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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사(7)] 도산 안창호, 상해임정의 청년 내각을 출범시키다 

지역 파벌 싸움 진정시키고 독립운동 조직 통합 

지도부 해체 막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조건부 국무총리 대리 취임
각 지역 지도자 모이면 자리 반납하기로 하고 정부 활동 본격 시작


▎1921년 1월 1일 중국 상해의 호텔 대동여사(大同旅舍)에서 열린 임시정부 신년축하식 때 촬영된 기념사진. / 사진:상하이총영사관
주요한의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에 따르면, 도산 안창호는 1919년 4월 5일 샌프란시스코를 출항해 상해로 갈 때 호주, 홍콩을 경유했다. 일본 쪽으로 가다가 혹시라도 체포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먼 길을 우회하다 보니, 안창호는 미국을 떠난 지 50일이나 지난 5월 25일이 되어서야 상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창호는 홍콩 도착 전, 상해의 조성환에게 전보를 쳐 홍콩으로 오라고 요청했다. 5월 20일께 홍콩에 도착한 안창호는 그곳에서 조성환을 기다리며 며칠을 보냈다. 조성환을 만나 상해의 정세를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조성환은 안창호가 1907년 한양에서 신민회를 조직할 때 함께했던 동지였다. 조성환은 기호 출신이자 육군무관학교 출신이었다. 그래서 조성환은 신민회 안에서도 무관 출신인 이동휘, 이갑, 유동렬, 노백린 등과 친했다. 조성환은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신규식과 함께 대종교에 투신했다. 상해임시정부에서는 군무차장으로서 무력투쟁을 주장했다. 이렇게 조성환은 비록 안창호의 신민회 동지였지만 전혀 다른 노선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안창호가 특별히 조성환을 홍콩으로 부른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첫째, 안창호의 신민회 동지들은 1910년 4월 이른바 중국 산동반도의 청도회담에서 실력양성론과 무력투쟁론으로 노선이 갈라진 후 1919년이 되도록 타협점을 찾지 못했는데, 안창호는 조성환을 통해 노선 타협이 가능한지 확인하고자 했다. 청도회담 당시 무력투쟁 노선은 주로 무관 출신이 주장했는데, 조성환 역시 무관 출신이기에 그들의 생각을 잘 알았다. 따라서 안창호는 조성환을 불러 실력양성 노선으로 설득이 가능한지 여부를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둘째, 안창호는 1910년 4월 망명할 때, 중국 청도를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10개월 정도 머무는 동안 그곳의 이상설과 극심한 노선 갈등을 겪었다. 기호 지방의 명문 양반 가문 출신으로 의병 투쟁을 주도하던 이상설은 여러 면에서 안창호와 대립했다.

청도회담 이후 갈라진 민족 지도자들


▎2019년 8월 1일 부산 영도구 (사)남항동청년회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과 74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태극기 50개와 독립유공자 12명의 얼굴을 함께 프린팅한 태극기 24개를 부산 영도구 영도대교에 게양했다. / 사진:송봉근 기자
안창호는 국권 회복 후 민주공화제를 추구했지만, 이상설은 군주제로의 회복을 추구했다. 또한 안창호는 실력양성을 주장한 반면 이상설은 의병투쟁을 주장했다. 안창호는 평안도 출신에 기독교를 믿었지만, 이상설은 기호 출신에 유교를 숭상했다. 이렇게 여러 면에서 다르다 보니 안창호와 이상설은 사사건건 충돌했다. 결국 안창호는 1911년 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이렇게 노선이 다른 이상설의 의병투쟁에 신민회 동지들 중 무력투쟁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적극 동조했다. 대표적 인물이 이동휘, 조성환 등이었다. 특히 이동휘는 함경도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1917년 이상설이 세상을 떠난 후 블라디보스토크의 동포 사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성장해 있었다. 따라서 안창호는 조성환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의 이동휘와 협력이 가능한지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안창호의 기대와 달리 조성환은 아예 홍콩에 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조성환은 당시 상해임정의 대표적 지도자인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등과 함께 상해를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안창호가 오면 자기 고집대로만 하자고 할 것이고, 잘못하면 또 파벌 싸움이니 지방 싸움이니 하는 문제가 날 터이니 우리는 물러간다”고 하면서 떠났다고 한다. 이렇게 조성환이 상해를 떠나자 현순 목사가 “그럼 내가 간다”고 하면서 홍콩으로 왔다. 현순 목사를 통해 안창호는 상해의 분위기를 전해 들었다. 자신 때문에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조성환 등이 상해를 떠났다는 소식에 안창호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해외 독립운동이 분열과 파쟁의 혼돈 속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컸다.

당시 해외 독립운동가들은 지역별, 신분별, 노선별로 심각하게 분열돼 있었다. 지역별로는 기호파(畿湖派), 서파(西派), 북파(北派), 교남파(嶠南派) 등이 있었다. 기호파는 경기 중부 출신들이고, 서파는 평안도와 황해도, 북파는 함경도, 교남파는 경상도 출신이었다.

기호파에서는 이승만을 비롯해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조성환 등이 대표자였다. 서파에서는 안창호와 김구가 대표자였고, 북파에서는 이동휘가 대표자였다. 신분별로 보면 이동녕, 이시영, 이승만은 명문 양반 출신이었고, 안창호나 이동휘, 김구는 평민 출신이었다. 노선별로 보면 안창호는 실력양성을 주장했고, 이동휘와 이동녕 등은 무력투쟁을 주장했다. 이승만은 외교협상론을 주장했다.

이렇게 다양한 분파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분파는 지역별 분파였다. 이처럼 지역별 분파를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파벌은 당시에 돌연 생겨난 것이 아니라 500년 조선왕조의 유산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 유산을 극복하지 않으면 해외 독립운동은 지리멸렬할 것이 분명했다.

당시 서파의 수장으로 간주된 안창호는 좋든 싫든 본인 역시 한 파벌의 우두머리였다. 그런 상황에서 안창호가 상해로 가겠다고 하자, 당장 기호파를 대표하던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조성환 등이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안창호가 상해로 가면 기호파는 물론 북파와의 협력 여부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상해에서의 독립운동은 지리멸렬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선·파벌에 따른 갈등 극심


▎상해임시정부가 수립 이듬해에 발행한 1920년 ‘대한민력’. 서기와 중화민국 기년을 표시하고, 개천절과 독립선언일을 국경일 혹은 기념일로 정했다. 국내진공작전을 실현해 고국으로 개선하는 그림을 담았다. / 사진:김시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교육과장
그래서 홍콩의 안창호는 상해를 떠난 기호파 지도자들을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며, 북파 지도자 이동휘와도 어떻게 협력관계를 맺을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고 고민했다. 고민의 결과는 자신을 낮춰야만 해외 독립운동을 통합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5월 25일 상해에 도착한 안창호는 환영회에서 몇 차례 연설했는데 그때마다 단합과 통일을 강조했다. 예컨대 5월 26일 상해 영국 조계에 있는 중국인 예수 교회당에서 열린 교민친목회 주최 환영회에서는 이런 연설을 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통일되어야 하겠소. 대한 국민 전체가 단합하여야 하겠소. 세계가 지금은 우리를 주목하여 어디 멕시코보다, 어디 중국보다 나은가 보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희생하더라도 여기 이 정부를 영광스러운 정부로 만들어야 하겠소. 세상의 조소를 받지 않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머리가 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섬기려 왔습니다.”(주요한, [안도산전서], 삼중당, 1963년, 197~198쪽)

위에서 보듯, 안창호는 “나는 여러분의 머리가 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섬기려 왔습니다”라고 함으로써 권력욕이 없음을 강조했다. 자신을 낮춤으로써 기호파 지도자들과 북파 지도자들을 통합시키기 위한 발언이었다. 안창호는 자신의 말이 진정임을 보이기 위해, 6월 4일 두 번째 환영회 연설에서는 이런 말까지 했다.

“우리의 계획이 허다하지마는 우리가 통일을 잃으면 하나도 성취하지 못하겠으니 심려(深慮)하여야 하겠소… 일본은 봉천, 안동현 등지에 자기 심부름꾼을 두어 각지의 연락을 끊으며 이간책을 쓰려 하오. 그러므로 우리의 일언일소(一言一笑)가 통일을 방해하면 아무리 자기가 국가를 위한다 하나 이는 스스로 일본의 충신이 되는 것이오.”(주요한, [안도산전서], 삼중당, 1963년, 198쪽)

와해 상태였던 상해임정 지도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이 광복 77주년을 맞아 스타벅스코리아, 문화유산국민신탁과 공동으로 독립운동의 거목인 김구·안창호·한용운 선생의 친필 휘호를 2022년 8월 9일부터 21일까지 일반에 공개하는 특별전시회를 열었다. 사진은 도산 안창호 유묵 ‘약욕개조사회 선자개조아궁(若欲改造社會 先自改造我窮)’. / 사진:국가보훈처
그런데 안창호가 상해에 도착했을 때 상해임정의 중견 지도자는 안창호 한 명뿐이었다. 안창호가 상해에 오기 전에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조성환 등이 모두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떠남으로써 상해임정의 지도부는 사실상 와해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창호는 내무총장에 취임할 수 없었다.

“나는 여러분의 머리가 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섬기려 왔습니다”라고 공언한 상황에서 내무총장이 된다는 것은 머리가 되는 것이나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지도부가 와해된 상해임정을 어떻게든 수습해야 할 책무 역시 안창호에게 있었다.

[임시의정원회의록]에 따르면, 1919년 4월 30일부터 5월 12일 사이에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최됐다. 그때 임시의정원 의장, 부의장 및 국무총리 대리가 선거되는 등의 변동이 있었다. 의장과 부의장은 임시의정원법에 따라 4월 30일 새로 선출됐는데 손정도가 의장, 신규식이 부의장에 당선했다. 이에 따라 임시의정원 의장단은 기왕의 의장 이동녕, 부의장 손정도에서 새로이 의장 손정도, 부의장 신규식으로 바뀌었다. 의장 손정도는 평안도 출신이며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 출신이었다. 반면 신규식은 기호 출신이며 대종교 핵심간부였다.

한편 4월 30일에는 국무총리 대리도 선출했다. 본래 상해임정의 초대 국무총리는 이승만이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한성 정부의 집정관 총재를 자처하며 상해임정의 국무총리로는 취임하지 않았다. 이에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총리 대리를 선출하게 됐던 것이다. [임시의정원회의록]에 따르면, 국무총리 대리를 선출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가 제안됐다. 첫째, 오의선이 동의(動議)하고 홍진이 재청한 방법인데, 각부 총장 순서대로 선출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되면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순서대로 국무총리에 선출될 수 있었다. 그들 중에서 당시 상해에는 오직 법무총장 이시영만 있었다. 그래서 각부 총장 순서대로 선출하게 되면, 법무총장 이시영이 국무총리 대리였다.

둘째, 이기룡이 개의(改議)하고 손두환이 재청한 것으로, 각부 총장 순서 말고 투표로 선출하자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투표한 결과 이동녕이 국무총리 대리에 선출됐다. 국무총리 대리 이동녕은 임시의정원 부의장 신규식과 마찬가지로 기호 출신이면서 대종교 신자였다.

이에 따라 1919년 4월 30일 자로, 상해임정의 권력 구조는 기호 출신 국무총리 대리 이동녕과 평안도 출신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를 양축으로 안정됐다. 기호 출신으로는 국무총리 대리 이동녕을 위시해 법무총장 이시영, 임시의정원 부의장 신규식, 내무차장 신익희, 외무차장 현순, 군무차장 조성환 등이 있었다. 반면 평안도 출신으로는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를 비롯해 교통차장 선우혁 등이 있었다. 전체적 구도로 보면 기호 출신과 평안도 출신이 주류고, 그 외 경상도 출신으로 재무차장 윤현진과 법무차장 남형우 등이 있었다.

그런데 국무총리 대리 이동녕이 5월 9일 돌연 사직서를 제출했다. 명확한 이유도 없이 단지 국무총리 대리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사직 이유였다. 공교롭게도 5월 10일에는 법무총장 이시영도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동녕과 이시영이 사직서를 제출한 이유는 안창호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 즈음 조성환이 홍콩으로 오라는 안창호의 전보를 받고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등과 논의하고 상해를 떠나기로 합의했을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특정 지역 출신의 권력 독점 우려 팽배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이 2022년 3월 1일 개관했다.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에 위치한 기념관은 3·1운동부터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의 과정을 소개한다. / 사진:연합뉴스
아마도 그들은 안창호가 오면 상해임정의 권력 구조가 안창호 중심으로 재편되고, 나아가 상해임정의 주류 노선이 실력양성으로 바뀔까 우려해 미리 떠났을 것으로 이해된다. 즉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조성환 등은 안창호가 실력양성 노선을 접고 무력투쟁 노선으로 전환하지 않는 한 협력할 수 없다는 뜻을 행동으로 표명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조성환 등은 5월 10일 전후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상해를 떠났을 것이 확실하다. 그들이 떠남으로써 기호파와 서파 양축으로 안정됐던 상해임정의 지도부가 와해하고 말았다.

따라서 1919년 5월 25일 안창호가 상해에 도착했을 때는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 말고는 중견급 지도자가 없었다. 게다가 손정도 의장은 안창호와 같은 평안도 출신이고 기독교 신자였다. 따라서 안창호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할 경우, 평안도 출신이 상해임정의 권력을 독점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상해임정은 평안도 파벌의 임시정부로 전락하고, 그에 대한 반발로 연해주, 만주, 미국 등등 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므로 안창호는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하지 않았다. 대신 홍십자(紅十字)병원에 입원했다. 그곳에 동서 김창세가 의사로 근무하기에, 장기 항해의 여독도 풀고 향후 대책도 숙고하기 위해서였다. [나의 고백]에 따르면, 이광수는 문병차 홍십자병원으로 가서 안창호를 만났는데, 그때 안창호는 “이번 길의 목적은 북간도로 가서 우리 동포를 위하여 산업과 교육운동을 함이라” 했다고 한다. 이런 언급은 다분히 기호파 인사들을 겨냥한 것으로 이해된다.

우선 “북간도로 가서 우리 동포를 위하여 산업과 교육운동을 함”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은 절대 실력양성 노선을 포기할 수 없음을 알린 것이었다. 다음으로 실력양성 노선을 포기하고 상해임정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가 되느니, 차라리 북간도로 가서 실력양성 운동을 하겠다는 뜻을 알린 것이었다. 요컨대 당시 안창호는 상해임정에서 실력양성 노선을 수용하면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취임하고, 그렇지 않다면 북간도로 가겠다는 결심이었던 것이다.

진통 속 안창호·김구 중심 임정 활동 시작

만약 안창호마저 상해를 떠난다면 상해임정의 지도부는 해체나 마찬가지였다.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조성환 등 기호파 중견들이 이미 떠난 마당에 서파의 핵심지도자인 안창호마저 떠나면 상해임정의 지도부는 완전히 해체되기 때문이었다. 이에 신익희, 윤현진 등 젊은 차장들은 거의 매일같이 병원으로 찾아가 안창호에게 취임할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국내에서 애국 동포가 피를 흘리고 옥에 갇히면서 싸우는데 어찌 손을 묶고 가만있을 수 있는가? 또 동포에게 실력양성을 고취하더라도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더욱 효력 있지 않는가?”라는 논리로 안창호를 설득하고자 했다.

결국 안창호는 청년 차장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919년 6월 28일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했다. 당시 안창호는 청년 차장들에게 두 가지를 취임 조건으로 제시했다. 첫째, 각지에 있는 영수들을 상해로 모으는 일을 적극 추진할 것이고, 둘째, 그분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도산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라는 자리를 내놓고 다른 분을 최고 지도자로 추대할 것 등이었다.

북경로 예배당에서 열린 취임식 연설에서 안창호는 “한 덩어리가 되는 데 대하여 구체적으로 할 것은 다시 러시아, 중국, 미국 각지로부터 정식 의정원을 소집하여 거기서 주권자 3인을 택하여 그 셋이 일곱 차장을 뽑아 의정원에 통과시키게 하려 합니다”라고 함으로써, 자신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취임은 대통합을 위해서임을 분명히 했다. 이렇게 해서 1919년 4월에 공포된 상해임정은 6월 28일 안창호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해 차장 내각을 출범시킴으로써 본격적인 정부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한편 안창호는 김구를 경무국장에 임명했다. 당시 김구는 44세로, 42세인 안창호보다 두 살 연상이었다. 게다가 신익희, 윤현진 등 차장들은 20대 청년이었다. 그럼에도 김구는 처음 안창호에게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원하고 경무국장을 사양했다. 고국에 있을 때 시험 삼아 순사 시험을 혼자 쳐봤는데 불합격했기에, 혹시라도 허영을 탐해 실무에 소홀할까 우려해 경무국장을 사양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창호는 “백범이 만일 거절하여 피한다면 청년 차장들의 부하 되기가 싫다는 것으로 여러 사람이 생각할 터이니 거절하지 말고 공무를 집행하시오”라는 말로 김구를 경무국장에 임명했다. 이로써 상해임정은 안창호와 김구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정부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210호 (202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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