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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20)] 영화 '그린 북'으로 보는 흑백갈등과 기후 문제 

마법 같은 에어컨, 미국 정치 지형도 바꿨다 

무덥고 건조한 남부 지역 더위 견디게 해주자 백인 이주 증가
텍사스·플로리다 선거인단 34명→70명, 공화당 강세 이어질 듯


▎영화 [그린 북(Green book)]은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와 그의 보디가드 겸 운전사인 이탈리아계 미국인 토니 발레롱가가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1960년대 미국 남부에 투어를 다니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 작품이다. / 사진:유니버셜 픽처스
"난음악가예요. 곧 콘서트 투어를 시작할 참인데 장소가 대부분 남부입니다. 켄터키, 테네시, 델타지역…”

“장담하는데 당신, 딥사우스(Deep south)라면 문제가 많을 겁니다.”

영화 [그린 북(Green book)]의 한 장면. 유명 피아니스트 돈 셜리와 그의 보디가드 겸 운전사인 이탈리아계 미국인 토니 발레롱가가 1960년대 미국 남부에 투어를 다니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 작품이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그린 북]은 여전히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당시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이 남부에서 묵을 수 있는 숙소나 식당 등이 정리된 일종의 가이드북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도 이 책을 갖고 다닌다.

1960년대 미국은 인종 차별과 분리정책이 여전했다. 남부 지역에서는 흑인들이 백인들과 별도로 구분된 공간에서 살아야 했고 학교나 식당, 버스 등도 따로 이용해야 했다. 특히 [그린 북]에서도 언급된 딥사우스 지역은 그런 분위기가 더 짙었다. 루이지애나·미시시피·앨라배마·조지아·사우스캐롤라이나 5개 주로 남북전쟁 때도 북부에 반기를 들고 남부연합을 결성한 핵심지역이었다. 일부는 여기에 아칸소·플로리다를 합치기도 한다. 1964년 인종 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Civil Rights Act)’이 제정되고, 1965년에는 흑인들의 선거권을 보장하는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이 제정됐지만, 이곳 딥사우스 지역의 차별적 분위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남북전쟁과 남부의 쇠락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뉴욕과 펜실베이니아에서 승리할 경우 75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47명으로 감소했다. 반면 공화당 입장에서는 텍사스와 플로리다에서 얻을 수 있는 선거인단 수가 34명에서 70명으로 2배가 됐다. / 사진:중앙SUNDAY
몇 년 전, 회사 선배가 미국으로 연수를 간다고 해서 어느 도시로 가는지 물어봤더니 “오스틴”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미국을 잘 모르는 나는 오스틴이 텍사스의 주도라는 것을 그 선배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알았다. 아니, 많고 많은 미국의 도시 중에서 왜 하필 덥고 유명한 도시도 별로 없는 텍사스로 가는 거지? 당시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스틴에 델(DELL) 컴퓨터 본사를 비롯해 많은 첨단 전자 기업들이 들어와 있으며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을 비롯해 많은 제조업 공장이 들어와 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게다가 세금도 저렴하고 인프라도 좋아 계속 인구가 늘어나는 도시라는 것도 말이다.

하지만 아마도 우리에게 미국 남부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거대한 목화밭과 거기서 일하는 흑인 일꾼들 아닐까. 남부는 건국 이래 오랜 기간 노예와 플랜테이션 농업에 의존하는 지역이었다. 거대 농장을 기반으로 한 남부의 농업은 건국 초부터 미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 이런 남부에 남북전쟁의 패배는 경제적으로 큰 시련을 가져왔다. 흑인 노예가 해방되자 당장 농장에서 일할 노동력이 크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영화로도 각색된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는 이런 남부의 특징과 남부인들의 좌절이 잘 묘사돼 있다.

여기에 미국 경제의 중심도 농업에서 제조업 등으로 급격히 이동하면서 남부의 위상은 점점 쪼그라들었다. 그러는 동안 상공업이 발달한 북동부와 ‘골드 러시’로 대박을 터뜨린 서부는 미국의 경제를 견인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을 비롯해 건국의 주역들을 상당수 배출하고 미국의 탄생을 이끌었다고 자부하는 남부로서는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20세기가 돼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쇠락한 남부를 떠나 대거 북부와 서부로 떠났다. 이에 따라 20세기의 전반기에 경제적으로 낙후된 미국 남부에서는 무려 1000만 명의 인구가 빠져나갔다. 1950년대부터 소위 ‘선벨트(Sunbelt)’라고 불리는 버지니아부터 텍사스까지 9개 주와 뉴멕시코·애리조나·네바다의 인구를 모두 합쳐도 3300만 명에 불과했는데 이것은 북부 공업지대 15개 주 인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였다.

날씨도 남부를 떠나는 요인 중 하나가 됐다. 텍사스나 뉴멕시코 등 남부의 건조하고 뜨거운 여름은 사람들이 쉽사리 정착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일자리도 없는데 날씨까지 무더우니 사람들을 끌어들일 만한 매력은 찾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대로 갔으면 남부는 지금까지도 낙후된 저소득 지역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며, 위에서 말한 선배도 절대로 연수를 가지는 않았으리라.

에어컨이 가져온 반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미국 남북전쟁의 한 광경. 남부연합의 깃발이 보인다. 영화 [그린 북]에서 언급된 딥사우스 지역은 루이지애나·미시시피· 앨라배마·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5개 주로 남북전쟁 때도 북부에 반기를 들고 남부연합을 결성한 핵심지역이었다. / 사진:유튜브 캡처
그런데 1960년대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1950년 미국 총인구의 28% 정도를 차지했던 선벨트 지역의 인구는 2000년에 약 40%로 증가했다. 이런 추세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2030년에는 미국 인구의 55%까지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추정이 나오고 있다.

전환점을 만든 것은 기술이다. 1950년대 이후 에어컨이 일반 가정에 빠른 속도로 보급되면서 그보다 빠른 속도로 남부의 인구가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 뜨거운 여름을 견딜 수 없도록 했던 기후는 에어컨이라는 마법사가 나타난 덕분에 통제가 가능해졌다. 그러자 매서운 한파로 유명한 미국 북동부에 거주하던 은퇴자들, 특히 백인들이 따뜻한 겨울을 찾아 대거 플로리다·텍사스 같은 지역으로 이동했다.

온화한 기후를 찾아 거주지를 이동할 정도라면 대개 연금이 보장되거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은퇴자들이다. 이들이 지갑을 벌리자 남부의 경기가 살아난 것은 당연하다. 소매업을 비롯해 의료·오락·음식·서비스업 등이 성장하게 됐고 이는 일자리 상승으로 이어졌다. 특히 텍사스는 밀레니얼 세대가 가장 많이 이주하는 주로 꼽히고 있다고 한다.

물론 저렴한 땅값과 세금 혜택 등을 내밀며 하이테크 제조업 등을 유치한 주 정부의 정책적 요인도 무시하기는 어렵겠지만, 무엇보다 에어컨 같은 기술이 없었다면 인구가 늘어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인구 변화는 미국 정치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미국 북동부에서 포근한 날씨를 찾아 이주한 사람들은 대개 백인이었다. 안 그래도 인종차별 분위기 때문에 남부에 거주하던 상당수의 흑인 인구가 북부로 이동한 상황에서 백인 은퇴자들이 대거 밀려들자 남부는 백인 쏠림 현상이 심화됐다. 안 그래도 보수적인 공화당의 강세 지역으로 분류되는 남부가 더욱 공화당 성향으로 바뀌어 간 것이다.

원래 미국 남부는 민주당의 아성이었다. 남북전쟁에서 흑인 노예를 해방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공화당 소속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반면 민주당이야말로 노예 해방에 반대하며 남부연합을 이끌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지금은 상황이 반대로 바뀐 것일까. 그것은 흑인 인권 운동이 한창이던 1960년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린든 존슨 대통령 등 민주당 출신 대통령들이 잇따라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법안과 제도 마련에 적극 나서면서다. 이를 계기로 남부는 민주당과 결별했고, 공화당이 이 틈을 파고들면서 양측의 관계는 바뀌어버린 것. 어쨌거나 1960년대 이후 에어컨이라는 기술 혁신의 결과로 미국 남부가 더욱 보수적으로 바뀌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진보의 역설일지도 모르겠다.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와 존 케리 민주당 후보의 대결이었다. 이 선거는 현직 대통령인 조지 부시 후보가 승리했다. 그런데 이 선거 후 제임스 와일리 호프스트라대 교수는 ‘케리 후보의 패배는 에어컨 때문(Blame air conditioning for Kerry loss)’이라는 칼럼을 한 언론에 기고했다. 에어컨이 남부의 정치적 위상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었다.

갈수록 세지는 남부의 입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자택 앞에서 지지자가 ‘트럼프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깃발을 흔들고 있다. / 사진:로이터(연합)
이것은 무슨 말일까.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각 후보는 투표에서 승리한 주(州)의 선거인단을 독식하는데, 더 많은 선거인단을 확보한 후보가 승리하는 간접 선거 시스템이다. 선거인단의 규모는 각 주의 인구 규모에 따라 다른데, 예를 들어 가장 선거인단이 많은 캘리포니아는 무려 55명의 선거인단을 갖는 반면 델라웨어 같은 작은 주는 단 3명만 갖는다. 즉, 캘리포니아에서 승리한 후보는 캘리포니아 선거인단 55명을 모두 확보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선거인단 총 538명 중 절반을 먼저 확보하면 승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에어컨의 보급으로 남부 인구가 증가하면서 선거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현재 미국에서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한 북동부의 뉴욕과 펜실베이니아의 경우 1952년 기준 선거인단은 각각 45명과 32명이었다. 반면 공화당 지지성향이 강한 남부 텍사스는 24명, 플로리다는 10명이었다. 하지만 2024년 현재 뉴욕은 28명, 펜실베이니아는 19명으로 선거인단이 줄었다. 반면 텍사스는 40명, 플로리다는 30명이다.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뉴욕과 펜실베이니아에서 승리할 경우 75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47명으로 감소했다. 이 지역에서 강력한 민주당 입장에서 본다면 28명가량을 손해 보게 된 것이다. 반면 공화당 입장에서는 텍사스와 플로리다에서 얻을 수 있는 선거인단 수가 34명에서 70명으로 2배가 됐다. 물론 캘리포니아(32명→54명)처럼 민주당 성향이 강한 주이면서 선거인단이 늘어난 곳도 있다. 하지만 전반적인 추세로 보면 인구구조에서 남부의 상승세인 것은 사실이며 이것이 공화당에 좋은 환경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2000년 대선에서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는 앨 고어 민주당 후보를 3표 차로 이겼지만, 만약 인구구조가 1952년과 같았다면 18표 차로 앨 고어 후보가 승리했을 테니 말이다. 물론 이것은 당시 각 지역의 정치성향이 지금과는 달랐다는 것은 무시하고 어디까지나 인구 구조로만 접근한 가정이다. 어쨌든 이런 변화는 2024년 대선에 나서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는 희소식이 될 것이다.

그런데 지구 온난화가 점점 더 빠르게 진행된다면 어떻게 될까? 에어컨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더위가 이어지면서 일상생활에 지장을 심각하게 받게 된다면 미국인들은 다시 남부에서 북부로 이동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정치 지형 역시 인구 변화와 맞물리며 새로운 양상이 펼쳐지지 않을까?

※ 유성운 - 중앙일보 기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403호 (202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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