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3)] '햄릿'에서 찾아낸 중세 기후 변화 

변방의 바이킹은 어떻게 영국을 지배했을까? 

중세 온난기에 힘 키운 덴마크 바이킹, 유럽 바다 누비며 왕성한 정복 활동 벌여
캐나다에서 바이킹 유물 발견돼…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서 아메리카 대륙 밟아


▎2016년 개봉한 영화 [햄릿]의 스틸컷.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은 덴마크가 영국을 지배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 사진:메가박스중앙
"거트루드, 당신 아들은 즉시 영국으로 갈 거요. 승선 준비는 이미 다 마쳤고, 로젠그라츠와 길더스톤 편에 짐의 편지를 영국의 왕에게 보내 햄릿의 안녕과 행복을 부탁할 것이오. 다행히 영국의 날씨와 기후가 좋아서 덴마크보다는 그한테 훨씬 나을 거요. 저기 햄릿이 오는구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햄릿]의 일부다. 덴마크 국왕 클로디어스가 죽은 형의 부인이자 지금은 자신의 아내가 된 거트루드에게 하는 대사다. 사망한 형을 이어 덴마크의 새 국왕으로 즉위한 클로디어스의 최대 골칫거리는 바로 선왕의 아들인 햄릿. 부왕의 석연치 않은 죽음에 삼촌 클로우디스가 개입돼 있다고 확신한 햄릿이 자신에게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클로디어스는 햄릿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문제 삼으며 영국으로 보내겠다고 한다. 그런데 왜 그는 하필 영국을 택했을까? 이어지는 클로디어스의 대사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햄릿이) 영국에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햄릿의 목을 치라는 내 친서가 영국 국왕에게 갈 테니까…. 그는 친서를 보자마자 내 명에 복종하며 이유도 묻지 않고 즉시 처리하겠지.”

당시 영국은 덴마크가 시키는 일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처지였다. 영국이 덴마크에 그렇게 설설 기는 비굴한 관계였다고? 의아할 수도 있지만 역사적 사실이다(정확히 구분 짓자면 여기에 등장하는 영국은 잉글랜드 왕국을 가리킨다. 현재의 영국은 잉글랜드를 비롯해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북아일랜드까지 포함한다).

'라스트 킹덤'으로 본 바이킹의 영국 침략사


▎앵글로·색슨족이 건설한 영국의 7왕국 지도. 9세기 바이킹의 일파인 데인족은 여러 부족을 통합해 덴마크 왕국을 건국하고 앵글로·색슨족의 7왕국을 침공했다. / 사진:Vikings Wiki
영국은 정복할 수 없는 국가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유럽을 지배했던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연이어 침공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는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고대부터 중세까지만 해도 영국은 유럽의 동네북에 가까운 신세였다. 로마 공화정 시절 카이사르의 정복 사업을 시작으로 6세기 앵글로·색슨족, 10세기 데인족(덴마크), 11세기 노르만족 등이 차례로 정복했다. 나라의 주인도 수시로 바뀌었다. 고대부터 중세까지는 지금과 달리 ‘화려한’ 연전연패가 영국사를 수놓고 있다.

얼마 전 막을 내린 영국 BBC 드라마 [라스트 킹덤]은 영국의 이런 모습을 잘 반영한 작품이다. 버나드 콘웰이 쓴 소설 [색슨 스토리즈(The Saxons Stories)]를 토대로 만든 이 드라마는 2015년 8월부터 올해 3월까지 7년에 걸쳐 시즌5까지 방영되며 많은 인기를 누렸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9세기 바이킹의 일파인 데인족이 영국을 침공했다. 당시 영국은 앵글로·색슨족이 건설한 7왕국으로 나뉘어있었는데 대부분 데인족에 굴복한다. 그 과정에서 색슨족의 귀족 출신 우트레드는 데인족에게 포로로 잡히고 그들 틈에서 전사로 자라게 된다. 그러나 데인족 간 내부 다툼에 휘말리면서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되자 영국 남부에 있던 웨식스(Wessex) 왕국으로 귀순해 이들을 돕는다. 당시 영국을 위협한 데인족이 바로 지금의 덴마크다.

이때 데인족은 알프레드 대왕이 다스린 웨식스의 강력한 저항에 막히긴 했지만, 노섬브리아·이스트앵글리아·머시아 등 영국 북부를 획득했다. 이들이 다스린 영토는 데인로(Danelaw)라고 불렀고, 웨식스 왕국의 영토는 영국(잉글랜드)이 됐다. 이후 데인족은 여러 부족을 통합해 덴마크 왕국을 건국하고 영국을 수시로 침략하면서 세금(데인세)을 거뒀다. [햄릿]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이후 11세기가 되자 덴마크 국왕 크누트는 영국-노르웨이의 왕위까지 차지하면서 ‘북해 제국(North Sea empire)’을 건설했다.

그런데 당시 바이킹들이 뒤집어놓은 것은 영국뿐 만이 아니다. 출신이 불분명한 바이킹 지도자 롤로는 9세기에 프랑스 파리를 침략했고, 약탈을 멈추는 대가로 프랑스 북서부 지역을 할양받았다. 이 지역은 ‘북부 사람들의 땅’이라는 의미로 ‘노르망디(Normandie)’라는 명칭이 붙었으며, 이곳에 이주한 바이킹(노르만족)은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다. 롤로의 5대손 ‘정복왕 윌리엄’의 지휘 아래 영국을 완전히 정복했고(1066년), 일부는 지중해까지 내려가서 시칠리아섬을 지배하던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시칠리아 왕국을 세웠다(1091년). 이렇게 해서 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바이킹 대공세가 300년 만에 마무리됐다.

중세 온난기가 바이킹을 깨우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 시기에 바이킹들이 이렇게 왕성한 정복 활동을 벌이게 된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역사학자들이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는 것은 기후의 변화다. 흔히 기후는 안정돼 있으며, 지금의 기후 변화는 현대 인류가 만들어낸 비정상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려보면 기후는 늘 변화했으며, 시기에 따라 냉탕과 온탕을 오르내렸다.

햄릿의 조상들이 북해 일대를 휘젓고 다니던 시기를 기후학자들은 ‘중세 온난기(medieval warm period)’라고 부른다. 지구 온난화를 심각하게 다루는 현재보다도 기온이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보는 이유 중 하나는 당시에 노르웨이나 영국에서도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지금 와인 생산의 북방 한계선은 프랑스와 독일 중부 지역이다. 다시 말해 중세 시대에는 영국과 노르웨이 지역이 지금보다 더 따뜻했다는 이야기다. 지금 같은 난방 시설이 없었던 과거에는 기후가 인간의 활동 영역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날씨가 따뜻하면 외부 활동을 할 수 있고, 농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더 많은 곡물을 수확하고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 반대로 날씨가 추워지면 이런 것들이 모두 어려워졌다.

바이킹으로 시야를 좁혀서 본다면 날씨가 추웠을 때는 겨울 해빙이 항해를 막았고, 농업 활동이 부진해지면서 굶게 되는 사람이 많아졌다. 즉, 중세 온난기는 바이킹들이 이전보다 배불리 먹고, 많은 전사를 확보해 얼지 않은 바다를 마음껏 휘저으며 약탈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준 것이다. 사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지구 반대쪽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데인족이 영국을 약탈·점령하고 노르만족이 시칠리아에 왕국을 세우던 시기에 중국에서는 송(宋)나라가 들어섰다. 송나라는 요(거란)·금(여진) 같은 유목민족 왕조에 수없이 침략당하며 국력이 약화했으며, 나중에는 화북 지역을 금나라에 내줬던 왕조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약했던 왕조로 평가받는다. 물론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숭상했던 송나라의 분위기도 이런 결과에 한몫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 시기의 유목민족 왕조는 확실히 강력했다. 송나라를 밀어낸 금나라는 곧바로 또 다른 유목민족에게 자리를 내줬으니, 그것은 바로 유라시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칭기즈칸의 몽골이기 때문이다. 몽골은 강력한 기마군단을 앞세워 동아시아뿐 아니라 이슬람, 동유럽을 휩쓸며 강력한 힘을 과시했다. 유럽의 바이킹, 아시아의 유목민족이 동시에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는 점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붉은 머리 에리크의 전설도 기후 덕분


▎영국 BBC 드라마 [라스트 킹덤]은 9세기 영국에서 벌어졌던 바이킹들의 대규모 침공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 사진:넷플릭스
바이킹의 본거지는 단연 스칸디나비아반도, 지금의 노르웨이·스웨덴·핀란드가 붙어 있는 땅이다. 그 바로 아래에 덴마크가 있는 유틀란트반도가 이들에 덤비기라도 하듯 삐죽 솟아 있다. 이곳 역시 바이킹의 일파인 데인족의 본거지로서 바이킹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다 건너 북서쪽으로 수백㎞ 떨어진 지역에 작은 섬이 하나 있다. 아이슬란드다. 바이킹 시각에서 보면 변방 중의 변방인 외딴섬에 불과한 곳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10세기 말엽 역사에 이름을 남긴 걸출한 바이킹 영웅이 한 명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에리크 토르발드손. 흔히 ‘붉은 머리 에리크(Erik the Red)’로 불리는 인물이다.

살인죄로 아이슬란드에서 3년간 쫓겨난 그는 982년 서쪽으로 항해해 새로운 섬을 발견했으니, 지금의 그린란드다. 그는 이곳에서 3년을 머물다가 아이슬란드로 돌아가 사람들을 설득해 350여 명을 데리고 그린란드로 되돌아갔다.

그는 세 아들을 뒀는데, 그중 둘째인 레이브 에리크손은 아버지보다 더 대단한 지리상의 대발견을 이뤘다. 그는 서쪽으로 계속 가다 보면 ‘나무가 많은 땅’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1000년경 동료 35명을 이끌고 떠났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지역은 꽤 살기가 괜찮아 보였고, 에리크는 그 땅에 빈란드(Vinland)라는 이름을 붙였다. 바이킹의 오래된 전설인 ‘붉은 머리 에리크의 사가(Saga of Erik the Red)’와 ‘그린란드 사가(Saga of the Greenlanders)’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저 바이킹의 전설로 치부됐던 이 이야기는 현대에 재평가됐다. 1961년 스웨덴 고고학자 헬게 잉스타드가 캐나다 뉴펀들랜드 지역을 조사해 바이킹 유적 및 유물을 대거 발굴한 것이다. 그래서 현재는 에리크손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약 500년 먼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다만 바이킹들의 거주는 오래가지는 못했는데, 유럽을 약탈하던 그 ‘버릇’을 억누르지 못하고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과 충돌을 벌이다가 결국 이 땅을 포기했다고 한다. 만약 이들이 조금 더 정착에 노력을 기울였다면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당시 그린란드에 바이킹들이 집단 거주지를 건설하고, 그곳에서 계속 서쪽으로 이동해 뉴펀들랜드까지 갈 수 있었던 것도 역시 기후 덕분이다. 만약 당시 기후가 소빙기(小氷期)처럼 추웠다면 거칠고 유빙이 떠다니는 바다를 건너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몇백 년 만에 찾아온, 현대보다 더 따뜻한 기후 덕분에 바다는 어느 때보다도 항해를 떠나기에 좋은 환경이었고 에리크손은 콜럼버스에 앞서 아메리카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유성운 중앙일보 기자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210호 (2022.09.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