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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초대석] 스테인드글라스로 세상 밝히는 ‘빛의 화가’ 김인중 신부 

“가장 큰 죄는 절망… 삶이 죄가 아니라 희망 없이 사는 것이 죄다” 

나권일 월간중앙 편집장
“힘든 시기…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라. 모든 것은 지나간다”
청양 빛섬갤러리에서 작품 상설 전시… “예술이 한 도시 재생에 역할 가능”


▎김인중 신부가 자신의 빛섬갤러리에 전시된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670개의 그림조각을 벽에 이어 붙였는데, 그림 하나 하나가 다 색깔과 모양이 다르다. 획일적인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해방과 자유로움을 표현했다.
충남 청양군 정산면 버스터미널에서 내려서 도로 옆으로 난 길을 따라 15분 남짓 걸으면 ‘빛섬아트갤러리’가 나온다. 세계적인 스테인드글라스 거장 김인중(金寅中·83)의 작품이 상설 전시되고 있는 곳이다. ‘빛섬’은 ‘빛의 화가’로 불리는 김인중 신부의 한글 호다. 그가 만드는 작품 하나하나가 빛을 나누어주는 섬이 되고 싶다는 뜻을 담았다. 김 신부의 작품은 프랑스 브리우드의 생 줄리앙 성당, 사르트르 대성당 등 전 세계 45곳에 설치돼 여행자와 관람객들을 불러 모은다. 최근에는 대전 KAIST 본원에 대형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설치해 화제를 모았다. 조만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도 김 신부의 작품이 설치될 예정이다.

빛섬갤러리에 들어서자 김 신부의 동생 김억중(69) 한남대 건축학과 명예교수가 반가운 미소로 달려왔다. 그는 김 신부의 일곱째 동생이다. 막내 동생은 김항중 한남대 교수다. 이번 인터뷰는 변주선 김인중 신부 후원회장(대림성모병원 행정원장)의 도움으로 김억중·김항중 두 교수에게 요청해 어렵게 이뤄졌다. 파리에 머물며 주로 유럽에서 활동해온 김 신부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국내에 체류 중이다. 현재 KAIST 초빙석학교수로 있다.

천진한 웃음기와 소탈함 가득


▎김인중 신부가 작업한 프랑스 생 줄리앙 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사진. 중세로부터 내려오는 납선 대신 붓으로 유리에 그림을 그린 뒤 구워서 식히는 새로운 기법으로 만들었다. / 사진:김인중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들을 둘러보고 있던 사이 김인중 신부가 흰색의 도미니크수도회 수사신부 복장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걸음걸이가 약간 불편해보일 뿐, 평생을 청빈과 정결, 순명으로 살아온 이 탁발수도자의 얼굴은 천진함과 소탈함이 가득했다. 마을 어르신처럼 인자한, 가을 햇볕처럼 따뜻한 미소였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보청기를 귀에 끼고 듣던 김 신부는 어느 순간부터 윙윙거리고 답답하다며 떼어놓고 조금 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에게서 말보다 더 강한 눈빛의 언어를 만났다. 때론 침묵이 말로 하는 소통보다 더 깊다는 것을 실감했다. 인터뷰 도중 설명이 필요한 대목은 동생 김억중 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세계적인 화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갤러리가 이렇게 한적한 곳에 있다니…. 놀랍습니다.

“이 갤러리가 만들어지기까지 동생(김억중 교수)이 고생했습니다. 제가 세속적 명예는 유럽에서 다 누렸어요. 동생이 국내에 제 전시관을 추진한다고 하더군요. 기왕이면 고향(충남 부여)에 가까운 곳이면 좋겠다고 했어요. 소외된 곳에서 갈망이 있다면 기꺼이 내려가겠다고, 지역문화 욕구의 불씨가 되겠다고 말했어요.”

이곳 청양 정산면을 택하게 된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프랑스 중남부에 브리우드라는 작은 도시가 있어요. 거기에 11세기에 지어진 오래된 성당(생 줄리앙 바실리카)이 있는데, 성당을 되살리려고 스테인드글라스를 새로 설치하기로 했어요. 전 세계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자들을 대상으로 공고를 냈습니다. 53명이 응모했는데, 영광스럽게도 내가 맡게 됐어요. 브리우드가 위치한 프랑스 샤롱트 지역 출신 최초의 성인이 바로 한국에서 순교한 오메트르 베드로(1837~1866) 성인이십니다. 그런 이유로 제가 작품을 맡게 된 겁니다. 기도하면서, 울면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37개를 만들었습니다. 제 그림은 유럽의 전통적 스테인드글라스와 달리 붓으로 그렸습니다.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왔어요. 미슐랭가이드(2017년 판)에 브리우드에 있는 식당이 최고 평점 별 3개를 받았어요. 그 뒤로 브리우드가 유명한 관광지가 됐습니다. 예술이 한 도시를 재생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경험했어요. 내 아트갤러리가 이곳 정산에 있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어요.”

김억중 교수에 따르면, 한 기업체가 빛섬갤러리가 있는 이곳에 카페테리아를 준비했다가 김 교수의 제안으로 김 신부의 작품을 전시하는 아트갤러러를 같이 해보자는 데 의견일치를 이뤄 작품을 전시하게 됐다고 한다. 카페는 카페대로, 갤러리는 갤러리대로 따로 운영하면서도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갤러리가 위치한 청양군(군수 김돈곤)도 세계적 예술 도시로 거듭난 프랑스 브리우드처럼 김 신부의 빛과 예술 혼이 정산을 탈바꿈시켜 ‘제2의 브리우드’ 현상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김억중 교수는 “큰형님은 처음부터 미술관은 대도시나 수도권보다 자신이 태어난 백제권이 좋겠다고 하셨어요. 고향과 뿌리에 대한 애정이 아주 깊으십니다. 대전을 연고로 하는 한화이글스 팬이기도 하십니다(웃음)”라고 덧붙였다.

도포자락 같은 흰색 수도복 입고 귀국


▎김인중 신부가 수도자의 기쁨과 자유를 표현한 작품들. 원경 스님은 “긴 옷깃을 펼치며 너울대는 듯한 느낌에서 사찰의 승무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 사진:파람북, 나권일
서울대 회화과를 나와 미술교사를 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화가적 재능이 뛰어나신데, 왜 신부가 되셨나요?

“4살 때였어요. 논밭이 펼쳐진 벌판에 서 있는데, 하늘에서 무지무지하게 아름다운 빛이 떨어졌어요. 그 순간을 평생 기억하고 살았습니다. 성직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만 갖고 있었지 엄격한 유교 집안이라 입 밖에 꺼내지를 못했습니다. 미대를 졸업하고 소신학교 학생(신학생 지망자 중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미술선생을 2년 동안 했어요. 학생들을 보니 내가 신학교에 갈 수는 없겠더라고요. ‘나는 집안의 장남이지, 내가 제자들보다 10살이나 더 많지’. 그 마음을 꾹꾹 눌렀어요. 그런데 미사 참례하는 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소신학교가 있는 서울 혜화동성당 아침미사를 1년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매일 다녔어요. ‘내가 이렇게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으니까 수도원에 가도 되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사제가 되는 길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어릴 때 꿈이 영화배우였어요. 왜냐? 영어·수학 풀고 교과서 달달달 외우는 것보다 뭔가 내 생각을 나타내는 것, 창작하는 게 좋았어요. 내가 인물(외모)은 없어도 영화배우는 개성 있는 얼굴이면 되니까(웃음). 그런데 한국은 지금도 그렇지만 뭔가를 한다고 하면 전부 다 상을 타야 하고, 등수 안에 들어야 하잖아요. 거기에 신물이 났어요. ‘아~ 내가 연못에서 놀아서는 안 되겠다. 바다로 가보자’ 그 생각을 오래 품었지요. 소신학교에서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더 이상 교사 일을 하기 힘들었어요. 그만두고 무작정 유럽으로 갔어요. 막무가내로 선교사를 붙들고 물어물어 파리에 가서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스위스에 가서 수도회 사제가 되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내년이면 사제서품 받은 지 벌써 50년이 됩니다.”

김 신부는 8남매 중 장남이었다. 그의 부친은 조상 섬김과 제사를 평생 삶의 중심에 놓고 사신 분이었다. 김 신부는 사제가 되겠다고 뜻을 둔 뒤 29살 때인 1969년 스위스의 수도회에 입교하면서 외부와 연락을 끊었다. 6년간 완벽하게 비밀 수행하듯 교육을 받고 1974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이듬해 귀국했다. 외국에 미술공부하러 간 줄만 알았던 그의 부친은 김 신부가 도포자락 같은 하얀색 수도복을 입고 나타나자 처음에는 ‘역시 파리 패션은 다르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평생 독신으로 살며 하느님만 섬기는 도미니크수도회 신부가 됐다는 것을 알고는 앓아누웠다고 한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부모의 허락을 받은 뒤 부모와 형제 다섯, 누이 셋이 모두 가톨릭신자가 됐다. 김인중 신부를 제외하고 7명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가정을 이뤘다.

수도회 사제는 공동생활을 해야 하는데, 다시 붓을 들기가 쉽지 않으셨을 듯합니다.

“그렇죠. 그림을 그만둘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 수도원에서 나처럼 중세문화(스테인드글라스)와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은 없더라고요. 그림과 사제생활을 겸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우리 수도회가 나에 대해 아주 만족해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고 해도 나 정도 유명해지기는 어려우니까(웃음).”

실제 김인중 신부는 도미니크수도회(Dominican Order)의 이름을 빛낸 사제로 꼽힌다. 2010년에는 프랑스 정부가 주는 문화예술공로 훈장 오피시에를 받았다. 김 신부가 이처럼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뭘까? 이는 스테인드글라스라는 가톨릭 미술양식을 이해해야 알 수 있다. 스테인드글라스(stainedglass)는 재료에 안료를 넣어 만든 색유리나 겉면에 색을 칠한 유리를 장식적인 형태 또는 회화적 도안으로 자른 후, 납으로 된 리본으로 용접하여 만든 창유리를 말한다. 처음에는 김 신부도 유럽의 전통을 존중해서 작품에 납선을 넣었다고 했다. 이후 자신의 장점을 살려 붓으로, 서예 쓰듯이 유리에 그려서 구워냈다고 한다. 건축가인 김억중 교수는 이렇게 부연 설명했다. “유럽에서 성당을 지을 때 골조를 세우면 큰 창만 남게 되는데, 이를 어떻게 채울까? 그 답이 스테인드글라스였습니다. 그런데 유리작품이 풍압을 견디려면 착색된 유리를 납으로 이어붙여야 하죠. 그런데 큰형님은 중세로부터 내려오는 납선 대신 붓으로 유리에 그림을 그린 뒤 구워서 식히는 새로운 기법을 만들어낸 겁니다. 과거 스테인드글라스는 성경 속 스토리를 넣어서 성경을 대신하는 기능을 했다면 이제는 추상화시켜서 종교, 민족에 관계없이 누구나 감상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김 신부는 이를 두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해방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종교시설에 국한됐다면 이제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납선을 없애서 유리 자체로 안전하게 서 있을 수 있기에 앞으로 옥외나 야외에 설치작품도 가능하다고 했다.

“천사가 그림 그린다면 김인중의 작품과 같을 것”


▎시인 원경 스님 (오른쪽)과 김인중 신부. 충남 청양 빛섬 아트갤러리에서 올해 4월 처음 만났다. / 사진:파람북
세상 사람들은 김 신부님을 ‘스테인드글라스로 보이지 않는 영혼의 세계를 빛과 색으로 나타내는 화가’로 이해합니다. 동의하십니까?

“진짜 빛은 하느님의 빛입니다. 이탈리아의 가톨릭 신학자 보나벤투라(1221~1274) 성인이 말씀하신 것처럼 빛은 하느님에게서 오고, 색은 빛에서 옵니다. 색은 빛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나죠. 우리가 알아 모신다고 할까요? 자식이 부모에 효도하듯이 빛에 대해 답을 하는 것이 우리 피조물의 역할이죠.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진리는 나의 빛’이라고 했고, 예수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 하셨습니다. 빛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교회의 눈입니다. 방심할 틈도 없이 빛을 전해야 합니다.”

“예술은 획일적인 유니폼 아냐… 자유로워야”


▎‘빛의 화가’ 김인중 신부가 대전 KAIST 김인중홀의 천장을 자신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으로 채웠다.
유럽의 언론과 평론가들이 김인중의 예술세계는 빛과 색으로 구분된다고 했습니다. 빛은 눈부셔서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색을 통해 그 빛을 봅니다.

“맞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빛을 색으로 전합니다. 색의 역할은 빛을 잘 표현해내는 것이죠. 색은 빛을 잘 여과시켜서 보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불가시한 것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다 나에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성심(聖心)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신앙적인 얘기지만 예수 성심이 아니고는 내 예술이 나올 수 없습니다.”

신부님의 작품을 보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 다르게 느껴집니다.

“‘정치는 문화를 만들 수 없지만, 문화는 정치를 만들 수 있다’ 독일의 어느 정치인이 한 말인데, 가슴에 와 닿더군요. 저는 전체주의와 획일성에 반대합니다. 예술은 획일적인 유니폼이 아닙니다. 여기에 670개의 그림조각을 벽에 붙인 작품이 있습니다. 670개가 하나하나 다 다른 그림입니다. 전체주의 나라인 북한의 지도자는 엄청난 카드섹션으로 권위를 내세우죠. 제 작품은 하나하나가 다 개인의 자유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삶은 각자마다 매 순간이 다 다르니까요.”

김 신부의 예술적 영역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시작해 세라믹과 회화, 조각 등으로 확장했다. 그의 작품은 이탈리아 몬테카시노와 대만에서 피카소의 작품들과 같이 전시될 정도로 유명하다. 유럽 왕실의 한 왕자가 성당에 미사 보러 왔다가 그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에 열중하다 보니 미사가 다 끝났더라는 일화도 전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설치된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릴 때는 작가가 아니라 일반 수도자나 신자처럼 보이려 고개를 숙이곤 한다고 말했다. ‘하느님은 (누가 그린 것인지) 다 아실 것’이라면서.

인터뷰 중간에 몇몇 인상적인 작품 앞에서 김 신부에게 설명을 청했다. 그는 “그리고 나면 그림이 결국은 다 십자가가 되더라. (추상으로 보이지만) 추상이란 게 없다. 나한테는 다 사실(寫實)이다”라고 말했다. 자유로운 화풍이 넘쳐나는 한 작품을 가리키자 “기쁨을 표현했다. 기쁘지 않으면 죄”라고 일갈했다. 그래서일까. 세계적 미술사가 웬디 베켓(1930~2018)은 “만약 천사들이 그림을 그린다면 그들의 예술은 틀림없이 김인중의 그림과 같을 것이다.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움, 자유로움에 흠뻑 젖어 있는 것과 같으리라. 색채와 형태들은 독특한 진실의 힘에서 나오는 듯하고, 김 신부의 작품은 창조되었다기보다는 기도의 깊이에서 솟아나온 듯하다”고 평한 바 있다.

최근에 시인인 원경 스님(심곡암 주지)과 함께 [빛섬에 꽃비 내리거든]이라는 책을 내셨지요. 화가와 시인의 만남이라고 해서 꽤 화제를 모았습니다.

“원경 스님이 제 작품을 보고 시를 썼어요. ‘긴 옷깃을 펼치며 너울대는 듯한 느낌에서 사찰의 승무가 떠올랐다’ 그러시더군요. 우리나라가 지금 종교 간 갈등이 너무 심합니다. 배가 뜨기 위해서는 물이 깊어야 해요. 원경 스님과 우리 둘이 얘기한 것도, 우리 수도자들이 절대적으로 겸손해야 한다고 했어요. 불가에서는 연꽃을 소중하게 여기잖아요. 제가 몸담고 있는 수도회에서는 백합이 상징적인 꽃이에요. 연꽃과 백합은 같은 태양 아래서 같이 피는 것이지 싸울 필요가 없는 거잖아요(웃음).”

세계적인 거장이신데, 배우려고 찾아오는 분들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왜 제자들을 두지 않으십니까?

“문하생을 두면 결국에는 자기 사단을 만들게 됩니다. 제자 되겠다고 찾아온 사람에게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혼자의 길을 걸어라. 나도 프랑스에 가서 스승을 모시지 않고 내 혼자 힘으로 했다’고. 예술은 자기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KAIST 학생들에 ‘영적인 샘물’ 선물하고파


▎김인중 신부는 “내가 싸워야 할 것은 내 진부함과 자기 안주”라며 “끊임없이 나를 쇄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 사진:파람북
김 신부는 지난해부터 KAIST 초빙석학교수로서 강단에 서곤 한다. 이광형 총장이 그를 초빙했다. 김 신부는 “코로나19가 아니었으면 KAIST도 몰랐을 것”이라면서 “프랑스에서 올 때 한국에 코로나19가 심하니까 가지 말라더라. 걸리면 어떡할 거냐고? 이제 가려고 했더니 프랑스에서 코로나19 아직 안 끝났다고 오지 말라고 했다(웃음). 코로나19가 내겐 크라운이 됐다”고 웃었다. 김 신부는 오랫동안 유럽문화의 세례를 받은 지식인이다. 교육자로서 그는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KAIST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여러분이 다 수재들인데, 인생의 목적과 행복을 혼동하거나 잊어버리면 안 된다. 그러니까 (못 견디고) 자살하는 사람이 나온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그리운 샘물’을 선물하러 왔다. 목마른 이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예수님 말처럼 여러분들에게 영적인 샘물을 주겠다(웃음).”

신부님은 학창시절은 어떠했습니까?

“나는 학교 다닐 때 그림을 좋아했을 뿐이지 내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좋아한다는 것, 이게 중요해요. 무한한 가능성을 주는 것이니까요. 우리나라는 반짝 수재들이 너무 많아요. 저는 고등학교 때 주위에 그림 잘 그리는 친구들이 많아서 주눅이 들었어요. 결국은 그것이 나무가 자라는 데 거름이 됐지요. 내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들이 나한테는 가장 고마운 은인이 된 겁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누가 1등이냐 2등이냐 따지는데, 진짜 1등은 자기 삶을 완벽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죠. 재능이 많다고 1등이 아닙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말을 우리가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나는 절망하지 않았어요. 그때 내가 반짝 수재가 아니기 때문에 천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샘은 깊이 파야 물이 나옵니다. 천재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되어지는 것입니다. 반짝 사는 사람은 경쟁해서 1등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진짜 천재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그것을 막고 있어요.”

우리 사회는 경쟁이 심합니다. 경쟁에서 뒤지면 심지어 목숨을 버리기까지 합니다.

“진짜 행복은 경쟁에서 뒤떨어졌을 때 찾을 수 있어요. (세속적인) 궤도를 벗어나야 다른 행복을 찾을 수 있죠. 내가 자부심을 갖는 게, 내 부모님이 내게 법과대학이나 의과대학을 권하지 않은 것입니다. 법대, 의대 간 내 친구들과 엊그제도 통화했는데, 그들은 벌써 은퇴해서 10년 전부터 놀고 있더라고요. 나는 이제 시작인데 말이죠.”

행복하신가요?

“행복하지 않으면 어떻게 지내나요(웃음)? 우리가 살면서 죄를 짓는데,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절망입니다. 삶이 죄가 아니라 희망이 없는 게 죄입니다. 우리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아주 좋은 말이 있어요. 유럽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다 놀라더군요. 성경에 ‘버려진 돌이 주춧돌이 됐다’는 말이 있지요. 우리 삶은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안주하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끝없이 새로워져야지요. 내가 좋아하는 야구로 비유하자면, 희망을 가지고 자신감을 가지면 야구공이 수박덩이처럼 크게 보이더라. 그겁니다(웃음).”

안면도에 ‘김인중미술관’ 추진

우리가 살면서 성찰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살면서 내가 교양인으로 행동했는가? 이것을 돌아봐야죠. 특히 종교인이라면 내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했는가? 내가 남의 행복에 기뻐했는가를 성찰해야 합니다. 시기질투는 악마가 좋아하는 행동이니까(웃음).”

나라 살림도 어렵고, 사회 갈등도 심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물론 힘들죠. 하지만 ‘우리가 잘 살아야 100년 사는데, 천년 사는 근심을 가지고 살지 말라’ 그 얘기를 해주고 싶어요. 주어진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지나간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지금을 잘 사는 것은 할 수 있잖아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수녀가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아무것도 불안해하지 말라. 모든 것은 지나간다.’”

파리에 머물 때 김 신부의 화실은 수도회 작은 다락방이었다. 김억중 교수가 찾아가봤더니 여름엔 사우나고, 겨울엔 냉동고나 다름없더라고 했다. 그래도 김 신부는 불평 한마디 없이 기쁘게 살더란다. 청빈을 신조로 삼는 수도회 사제로서 김 신부는 전시회 때마다 판매수익을 100% 사회에 환원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도 수도회에서 은퇴할 나이도 한참 지난 83세다. 그가 여생을 창작에 불태우며 생활할 수 있는 안식처를 국내에 마련하려는 것도 그 이유다. 건축가인 김억중 교수는 이를 위해 충남 안면도에 ‘김인중미술관’을 세우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시급한 것은 미술관을 지을 재원이다. “창작에 대한 열망이 크신 분인데, 이제는 수도회 밖으로 나와서 작업하실 수 있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여생을 화가로서 국내에 머물며 인생의 역작을 남기게 해드리고 싶어요. 지역상생프로젝트 1호점인 빛섬갤러리도 점차 2호, 3호, 4호점으로 늘려나갈 겁니다. 국내와 제3세계, 동남아까지 넓히고 싶어요.” 김 신부를 자신의 집이 있는 충남 공주에 모시고 있는 동생 김 교수의 말이다.

저 멀리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만들어 기증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 남동부에 위치한 섬나라입니다.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다가 1960년 독립했어요. 내 작품은 글로 쓰인 것이 아니니까 아프리카 사람들도 내 그림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나서 아프리카 차드공화국 성당에도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설치하려고 합니다.”

“내가 싸워야 할 것은 나의 진부함”

신부님에겐 그림이 곧 선교라고 봐야겠네요.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죠. 존경하는 칼 뉴만 추기경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저녁 때 성모상 앞에 손을 대고 혹시 내가 말과 행위와 생각으로 하느님께 오는 사람을 내쫓지는 않았는지 용서를 청한다’고 했어요.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나는 나의 모든 행위가 하느님께 감사할 것밖에 없어요. 잘 되면 하느님 덕분이고, 안 되면 내 탓인 거죠.”

앞으로 더 하시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지금까지 80년은 전부 다 연습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음의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게 내 계획입니다. 내 일에는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내가 싸워야 할 것은 내 진부함과 자기 안주죠. 이 세상에는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없습니다. 끊임없이 나를 쇄신해야 합니다.”

2시간이 훌쩍 지났다. 청량하고 맑은 숲 속에서 힐링한 느낌이었다. 시인 이해인 수녀는 김 신부를 두고 ‘천국을 앞당겨 맛보게 한 빛의 화가’라고 칭하면서 “언젠가 신부님께서 제게 안에서만 타오르는 촛불이 되지 말고 밖으로도 빛을 뿜어내는 넓은 빛이 되어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밖으로 뿜어내는 넓은 빛, 그 말이 늘 가슴에서 울렸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김 신부가 지금까지 그린 작품 하나 하나가 ‘세상 밖으로 뿜어내는 넓은 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정현종 시인의 그 시가 떠올랐다. 허락없이 시를 변주해 글을 마친다. ‘청양 정산에 빛섬이 있다. 다시 그 빛섬에 가고 싶다.’

- 글 나권일 월간중앙 편집장 na.kwonil@joongang.co.kr / 사진 김성태 객원기자

202312호 (20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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