진다. 이런 초라함은 야사(野史)에서 보았듯 희빈 장씨의 죽음과 관련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천장 당시 서오릉 권역의 공간상 문제 때문이었을까?

혹시 흔적이 남아 있을까 싶어 문형리 대빈묘의 옛터를 추적해 보았다. 추적이 쉽지는 않았지만, 수소문 끝에 현장을 잘 알고 있다는 지역 토박이 이장과 연락이 닿아 현장을 찾을 수 있었다. 현장은 묏자리가 포함된 개인의 사유지였다. 대문 앞에는 수령 617년(2020년 기준)의 느티나무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이장 덕분에 양해를 구하고 현장을 답사할 수 있었다. 묏자리는 대문에서도 한참 떨어진 경사진 언덕 위에 있었으며, 남향으로 확 트여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고 용호(龍虎: 묏자리의 좌·우측 지형)가 잘 어우러져 있어 문외한의 눈으로 봐도 명당급 자리였다.

26만평 문형리 대빈묘, 서오릉으로 옮겨 옹색해져


▎‘한국화, 역사를 만나다’ 전시회에서 선보인 우승우 화백의 장희빈 인물도.
대정 7(1918)년 대빈묘 터의 [국유임야매각원허가]와 관련한 기록을 보면, 묘역의 임야는 면적만 26만 평에 달하며 1911년 토지조사부 상에서 언뜻 눈에 보이는 대지면적도 1600여 평에 달한다. 이런 곳을 두고 서오릉 경내로 또 천장했다. 천장의 이유가 1969년 경기도 광주시의 도시구획으로 희빈 장씨의 묏자리에 도로가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과연 묘역에서 200m 정도 떨어져 있는 도로가 천장 이유인지에 대해서는 현장에서의 느낌상 의문이 생긴다.

조선시대에는 무덤에도 서열이 있었다. 그 서열에 따라 봉분은 어떻게 만들며 관련 시설물들은 어떤 것까지 설치가 가능한지 명확히 규정돼 있었다. 그렇기에 조선의 임금들은 어떻게든 조상들의 위상을 높이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조상에 대한 효행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신분과 위상을 높이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왕위에 오르기 전 사망한 세조의 장자인 의경세자는 동생 성종에 의해 추존, 임금 덕종이 돼 서오릉에 경릉(敬陵)이라는 이름으로 묘역이 조성됐고, 영조 또한 갖은 노력 끝에 생모 숙빈 최씨의 묘역을 소령원(昭寧園)이라는 이름으로 격상시켰다.

무덤의 서열은 능(陵)-원(園)-묘(墓) 순이다. 숙종과 인현·인원왕후의 무덤은 명릉(明陵)이며, 숙종의 첫 번째 왕후였던 인경왕후의 무덤은 익릉(翼陵)이다. 이에 비해 같은 서오릉 영역에 있으면서도 대빈묘의 상대적인 초라함은 현대인들에게 야사와 연계된 희빈 장씨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충분히 있다. 하지만 이는 1969년 6월 대빈묘를 이곳으로 옮길 때 선정한 장소적 여건, 봉분과 기본적 장식품만 옮긴 것이 원인일 뿐 대빈묘가 서오릉으로 천장되지 않았다면 옛터의 대빈묘는 지금과 같이 그렇게 초라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자였던 경종의 친어머니, 한때 임금이 열렬히 사랑했던 여인, 궁녀 출신으로 왕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빈으로 강호된 후 삶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여인, 그 여인을 위해 숙종이 1년간을 둘러보게 해서 찾은 광주 문형리 묘역, 임야 넓이만 26만 평에 달하며 사방 100여 보의 공간을 비워 조성한 묘역, 이것이 원래 대빈묘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야사를 기본으로 제작한 TV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서오릉에 천장한 대빈묘의 현 위치만으로 장희빈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104호 (2021.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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