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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김인규 전 KBS 사장이 바라본 ‘3김 정치’ 

“승부사 YS·인동초 DJ·협상가 JP 정치 9단의 리더십, 좋은 본보기될 것” 

흠결 있더라도 장점은 취사선택하는 게 한국 정치에도 바람직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으로 3김 시대 능동적으로 뛰어넘어야


▎김인규 전 KBS 사장은 “정치는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인데, 3김이 ‘정치 9단’으로 불린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강조했다.
20세기 한국 정치는 ‘3김 정치’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매김한 데 이어 90년대에는 잇따라 대통령에 당선되며 정치 인생의 정점을 찍었다. 김종필(JP) 전 총리는 70년대와 90년대 두 차례에 걸쳐 6년간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5·16 이후 40년 넘게 정치권의 최전선에 자리 잡으며 한국 정치사에 한 획을 그었다. YS와 JP는 9선, DJ는 6선 등 3김의 국회의원 선수만 합해도 24선에 달한다. 3김의 역사가 곧 한국 정치의 역사이자 발자취였던 셈이다.

거목에는 그림자도 짙게 드리우는 법. 3김의 공과를 둘러싼 갑론을박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척박한 정치 토양 속에서 한국 정치가 이만큼 성장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할 수 있었던 데는 분명 3김의 공이 크다는 긍정적 평가가 존재하는가 하면, 지역감정에 기대어 한국 사회의 편 가르기 병폐를 심화시키고 구시대적 보스 정치로 정치 발전을 저해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상존하고 있다. 2018년 6월 JP 타계로 3김 시대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린 지 이제 3년이 막 지난 만큼 3김을 둘러싼 정치권과 학계·언론계의 치열한 논쟁과 토론은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그런 가운데 한국 정치사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3김과 관련한 각종 미공개·희귀 자료와 역사적 사건, 취재 뒷얘기 등을 모은 책 [위대한 정치인 3金](나남출판)이 지난 6일 출간됐다. 김인규 전 KBS 사장이 펴낸 이 책에는 저자가 1970년대 말부터 2010년대 초까지 KBS 정치부 기자와 정치부장·사장 등을 지내면서 직접 경험한 30여 년 동안의 3김의 역사가 빼곡히 담겼다. 김 회장은 한국방송협회장, 한국디지털미디어산업협회장, 고려대 언론대학원 석좌교수 등을 역임한데 이어 2017년부터 지난 5월까지 경기대 총장을 지냈고, 현재 한국장애인재활협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를 만나 3김의 정치 스타일과 특징, 3김 정치가 오늘날 한국 정치에 끼친 영향과 시사점 등에 대해 들어봤다.

기자생활 30여 년간 3김 자료 꼼꼼히 챙기며 기록 남겨


▎김인규 전 KBS 사장이 기자 시절 3김에게서 직접 받은 휘호들. 왼쪽부터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도무문’,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한산도야음’, 김종필 전 총리의 ‘시화세태’. / 사진:김인규
책을 내게 된 계기는.

“경기대 총장에 취임한 뒤 3김이 생전에 직접 써서 내게 건넨 휘호를 벽에 걸어놨다. 예전에는 중견 정치인들이 종종 가까운 지인들에게 휘호를 써서 선사하곤 했다. 나도 27점을 받았는데 그중에는 3김이 쓴 글씨도 포함돼 있었다. 알고 보니 3김 중 한두 명의 글씨를 갖고 있는 사람은 여럿 있어도 3김의 휘호를 모두 보관하고 있는 사람은 나뿐인 듯싶었다. 그래선지 총장실을 방문하는 손님들도 3김 휘호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정작 대학생들은 3김이 누군지 거의 알지 못하고 있더라. ‘3김이 누구예요’라고 되묻는 학생도 적잖았다. 세대가 이렇게 단절돼 있구나 싶어 큰 충격을 받았다. 마침 그동안 취재 자료를 모아놨던 상자를 다시 꺼내 보니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3김 관련 비화가 꽤 적혀 있었고, 이걸 책으로 내면 세대 간 소통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그래도 3김 생전에 책을 내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아 기다렸다가 2018년 JP가 세상을 떠난 뒤 본격적으로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료는 어떻게 모으게 됐나.

“평소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겠다 싶은 건 꼼꼼히 챙겨놓는 편이다. 기자 시절부터 기록하는 게 오랜 습관처럼 굳어졌다. 이번에 책을 쓰려고 보니 취재수첩 30권과 일기장 40여권을 썼더라. 이대로 사장시키는 건 아니다 싶어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자료는 YS와 DJ 측에 전달하기로 했다. 이희호 여사는 DJ 관련 자료 25점을 기증했더니 깜짝 놀라는 거였다. 1980년 5월 17일 밤 계엄군이 들이닥쳐 동교동에 있던 자료를 모두 압수해 갔는데, 내가 건넨 게 그동안 애타게 찾던 바로 그 자료들이라면서다. 1980년 서울의 봄 때 DJ가 발표한 성명서와 담화문이 대표적이다. 이 자료들은 지금 김대중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상도동에 보낸 30여 점도 김영삼 대통령 기록전시관에 소장돼 있는데, 1980년 YS 신년사의 경우 빨간 펜으로 곳곳에 X자 표시가 돼 있고 검열필 도장이 찍혀 있는 등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사료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받았다.”

YS는 부지런하고 DJ는 꼼꼼, JP는 감성적


▎1988년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회동한 3김. 왼쪽부터 김종필 전 총리, 김영삼ㆍ김대중 전 대통령. / 사진:연합뉴스
3김의 정치 스타일을 비교하자면.

“무엇보다 각자 개성이 뚜렷했다. YS는 한마디로 ‘부지런한 승부사’였다. 한번은 마포 가든호텔에서 따로 조찬을 하자고 해서 약속 시간 10분 전에 도착했는데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다음 약속 땐 15분 전에 갔더니 역시 미리와서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부지런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당시 수행비서에게 물어보니 약속 시간보다 최소한 20분 전에는 도착한다더라. 1990년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며 3당 합당을 단행한 거나 대통령 취임 후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도입을 전격 단행한 것도 승부사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된 결과물이다 싶다.”

이에 비해 DJ는 ‘꼼꼼한 집념의 정치인’, JP는 ‘감성적 협상가’였다고 그는 회고했다. “DJ는 항상 꼼꼼하게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다. [김대중 연보]를 봐도 ‘이 정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뒀다니’ 싶어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과격한 재야인사’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매사에 신중하고 만나는 모든 이를 성심성의껏 대했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1971년 첫 도전 후 26년 만인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인동초’에 비유되는 그의 정치 여정과 궤를 같이한다. 그런가 하면 식사 자리에서는 유머로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며 부드러운 분위기를 유도하는 감각도 탁월했다.”

군인 출신인 JP가 감성적이란 평가는 조금 의외다.

“JP는 육사를 졸업한 군인이자 5·16의 핵심 인물이었다 보니 성격도 엄격하고 직선적일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은 미술과 음악ㆍ문학에 두루 조예가 깊은 예술 애호가였다. 저명한 화가들의 모임인 ‘일요화가회’가 JP를 명예회장으로 추대할 정도였다. 그의 그림 60점을 모아 [JP 화첩]도 발간했는데, 모든 작품마다 당시 심정을 시적인 표현으로 적어놓은 게 인상적이었다. 1969년 3선 개헌으로 정국이 요동칠 때 그린 ‘초가와 관악’이란 작품에는 ‘무척 괴롭지만 이것 역시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인 것을…. 내게 위안과 마음의 평온을 갖게 해준 것은 그림이었다’는 설명을 곁들여놓았다. 대화할 땐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도 대단했다. 대화 소재 또한 그 어느 정치인보다 훨씬 다양해서 회동이 끝날 때면 참석자들 모두 자리가 파하는 걸 아쉬워했다. 그의 이런 화술이 DJP 연합 등 정치 협상에서도 큰 힘을 발휘했다고 본다.”

휘호에 적은 호칭도, 밥값 계산하는 스타일도 제각각


▎김인규 전 KBS 사장이 펴낸 [위대한 정치인 3金] 표지. / 사진:나남출판
3김이 쓴 휘호를 모두 갖고 있는데.

“호칭부터 다른 게 가장 눈에 띄었다. YS는 1980년 6월 가택연금 중에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고 쓴 두루마리를 김덕룡 당시 비서실장을 통해 몰래 보내왔는데 김인규 ‘동지’로 적혀 있길래 ‘아, 말 그대로 타고난 정치인이구나’ 싶었다. 내가 당원도 아니고 오랜 기간 고락을 함께한 사이도 아닌데 말이다. 10년 뒤인 1990년 여름엔 DJ가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야음( 閑山島夜吟)’ 스무 자를 정성스레 써서 전해왔다. 3당 합당 이후 고민 가득한 마음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심정에 비유한 듯했다. 그런데 DJ가 붙인 호칭은 ‘선생’이었다. 호남에서는 존경의 뜻을 담은 표현이라고 하더라. DJ 특유의 성품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몇 달 뒤엔 JP에게서 ‘시화세태(時和世泰)’라는 휘호를 받았다. 시절이 화평하고 세상이 태평하다는 뜻이었는데, 3당 합당 이후 정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DJ와는 정반대라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눈길을 끈 건 JP는 ‘부장’이란 호칭을 썼다는 점이다. 3김 중에서 가장 ‘비정치적’ 용어를 사용한 게 평소 JP의 모습 그대로였다. 호사가들은 이런 스타일 때문에 3김 중에서 JP만 대통령이 못 된 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휘호에 얽힌 뒷얘기도 소개했다. “2010년 초 KBS 사장 시절 [TV쇼 진품명품]에 출연한 전문 감정사 세 분이 방에 찾아왔길래 3김 휘호도 한번 감정해달라고 부탁했다. 우선 누구 글씨가 가장 훌륭하냐고 물었더니 만장일치로 JP 휘호라고 했다. 다음은 DJ-YS 순이었다. 확실하냐고 물으니 DJ도 달필이지만 JP는 서체를 알고 쓴 거라 차원이 다르다고 하더라. 그래서 감정가격은 얼마나 될지 물었더니 잠시 구수회의를 하더니만 DJ 글씨가 가장 비쌀 거라며 추정 가격을 알려줬다. 반면 JP 글씨의 감정가격은 DJ 휘호와 네 배나 차이가 났고 YS 글씨보다도 50%나 낮게 책정이 됐다. 이유를 물으니 대통령이 되고 안 되고 차이 때문에 가격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 현실 정치의 냉정함을 새삼 느꼈다. 3김 휘호를 접한 방문객 중 DJ 휘호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유독 많았던 이유도 비로소 이해가 됐다. 요즘 DJ 글씨는 그때보다 두 배 이상 비싸졌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개인적으로 3김을 접하면서 느꼈던 3김만의 특징이 있다면.

“일단 계산하는 방식부터 전혀 달랐다. YS는 식사가 끝나면 ‘어이~’라고 부르고는 그냥 나갔고, 그러면 이원종ㆍ김덕룡 등 비서들이 와서 계산을 했다. 돈이 있으면 내고 없으면 외상 사인하고. 이에 비해 DJ는 자리가 파하기 전에 직원을 불러 영수증을 확인한 뒤 지갑을 꺼내 정확한 금액을 현금으로 지불하곤 했다. 호탕하기로는 JP가 단연 으뜸이었다. 항상 주인을 자리로 부른 뒤 호주머니에서 수표와 현금을 한 움큼 집어 건네고는 ‘오늘 얼마가 나왔을진 모르겠지만 이걸로 합시다’라며 퉁치곤 했다. ‘너무 많이 계산한 거 아냐’는 궁금증이 일던 차에 우연히 기회가 돼서 물어보니 미리 밥값을 대충 예상하고 그에 맞게 준비해놓는 거란다. 그래도 옆에서 보기엔 이런 모습이 가장 멋있지 않나(웃음).”

3김의 경륜과 리더십은 좋은 본보기이자 참고 자료

책에는 1970~80년대 김 회장과 3김을 함께 취재했던 동료 기자 8명의 글도 실려 있다. 이른바 ‘내가 본 3김’이다. 그중 허남진 전 중앙일보 논설주간의 글에는 당시 취재 기자로서 느꼈던 YS와 DJ의 상반된 스타일이 자세하게 담겨 있다. “상도동과 동교동엔 아침저녁으로 기자들과 정치인들이 북적거렸다. 담당 기자들도 동네 앞글자를 따서 ‘동가식 상가숙이 따로 없다’는 농담을 주고받곤 했다. 상도동은 아침 시래깃국이 맛있었고 동교동은 새참으로 내놓는 목포 직송 홍어회가 일품이었다. YS는 매일 새벽 동네 주민들과 조깅이나 배드민턴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고 남산 헬스클럽에서 별도로 체력을 다졌다. 반면 다리를 절룩거려야 했던 DJ는 아침 기상과 함께 거실 수족관에 먹이를 뿌리고 앞마당 꽃밭에 물을 주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꽃밭은 늘 반듯한 사각형이었고 화초도 색깔별로 반듯하게 줄을 맞춰 심겨 있었다. 수첩도 대조적이었다. DJ 수첩에는 검정 외에 빨강·파랑으로 깨알 같은 글씨가 가지런히 적혀 있었던 데 비해 YS 수첩의 글씨는 들쭉날쭉하고 선도 여기저기 죽 그어져 있었다. 정리정돈형과 자유분방형의 두 표본을 보는 듯했다.”

일각에선 3김 자료가 의외로 많지 않아 아쉽다는 말도 나온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예를 들어 1980년 서울의 봄이 왜 그렇게 사라졌는지에 대한 역사적 기술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2·12 사태 이후 검열이 한층 강화되면서 신문·방송 등 공식 매체에서는 제대로 된 보도가 나가지 못했고 이희호 여사의 경우처럼 개인이 보관하던 자료도 대부분 압수돼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5·17이 어떻게 시작됐는지에 대한 자료도 부족하긴 매한가지다. 이래서는 현대 한국 정치사가 올바르게 조명되기 힘들다. 지금이라도 당시 관계자들이 갖고 있는 자료를 모두 모아 ‘서울의 봄 백서’부터 만들어야 할 때다. 요즘 미얀마 사태를 보면서도 군부의 철저한 통제 탓에 우리처럼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을 것 같다는 우려가 들더라.”

3김 정치의 시사점과 교훈을 찾는다면?

“역사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 중요하다. 과거를 잘 들여다보면 미래에 대해서도 배울 점이 참 많다는 걸 깨닫게 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특히 오늘날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급변하는 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슬기롭게 조율하고 최적의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 지도자가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상황에서 3김의 경륜과 리더십은 좋은 본보기이자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김 정치를 보스 정치로 폄하하는 목소리도 있는데, 격변의 정치 현실 속에서 오랜 기간 신망을 얻으며 나름의 족적을 남긴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보스’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3김의 역사를 재단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다소 흠결이 있었더라도 한국 정치에 남긴 업적을 객관적으로 조명하며 그들의 장점은 취사선택하는 게 미래의 한국 정치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정치는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인데, 3김이 ‘정치 9단’으로 불린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겠나. 오늘날 정치인들도 배울 건 배우고 비판할 건 비판하면서 3김 시대를 능동적으로 뛰어넘어야 경쟁력 있는 리더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언론인으로서 장애인에 대해 거의 몰랐는데 2006년부터 장애인재활협회에 몸담으면서 이런 봉사활동을 꾸준히 지속하는 게 내게 주어진 사회적 의무이자 책임이란 생각을 갖게 됐다. 그게 내가 우리 사회로부터 받은 것에 대해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 글 박신홍 정치 디렉터 jbjean@joongang.co.kr / 사진 신인섭 기자

202108호 (2021.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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