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북한.국제

Home>월간중앙>정치.사회.북한.국제

정밀취재 | ‘안철수 현상’ 소멸의 비하인드 스토리 - “안철수, 나홀로 ‘갈라파고스’섬에 갇혔나” 

‘새정치’ 내걸며 화려하게 등장, ‘사람 정치’엔 실패했다는 게 중론… 3년 정치 인생의 현주소 입체 추적 

김포그니 월간중앙 기자
2014년 한 해 동안 여의도에서 부침이 가장 도드라졌던 정치인을 꼽자면 당연 안철수 의원이다. 한때 40% 대에 육박했던 안 의원의 지지율은 지금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그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인사들의 전언을 통해 안철수 현상’의 생성과 소멸 과정을 재구성했다.

▎2012년 11월 23일 18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안철수 후보가 서울 공평동에 위치한 캠프 기자실에서 열린 사퇴회견 중,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다. 당시 40% 대에 육박하던 그의 지지율은 2년 만에 7% 대로 떨어졌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이 2014년 12월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 전국 성인 1005명을 대상으로 차기 정치지도자에 대한 선호도 조사를 실시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18%로 선두를 달렸고, 문재인 의원(13%)이 그 뒤를 따랐다. 이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7%), 안철수 의원(7%), 김문수 새누리당 보수혁신위원장(6%), 정몽준 전 의원(6%), 홍준표 경남도지사(4%), 안희정 충남도지사(3%) 등이 차례로 지지를 받았다.

이런 걸 격세지감이라고 하는 걸까? 2011년 10월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 출마를 고려한다’는 한마디로 일약 유력한 차기 지도자로 떠올랐던 안철수 의원은 지금은 간신히 명함을 내미는 수준으로 뒷걸음질했다. 18대 대선 당시 40% 대에 육박하던 지지율이 2년 만에 7% 대로 크게 내려앉은 것이다. 이제 ‘안철수 현상’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다.

2014년 4월 노원 병 재보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승리해 원내 입성할 당시 그는 유력한 차기 주자로 자리매김하는 것처럼 보였다. 2014년 3월 제1야당인 민주당과 안철수 신당인 ‘새정치연합’이 합당할 때도 그는 정치권 ‘태풍의 눈’으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합당으로 탄생한 새정치민주연합의 공동대표라는 막강한 자리는 덤으로 주어졌다. 그로부터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그는 ‘고만고만’한 차기 주자 중의 한 명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안 의원 주변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그 많던 사람들이 지금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무소속에서 야당으로 말을 갈아탄 그의 정치적 선택이 패착이었을까? 위기국면일수록 더 똘똘 뭉쳐 든든한 울타리가 돼주는 친위부대의 부재가 몰락을 재촉한 걸까? 사유야 어떻든 안 의원은 ‘게(지지율)도 구럭(인맥)’도 다 잃은 외로운 처지로 내몰렸다. 언제부터인가 안 의원 주변에는 평소 보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기성 정치판에 새정치를 구현하겠다던 인적 네트워크가 사실상 와해된 것이다. 이를 두고 안 의원 주변의 인사들은 “안 의원을 따르던 대중과 정치 엘리트가 거의 동시에 심정적으로 등을 돌렸다”고 말한다. ‘안철수 과외교사’로 알려진 고원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안철수 현상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고 고개를 저었다.

안철수의 새정치는 ‘그림자 정치’?

일각에서는 안 의원이 인맥 구성의 첫 단추를 잘못 뀄다고 지적한다. 각계로부터의 다양한 인재를 끌어 모으기보다 몇몇 지인에 의존하는 경향을 패인으로 지적한다. 실제로 항간에는 ‘안철수의 사람은 곧 박경철의 사람’이란 말이 떠돌기도 했다. 심지어 안 의원의 정치 입문도 박경철 안동신세계연합클리닉 원장의 작품이라고 보는 이가 적지 않았다. 안 의원의 핵심 측근 A씨는 2014년 6월 중순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예상했다시피 안 의원이 정계로 나오게 된 건 박 원장의 권유 때문이다. 박 원장이 안 의원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안 의원의 부인 김미경 씨가 극력 반대했다. 박 원장이 결국 김씨도 설득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그들 관계는 막역하다.”

이후 안 의원 인적 네트워크 구성은 박 원장의 손에서 시작됐다는 게 ‘안철수 진영’의 정설로 자리 잡기도 했다. 박선숙 전 민주통합당 의원, 유민영 전 안철수 캠프 대변인, 곽수종 새정치연합 총무팀장과 사공정규 동국대 의대 교수 등이 박 원장의 추천으로 등용된 대표적 인사로 알려졌다. 곽수종 팀장의 경우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정연) 창당 합의 과정서 안 의원의 ‘집사’ 역할을 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출신으로 18대 대선 전부터 안 의원과 교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친목·공부 모임인 ‘고인물 모임’에 박 의원이 뒤늦게 합류시킨 멤버다.

당시 안 의원 참모들 사이에는 ‘곽박’(곽수종·박경철)이란 용어가 있었다. ‘곽박’ 두 사람이 안 의원의 선택에 입김을 불어넣는다는 걸 빗대서 한 말이었다. 박선숙 전 의원은 지금도 안 의원의 가까이서 조직관리 조언을 하는 몇 안 되는 측근이다. 앞서의 A씨는 “박 전 의원은 대선 이후 은인자중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여전히 안 의원을 보좌하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박 원장도 과거 박 전 의원에게 정무적 판단을 협의하곤 했다는 것이다. 이는 박 원장이 안 의원 주변에 배치한 인맥을 통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한 방증으로 언급됐다. 야권 일각에선 이를 ‘그림자 정치’로 불렀다.

물론 박경철 원장은 2014년 3월, 새정연 출범 당시에도 자신의 역할론을 강하게 부인했다. 박 원장은 한 사석에서 “합당에 관여한 측근 상당수를 내가 소개했다는 보도는 소설”이라며 “소문을 확인도 않고 쓴다”고 펄쩍 뛰었다. 그는 이어 “안철수 의원은 이제 홀로서야 한다”며 “과거 안 의원은 항상 나하고 ‘2인3각’이라는 느낌을 줬다. 이제는 그래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안 의원 주변에서는 박 원장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A씨는 “이런 ‘그림자 정치’로 인해 대선 당시 안 의원과 동고동락했던 핵심 인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떨어져 나갔다”고 말했다.

설령 안 의원의 ‘친구’로 통하는 박 원장이 인재를 대거 천거했다고 한들 그게 큰 허물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양당 체제에서 안 의원과 궁합이 맞는 능력 있는 인사라면 많을수록 좋다. 더 큰 문제는 안 의원이 측근과 참모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고 안 의원의 측근 B씨가 말했다. 그는 “인재 등용의 루트를 다양하게 확보하지 못한 잘못도 있다”면서도 “그렇게 모인 주변 인사들과 따로 노는 안 의원의 독특한 행보가 조직 내부의 실망감을 더 키웠다”고 지적했다.

“부하직원과 일하나?” 합의적 판단의 부재


▎2011년 8월 고양시 일산아람누리에서 안철수 교수(오른쪽)와 박경철 원장이 대담 형식으로 ‘청춘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다. 야권 일각에서는 한동안 안철수 의원의 정치 입문이 박 원장의 작품이라고 보는 시각이 퍼져 있었다.
안 의원은 주변과 흉금을 터놓고 상의하는 일이 드물었다고 한다. 측근들조차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안 의원이었다는게 야권 전반의 시각이다. 안 의원 본인의 ‘샤이(shy)한’ 캐릭터도 인맥 와해의 한 이유라는 것. 현재 ‘안철수 멘토’로 불렸던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과 이태규 전 청와대 비서관, 김성식 전 새누리당 의원, 고원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하승창 진심캠프 대외협력실장, 김민전 경희대 교수, 전성인 홍익대 교수, 사조직인 ‘고인물 모임’ 원년 멤버 대부분이 안 의원의 곁을 떠났다. 윤 전 장관, 김 전 의원의 경우 새정연 합당 관련 의논 과정에서 배제된 것이 ‘결별’의 한 이유가 됐다. 이 밖에도 송호창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조광희 변호사, 강인철 변호사 등도 안 의원과 거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테면 참모진들과의 수평적 토론은 뒷전이고 하부조직인양 건의를 받아 선택하는 방식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윤여준 전 장관은 이미 2014년 5월 초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안 의원은 자신이 아이디어를 내기보다는 참모진에게 보고받는 걸 선호하는 편”이라며 우려를 나타낸 적이 있다. 정치인이라면 토론에 익숙해야 하는데 안 의원이 평소 자기 속 이야기를 잘 안 하다 보니 남도 설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람 자체로는 참 좋은데 기업인 출신이라 그런지 주변 측근으로 하여금 정신적인 동지의식을 갖게 하는데 서툴렀다는 말도 나온다. 윤 전 장관은 “정치지도자는 고난을 같이 할 사람을 주변에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도 못하더라. 그렇다고 기업인 출신인 ‘MB’(이명박 전 대통령)처럼 이해관계를 조건으로 참모진을 설득하는 것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리더였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2014년 초 민주당과의 합당은 안 의원에겐 시련의 시작이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참모를 잃어 뼈아픈 손실이 됐다는 게 내부의 평이다. 안 의원의 멘토 출신인 C 교수는 “안 의원에게 ‘동료’의 개념이 자리 잡으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며 일화를 소개했다. 합당 당시 안 의원이 ‘선(先)결정, 후(後)논의’의 진수를 보여줬다고 한다. 이를테면 안 의원의 복심으로 알려진 ‘곽·박’조차도 합당 과정에서는 주도적 역할을 하기보다 돌아가는 정보를 아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안 의원이 2013년 8월부터 약 다섯 달 동안 공들여 ‘새정치연합’ 의장으로 영입한 윤 전 장관은 합당 과정에서 완벽히 소외됐다. 때문에 윤 전 장관은 합당 발표 직후 안 의원을 향해 극도의 실망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안철수 신당을 준비하던 새정치연합 내부도 발칵 뒤집혔다. 민주당과의 합당을 통보 받은 새정치연합 내부는 충격과 허탈 그 자체였다. 평소 안 의원은 ‘제3지대에서의 신당 창당이 새정치’라고 강조했다. 자신의 말을 뒤집음과 동시에 동료들을 따돌리고 밀실 합의를 해버린 셈이다. 그 충격은 합당의 대의마저 손상케 했다. 그 결과 윤 전 장관을 비롯한 새정치연합 지도부 대부분이 연락 두절됐고 공개적으로 사퇴 의사를 밝히는 이들도 등장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안 의원은 2014년 3월 12일 영상편지를 통해 민주당과의 신당 창당 과정을 해명했다. 그러나 “참모나 측근을 마치 안철수연구소 부하직원인양 대하는 모습이 항상 염려스러웠다”는 인식이 안 의원 주변에 여전히 존재한다.

이런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안 의원은 제1야당 공동대표에 취임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성공한 정치인의 행로를 밟는 듯했다. 하지만 평온한 시절은 몇 달을 못 갔다. 2014년 7·30 재보궐선거가 야당의 완패로 막을 내린 것이다. 안 의원의 선택도 빛을 바랬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안 의원은 조직기반으로 성장해온 사람이 아니라 대중적 열망, 엄밀히 말하자면 여론조사 지지율로 여기까지 왔다”고 성장 과정을 되짚었다. 그는 “자기 몸에 맞지 않는 옷인 조직과 공천 개혁 등으로 돌파하려 했으니 성공하기 어려웠던 것”이라고 안 의원의 패인을 분석했다.

‘사람 정치’의 실종… 삼고초려하면 뭐하나


▎2013년 5월 22일 서울 서교동 창비빌딩에서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당시 무소속인 안철수 의원의 ‘싱크탱크’격인 ‘정책네트워크 내일’ 이사장으로 영입된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그러나 최장집 교수는 그로부터 80여 일 만에 안 의원의 곁을 떠났다.
손학규 전 민주당 고문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에서 민주당으로 말을 갈아탔다. 안 의원과는 ‘외부에서 민주당으로 영입됐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손 전 고문은 2014년 안 의원이 민주당과의 합당이라는 결단을 내리자 각별한 당부를 했다고 한다. 그는 6월 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일단 민주당의 대표가 된 이상 민주당 전체가 다 내 식구라는 자세를 갖고 사람을 품어야 한다”고 자문했다. 그는 또 정치하는 방법론과 관련해서도 “얼굴이 새로운 게 새정치가 아니라 그 정치의 내용이 민주주의 기본을 제대로 지키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안 의원이 새정연에 합류한 지도 거의 1년이 돼간다. 민주당 내부에서 관찰된 그의 ‘사람 정치’는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 C교수는 “안 의원은 상대가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도와달라는 읍소를 잘한다”고 설명했다. 일례로 안 의원은 최근에도 장하성 교수를 붙잡으면서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이를 두고 C교수는 “정작 내 사람이 되면 책임을 안 지니, 누가 그와 함께하려고 하겠느냐”고 안 의원의 용인술을 비판했다. 특히 정치의 때가 덜 묻은 학자들, 이를테면 정책 자문을 맡은 교수들 중에 꽤 많은 이가 안 의원의 이런 행태 때문에 낙심하고 떠났다고 한다. ‘십고초려’ 끝에 영입한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대표적인 사례다. 최 교수는 정책네트워크 ‘내일’의 이사장에 영입된 지 80일 만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최 교수의 한 측근은 “안 의원은 최 교수만 영입하면 알아서 창당 기반이 척척 마련될 것으로 기대한 것 같다”면서 “노(老) 교수가 어렵사리 도와주러 왔더니 식사, 차비며 모든 비용을 모른 채 했다”고 뒷얘기를 털어 놓았다. 이사장직으로 영입해놓고 최소한의 재정적 보조도 없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최 교수가 아주 힘들어했다”는 게 이 측근의 주장이다.

이와 관련 안 의원 측근이었던 B씨는 “(안 의원은) 쉽게 말해 사람 관리라는 걸 모른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과거에도 최 교수의 사례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안 의원이 대선을 치르고 난 뒤 생업을 중단하고 자신을 도와준 이들과 식사하는데 ‘더치페이(비용 각자부담)’를 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던 것. B씨는 “당시엔 그 같은 행동이 당황스러우면서 신선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도리에 어긋난 행동이었다”라고 말했다. 윤여준 전 장관도 “그와 지내보며 느낀 건 안 의원은 여태껏 주변으로부터 떠받들어져 살아왔고, 그게 익숙한지 자신을 도와주러 온 이들은 귀히 여길 줄 모르는 것 같았다”고 소견을 밝혔다.

윤 전 장관은 새정연 합당으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안 의원의 만남 요청을 수 차례 거절하다 7·30 재보선 공천을 두고 안 의원과 만났다. 윤 전 장관이 각별히 아끼는 이태규 전 청와대 비서관의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윤 전 장관은 “이태규 전 청와대 비서관은 꼭 챙겨달라고 어려운 부탁을했다”며 “그럼에도 공천에서 떨어지고 말았다”고 말했다.

안 의원의 ‘사람 관리’는 최근에까지도 구설에 올랐다. B씨는 지난 10월 안 의원의 빙부상에서 벌어진 일화를 소개했다. 빙부상 때 안랩(Ahnlab)의 일부 직원이 빈소가 있는 여수까지 내려와 일손을 거들었다. 안랩은 안 의원이 설립한 회사로 현재 최대 주주(지분율 18.6%)로 있다. 물론 안랩의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빈소를 찾았을 수 있다. 하지만 공직에 있는 정치인이라면 과거 부하직원들의 성의를 정중하게 거절하는 감각도 갖춰야 했다는 게 B씨의 지적이다. “옛 직장 부하까지 동원돼야 할 정도로 안 의원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그는 일침을 가했다. 이 같은 상황은 그도 은연 중에 ‘새정치’에 역행하는 특권의식에 젖어 있다는 비판을 부를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반성이 필요한 대목이다.

“안철수 이름 팔고 다니지 말라”는 주문 ‘황당’


▎2014년 1월 8일 대구시 중구 남일동의 한 카페에서 열린 새정치추진위원회 대구광역시 설명회에서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과 안철수 의원이 자리를 함께했다. 윤 전 장관은 새정치 신당 창당 작업을 진두지휘하다 새정치연합과 민주당이 합당하자 안 의원과 결별했다.
안 의원이 외부의 시선에도 둔감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지난 5월 중순 안 의원의 지인 D씨는 안 의원과 참모들이 사용하는 온라인 메신저의 단체대화방에 들어가서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안 의원이 ‘(내 이름을 팔아) 자기 장사하는 사람들 다 알고 있다’는 내용의 경고성 글을 올려놓았던 것이다. 훗날 D씨는 기자에게 “그때는 안 의원의 인기가 이미 바닥을 달릴 즈음”이라며 “안 의원 입장에선 주변 참모진들을 격려하고 감싸도 부족할 시기였다. 아직까지 상황 파악을 못한다는 생각에 미치자 사람이 좀 우스워 보였다”고 돌이켰다.

지난 11월 초에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 대선 때부터 안 의원과 함께 했던 원년 멤버들도 대거 이탈하고, 안 의원에게 애정을 가진 핵심 참모들도 알게 모르게 결별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런데 안 의원실 측의 한 인사가 당직자들을 상대로 ‘안철수 이름을 팔고 다니지 말라’는 내용의 글을 온라인 단체 대화방에 올린 것이다. 대다수의 참모가 안 의원과 거리를 두려는 상황에서 ‘눈치’ 없는 글이 올라오자 다들 황당해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D씨는 “이때는 원년 멤버 대부분이 안철수 의원실 출신으로 불리는 것조차 기피했다”면서 “그렇게 분위기 파악을 못해서야…”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 밖에도 많은 이가 안 의원의 자기중심적 사고를 걱정한 것으로 확인된다. ‘새정치연합’ 시절 안 의원의 정책 조언 담당을 맡았던 한 인사는 “18대 대선 당시만 해도 안 의원은 브레인스토밍(Brain storming)에 능하다고 알려졌다”면서 “그런데 언제부턴가 자기 뜻대로 결론을 내리는 모습에 실망감이 앞섰다”고 전했다. 이 인사는 안 의원이 국회에 들어온 직후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안 의원이 한 정책토론회를 앞두고 발제자에게 사전 설명을 요청했다고 한다. 안 의원에게 평소 호감을 가졌던 발제자는 안 의원이 토론에 그만큼 열정을 갖고 있으려니 해서 요청에 응했다. 사전발제가 끝나자 안 의원으로부터 뜻밖의 전갈이 왔다. 발제문의 일부를 수정해달라는 것이었다. 안 의원이 ‘자기 생각에 맞춰달라’는 주문을 완곡하게 해오자 이 발제자는 결국 기분이 상했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토론회라는 게 뭔가. 각기 자기 의견과 논리를 기탄없이 말하는 장 아닌가? 발제자가 어떤 의견을 내놓더라도 그때그때 반론을 제기하면 그만인 것을 발제문을 수정하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한때 대중으로부터 새정치를 구현할 ‘정도령’으로 각광받았던 안 의원이 어떤 때는 자신만의 ‘갈라파고스섬’에 갇혀버린 모양새를 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 이유다.

경제개혁으로 방향 튼 새정치


▎2014년 2월 20일 당시 김한길 민주당 대표와 안철수 새정치연합 의원이 국회 귀빈식당에서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공약 이행을 촉구하는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두 사람은 그로부터 한 달여 뒤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의 합당을 전격 발표했다.
안 의원은 요즘 경제이슈에 푹 빠져 있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정치개혁’에서 한 발 물러섰다. 그는 최근 “정치개혁을 들고 나온 것에 후회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도 논란을 불렀다. 이에 안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새정치를 정치개혁에 국한하지 않고 경제와 교육 등 국민들의 구체적인 먹고 사는 문제가 중심이 되도록 했다면 국민들과 더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취지였다”고 해명했다. 이후 안 의원은 자신의 전문분야인 ‘경제’와 ‘교육’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당 대표에서 물러난 이후 처음으로 가진 정책 토론회에서 ‘다가올 40년 장기불황, 한국경제 해법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면서 “우리 정치가 국민에게 해주지 못한 일을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는 후문이다. 이처럼 안 의원은 ‘경제개혁’에 몰입하며 전문 콘텐츠를 가진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 극대화 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주변에서는 안 의원의 인문학적 소양을 노골적으로 의심하는 기류가 감지된다. 한 측근 인사는 내부 회의석상에서 안 의원이 선도적으로 어떤 착상을 제시하는 예를 거의 본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 인사는 “평소 성공기나 추리소설을 즐겨 읽은 데다 삶의 궤적을 따라가보면 늘 대우받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인데 어떻게 인문학적 고민이 삶에 스며들 수 있었겠느냐”고 되물었다.

학계에서도 안 의원이 과연 어떤 콘텐츠를 가지고 정치를 하려는 건지 의아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안 의원에게 정치 외교를 자문해온 교수진의 경우가 그렇다. 몇 달 전 ‘정책네트워크 내일’ 주최로 일명 ‘진보-보수 토론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윤영관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보수 패널로 이영훈 서울대 교수를 초대했고 안 의원도 자리를 함께하기로 했던 것. 그런데 이 교수가 뉴라이트 성향의 학자였다는 게 뒤늦게 도마 위에 올랐다. 안 의원 지지층의 52.2%(2012년 11월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진보 성향이었기에 뉴라이트 계열 학자를 보수 패널로 초청하는 게 온당한가에 대한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결국 안 의원은 주변의 만류로 토론회 불참을 선택했다.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를 표방하던 안 의원이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토론에 몸을 사리는 모습이 왠지 낯설어 보였다는 반응을 낳았다. 차라리 일부의 반발을 무릅쓰고서라도 자신의 역사인식을 당당하게 제시하고 동의를 구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안 의원의 말도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건국과 광복에 대한 역사적 견해를 놓고 말을 바꿨다가 지지층으로부터 반발을 샀다. 안 의원은 2012 대선후보 3인 역사관 검증 과정에서 이른바 ‘건국절 논란’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명박 정부에서 ‘건국 6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하면서 논란을 일으킨 것은 일본제국주의에 맞섰던 선열들의 희생을 부정하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다.(…) 대한민국 건국이 1948년 8월 15일이 돼서야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일본에 의한 독도 강점기간이 인정받을 수 있다는 근거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특정세력, 특정집단이 더 이상 이와 같은 그릇된 역사인식을 확산되지 않도록 대응해나가겠다.” 역사학계에서 ‘건국’이라는 표현은 주로 보수진영이, ‘광복’은 진보 내지는 중도 진영이 선호한다.

그랬던 그가 2013년 8월 15일 자신의 트위터에 “광복 68주년, 건국 65주년입니다”라는 글을 올려 지지자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안 의원이 쓴 ‘건국’이라는 표현은 2012년 대선 당시의 발언과 배치되는 대목이다. 이런 행보가 그의 역사인식을 비롯한 인문학적 소양에 회의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단초가 됐다.

“안철수, 국민의 열망을 다시 기억해야”


▎2012년 9월 20일 대선출마를 공식선언한 안철수 교수가 자신이 설립한 ‘안랩’에 들러 직원들의 응원에 손들어 답하고 있다. 현재 안 의원은 ‘안랩’의 최대 주주(지분율 18.6%)로 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갔다. 7·30 참패를 끝으로 새정연 공동대표에서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안 의원은 지난해 말부터 경제개혁으로 눈을 돌려 다시금 대중과의 교감에 나섰다. 호응이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박원순 시장, 문재인 의원에 이어 아슬아슬하게 3위를 기록하고 있는 게 현재 안 의원이 가진 성적표의 전부다. 대중들로부터 차츰 잊혀져가는 가운데 “‘새정치’, 잔치는 이제 끝났다”는 말이 안 의원 진영 내부에서도 스스럼없이 흘러나온다.

안 의원이 자신의 존재감을 다시금 드러낼 수 있는 비책이 있을까? 우선은 말보다 행동이 앞서야 한다는 게 핵심 참모들의 의견이다. 안 의원은 최근 지인들과의 사석에서 “나는 바뀐 게 없는데…, 사람들은 내가 바뀌었다고 한다”며 씁쓸한 심정을 토로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그의 핵심인사 일부는 “바뀐 게 없다는 게 문제”라고 되받아 쳤다. 원론적인 얘기를 그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핵심 인사들이 아무리 진심을 담아 충고를 해도 돌아오는 건 “제 본심은 변한 게 없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을 한번 다시 살펴봐야겠습니다”는 내용의 답변뿐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한 핵심 인사는 “반성만 하다 백발노인 될 기세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안 의원이 언제까지 ‘새정치’의 아이콘으로 국민의 뇌리에 기억될까? 정치권에서는 안 의원이 아닌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성식 전 의원은 정치판을 확 바꿔보자던 국민의 열망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제는 그 열망을 안 의원 테두리에 가둬서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변화를 바라는 국민적 욕구가 분명히 있다. 분명 안 의원이 아닌 다른 각도에서 이 열망을 실현할 기회가 또 올 것이다.”

야권의 차기 주자 선호도 3위를 달리는 안철수 의원. 미래는 모르는 일이지만 지금과 같은 페이스라면 3위의 자리도 위태롭기 그지없다. 해는 지고 길은 멀다. 시간은 더 이상 안 의원 편이 아닐 수 있다.

201501호 (2014.12.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