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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인간의 위대한 여정(19)] ‘종교적 인간’ 호모 릴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 

정교한 인문(人文)과 접신(接神)의 향연 

배철현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 교수
인류에겐 만물의 창조주 찾으려는 경향 존재, 무생물에도 욕망 투사…상징과 종교의 탄생은 인간의 ‘자연 개척정신’ ‘존재론적 자의식’과 결부돼

현생인류의 문화 창조가 석기혁명(石器革命)을 추동했다. 나투피아 마을의 사례는 최초 인간의 개척정신과 조직 결성을 증명한다. 궤베클리 테페 대역사(大役事)는 문명 세계의 발원을 상징한다. 기원전 수천 년경 채집활동에서 농경사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종교와 의례의 기원(基源)은 상존했다. 세계 도처에서 숨쉬는 거대 신전과 건축 유적이 이를 방증한다. 신과 인간의 공존, 그 광대무변한 소통의 시공(時空) 속으로 원시여행을 떠나보자.


▎궤베클리 테페의 유물들은 원시 종교의 탄생에 대한 시나리오를 전복한다. 쇼베동굴이 빙하 시대 구석기인들의 지하신전이었다면, 궤베클리 테페는 최초의 지상신전이다. 떠돌이 사냥- 채집인들이 거대한 신전을 건축하면서 거꾸로 종교의 필요성이 생겼다. 종교의 탄생이 오히려 농업과 다른 문명들을 일으키는 단초가 되었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이 발간된 지 12년 후인 1871년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이란 책에서 종교의 기원을 간단하게 설명한다. 상상력·경외심, 그리고 호기심 같은 중요한 지적 능력을 획득한 후, 인간에겐 자신의 주위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이해하려는 욕망이 생겨났다. 다윈은 멸절하는 만물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추측하기 시작한 것이 종교의 기원이라고 말했다. 다윈 세계관의 세례를 받은 현대인들조차 보이지 않는 신을 기꺼이 믿으려는 인간의 본성은 수수께끼다. 모든 인간사회에서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신들을 믿어왔다. 인간문명이 존재하는 곳에 종교가 있게 마련이다. 유럽 도시 곳곳에서 발견되는 중세의 고딕 성당, 마야인들의 피라미드, 고대 영국의 스톤헨지,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카바를 방문하면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신비와 매력에 휩싸인다.

종교도시와 종교건축물들은 종교가 인류의 문명과 얼마나 밀접한지 알려준다. 인류는 역사를 통해 정교한 종교건물과 의례를 구축하기 위해 막대한 재화를 사용했다. 종교는 인간의 생존과 번식에는 별 영향이 없음에도 인류문명과 문화의 태반이 되었다. 아직 과학자들 간의 일치된 의견은 없지만, 고고학자나 심리학자들은 종교의 기원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줄 수 있다. 종교는 사람들 간의 협동심을 함양하는 최적의 문화다.

의지와 상상력이 인간존재의 ‘생활 개척’ 원동력


▎고고학자 V. 고든 차일드(1892~1957)는 중동지방 에서 일어난 농업을 기반으로 한 혁신적 변화들 가운데 하나가 종교라고 말했다. 고든은 이 변화를 ‘신석기 혁명’이라는 용어로 불렀다. / 사진캡처·domusapientiae.wordpress.com
다윈의 종교에 대한 정의와 인간 마음에 관한 인지심리학적 연구를 기반으로 종교를 연구하는 ‘인지종교학’이라는 새 분야가 탄생했다. 인지종교학은 심리학·인류학·신경학을 동원하여 인간의 종교사상의 정신적 기반을 연구하는 분야다. 인간의 인지체계 안에 신과 같은 초자연적 주체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존재를 찾으려는 기능적 요소들이 있다. 종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정교한 사회성 인식 및 신장이다. 인간은 삼라만상을 그저 보지만 않고, 그 안에서 그것을 만든 주체를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무생물에게도 자신의 감정·욕망·의식을 불어넣으려 하며, 여러 문화에서 이런 경향이 종교로 등장한다. 종교는 인간이 복잡한 사회를 건설하면서 그 사회를 하나의 상징으로 엮으려는 특별한 시도다. 인류는 언제부터 ‘종교’를 갖게 되었을까?

종교는 인류가 농업을 발견한 후 등장했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1923년 호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한 고고학자 V. 고든 차일드(1892~1957)는 중동지방에서 일어난 농업을 기반으로 한 혁신적 변화들 가운데 하나가 종교라고 말했다. 고든은 이 변화를 ‘신석기혁명’이라는 용어로 불렀다.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던 고든이 ‘혁명’이란 단어를 농업에 붙인 이유는, 농업이 인류에게 근본적 변화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신석기혁명’은 세계 곳곳에서 다른 시기에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으로 일어났다. 고든의 연구는 기원전 1만 년에서 8000년 사이에 ‘비옥한 초승달’ 지역과, 기원전 8000년경엔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와 서부 태평양의 섬들이 흩어져 있는 멜라네시아의 쿡 지역에서 등장한 농업을 연구했다.


▎아부 후레이라(Abu Hureyra) 마을은 야생귀리를 개량하여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근처 무레이베트(Mureybet)와 텔 까라멜(Tell Qaramel)에서도 농업을 실천하고 있었다. / 사진캡처·memim.com
신석기혁명은 인간 문화의 모습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인류는 목초지를 찾아 떠돌아다니던 사냥-채집인에서 농업을 발견하면서 정착-경작인이 되었다. 그들은 정착생활을 통해 식물을 관찰하고 다양한 효능을 실험하여 재배에 성공했다. 인류는 동시에 염소·양·소와 같은 야생동물을 가축으로 사육했다. 인류는 소위 나투피아 시대(BC 1만250~BC 9500년)부터 야생 밀과 보리를 관찰했다. 야생 밀과 보리는 무르익으면 쉽게 흩어지고 힘이 없어 추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인류는 식물 교배를 통해 흩어지지 않고 추수할 수 있는 돌연변이 밀과 보리를 산출해내는 데 성공한다.

인류는 더 이상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필요한 만큼만 농사하기 시작했다. 인류는 마을을 만들기 시작했고, 더 많은 추수를 위해 관계수로 공사와 벌목을 감행했다. 인구는 증가하고, 효율적 생산을 위해 노동을 분화하고, 다른 마을과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 인류는 사람들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정치조직을 만들고, 지도자와 사제를 내정하여 중재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들에게 사후세계라는 관념이 생겨나자 종교가 지도자의 중요한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다. 특히 문자와 사유재산이 등장하면서 인류는 기원전 3300년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인류 최초로 수메르 문명을 구축했다. 수메르 문명은 석기시대가 끝나고 청동기시대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고든은 인류의 농업혁명이 불의 발견 이후 가장 위대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이것이 고든이 설명한 신석기혁명과 그 후의 과정들이다.


▎궤베클리 테페에는 세 지층이 있다. 가장 오래된 지층은 제Ⅱ지층으로, 한 개의 거대한 돌기둥이 T형태의 원형 구조로 서있다는 게 특징이다. 이 돌기둥들은 석회암 벽으로 연결되어 있고 원형 안쪽을 향하고 있다.
고든의 ‘신석기혁명’ 이론을 흔드는 고고학적 발견들이 있다. 첫 번째는 나투피아(Natufia) 마을(BC 1만250~BC 9500년)의 등장이다. 고고학자들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레바논·요르단, 그리고 서부 시리아에 이르는 지역에서 조그만 마을들의 흔적을 발굴했다. 이들 마을은 빙하기가 끝난 후 기후가 상대적으로 온화해지고 습해지자 야생 밀과 보리를 섭취하면서 마을을 형성해 거주했다. 고든은 농업혁명이 마을과 문명을 만드는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했다. 나투피아인들은 마을을 이루어 수백 명이 모여 살았지만, 그들은 농부가 아니다. 그들은 야생영양을 사냥하고 야생 귀리·보리·밀을 채집했다.

대부분의 나투피아 마을들은 온도가 영하 11도까지 떨어진 기원전 1만800년경에서 기원전 9600년까지 1200년 동안 지속된 소빙하기를 거치면서 정착생활을 지속하지 못하고 또다시 떠돌이 사냥-채집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시리아 북쪽에 위치한 아부 후레이라(Abu Hureyra) 마을은 야생귀리를 개량하여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근처 무레이베트(Mureybet)와 텔 까라멜(Tell Qaramel)에서도 농업을 실천하고 있었다.

나투피아 시대 마을들의 사례는, 농업이 먼저 등장하고 마을이 후에 형성되었다는 고든의 ‘신석기혁명’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나투피아인들은 마을 정착지를 먼저 형성하고 식량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농업기술을 발견했다. 나투피아인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던 곳에서 야생 농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가장 탁월한 생존전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농업이 현생인류의 삶을 바꾼 것이 아니라, 인류의 상상력과 의지가 오히려 농업을 발견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고든의 ‘신석기혁명’에 도전하는 또 다른 고고학적 발굴이 있다. 이 발굴은 종교의 기원을 알려주었다. 인류는 아직 농업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거나 한 곳에 거주하지 못했다. 이 발견은 인류가 경제활동을 사냥-채집 중심에서 농업-유목 중심으로 이전하는 과정에 등장한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이다. 바로 터키 남동부지역 산맥 정상에 위치한 궤베클리 테페(Goebekli Tepe) 유적지다. ‘궤베클리 테페’는 터키어로 ‘불룩한 언덕’이란 의미다. 주위 약 10㎞ 내에 아무도 거주하지 않았던 지역 가운데 우뚝 솟은 장소에서 신기한 건물들이 발견되었다. 이곳은 특히 고대 시리아의 수도였던 에뎃사인 산리우르파(Sanliurfa)라는 고대도시에서 북동쪽으로 12㎞ 거리에 있다.

인간의 사회문화적 변화가 농업혁명을 일으키다


▎궤베클리 테페는 하란평원 가운데 해발 760m 위에 지름 300m, 높이 15m나 솟아 오른 언덕이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 위에 건물을 짓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만든 언덕이다. / 사진제공·배철현
궤베클리 테페는 하란평원 가운데 해발 760m 위에 지름 300m, 높이 15m나 솟아오른 언덕이다. 이 언덕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 위에 건물을 짓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언덕이다. 이 언덕은 직경이 300m나 된다. 궤베클리 테페는 기원전 1만 년에서 9000년 사이에 형성되었다. 왜 인류의 조상들은 사방천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거대한 언덕을 구축하고 정교한 구조물들을 만들었을까?

미국 시카고대학과 터키 이스탄불 대학은 1963년 이곳을 처음 발굴하기 시작했다. 미국 고고학자 피터 베네딕트(Peter Benedict)는 이곳이 신석기 유적일 수 있다고 가정하였지만, 그 위에 비잔틴시대와 이슬람시대 무덤이 무작위로 덮여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곳에서 발굴한 수많은 부싯돌, 커다란 석회암 돌기둥, T자형 기둥들을 비잔틴시대의 무덤 표시라고 판단했다. 더구나 동네 주민들은 이 언덕에서 오랫동안 농사를 지었고, 이 ‘무덤표시’들은 집으로 옮겨져 무작위로 훼손됐다. 베네딕트 교수는 이 무더기 안에 숨어 있는 건축물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이곳을 본격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한 고고학자는 독일 고고학연구소 소속 클라우스 슈미트(Klaus Schmitt)다. 슈미트는 시카고 대학 고고학팀의 궤베클리 테페에 대한 고고학적 보고서를 읽고, 자신이 스스로 확인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1994년부터 2014년 사망할 때까지 줄곧 이곳을 발굴했다. 궤베클리 테베에 도착하여 흩어진 부싯돌과 T자형 기둥을 목격한 순간, 이들 유물이 비잔틴시대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오래된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는 이곳이 의례를 위한 신전이며 순례자들을 위한 신석기시대의 ‘메카’라고 생각했다.


▎인간문명이 존재하는 곳에 종교가 있게 마련이다. 마야인들의 피라미드,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의 카바 등을 방문하면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신비와 매력에 휩싸인다.
궤베클리 테페는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기원전 2500년)보다 7000년이나 앞서고, 영국의 솔즈베리 평원에 있는 스톤헨지(기원전 3000년)보다 6500년이나 앞섰다. 궤베클리 테페 건물은 인류가 건축한 가장 오래된 신전이다. 빙하시대 현생인류는 쇼베 동굴이나 라스코 동굴과 같은 지하에서 벽화를 통해 자신들의 종교성을 표현했다면, 빙하시대가 끝나고 유럽에서 남쪽 터키로 내려온 현생인류는 가장 높은 곳을 찾아 신전을 세웠다. 현생인류가 궤베클리 테페 신전을 지을 때 대부분은 식물을 채집하거나 야생동물을 사냥해 생존하는 조그만 유목집단 안에서 살았다. 그들이 이렇게 큰 건물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신전 건축자들은 놀랍게도 16t이나 되는 돌을 바퀴나 동물의 도움 없이 옮겨왔다. 인류는 아직 바퀴와 수레를 끄는 동물을 사육하지 못했던 시대였다.

고든을 비롯한 대부분의 학자는 지금까지 농업이 초기인류에게 음식과 시간의 여유를 선사하여 커다란 건물을 세우고 상징적 언어를 발전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궤베클리 테페는 인류문명의 구조와 시작에 관해 전혀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이들 건물을 건축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였고, 정기적으로 멀리서 이곳으로 ‘순례’ 오는 사람들을 위해 오히려 농업과 같은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었다는 것이다. 농업이 사회문화적 변화를 이끈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변화가 농업을 탄생시킨 것이다. 실제로 인류 최초의 농산품인 밀이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재배되었다. 궤베클리 테페가 실제로 기원전 9500년 전에 만들어졌다면, 상징과 농업이 소위 ‘비옥한 초승달’ 지역, 즉 요르단·레바논·이스라엘·시리아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전파되었다는 주장도 수정되어야 한다.

궤베클리 테페에는 세 지층이 있다. 가장 오래된 지층은 제 Ⅱ지층으로 토기가 등장하기 전 신석기시대 ‘A pre-pottery Neolithic A’(PPNB, BC 9500~BC 8000년) 기간이다. 대략 기원전 9500년으로 측정된다. 이 지층은 한 개의 거대한 돌기둥이 T형태의 원형 구조로 서있다는 게 특징이다. 이 돌기둥들은 석회암 벽으로 연결되어 있고 원형안쪽을 향하고 있다. 둘러싼 돌기둥의 아래는 의자처럼 생긴 돌무덤이 받친다. 돌기둥과 석회암 벽으로 형성된 10~20m 크기의 원형 가운데에는 두 개의 커다란 기둥이 박혀있다. 이것들은 인류가 제작한 최초의 거석들이다. 20개의 원을 그리며 모두 200개 돌기둥이 서있다. 가장 큰 돌기둥의 크기는 20t 무게에 6m 높이다. 돌기둥들은 바닥에 움푹 파인 구멍에 끼워졌다.

돌기둥에 새겨진 제단(祭壇)의 흔적


▎궤베클리 테페는 스톤헨지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졌다. 궤베클리 돌기둥은 스톤헨지와 달리 정교하게 다듬은 석회암으로 제작됐다.
돌기둥들은 모두 거대한 망치가 혹은 영어 대문자 T가 박혀있는 모습이다. 기둥들은 마치 사람이 양쪽 팔을 벌리고 서있으면서 아래 돌로 만든 벽으로 연결되어 있다. 제Ⅱ지층 위에 제Ⅲ지층이 드러난다. 제Ⅲ지층은 토기가 등장하기 전 신석기시대 ‘B pre-pottery Neolithic B’(PPNB, BC 7600~BC 6000년) 기간에 해당한다. 이 지층에는 커다란 돌기둥이 없고 규모가 작은 직사각형 건물들이 등장한다. 돌기둥의 수와 크기가 현저하게 줄었다. 대부분의 경우 중앙 두 개 기둥만 남아있다. 이들 중 가장 큰 것이 1.5m다.

제Ⅱ지층(PPNA)은 궤베클리 테베의 특징과 기능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고고학자들이 지하투과 레이더를 이용하여 조사한 결과, 원형 구조물은 기하학적 모형을 지녔고 특정한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궤베클리 전 지역에 널리 퍼져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10개 원형 구조물들을 발견했다. 이들 중 네 번째 원형구조물인 D는 신비한 궤베클리 테베 구조물의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여 그 기능을 추측할 수 있다.


▎궤베클리 테페엔 세 지층이 있다. 가장 오래된 지층은 제Ⅱ지층으로 토기가 등장하기 전, 신석기시대 기간인 기원전 9500년으로 측정된다. 거대한 돌기둥들이 T형태의 원형구조로 서있다는 게 특징이다. / 사진제공· 배철현
원형구조물 D는 지금까지 발굴된 구조물들 중 가장 크고 보존이 잘되어 있다. 두 개의 중앙 돌기둥이 11개의 작은 돌기둥에 둘러싸여 있다. 돌기둥들은 모두 T형태다. 대부분의 돌기둥들은 야생동물과 새들(두루미, 황새, 오리) 등을 그린 ‘얕은 부조물’로 장식되었다. 가장 흔히 등장하는 동물은 뱀이다. 그 외에도 멧돼지, 들소, 영양, 야생 당나귀, 그리고 몸집이 큰 육식동물들도 묘사되었다. 중앙에 서있는 두 개의 큰 돌기둥은 높이가 5.5m, 무게가 8t이다. 이 두 개 돌기둥은 주위를 둘러싼 작은 돌기둥들과는 달리 20㎝ 높이의 제단 위에 서있다. 제단도 표면은 부드럽게 처리한 기반으로 옆이 다섯 마리 오리로 장식되었다.

원형구조물 D에서 발견된 중앙 돌기둥은 인간의 모습을 취했다. T형태에서 위에 튀어나온 부분은 인간의 머리를 추상적으로 표현했고 그 밑에 작은 원형은 얼굴을 표시한 것 같다. 돌기둥의 측면에 팔이 펼쳐져 있고 앞부분엔 손이 새겨져 있다. 허리춤을 동여매고 앞부분을 가린 기하학적 무늬는 동물의 가죽을 표현했다. 옷은 여우와 같은 야생동물의 가죽을 벗겨, 상체부분은 허리에 돌려 매고, 다리와 꼬리 부분은 성기부분을 가리고 아래로 늘어뜨렸다. 고고학자들은 실제로 여우의 꼬리뼈를 이곳에서 발견했다. 이곳은 실제로 여우를 희생 제물로 바친 제단인가?

궤베클리 테페는 스톤헨지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졌다. 궤베클리 돌기둥은 스톤헨지와 달리 정교하게 다듬은 석회암으로 제작되었고, 가젤·뱀·여우·전갈, 그리고 야생 멧돼지 등을 묘사한 ‘얕은 부조물’로 가득 차 있다. 언덕의 다른 부분에는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석기도구가 널려 있다. 이전 구석기시대에는 볼 수 없던 날카로운 칼과 화살촉이 수없이 등장한다.

이들 돌은 중심을 향해 정렬해 있다. 돌기둥에 새겨진 사나운 야생동물들은 죽은 모습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무서운 존재로 묘사되었다. 전갈은 독침을 쏘고, 맷돼지는 돌진하고, 사자는 포효한다. 돌기둥들은 이들 동물의 힘을 빌려 제사를 지내는 것 같다. 발굴이 진행되면서, 궤베클리 테페의 원형구조물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가장 오래된 원형구조물은 정중앙에 위치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원형 구조물은 돌과 흙으로 매립되고 이전 원형보다 큰 원형 구조물이 등장한다.

궤베클리 테페는 현생인류 최초 ‘순례지’


▎Anthropomorphic 조각상은 궤베클리 테페의 남서쪽 언덕 유적지에 있는 방에서 발견됐다.
이 두 번째 원형구조물은 첫 번째 구조물보다 크기가 작고 부조물을 제작한 솜씨도 서툴러졌다. 이 구조물이 다시 매립되고, 세 번째 원형구조물이 들어선다. 궤베클리 테페의 가장 오래된 원형구조물들이 후대 원형구조물들에 비하여 가장 크고 정교하며, 기술적으로나 미적으로 완성도가 높다. 이들 구조물은 PPNA 시기가 끝나는 기원전 8000년경에 쓸모 없는 유적지가 된다.

슈미트는 궤베클리 테페에서 찾아내지 못한 것으로부터 중요한 사실을 유추한다. 이곳에는 사람들이 거주한 흔적이 전혀 없다. 거석을 이 언덕 위로 옮기고 그것들을 원형으로 세우고 ‘얕은 부조물’을 새겨 넣기 위해서는 적어도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수원이 없다. 가장 가까운 냇가는 5㎞ 정도 떨어져 있다. 돌기둥을 세우거나 조각을 한 사람들의 거주지 흔적이 없다. 이곳에는 부엌이나 음식을 장만한 불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다면 이들 건물의 용도는 무엇인가?

궤베클리 테페는 현생인류 최초의 ‘순례지’였다. 이곳에서 수천 마리의 영양과 들소의 뼈가 발견되었다. 그들은 도축된 동물들을 먼 곳에서 가져와 이곳에서 먹었던 것 같다. 대규모 건축에는 그것을 주도하는 지도자와 감독관이 있어야 하는데, 이곳에서는 지도자를 위한 공간이나 무덤도 없다. 아직은 평등사회였다. 이들은 사냥-채집으로 연명하던 사람들이다. 아직 문명을 모르던 사냥-채집자들이 궤베클리 테베와 같은 구조물을 건축하는 것은 커터 칼로 보잉 747 비행기를 제조하는 것과 같은 기적적인 사건이다. 궤베클리 테베는 인류에게 다가올 농업을 기반으로 정착한 문명세계와, 과거의 떠돌이 사냥-채집생활의 경계를 표시한다. 이들의 업적은 놀랍지만, 학자들은 아직도 궤베클리 테페의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다.

인류학자들은 종교가 인류의 조상들인 사냥-채집인들이 농부가 되어 복잡한 사회를 구축하면서, 그들 사이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갈등을 조절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추정했다. 정착사회는 장기적이며 정교한 목표를 지닌다. 먹을 것이 충분해야 하고 반영구적 가옥이 필요하다. 마을을 형성하여 정착을 원하는 사람들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내적 단결이 필요했다. 죽은 자의 매장이나 동굴벽화나 이동예술작품은 원시종교의 행동들이다.

궤베클리 테페의 유물들은 원시종교의 탄생에 대한 시나리오를 전복한다. 떠돌이 사냥-채집인들이 거대한 신전을 건축하면서 거꾸로 종교의 필요성이 생겼다. 종교의 탄생이 오히려 농업과 다른 문명들을 일으키는 단초가 되었다. 인간이 자신들의 존재이유에 대한 호기심을 표현하기 위해 모여 신전을 건축하려는 충동은 인간을 단순히 자연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세계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단계로 상승시켰다. 인간은 이제 자연을 이인칭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삼인칭으로 여기며 정복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들은 야생동물을 사육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가축으로 만들고, 야생 곡식을 자신들의 주식으로 만들기 위해 교배를 통해 곡식들의 유전자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종교의 시작과 문명의 흥기(興起)


▎제Ⅲ지층에는 커다란 돌기둥이 없고 규모가 작은 직사각형 건물들이 등장한다. 돌기둥의 수와 크기가 현저하게 줄었다. 대부분의 경우 중앙 두 개 기둥만 남아있다. 이들 중 가장 큰 것이 1.5m다. / 사진제공·배철현
프랑스 고고학자 자크 코뱅(Jacques Cauvin)은 농업의 등장에 대한 고든의 물질적 기원에 대한 해석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는 PPNA 단계에서 곡물이 북 레반트 지역에서 재배되기 시작하고 PPNB로 들어가면서 아나톨리아(터키) 지역으로 농업이 전파된 경위를 논의했다. 코뱅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상징의 혁명’과 ‘종교의 기원’에 관한 주장이다. 인간들이 마을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거주지가 있는 인간영역과, 캠프파이어 건너편 사나운 짐승들이 거주하는 위험한 영역을 구별하기 시작하는 이원론적 사고가 인간에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나운 짐승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강력한 ‘신들’이 저 너머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상상한 신들은 자신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취하지 않고, 인간의 모습으로 상상했다.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거의 모든 신화에서 신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과 유사한 ‘신인동형동성적(神人同形同性的)’ 모습을 취한다. 대표적 이야기가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의 인간 창조를 다룬 <창세기> 대목이다.


▎제Ⅱ지층(PPNA)은 궤베클리 테베의 특징과 기능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지금까지 10개의 원형구조물을 발견했다. 이들 중 네 번째 원형구조물인 D는 신비한 궤베클리 테베의 원래 모습을 간직해 그 기능을 추측할 수 있다. / 사진제공·배철현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습대로 인간을 만들자.”

궤베클리 테베는 코뱅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돌기둥에 새겨진 동물들은 영적인 세계를 보호하는 문지기다. T자형 기둥들에 새겨진 부조물들은 피안의 세계를 표시한다.

궤베클리 테페를 중심으로 수백 ㎞ 내에 살던 사냥-채집인들은 아마도 이곳을 정해진 시간에 모여 만나고, 선물과 희생 제물을 가져오는 거룩한 장소로 여겼을 것이다. 쇼베동굴이 빙하시대 구석기인들의 지하신전이었다면, 궤베클리 테페는 최초의 지상신전이다. 이 건축물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일종의 사회적 기관이 필요했고, 모여드는 사람들을 처리하는 지도자가 있었을 것이다. 횃불을 들고 온 수많은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드럼을 치면, 돌기둥에 새겨진 동물들이 깜빡이는 횃불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마치 횃불을 들고 지하동굴로 들어가 동굴벽화 속 유영하는 동물을 보았을, 구석기시대의 유전자를 그대로 지상에 실현한 것이다. 궤베클리 테페를 건축하는 노동자들이나 이곳으로 축제를 즐기기 위해서 오는 순례자들을 위한 음식 역시 필요했을 것이다. 이 필요성이 오히려 야생 곡물을 본격적으로 재배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다음 호에는 궤베클리 테페에 새겨진 동물의 모습을 살펴보며, 인간이 종교의례를 통해 어떻게 지적 도약을 했는지 공부할 것이다.

배철현 -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셈족어와 이란어 고전문헌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대왕이 남긴 삼중 쐐기문자가 기록된 베히스툰비문의 권위자다. 2003년부터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5년에 개원한 미래혁신학교 건명원(建明苑) 운영위원이다. 저서로는 <신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질문> <심연>이 있다.

201707호 (2017.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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