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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특집 | 화제탐구] 금빛 과녁 적중한 한국 양궁과 현대차그룹 ‘37년의 동행’ 

혁신의 DNA 공유하며 ‘세계 최강’으로 우뚝 

정몽구-정의선 부자의 전폭적 지원이 한국 양궁 발전 밑거름
인재 육성, 첨단 기술 접목 등 도전과 혁신으로 동반 성장 이뤄


▎7월 30일 일본 도쿄 올림픽 여자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안산이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주먹 인사를 하고 있다. 현대차는 정몽구 명예회장으로부터 정의선 회장에 이르기까지 37년간 한국 양궁의 역사를 함께 썼다. / 사진:연합뉴스
8월 8일 막을 내린 2020 도쿄 올림픽의 최대 화제는 양궁이었다. 여자 단체전 9연패, 남자 단체전 2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대한민국이 따낸 금메달 6개 중 4개가 양궁에서 나왔다. ‘궁사(弓師)의 민족’이란 말이 허언이 아님을 만방에 알린 셈이다.

시상대 위에서 우리 선수들이 기쁨을 만끽하는 사이 그 아래에는 또 한 명의 승리자가 눈에 띄었다. 바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다. 정 회장은 아버지 정몽구 현대차 명예 회장에 이어 2005년부터 대한양궁협회장을 맡고 있다. 8강에서 탈락한 강채영 선수가 울음을 터트리자 등을 두드리며 다독이는 장면은 진정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3관왕에 오른 안산 선수는 자신의 금메달을 정 회장에게 걸어주며 기쁨을 나눴다.

양궁은 비인기 종목으로 분류된다. 양궁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과 같은 대형 이벤트가 열렸을 때뿐이다. 개인 기록경기인 탓에 상대와 겨루는 구기종목에 비해 관중 동원력에서 열세다. 고가의 장비와 장소 마련이 여의치 않은 탓에 저변을 넓히기 어려운 스포츠다. 팬덤이 형성되지 않으니 상업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기업으로서는 후원에 나설 매력요인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한국 양궁이 세계 정상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든든한 지원군이 있어서다. 수십 년 동안 양궁을 지원해온 현대자동차그룹이 그 주인공이다. 현대차그룹의 37년에 걸친 치밀한 지원은 한국 양궁을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려놓은 원동력이었다. 한국 양궁과 현대차그룹이 혁신의 DNA를 공유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국 양궁 발전사 곳곳에는 현대차그룹의 도전 정신이 깃들어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무대의 변방에 머물러 있던 한국 양궁은 1985년 당시 현대정공(현재 현대모비스) 사장이었던 정몽구 명예회장이 대한양궁협회장에 취임하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정 명예회장은 당시만 해도 국내에 생소했던 스포츠 과학화를 양궁에 도입해 경기력 향상을 뒷받침했다. 2005년 정 명예회장에 이어 협회장에 취임한 정의선 회장도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정 명예회장이 닦아놓은 기틀을 바탕으로 한국 양궁을 한층 업그레이드했다.

그 성과는 눈부셨다. 1984년 서향순 선수가 첫 올림픽 메달을 딴 이래 도쿄 올림픽까지 누적 금메달 26개, 은메달 9개, 동메달 7개를 획득했다. 세계 각국이 한국의 훈련 방식을 벤치마킹할 정도로 절대적인 최강자에 올랐다. 이 같은 위업은 선수들의 피땀 어린 훈련의 결과인 동시에 현대차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이 빚어낸 합작품이다. 정 명예회장과 정 회장의 양궁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스포츠계에서 유명하다.

정몽구·정의선 父子 37년 이어온 양궁 사랑


▎1985년부터 1997년까지 대한양궁협회장을 지낸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양궁 발전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야구장에서 소음 적응 훈련을 창안해낸 것도 정 명예회장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정 회장은 틈날 때마다 훈련장을 찾아 선수들을 보살피며 용기를 북돋웠다. 도쿄 대회를 앞두고 선수들에게 전동마사지건과 미국 유명 스쿼시 코치 폴 아시안테가 두려움을 극복한 경험을 풀어낸 책 [두려움 속으로]를 선물하기도 했다. 대회가 시작되자 미국 출장을 마치자마자 일본으로 건너가 주요 경기마다 응원석을 지키며 선수들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지난해 초에는 7월 말의 일본 기후와 비슷한 미얀마 양곤 전지훈련장을 방문해 선수들의 기후 적응 훈련을 직접 살폈다. 코로나19로 인해 국제 대회가 줄줄이 취소돼 경기 경험을 쌓을 수 없게 되자 경기장 환경과 방송 중계 상황을 재현해 적응을 돕기도 했다. 올해 5~6월 네 차례에 걸친 미디어 실전 훈련이 도쿄 무대에서 중압감을 극복해내는 데 효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전 환경 적응력을 높이기 위해 아예 경기장과 똑같은 환경을 만들어 훈련한 것도 큰 효과를 발휘했다. 진천선수촌 훈련장에 도쿄 유메노시마 공원 양궁장과 똑같은 시설을 만들고, 실전에서 예상되는 음향·방송 환경을 적용해 훈련토록 했다.

모든 과정을 정 회장이 직접 확인해가며 꼼꼼히 챙겼다고 한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정 회장은 종종 선수들을 찾아가 격의 없이 함께 식사하며 격려하고 다양한 선물로 사기를 북돋워주곤 했다”고 전했다. 2012 런던 올림픽 당시 경기장과 숙소가 한 시간 이상 떨어져 이동하는 데 불편하자 경기장 인근 호텔을 빌려 컨디션 조절을 돕기도 했다.

정 회장의 세심한 배려는 정 명예회장과 똑 닮았다. 정 명예회장도 협회장 재임 때 선수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쏟기로 유명했다. 해외 전지훈련에 가면 직접 맛있는 음식을 따로 포장해 선수들에게 보내는가 하면, 1991년 폴란드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선수들이 식수 때문에 고생하자 스위스에서 물을 공수해 오기도 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때는 중국에 있는 현대차그룹 주재원과 가족을 비롯해 현지에 체류 중인 한인을 모집해 9000명 규모의 응원단을 조직,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워줬다.

특히 효율성을 극대화한 한국 양궁의 독특한 훈련법은 정 명예회장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단 한 번의 실수로 승부가 엇갈리는 토너먼트 방식이 도입되자 양궁협회는 집중력 강화에 주력했다. 사물놀이 현장이나 시끄러운 초등학교 운동장을 찾아다니며 훈련에 나섰다. 지금은 한국 양궁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 한 야구장 훈련도 당시 나온 아이디어였다.

2005년 정의선 회장이 협회장에 취임한 이후 양궁의 과학화는 한층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정 회장 주도로 경기력 향상을 위한 기술적 지원에 현대차그룹의 연구개발 역량이 동원됐다. 기술 지원이 본격화한 건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직후부터다. 고정밀 슈팅머신, 점수 자동 기록장치, 심장 박동수 측정 장비, 딥러닝 비전 인공지능(AI) 코치, 선수 맞춤형 그립 등 5개 분야의 첨단 장비를 도입해 눈길을 끌었다.

현대차그룹의 기술이 접목된 첨단 장비는 이번 도쿄 올림픽 성적의 일등공신 중 하나였다. 우수한 품질의 화살을 선별하는 슈팅머신을 새로 제작해 보다 균일한 품질의 화살로 경기에 임할 수 있었다. 이번 경기에 지원한 비전 기반 심장박동 수 측정 장비는 선수 얼굴의 미세한 색상 변화만으로 심장 박동수를 측정할 수 있어 접촉식 생체 신호를 측정하기 어려운 실전 경기 중에도 코치진이 선수의 심리적 불안 요인을 없애는 데 톡톡히 활용됐다. 선수가 사용하는 활의 중심에 덧대는 그립은 3D스캐너와 3D프린팅 기술로 선수에게 꼭 맞도록 제작해 제공했다. 그립 소재는 자동차 부품 소재로 활용되는 신소재를 활용하기도 했다.

인재 원칙, 연공서열 타파하고 능력 위주 발탁


▎현대차그룹과 한국 양궁은 혁신의 DNA를 공유하며 글로벌 강자로 함께 발전해왔다. 현대차그룹은 UAM(도심 항공 모빌리티) 개발 등 과감한 투자를 통해 미래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춰나가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국가대표 선발전이 곧 올림픽 결승전’이란 말이 있다. 한국 양궁의 수준이 높다는 뜻이지만, 그만큼 공정한 경쟁을 통해 국가대표를 선발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대차그룹은 양궁협회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선수단 선발과 협회 운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 원칙을 37년째 지켜오고 있다. 단 한 가지 요구사항은 ‘협회 운영은 투명하게, 선수 선발은 공정하게’ 해달라는 것뿐이다.

실제로 한국 양궁은 오로지 실력만으로 발탁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번 대회 남자 대표팀 구성이 대표적이다. 막내 김제덕(17), 둘째 김우진(29), 맏형 오진형(40) 등 10대, 20대, 40대가 한 팀을 이뤄 금빛 화살을 쏘았다. 온라인에선 ‘블라인드 채용의 정석’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1988년 서울과 1992년 바르셀로나에서 금메달을 따고 은퇴했던 김수녕 선수는 1999년에 선수로 복귀해 실력으로 대표 자격을 거머쥐고 2000년 시드니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갓 스무 살을 넘긴 안산 선수는 오로지 실력으로 발탁돼 도쿄 대회에서 3관왕에 오르며 한국 양궁의 역사를 새로 썼다.

혁신을 거듭한 끝에 세계 최강자의 자리에 오른 한국 양궁은 현대차그룹의 끊임없는 혁신과 맞닿아 있다. 현대차그룹이 일하는 방식과 기술 혁신, 과감한 투자를 통해 미래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것과 닮은꼴이다.

양궁과 마찬가지로 현대차그룹의 인재 원칙은 공정, 능력 위주다. 현대차그룹은 연공서열 중심의 순혈주의를 타파하고 능력 위주로 인재를 발탁하고 있다. 2019년에는 직급과 호칭 체계를 축소 통합하고 승진연차 제도를 폐지했다. 기존에 한 직급당 4~5년 차가 돼야 승진할 수 있었지만, 이를 폐지함으로써 능력에 따라 승진하고, 나이에 구애하지 않고 팀장과 임원이 될 수 있게 됐다. 또 성능·디자인·미래 기술 부문에서 과감한 인재 영입으로 글로벌 자동차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기도 하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과감한 투자로 끊임없이 기술 혁신을 거듭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수소전기차, 도심 항공 모빌리티(UAM), 로봇 등 첨단 영역에서 새로운 기술 개발과 사업 추진으로 주목할 만한 변화를 보이는 중이다. 최근 신사업으로 떠오르는 수소 분야에서 현대차그룹은 명실상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른 메이커들이 포기하는 순간에도 개발을 이어간 끝에 세계 최초로 수소전기차 양산에 성공했다. 또 연료전지 시스템을 수출하는 등 수소 분야에서 글로벌 주도권을 선점하고 있다.

끊임없는 혁신과 도전이 글로벌 강자 원동력

최근에는 UAM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2020년 CES(세계가전전시회)에서 신개념 모빌리티 비전을 공개하고 전담조직을 신설해 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 인수한 세계적 로봇 기업인 보스턴다이내믹스와 손잡고 로봇사업도 본격화하는 중이다.

경기장을 그대로 재현해 훈련하는 ‘실전보다 더 실전 같은 연습’은 현대차그룹으로부터 시작됐다. 정 명예회장이 품질 강화를 위해 2002년부터 운영한 ‘파이롯트 센터’가 그 원조다. 현대차·기아 남양연구소에 있는 파이롯트 센터는 신차 양산에 앞서 양산공장과 동일한 조건에서 시험 차를 생산해 운행한다. 차량 개발 완료 후 생산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연구소에 생산 과정을 그대로 재현하고 조립 연습을 해보는 것이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현대차와 기아는 JD파워 신차 품질 평가와 내구 평가에서 1위에 오르는 등 세계적 품질 평가 기관에서 우수한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아반떼, 제네시스G70, 텔루라이드 등 전략 차종들은 미국 올해의 차, 세계 올해의 차, 미국의 권위 있는 자동차 전문지 [모터트렌드]의 올해의 차에 선정되며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정 회장이 2008년 양궁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 시작한 ‘한국 양궁 활성화 방안’의 일환으로 자리 잡은 우수 선수 육성시스템은 현대차그룹의 인재 육성 시스템에도 동일하게 구현되고 있다. 양궁협회는 단계별 선수 육성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일선 초등학교 양궁장비와 중학교 장비 일부를 무상 지원하고 있다. 2013년에는 초등부에 해당하는 유소년 대표 선수단을 신설해 장비와 훈련을 지원하고 있다. 이를 통해 ‘유소년대표(초등학교)-청소년대표(중학교)-후보선수(고등학교)-대표상비군-국가대표’에 이르는 우수 선수 육성을 체계화했다.

현대차그룹도 자동차 분야 미래 인재 육성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펼치고 있다. 국내외 대학·연구기관과 기술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연구장학생제도를 마련해 학·석·박사 과정 중인 우수 인재를 조기에 발굴해 지원해오고 있다. 또 서울대와 한양대에 각각 ‘차세대 자동차 연구센터’, ‘정몽구 미래 자동차 연구센터’를 건립해 차세대 자동차 핵심기술 개발과 전문 연구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이와 함께 자동차 산업의 뿌리인 부품회사들을 위한 공익재단(자동차부품산업진흥재단)을 설립해 부품회사의 품질·기술·경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부품사들의 해외시장 동반 진출을 돕는 등 다각적인 지원을 펼치고 있다.

분야를 초월해 서로의 강점을 배우며 37년간 혁신의 DNA를 공유해온 것이야말로 한국 양궁과 현대차그룹이 동반 성장하게 된 비결이다. 한국 양궁과 현대차그룹이 동행할 미래가 더 궁금해지는 이유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202109호 (202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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