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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 실세’ 논란 정윤회 - 은둔생활 벗고 정치 전면에 나서나 

박지만 미행 건, 국정개입 의혹 등 ‘면죄부’ 받으면 공식활동 재개할 수도 

‘그림자 실세’, ‘비선 실세’로 지목돼온 정윤회(59) 씨가 국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윤회 문건파동’의 당사자로 검찰에 출석하면서다. ‘정치인 박근혜’의 그림자로 살아온 그에게는 어떤 공식 직함도 없다. 정·관가에서 그를 본 사람은 드물지만,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박근혜 정부의 ‘은둔의 권력자’로 통하는 이유다.




▎청와대 ‘비선 실세’ 논란의 당사자인 정윤회 씨가 장막을 걷어내고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을 향한 공세를 정면돌파하겠다는 의지의 발로로 비쳤다. 지난 12월 10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한 정씨는 “이런 엄청난 불장난을 누가 했는지, 또 그 불장난에 춤춘 사람들이 누군지 밝혀지리라 생각한다”고 말한 뒤 조사실로 향했다.
지난 12월 10일 국민의 눈길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쏠렸다. 이날은 항간에 ‘비선 실세’, ‘그림자 실세’라 불리던 정윤회(59) 씨가 검찰에 출두하는 날이었다. 이에 앞서 정씨는 11월 28일 자신의 국정개입 의혹 문건을 보도한 〈세계일보〉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그는 고소인 신분이자, 새정치민주연합이 국정농단 의혹을 제기하며 그를 고발함에 따라 피고발인 신분이기도 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취재진 앞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는 이날이 처음이었다.

수많은 취재진 앞에서 정씨는 “국정개입 의혹은 사실이 아니다”, “이런 엄청난 불장난을 누가 했는지, 불장난에 춤춘 사람들이 누구인지 다 밝혀지리라고 생각한다” 등 자신의 주장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취재진의 질문 공세에도 주눅 들거나 움츠리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한 표정과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는가 하면 카메라도 응시했다.

2004년 이래 박근혜 의원의 ‘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나 공개석상에서 자취를 감춘 정씨의 등장은 세인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당시 그를 취재했거나 정당과 회관에서 식사라도 같이한 이들의 반응은 “예전과 외모는 거의 변하지 않았네”로 압축된다. 당시에도 정씨는 이른바 ‘응대력’이 돋보였다고 한다. 기자와는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적당히 밀고 당기는 수완이 뛰어났다는 것이다. 초선 의원의 보좌진 시절부터 의원회관 내 돌아가는 얘기나 중앙당 고위당직자들이 박 의원을 빗대어 한 얘기의 줄거리를 꿰고 있었다고 알려질 정도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 정씨를 요즘 온 국민이 주시한다. 일부에서는 문건 파동에 대한 검찰수사가 마무리되고 후유증이 가라앉을 즈음 그가 공개적인 활동에 나설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그의 한 지인은 “정윤회 씨는 자신이 사람을 시켜 박지만 회장을 미행했다는 〈시사저널〉 보도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이 마무리 되면 공개적인 활동에 나설 의향을 내비쳤다”고 말했다. 그가 공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아니면 자연인으로서 사회활동을 하게 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일수록 정치인으로서의 욕망을 ‘커밍아웃’하는 순간이 오리라고 본다. 일련의 문건 파동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청와대 핵심 인사들과 아주 오랜 인연의 끈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대통령에게 누가 될까 봐) 그동안 청와대 인사들과 연락을 끊고 살았다”고 주장했다. 검찰을 통해 자신의 결백이 입증됐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장막 뒤의 삶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그의 개인 신상에 대해서는 아직도 대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지금은 야인이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정계입문(1998년)부터 한나라당 대표 취임 시점(2004년)까지는 비서실장으로 활동했다. 국회·정당·언론과의 접촉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문건 파동이 터져 나온 최근까지도 출생지, 직계존속, 졸업한 대학은 물론 2004년 이후의 삶이 라든가, 박 대통령과의 최초 만남 등에 대해서는 변변히 알려진 게 없다. 그나마 공개된 신상도 언론을 통해 직접 밝힌 게 전부다. 어떻게 보면 신비롭다는 이미지까지 풍기는 이가 바로 그다.

그의 본적은 강원도 정선군이다. 성장 배경이 어떠한지는 알려진 게 없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서 성장했다고 하지만 확인되지 않는 관측에 머문다. 출생 연도도 1954년, 1955년 등으로 분분했으나 주민등록상으로는 1955년생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한때 서울고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이마저도 근거 없는 관측에 불과했다. 정씨는 종로구 내수동에 있었던 보인중학교와 보인상업고등학교(현 보인고) 출신(1974년 졸업·30회)이다. 중학교 땐 역도선수를 지냈다고 한다. 실제 보인상고 30회 졸업생 중에 ‘정윤회’란 인물이 있다.

출신부터 이력까지 베일에 가려진 인물


▎박근혜 대통령의 의원시절 비서실장 역할을 한 정윤회(왼쪽) 씨와 전 부인 최순실 씨가 이혼 전인 2013년 7월 서울 근교의 한 공원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 뒤 행적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1981년(26세) 8월 대한항공 보안승무원으로 입사했다. 퇴사 시기는 1980년대 후반이라고 추정될 뿐 확인되진 않는다. 고교 졸업과 취직 사이 7년은 대학과 군대를 다녀온 시기로 추정된다. 정씨는 지난 7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대학원까지 졸업했는데 구체적 학력을 밝히지 않는 건 불필요한 잡음을 피하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이후 1993년 3월 경희대 경영대학원에서 관광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유학설도 흥미롭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한 언론에서 “정씨가 ‘독일에서 유학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자기가 독일 유학을 갔다 왔다고 말해서 그렇게 알고 있었지 어느 대학인지 물어보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는 대한항공 재직 시절 최순실(58·최서원으로 개명) 씨를 만났고 한참 뒤인 1995년(40세) 결혼한 걸로 알려졌다. 승마국가대표인 딸 유연 씨는 1996년 10월 말에 태어났다. 최씨는 박 대통령이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했던 시기의 측근 최태민(1912~1994)씨의 딸이다. 최씨는 1979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서거 이후 청와대를 떠나 야인으로 돌아온 박 대통령의 유일한 말벗이었다고 전해진다. 2006년 지방선거유세 때 박 대통령이 신촌로터리에서 괴한에 피습 당하자 지극 정성으로 간호를 도맡아 한 이도 최씨다. 최씨가 박 대통령과 정씨의 연결 고리 역할을 했으리라는 추론이 나오는 배경이다.

정씨는 박근혜 의원의 비서실장 시절 주변에 자신의 얘기를 간헐적으로 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자신의 취미는 승마·요트·사격이고, 서울 강남의 가라오케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노래를 부르고 나면 꼭 팁을 남기는 스타일로 인해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추론을 낳았다. 정씨의 지인은 나아가 “정윤회 씨는 부친이 의사여서 돈 문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고 주변에서는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아주 고가의 외제 오토바이 애호가로 수년 전엔 큰 사고를 당해 병원신세를 졌다고도 한다.

정씨는 사람들과 만나면 가끔 술자리를 즐긴 편이었던 듯하다. 그와 술자리를 함께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술값은 정씨가 낸 것으로 기억한다. 그와 자주 만났다는 A씨는 “술값은 대부분 정씨가 냈다. 정씨가 강남 등지에 부동산을 많이 갖고 있어서인지 부담 없이 냈다”고 말했다.

정치 입문 전 다양한 직업 전전

정씨는 정치에 입문하기 전까지 꽤 다양한 직업을 거쳐온 듯하다. 1980년대 후반 대한항공을 퇴사한 이후부터 1991년 9월 얀슨커피숍을 열기까지 2~3년가량의 행적은 묘연하다. 정씨는 청담동에 얀슨커피숍을 차려 놓고 빵과 음료 등을 함께 파는 현대식 제과제빵점을 운영했다. 얀슨은 1994년 6월 주식회사로 등기됐다. 당시 39세 나이였던 정씨는 ㈜얀슨의 대표이사를 맡았다. 얀슨은 커피 및 커피기계의 수입·판매, 승마장업, 체육관련용품 수입·판매, 휴게실업 등의 업종을 신고했다.

2001년엔 교육디지털콘텐츠 제작·유통·판매·컨설팅, 도서 출판 및 판매 등으로 업종을 바꿔 신고했다. 그 후로도 의류 및 가구의 수입·판매업, 국외 이주자 모집·알선, 이주신고 대행, 이주 상담 및 안내 등의 업종을 신고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풍운’이라는 일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정씨는 1998년 박근혜 의원이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면서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에는 보수가 없던 입법보조원으로 국회에 등록했다. 박 대통령은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당시 정씨를 “전직 입법보조원”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그를 ‘박근혜 의원 비서실장’으로 기억하고 호칭도 ‘실장’으로 부른다. 무보수 입법보조원이지만 모든업무를 관장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정씨를 자주 만났다는 B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당시의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다. “입법보조원이었던 정씨를 지금의 인턴 정도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박근혜 보좌진의 좌장 역할을 해온 ‘비선 비서실장’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가 사실상의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 박근혜 의원실 보좌진 4명을 채용했다. 지금의 청와대 3인방(이재만 총무·정호성 제 1부속·안봉근 제2부속비서관)이다. ‘비선 권력’ 얘기가 나올때마다 그는 어김없이 제일 먼저 거론된다.”

B씨는 정씨가 박 의원의 정책 관련 업무도 관여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어지는 설명이다. “박 의원이 대정부질의 같은 의정활동을 할 때 정 실장이 가끔 자문 교수단으로 알려진 외부 싱크탱크 같은 곳에서 자료를 만들어와 박 의원에게 제공해온 것으로 안다. 이런 연유로 정 실장이 의원실에서 나간 이후에도 ‘논현동팀’, ‘삼성동팀’, ‘강남팀’ 등 유사한 외곽조직을 운영하면서 박 의원을 돕고 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돌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박 대통령과 함께 여의도에 입성할 당시부터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를 꿈꿨다. 1998년 국회에서 그를 만난 사람들의 기억이 그렇다. 정씨는 언론인이나 다른 의원실 관계자들과 가까워질 즈음엔 슬쩍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의 기억은 이렇다. “정씨는 박근혜 의원이 국회의원 배지 몇 번 달려고 정치에 몸담은 게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목표가 뭐냐고 물으면 빙긋이 웃고 말더라. 누가 봐도 대통령을 염두에 둔 표정이었다. 아무리 전직 대통령의 딸이지만 꿈도 야무지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 박 대통령은 1998년 정계 입문 이후 치러진 세 번의 대선에 모두 출마 선언을 했다. 정계에 입문한지 불과 4년 뒤에 치러진 16대 대선을 앞두고서도 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 2007년과 2012년에도 연달아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3수 끝에 월계관을 머리에 썼다. 이런 이력을 놓고 보면 박 대통령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정씨도 그리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처음부터 잘 설계된 청사진에 따라 국회에 들어와 참모진을 구성했고, 지금 청와대의 주인을 만들어낸 이가 바로 정씨다.

아무리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이라도 이 정도의 경력이라면 현 정권 창출에 일정한 지분을 가졌다는 생각을 갖게 마련이다. 정씨가 언젠가는 정치의 전면에 나서 ‘마이웨이’를 외칠 수도 있다는 관측도 그래서 나온다.

측근 K씨 “정윤회는 반듯하고 소탈한 사람”


▎정윤회 씨는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됐을 때부터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를 꿈꾸어왔다고 전해진다.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서 압승한 한나라당 박근혜 당선자가 1998년 4월 3일 오전 화원읍 거리에서 시민들에게 당선인사를 하고 있다.
정씨의 최근 행보도 조금씩 과감하고 공개화되는 인상이 짙다. 언론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은 공개 모임에 보란 듯이 참석하고 있다. 바로 8월 13일 독도에서 열린 ‘보고 싶다 강치야’라는 콘서트다. 박 대통령의 공식 팬클럽인 ‘호박가족’ 회원들과 함께했다. 독도 입도허가서에는 본명이 아닌 ‘정윤기’라는 이름을 기재했다. 이 행사는 박 대통령의 팬클럽 ‘호박사랑’의 대표이자 성악가인 임산 씨 쪽이 주최했다.

정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임산이라는 사람이 옛날부터 알던 친구고, 자기가 행사 하는 데 가서 바람이나 쐬자고 해서 갔던 것”이라고 말했다. 가명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에 대한) ‘7시간 사건’ 때문에 하도 말이 많은데 내 이름을 걸고 다니면 되겠느냐 했더니, 그 친구가 배려 차원에서 (이름을) 바꿔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문제가 될 게 걱정돼 가명을 쓸 정도라면) 아예 가질 않죠”라고 덧붙였다.

최근 정씨와 접촉한 이들의 발언을 모아보면 그의 향후 행보를 어렴풋이 추측해볼 수 있다. 정씨와 함께 독도에 간 것으로 알려진 옛 직장 동료 K씨는 정씨에 대해 “반듯한 후배”라고 말했다. K씨는 대한항공 승무원 출신으로 대통령 전용기 승무원으로도 일했고,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 당시에는 미스코리아 출신 도우미들과 함께 독일 바덴바덴에서 홍보요원으로 활약했다. K씨는 세월호 참사 당일인 4월 16일에도 정씨와 서울 강남에서 저녁을 같이한 것으로 검찰조사에서 밝혀졌다. K씨는 정씨를 부를 때 항상 ‘우리 후배’라는 호칭을 썼다.

다음은 K씨가 〈월간중앙〉에 전한 정씨의 평가다. “우리 후배 정 실장은 성실하며 배울 게 많은 아주 괜찮은 사람이 확실하다. 성격도 소탈해 옛날 동기들과 만나면 양곱창이나 순대국에 소주 한잔 걸치는 게 전부다. 우리 후배 정 실장은 집 밖에도 잘 나가지 않고 거의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그걸 아는) 주변의 친한 지인들은 (이번 사태를) 매우 안타까워한다.” 정씨가 세월호 참사 당일 만난 역술인 이세민 씨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씨가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배울게 많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설명한다. 친박계 관계자들도 정씨를 일러 “박 대통령 만들기에 그 정도로 공헌한 사람이라면 국정운영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고 싶다는 욕구를 가질 법하다”고 말한다. 반면, 정씨가 공개적인 활동을 하기에는 아직 걸림돌이 많다는 시각도 있다. 그가 공식활동을 시작하면 최태민 씨와의 관계, 재산 문제 등 언론의 검증이 본격화될 수도 있다. 또다시 ‘과거사’ 문제가 불거진다면 박 대통령에게도 정치적 부담을 주게 된다. 정씨의 최종 선택이 궁금해진다.

- 최재필〈feel04@joongang.co.kr〉·김포그니 월간중앙 기자

201501호 (201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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