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Home>월간중앙>사람과 사람

[JOA의 핫피플 & 아트(18)] ‘별자리 화가’ 혜명 김성희 서울대 미대 교수 

욕망의 탄생과 소멸을 화폭에 기록하다 

[별 난 이야기] [투명인간]에 욕망으로 점철된 현대인의 삶 투영
세계 3대 경매사로 꼽히는 본햄스 본사에서 한국 화가 최초 개인전


▎김성희 서울대 미대 교수는 별자리 그림을 통해 인간의 존재와 욕망을 탐구한다. 얼마 전 영국 런던 본햄스 본사에서 한국 작가로는 최초로 개인전을 열어 주목받았다. / 사진:조정화
"인간 존재의 탐구에서 비롯된 질문들을 함축적으로 표현해오고 있다.” 한국 화가 혜명 김성희(60) 작가의 말이다. 대표작품 [별 난 이야기]는 수많은 별(모든 생명체)의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는 자연의 섭리에 대한 이야기로, 그림 속 별자리 하나하나 모두 특별하기에 ‘별(別)나다’의 중의적 의미를 담았다. 20여 년을 별을 그려 온 작가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아가야겠다”던 시인 윤동주의 고백과 그 의미는 다를지라도, ‘별’을 통해 삶의 의미와 방향성을 짚어내려는 작가의 서술적 고백이 맞닿아 있다.

영국 본햄스(Bonhams)는 크리스티, 소더비와 함께 세계 3대 경매사 중 하나다. 1793년 설립해 230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세계 22개국에 지사가 있고, 중국·일본·싱가포르 등 아시아권에도 진출해 있지만 우리나라는 지사가 없다. 한국에 진출한 크리스티, 소더비와 달리 한국 미술시장에 아직은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얼마 전, 런던 본햄스 본사에서 한국 작가로는 최초로 ‘혜명(작가 호)’ 전시를 개최해(10월 7~13일) 이목이 쏠렸다. 더구나 세계적인 아트페어 ‘프리즈 런던 2023’ 기간에 맞춰 개최됐기에 의미가 더 깊었다. K팝, K드라마에 이어 K아트에 대한 유럽 쪽 관심을 엿볼 수 있는데, K아트가 유럽 진출의 물꼬를 트는데 톡톡히 한몫을 해냈다.

이번 개인전 ‘혜명(Hemyeong)’은 별자리마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나는 신작과 그동안 작업해 온 대표작품 [별 난 이야기(Constellation Links)] 연작, [투명인간(Transparenter)] 연작, 그 밖에 과감하게 처음 시도한 디지털 영상으로 재해석한 작품 등을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본햄스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전통 재료로 표현한 현대적인 별난 ‘별자리’였다.

한국인 최초로 영국 본햄스 본사에서 개인전 열어


▎지난 10월 영국의 세계적 경매회사 본햄스 런던 본사에서 김성희 서울대 미대 교수의 개인전이 열렸다. 한국인으로선 최초다. / 사진:김성희
김 작가의 시그니처가 된 ‘별자리’ 그림에는 아픈 사연이 숨어 있다. 퇴근길에 오토바이를 피하려다 넘어져 아킬레스건이 끊어졌고, 수술 후 몇 달을 식물인간처럼 살다 보니, 살아온 욕망의 궤적을 돌아보면서 별을 처음 그리기 시작했다. 병실에 누워 그리는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이렇게 탄생한 [별 난 이야기]는 천연재료와 선(線)이 핵심적인 요소다. 바탕제 중에서 자연 상태를 가장 존중한 종이, 한지를 고집한다. 일반 한지와 다른, 전통 기법의 한지는 20년을 묵어 종이 자체가 은은한 미감을 자아낸다. 그 위에 산에서 채취한 열매와 나무껍질을 끓이고 걸러내길 수차례 반복해 나온 엑기스로 채색한다. 가장 안정적인 갈색 염료는 지난한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나온 색감이다. 점(별무리)을 그리고 지향하는 방향으로 먹 선을 긋고 나면 별자리 완성이다.

그가 동양화를 선택한 것은 그리는 사람의 현재상황(마음 상태)이 그대로 반영된 먹의 선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선’ 연구에 파고든 것도 선이 갖는 근원적인 방향성과 철학적 배경이 되는 동양의 ‘선’을 쓰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나무와 새, 사람 등 모든 형상 안 별자리의 필력에서 특유의 아우라마저 불러일으킨다.

또 다른 작품 [투명인간]은 현대인의 가속화된 삶을 투영했다. 두 손을 포켓에 넣고 있는데, 걷는 속도를 늦춘 상태를 의미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열심히 뛰다가 문득 욕망을 좇는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그런 지점이다.

김성희 작가는 22년째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대 Fine Art 분야 실기 쪽 여교수로는 최초였고, 서울대 창설 이후 76년 만에 첫 여성 미대 학장으로도 재임했다. 다양한 경험이 그림의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는 작가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갑작스런 교통사고 후 삶 되돌아보며 ‘별자리’ 그려


▎김성희 교수의 대표작〈별 난 이야기(Constellation Links)〉 연작 중 최근에 선보인 신작. 별자리마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난다. / 사진:김성희
영국 본햄스(Bonhams)의 본사 전시는 한국 작가로는 최초다.

“영국에서 개인전을 열기 위해 작년부터 진행했는데 계속 지체됐다. 이를 알고 오래전부터 내 작업을 좋아했던, 런던에 계신 프라이빗 컬렉터가 본햄스 측에 작품을 소개했다. 일단, 직접 오든지 자료를 보내달라고 요청이 왔다. 크리스티, 소더비와 함께 세계 3대 옥션 중 하나라서 어쩌면 작품을 한번 보고 말겠구나 생각했다. 갈 형편도 안 돼 작품만 보냈는데 놀랍게도 깊이 논의한 끝에 옥션하고는 상관없이 최고의 예우를 갖춰 초청해줬다. 특히 본햄스가 초청한 세계적인 컬렉터들과 함께 작품을 공유하는 자리가 마련되어 좋았다.”

최고의 예우로 초청 받았다고 했는데 어떤 점 때문일까?

“작품 배경이 되는 동양철학과 작업 기법 그리고 재료가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로 맞닿아 있는 부분에 주목한 것 같다. 작품 배경이 되는 철학에 동의하고, 공감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특히 어떤 영역의 작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작품으로 인바이트했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 미술이 해외로 나갔을 때 기존의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작품만으로 소통 가능성이 훨씬 높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혜명(Hemyeong)’전의 작품 구성에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신작 중심으로 하고 싶었는데, 대표작을 선정해 연락이 왔다. 투명인간 시리즈는 한 점만 할까 했는데 좀 더 요청해 4점을 보냈다. 전통 매체를 기반으로 한 기존 방식 작업과 디지털로 해석한 작품을 같이 배치했다. 첨단 디지털 방식은 작가가 계속 작업해 나가는 과정을 역으로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제 작품을 디지털로 해석한 것은 이번에 처음 시도했다. 자칫 서로 방해될까 우려했는데 오히려 서로 보완하면서 반응도 좋았다.”

대표적인 작품 [별 난 이야기(Constellation Links)] 연작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늦은 밤 퇴근길에 오토바이가 휙 지나가 넘어졌는데 일어설 수가 없었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져 4시간 수술 후, 몇 달간 식물인간처럼 누워 지냈다. 꼼짝 못하고 입만 벌려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고, 석 달이 지나자 우울증까지 왔다. 문득 왜 이런 상황이 왔을까 생각해 보니 그동안 숨 쉬는 것 빼고는 운동도 사치라고 생각했던 바쁜 일상이 떠올랐다. 내 삶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하게 되면서 ‘별자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별 난 이야기' '투명인간' 연작으로 욕망의 본질 탐구


▎김성희 교수가 꼽은 인생 사진. 초등학생 때 어머니와 함께 소풍 가서 찍은 사진이다. / 사진:김성희
[별 난 이야기]는 어떤 내용을 담았나.

“별이 탄생한 이야기이자 어떤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며,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읽을 수 있다. 끝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섭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이, 별 역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인간의 문명도 처음부터 있었던 게 아니다. 우리가 만약 꿈을 꾸지 않고 뭔가를 욕망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어떤 지향이나 꿈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들을 담았다.”

[별 난 이야기] 연작에서 가장 핵심적인 표현요소는?

“‘선(線)’이다. 하나의 별에서 또 다른 별로 이어 나갈 때 지향하는 방향을 만드는 것이 ‘선’이다. 그림의 상황에 맞게 다양한 선을 골라 쓴다. 곧은 선을 약간 눌러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구성상 흐리거나 진하게, 조화롭게 그린다. 그 선들의 집합 즉, 수많은 방향성의 집합이 별자리다. 동서양의 별자리를 참조하지만, 기본적으로 방향성에 맞게 모두 직접 만든 별자리다.”

본햄스에서 반응이 좋았던 또 다른 작품 [투명인간(Transparenter)] 연작도 궁금하다.

“역시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욕망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있는 현상 자체를 서술한다. 인간이 추구하는 방향에 따라 어떤 상황을 만들어 가고, 변화해 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어느 한계를 지나치면 존재를 집어삼키는 단계로 가기 시작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맹신하는 가치에 흡수되어 집어삼킨 상태로 인간 본연의 존재 자체는 사라지고 그 그림자, 즉 어떤 욕망의 그림자가 존재를 끌고 가는 상태를 표현했다.”

작가로서 재능뿐 아니라 예술경영에도 능력자라고 들었다. 서울대학교 미술관(MOA) 관장을 지낼 때 어디에 운영의 방점을 두었나?

“미술관의 생명은 좋은 전시가 첫째고 그 다음이 좋은 교육이다. 이전과 달리 예술 교육 부분에서 ‘전시예술공학’과 같은 정식 과목을 실시했다.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예술 교육을 위해 전문 학예사를 배치했다. 미술관의 역할이 달라지기 때문에 교과목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미술관 예산 증액을 위해 발로 많이 뛰어다니면서 그런 부분들을 많이 증식시키고 나왔다. 많은 사람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나라도 좋은 역할을 하려고 했다.”

예술 접목한 창의 인성교육으로 학생들에 도움 되고파

기숙사(관악사학생생활관) 관장도 지냈다.

“인원이 5000명 정도 되어 큰 빌리지를 형성한다. 기숙사 교육은 서울대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한다. 학생들에게 창의력과 상상력, 인성교육의 접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교수님들과 2009년부터 예술에 공학, 인문학, 사회학을 융합해 ‘예술교양교육’을 연구해 7개 과목을 만들었지만, 승인이 나지 않아 기숙사 운영에 적용해 봤는데 좋은 반응을 얻었다. 당시에는 기초교육원의 기류가 고전적인 지식 위주의 교육이 중요하지 다른 교육은 필요치 않다는 입장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사진 한 장이 있다면.

“초등학교 때 소풍 가서 어머니와 찍은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있다.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넷을 키우느라 바쁜 어머니께서 갑자기 소풍 장소에 오셔서 너무 기뻤다. 얼마나 소중한 순간이었던지 두고두고 어머니의 사랑을 잊지 않고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육아는 물론이고 실질적인 도움도 많이 주셨다. 무엇보다 작가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고, 지금까지 저를 믿어주신 절대적인 분이다.”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뭘 거창하게 하는 것보다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좋은 스승이 되고 싶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왔던 서울대 전체 교육에서 ‘창의성 인성교육’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서포트하고 실현할 수 있게 돕고 싶고, 창조적인 작업세계로 더 넓은 세상과 꾸준히 소통하는 작가이고 싶다.”

※ JOA(조정화) -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순수사진으로 석사 학위를, 조형예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몇 차례 개인전을 열고, 광주비엔날레 등 다수 국내외 그룹전에 참여했다. 단국대, 상명대 등에서 20여 년간 강의하면서 [포토닷], [디지털카메라매거진], [미술세계], [월간중앙] 등에 예술 관련 연재와 기고 글을 써오고 있다. 저서로는 [그래서 특별한 사진 읽기](2020년)가 있다.

202312호 (2023.11.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