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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의 핫피플 & 아트(18)] 다시 대중 앞에 선 ‘화수(화가&가수)’ 조영남 

“싫다는 사람 많은 건 유명하다는 뜻… 그게 내가 견디는 방식” 

한국 미술계 뒤흔든 ‘대작 사건’ 무죄 판결로 명예·자존심 회복
50여 년 동안 600여 차례 개인·단체전에서 2000여 점 선보여


▎가수이자 ‘화투 화가’로 대중적 사랑과 질시를 동시에 받았던 조영남은 다양한 기법과 소재로 미술계 안팎에서 논쟁의 중심에 서곤 했다. 대작 사건 무죄가 확정된 뒤 더 성숙하고 새로운 작품으로 대중 앞에 섰다.
어느 모래 벌에 외로이 외로이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동백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가수 조영남이 자신이 죽은 뒤의 ‘가수장’을 생각하며 부르게 됐다는 노래 ‘모란동백’ 가사 중 일부다. 가수 겸 화가인 아트테이너(Art+Entertainer) 원조 조영남(1945~)은 1968년 팝송 ‘딜라일라(Delilah)’로 데뷔해 가수로서만이 아니라 화가로도 50여 년간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왔다. 2016년 그림 대작(代作) 사건으로 기소되면서 방송, 전시 등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재판 기간 그림에만 전념하면서 [이 망할 놈의 현대미술]이란 책을 쓰기도 했다. 사실 이상의 시를 해설한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2023)] 등 20여 권의 저서가 있는 문필가이기도 하다.

어쨌든 2020년 무죄 판결을 받아 전시장에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됐다. 새롭게 태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는 맥락에서 [제2회 조영남 장례식(2021)] 퍼포먼스와 설치작품 외에도 최근 피카소[아비뇽의 처녀들]을 패러디한 화투 작품, [에비뇽의 다섯 여인들]과 [브라크] [영조] 등 신작 40여 점을 선보이기도 했다. 오는 11월 7일부터 남원시립 김병종미술관에서 [예술편력:조영남展]으로 약 4개 월간의 전시도 예정돼 있다. 대작 논란으로 뜨거웠던 ‘화투’ 시리즈의 신작과 구작 외에도 다양한 작품을 만나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여러 곳에서 내년 전시도 제의를 받은 상태다.

‘대작 논란’ 벗어나 작품활동 몰두하며 새 인생 예고


▎‘화투’는 화가 조영남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1998년 작 [극동에서 온 꽃]. / 사진:조영남
2000년대 초 중국 베이징에 있는 ‘798’ 예술특구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메카로 자리매김할 것이란 기대로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필자는 당시 이곳에서 조영남의 대규모 초대전을 우연히 보면서 관심을 가진 이후 꽤 오랫동안 그를 지켜봤다. 조영남은 이번 인터뷰에서도 밝혔지만 어릴 때부터 그리는 걸 무척 좋아했다. 줄곧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오다가 입대 후 본격적으로 유화 작업을 시작했다.

1973년 인사동 한국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50여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초기 작업은(1960년대 후반) 유화 그림 중심에서 1970~80년대 이르러 화투, 소쿠리 등 대중적이고 일상적인 오브제로 콜라주 한 작업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화투] 시리즈다. 뉴욕에서 팝아트 대가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코카콜라 병]을 보고 영감을 얻어 시작하게 됐다. 한국적 놀이 문화의 상징적 기호인 화투를 ‘희로애락’과 ‘시대의 초상’으로 풀어내 조영남 작품의 대표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화투 외에도 바둑, 음표, 태극기 등의 오브제로 팝아트적인 경쾌한 시각 경험과 동시에 콜라주로 색다른 조합을 끌어냈다.

근·현대 명화를 패러디한 작업도 많다. 설치 작품 [뒤샹의 부활]은 받침대 위에 기성품 ‘요강’ 2개로 제작한 레디메이드(ready made)로 개념미술의 시초이자 현대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마르셀 뒤샹의 ‘변기’ 작품을 패러디했다. 회화·조각·사진·설치·퍼포먼스 등 그의 작업은 모든 미술 분야를 아우른다. 50여 년이란 짧지 않은 기간 국제 비엔날레와 각국 미술관 등에서 연 개인전(50여 회)과 단체전(600여 회)을 통해 선보인 2000여 점의 작품 활동을 통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확립시켜 왔다.

혹자는 가수라는 직업 때문에 화가로서의 천재성이 묻혀 안타까워하지만, 다른 쪽에선 높은 그림값이 가수, 방송인의 대중적 인기 덕을 본 것이라고 평가절하한다. 어느 미술 평론가는 ‘화투 대작’ 방식이 무슨 개념미술이고, 현대미술이냐며 날을 세우는가 하면, 또 다른 평론가는 “현대 개념미술은 아이디어가 핵심이며, 예술가가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100% 관여해 제작하는 프로세스는 100여 년 전에 끝났다”고 그를 두둔한다.

어느 말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림 대작 사건을 계기로 한국 현대미술(사)을 거론할 때, 어떤 의미로든 조영남 이름 석 자를 빼놓을 수 없게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이 조영남 자신에게 어떤 득실이 있을지, 화가로서 어떤 이정표의 변곡점이 될지 좀 더 오랜 시간을 두고 볼 일이다. 다만 이로 인해 예술계뿐 아니라 대중 역시 난해한 현대미술을 좀 더 관심 있게 들여다볼 유의미한 기회가 된 것은 사실이다.

지난 9월 [프리즈 서울 2023] 전시 VIP 개막일에 ‘화수(화가+가수)’ 조영남을 우연히 만났다. 5년간의 법정 공방 때문이었을까. ‘세월에 장사 없다’는 안타까움과 반가움이 교차했다. 인터뷰를 요청하고 며칠 후, 한강이 내다보이는 청담동의 작업실 겸 집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9명 중에 7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이 궁금하다.

“황해도에서 태어나 6·25 때 피란 내려와 충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은 다 죽고, 동생(부산대 교수 조영수)하고 나뿐이다. [전국노래자랑]의 송해 선생하고 프로그램 때문에 학교를 방문해 내 성적표를 봤는데 공부를 잘했더라. 전부 ‘수’에다 초등학교 5, 6학년 담임선생님이 ‘조영남은 미술과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음’이라고 썼더라. 집안 대대로 음악, 미술 유전자가 있어서 고등학교 다닐 때 미술부장을 했고 학교 교지 그림도 내가 다 그렸다. 예배당에서도 맨날 노래했다. 내 동생은 음악을, 난 음악과 미술 DNA를 동시에 물려받아 운이 좋았다.”

어려서부터 음악과 그림 동시에 두각


▎조영남의 초기 화풍은 어린 시절 보았던 시골의 느낌을 무채색으로 표현하는 목가적 분위기였다. 이후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면서 화풍의 경계를 허물었다. 1973년 작 [청계천 풍경](왼쪽)과 2016년 작 [쏠 테면 쏴라!](오른쪽). / 사진:조영남
음대에 입학했다가 자퇴하고 서울대를 다시 입학하지 않았나?

“고등학교 3학년 때 한양대에서 주최한 전국음악콩쿠르가 있었다. 이태리 가곡, 독일 가곡, 한국 가곡 3곡을 불러야 했다. 독학했는데 1등을 해서 한양대를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런데 2학년 때, 약혼자가 있는 여학생하고 정분이 났다. 그 약혼자가 학교로 찾아오고, 그 집에서도 항의하러 오자 학교에서 불편해해서 학교를 그만뒀다. 서울대학교를 다시 시험 보고 들어갔다. 서울대 갔더니 여긴 여자들이 더 많더라(웃음).”

가장 애창하는 곡은?

“대표곡은 ‘딜라일라’이고, 내 인생 최고의 곡은 ‘모란동백’이다. 가수로 등록된 사람은 죽으면 ‘가수장(葬)’을 치러준다. 황금심 여사 장례식장에서 ‘알뜰한 당신’을 부르는데 웃음을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 며칠 후 고운봉 선생이 돌아가셨다. 그때는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를 불렀다. 남보원 선배가 ‘블루벨즈’ 큰 형을 부르더니 니네 죽으면 히트곡 ‘잔치 잔치 벌렸네(잔칫날) 그 노래 불러줄게 해서 확 터졌다. 그때 생각했다. 내가 죽으면 ‘딜라일라’는 영어도 있고, 합창하기 어렵고, ‘제비’는 박자가 어렵고, ‘화개장터’는 ‘구경 한번 와 보세요’라서 진지한 노래를 하나 해야되겠구나 해서 부른 게 ‘모란동백’이다.”

그림에 어릴 적 본 시골 풍경 느낌 살리려 고심


▎조영남은 기존 작품의 패러디, 자유로운 시각으로 고정관념을 경쾌하게 허문다. 2022년 작 [노인과 에펠탑](왼쪽)과 2013년 작 [백남준과의 대화](오른쪽). / 사진:조영남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특별할 게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렸는데 전문적으로 그린 것은 군대 갔을 때부터다. 입대할 때가 ‘딜라일라’를 부를 때라 인기가 최고였다. 많은 병사들이 나를 보겠다고 창가에 매달려 중대장이 일하지 말고, 가서 놀다가 끝날 때쯤 오라고 해서 시간이 많았다. 음악으로는 성공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을 생각해 보니 그림이었다. 후배 가수가 유화 물감과 붓을 사 줘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초기 작품에서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이 있다면.

“독일 작가들 스타일 중 뭉그러뜨려서 면을 처리하는 방법이 있다. 그런 스타일로 청계천 풍경을 그렸다. 시골에서 느껴지는 자연적인 무채색 느낌을 표현하려고 고심했다. 지금도 내 그림의 주조가 거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시골의 그 무심한 자연색을 표현하고 싶었다.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기가 눈으로 본 느낌을 그리게 된다. 특히 어린 시절 정신이 형성될 때 보고 느낀 게 나머지 인생을 좌우할 수 있어 어린 시절이 중요하다. 내가 어려서 시골에 살아 시골 느낌이 중요하게 다가왔다. 초기에 그렸던 그림 중 한 점은 1억 주고 팔았다가 내가 소장하고 싶어 다시 가져올 정도로 애착이 크다.”

하지만 [화투] 시리즈는 상당히 화려하다. 왜 하필 화투였나?

“1990년대에 뉴욕에 머물면서 세계적인 현대미술을 봤는데 내가 뭘 그려도 새로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앤디 워홀의 [코카콜라 병]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코카콜라 병’을 나는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런데 미국에 이민 온 사람들 중에 의사 자격증을 가지고 온 사람도 있고 다양한데, 한국 사람 몇 명이 모이기만 하면 화투를 쳤다. 호기심을 갖고 유심히 보니 화투는 그냥 놀이 기구지, 그걸 그림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화투’를 그리면 사람들이 워홀의 ‘코카콜라 병’ 작품을 보듯이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 생각이 맞았다.”

[화투]는 이제 조영남 그림의 아이콘이 되었다.

“화투 그림은 굉장히 일찍 그렸다. 처음 시작은 대략 1976~77년쯤이다. 나 자신도 좋았지만 대중의 반응이 제일 뜨거웠다. 점차 화투 그리는 화가로 알려졌다.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이나, 김환기의 ‘달항아리’ 그림처럼 ‘화투’라는 소재를 끌어와 그것으로 많이 알려지고 유명해졌다. 많은 양의 작품을 끝없이 보여준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고, 아이디어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대작 사건’이 진지하게 그림 그리게 된 계기 됐다”


▎조영남이 꼽는 인생 사진은 한국이 낳은 거장 백남준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백남준과의 친분은 그의 가장 큰 자랑거리다. / 사진:조영남
그림 대작(代作) 사건은 무죄를 확정받았다. 조수 소식도 궁금하고, 어떤 심정으로 견뎠나?

“2016년에 재판을 시작해 1년 만에 유죄 판결이 났고, 5년 있다가 고등법원에서 무죄, 대법원에서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 내 조수가 그 사건을 일으킨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무죄 판결 난 날에도 전화가 왔고 며칠 전에도 전화가 왔다. 나보다 두세 살 아래다. 나한테 형이라고 그랬는데…. 암튼 전화 와서 다시 화투 그림을 자기가 그리면 안 되겠냐고 해서, ‘내가 네 얼굴 보는 게 민망스러우니까 그 느낌이 없어질 때까지 좀 기다리자’고 했다. 난 세상이 무너져도 잘못한 게 없다. 그래서 견뎠고, 잘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수십 년 동안 팬들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았는데 이 정도의 고초를 겪는 것은 참아야지 생각했다.”

재판과 관련해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면.

“진중권 씨가 미학을 많이 배운 사람이다. 개인적인 친분이 전혀 없는데도 증인으로 나서줬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수미가 진중권 평론가에게 외국 사례는 없는지 알아봐 도와줄 수 없는지 부탁했다고 들었다. 1심에서 집행유예가 나왔을 때 측근들은 감옥은 안 가도 되니까 항소하지 말라고 했지만, 잘못한 것도 없고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 텐데 그럴 수는 없었다. 그때 우리 딸이 ‘아빠 지금부터 내가 해볼게’ 하더니 먼저 돈 준 두 명의 변호사와 매니저를 자르고, 미술 전문 변호사를 찾아 결국 재판을 이겼다. 내 딸이 그렇게 똑똑한 줄 그때까지 진짜 몰랐다. 그냥 이쁘고 착한 애인 줄 알았는데 똑똑하게 잘하더라.”

그림 대작 관련 재판 이후 작품 리콜이 많았다고 들었다.

“예능 방송에 나가 내 그림을 산 구매자들에게 그림이 맘에 안 들면 환불해 주겠다고 했다. 내 그림을 산 사람들은 환불받을 거라고 전혀 생각을 못 했는데 내가 입방정을 떨었다. 그림값 환불 때문에 평생에 딱 한 번 대출을 받았다.”

화풍이나 소재를 크게 몇 가지로 나눈다면?

“팝아트니까 화풍이라고 할 게 없다. 화투 등 대상을 뭘 그리느냐 하는 소재 중심으로 그린다. 사건 나기 전엔 대충대충 그렸는데 나라에서 5년 동안 내가 그림을 진지하게 그릴 기회를 줬다. 재판하는 동안 할 일이 없으니까 진지하게 그리게 되더라. 세계적인 화가는 전체 그림의 양적인 부분도 중요하다. 추상계열일 경우 똑같은 추상으로 공간을 다 채우면 지루하다. 소재를 늘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있을 부산시립미술관 전시회에 큰 공간을 준다니까 대략 200점을 걸려고 한다. 우리나라의 애국지사들 그림도 그린다.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그때그때 소재 중심으로 그리고 있다.”

압도적인 아티스트, 백남준과 친분 자랑스러워

이혼한 지 30년이 지난 윤여정 배우에 대한 언급을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묻지 않는 걸 어디서 대답해본 적 없다. 묻지 않는 걸 얘기하면 그게 바로 노인네들 증상이라고 생각해 묻지 않는 건 말 안 하는 게 내 철학이다. 아카데미상을 탔을 때도 기자들이 묻기에 답했다, ‘바람 핀 남편에 대한 우아한 복수 같다’고. 내 깐엔 멋지게 답변한 건데 그걸 못 알아들으면 할 수 없다.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건 아직도 유명하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석하고 견뎠다.”

살아오면서 아쉽고 후회되는 게 있나? 만약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딱 하나 있다. 바람 피워 이혼하면서 내가 집을 나올 때 왜 아이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어리석고 후회된다. 맹꽁이처럼 DNA에 생각 못 하는 그런 지점이 많다. 그건 내 숙명이다. 그런데 ‘만약’이라는 가정을 나는 제일 싫어한다. 시간 낭비고 덧없는 것이다. 나는 나쁜 아빠다. 잘 지낸다고 들었다. 나하고는 내가 집 나오면서 끝났다. 내가 6년 재판하는데 내 동생이 한 번도 전화한 적 없고, 나도 서운해한 적 없고 무덤덤하다. 우리 조씨들은 그런 경향이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을 한 장 꼽는다면?

“백남준과 굉장히 친했다. 그 부인하고도 친했다. 한국인 중에서 이 시대에 가장 스마트하고 압도적인 사람은 이어령과 김동길인데, 두 사람 이상으로 아티스틱하게 총체적으로 스마트한 사람은 백남준이다. 어눌하게 얘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모든 사안에 대해 술술 말할 정도로 공부를 많이 했다. 왜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됐는지 백남준 글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일본은 아티스트를 돈 주고 키워낸다. 그래도 백남준 같은 큰 인물이 못 나왔다. 중국도 역사가 깊고 미술 역사도 깊은데 아직 백남준 같은 압도적인 스타가 없다. 한국 작가들이 세계적인 ‘프리즈’ 수준으로 따라가려면 모든 방면에서 스마트해야 하고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그런 백남준 선생을 가까이서 봤기 때문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 한장을 꼽는다면 백남준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그런 사람과 친했던 게 자랑스럽다.”

※ JOA(조정화) -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순수사진으로 석사 학위를, 조형예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몇 차례 개인전을 열고, 광주비엔날레 등 다수 국내외 그룹전에 참여했다. 단국대, 상명대 등에서 20여 년간 강의하면서 [포토닷], [디지털카메라매거진], [미술세계], [월간중앙] 등에 예술 관련 연재와 기고 글을 써오고 있다. 저서로는 [그래서 특별한 사진 읽기](2020년)가 있다.

202311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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