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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터뷰] 김영춘 신임 해양수산부 장관 

“해양강국의 저력 복원하겠다” 

글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glutton4@joongang.co.kr / 사진 김현동 기자 kim.hd@joongang.co.kr
붕괴한 해운물류 기반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과업이 미션…대한민국 차세대 리더들과 당당히 경쟁하고 싶어

한국 해양수산의 전체 산업 분야가 위기에 빠졌다. 작년 한진해운의 몰락이 치명타였다. 세계적인 불경기 여파로 항만 분야, 조선산업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어획량으로 어민의 시름도 깊고, 세월호 참사 마무리도 결코 간단치 않은 과제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에 영웅이 난다고 했다. 김영춘 신임 해양수산부 장관에게 거는 기대감이다. 과연 그가 어떤 능력과 뚝심으로 무너진 해양강국의 자존심을 복원할 것인가. 그를 직접 만나 물었다.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 3선 정치인 김영춘(55)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해양수산부장관에 임명됐다. 81학번으로 문재인 정부의 중추, 소위 ‘86세대’의 좌장이라 볼 수 있는 인사다. 김 장관은 인터뷰에서 5월 20일 장관 지명을 통보받았지만 문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임명의 감(感)’을 잡고 있었다고 실토했다. 국회 농해수위 위원장으로서 장관직을 맡는 것이 온당한 것인가 한때 사양을 검토했다고 그는 말했지만, 해양 수도 부산을 지역구로 둔 정치인이 해수부 장관직을 마다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영춘 장관은 해양수산부 공무원들에게 관행(慣行), 관망(觀望), 관권(官權) 등 ‘3관’의 자세를 버리고 공직에 매진해줄 것을 주문했다.
김 장관의 임명에 대해 해수부는 일단 반색하는 분위기다. 여당 중진에 해당 상임위원장을 지냈고, 대통령의 신임도 두터운 장관의 부임이다. 농해수위원장을 맡으면서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터라, 그가 장관으로 있을 때 해수부의 위상도 크게 높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 장관은 그러나 절대 녹록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 곧 드러났다. 취임과 동시에 해수부 공무원들에게 변화와 쇄신을 강하게 주문했다. 관행(慣行), 관망(觀望), 관권(官權) 등을 ‘3관’으로 지칭하며, 이 같은 타성에 벗어나지 않으면 필벌(必罰)하겠다는 의지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해운·항만·어업·조선 등 관련 산업이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는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해수부가 제대로 못하면 문재인 정부도 크게 어려워질 것이란 점을 그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신상필벌’이란 직설적 표현을 언론을 통해 거침없이 유통시키고 있다.

김 장관은 1987년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 총재 시절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1985년 2·12 총선 직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김덕룡으로부터 정계 입문 권유를 받았다. 이때 거절하고 2년 후 87년 직선제 투쟁 국면에서 YS의 통일민주당을 스스로 찾아가 정치를 시작했다. “고대 총학생회장 경력으로 정치한다는 말은 듣기 싫었지만, 87년 민주화투쟁 성패는 나라의 운명을 바꿀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 김 장관의 고백이다.

그런 와중에 그의 사상에도 변화가 생겼다. “공산주의가 만들고 싶었던 사회를 스웨덴이 건설했다”는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발언에 그는 주목하기 시작했다. 급진적 혁명 없이도 점진적 개혁을 통해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주류 운동권에서는 그를 ‘부르주아 개량주의자’로 불렀지만 이후 그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었다.

“공산주의가 꿈꿨던 사회를 스웨덴이 건설했다”


▎고 김영삼 대통령(가운데)이 통일민주당 대표 시절 정계에 입문한 김영춘(왼쪽). YS는 20대 후반의 이 젊은 비서의 말을 경청하며 무한 신뢰를 보냈다. / 사진:김영춘
문민정부에서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지낸 그는 YS의 지극한 신임을 얻었다. 30대 초반의 이 젊은 비서관의 말을 대통령이 경청하는 모습이 여러 차례 목격됐고, 사람들은 김영춘을 ‘YS의 셋째 아들’이란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1996년 15대 총선 출마로 본격화한 그의 정치인생은 파란만장했다. 당시 서울 광진갑 지역구에 처음 출마했지만 고배를 들었다. 4년 뒤인 2000년 16대 총선 때 같은 곳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처음 금배지를 달았다. 2003년에는 한나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다. 이때 같이 탈당한 ‘독수리 5형제’ 중 두 명이 김영춘 장관과 김부겸 행자부 장관이다.

17대 총선에서도 거푸 당선됐지만 18대 총선은 불출마했다.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를 돕기 위해서였다. 19대 총선 때는 해양수산부 장관 선배인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민주당 간판으로 고향인 부산에 출마하는 모험을 하기도 했다. 부산 진갑에서의 첫 출마 때는 3.7%포인트 차이로 아쉽게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20대 총선에서는 같은 지역구에서 49. 58%의 득표율로 당선돼 최상급의 커리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인터뷰는 7월 12일 여의도 해양수산부 장관 집무실에서 약 2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한 의도와 의미를 무엇이라 생각하나?

“3선 의원이라는 점과 지난 1년간 농해수위 위원장으로 일해온 점, 그리고 국회와의 원활한 소통과 긴밀한 협조관계 유지를 기대하면서 장관에 임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문 대통령이 어떤 미션을 부여한 것으로 받아들였나?

“대통령께서는 과거 경제개발 초창기 1960~80년대까지 보유했던 해양력에 비해 지금 그 영역이 과소평가되고, 경시되고 있다고 본다. 잠재력이 아직 많은데 저평가되고 있다는 인식이다. 제게는 ‘대한민국의 해양력 수준을 적어도 30년 전의 비중으로 끌어올려 달라’고 했다. 해양수산 분야가 과거 담당했던 우리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복원하라는 주문이다. 제가 ‘해양강국의 꿈을 이뤄보겠다’는 취임의 포부를 밝혔는데, 그것에 대해서도 대통령께서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돕겠다고 했다.”

장관 지명 사실은 언제 통보받았나?

“통보는 5월 20일 받았지만 그 이전에 감을 잡긴 했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다. 국회 농해수위 위원장으로서 장관직을 맡는 것이 온당한 것인가 생각했다. 사양하려 했지만 주변 분들이 강하게 만류했다. 대통령께서 해양수산 분야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제대로 혁신하란 취지로 임명한 것인데 사양해선 안 된다고 했다. 작년엔 한진해운이 파산했고, 40년 만에 수산어획고가 최저로 떨어지지 않았나? 해운·항만·수산 총체적 위기 상황을 내가 회피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해양 수도라 할 수 있는 부산이 지역구인 국회의원으로서 그 책임감이 막중하다.”

“노무현 대통령과 나는 다르다”


▎2006년 12월 중앙일보가 주최한 ‘386 정치인 대담’을 마치고 참석자들이 시청앞 광장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김종혁 당시 중앙 일보 정책사회데스크, 송영길, 김영춘, 김명주 국회의원.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내며 커리어를 쌓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행로가 연상된다. 문 대통령이 차기 후보군에 김 장관을 추가한 것이란 정치적 해석도 있다. 해수부 내 노무현 장관에 대한 평가를 들어본 적이 있나?

“장관 재직 시에도 전혀 다른 발상으로 일을 처리하고, 조직에 상당한 충격도 주었던 분으로 알고 있다. 김대중 정부 당시 노 대통령은 영남의 유일한 유력 정치인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상당히 힘을 실어줬다고 들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척척 풀려서 당시 해수부의 위상이 굉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노 대통령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고향 부산에 출마한 비슷한 배경이 있지만, 나는 30년 이상을 서울에서 생활했다. 국회의원도 두 번 서울에서 당선됐기 때문에 처음 부산에 내려와서는 외지인 취급을 받으며 고생을 했다.”

장관 취임 후 한국 해양수산 정책이 직면한 가장 큰 과제를 어떻게 파악했나? 조선과 해양 물류산업의 전반적인 침체, 어족자원의 고갈 등 위기를 맞고 있는데.

“해양수산 분야는 큰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 맞다. 2008년 이후 장기 불황이 계속되고 있다. 2016년 한진해운 파산으로 해운산업은 매출액이 25%나 감소했다. 국적선사의 수송 능력은 절반 이하로 줄어든 상황이다. 수산업은 2016년 연근해 생산량이 93만t으로 44년 만에 100만t 이하로 떨어졌다. 수산자원 감소와 어장환경 훼손 등으로 근본적인 위기에 봉착했다.”

위기가 전방위적이다.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한국해양진흥공사 설립, 해운-조선-금융 상생체계 확립, 한국해운연합(KSP) 결성 등 해운산업 재건 프로젝트를 조속히 가동할 생각이다. 수산업과 관련해서는 우리의 바다를 되살리는 일이 급선무다. 휴어제를 도입하고 어선을 감척하겠다. 친환경·첨단 양식산업을 부흥하고 수산물 수출을 확대해야 어촌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중국어선의 불법조업에 대응하고 해양공간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해양수산 분야에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선제적으로 도입하는 것도 위기 극복의 단초다. 현재 6.4% 수준인 해양수산 GDP 기여율을 중장기적으로 10% 수준까지 높여 나가야 한다. 장관직을 맡는 동안 그 초석을 놓겠다.”

세월호 마무리 문제에 있어서의 현황과 애로점은 무엇인가? 교훈은 크지만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다. 장관으로서 어떤 마무리를 하고자 하는가?

“미수습자 수습이 최우선이다. 실행 가능한 모든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객실 구역과 인접한 화물 구역에 대한 수색이 진행 중이다. 선체 침몰 지점의 진흙과 자갈을 퍼 올려서 유해와 유실물을 수습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대형 해양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 어떤 마스터플랜을 준비하고 있는가?

“다양한 ICT 융복합 첨단 안전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곧 차세대 해양안전종합관리체계가 완성될 것이다. ‘연안여객선 인명대피 지원시스템’ 등 현장형 해양안전기술 개발도 추진하고 있다. 그 밖에도 여러 첨단 장치의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안전사고 예방에 왕도는 없다. 첨단장비와 시스템 도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수립된 정책이 현장에서 실효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범국민적 해양안전의식을 제고, 중소 선사 CEO를 비롯한 종사자들로 하여금 확고한 안전의식을 갖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3년이 흘렀는데 과연 안전에 대한 국민적 의식은 높아졌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선박과 관련해서는 항구에서 도항을 할 때 검사를 까다롭게 하고, 신분증 검사와 함께 정원초과를 단속하고 하니까 벌써 불만이 많다. 완화시켜 달라는 주문이 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는 여전히 세월호 이전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관련종사자들 중심으로 안전의식을 철저히 각인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국 사고도, 사고 예방도 사람이 빚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 두세 달 후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를 인터뷰했다. 김 교수가 세월호 수습이 끝나면 백서를 만들어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발언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해수부가 세월호 기록 작업을 주도하는 것인가?

“1기 특별조사위가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낸 보고서가 있고, 현재 선체조사위원회가 작업을 마치면 보고서를 낼 것이다. 일각에서 제2기 특조위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도 있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고 나면 그것을 총괄하는 세월호 백서를 만들어야 한다. 이 작업을 해수부가 주관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 작업의 준비를 제가 시작해보겠다.”

해경을 해수부의 독립 외청으로 만드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해경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공동의 목표를 추구할 것인가?

“야당이 협조해 정부조직법 개편안이 통과만 8월 중에라도 이뤄질 수 있다. 세월호 사건으로 사기가 떨어진 해경을 제대로 살리자는 취지의 조직개편이다. 해수부는 정책과 법을 중심에 놓고 큰 틀의 방향과 목표를 제시한다. 해경은 특수한 임무를 집행하는 기관이라 볼 수 있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많은 불법적인 일의 단속, 해난사고 시 구조와 구난작업, 각종 오염사고에 대한 대처를 해경이 맡는다. 해경은 최종적으로는 해수부 장관의 지휘를 받지만 독립적인 활동을 보장받게 된다. 조화로운 역할 분담이 원활하게 이뤄질 것으로 확신한다.”

취임 후 해양수산부 공무원에게 자기혁신과 환골탈태를 강하게 주문하고 있다. 어떤 점의 쇄신과 개혁이 필요한가?

“세월호 참사 이후 해양수산부가 정책적으로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한진해운 사태 등 일련의 과정에서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고 판단한다. 이제 침체된 조직을 혁신할 때다. 정책추진 역량을 강화하고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겠다. 우선 ‘3관의 자세’를 버릴 것을 직원들에게 주문했다. ‘관행(慣行)’대로 일하고 안주하는 자세, ‘관망(觀望)’, 눈치 보며 자기 앞길만 관리하는 보신주의, ‘관권(官權)’, 즉 공복임을 망각하고 공적 권한을 남용하는 행위를 저는 ‘3관’이라 지칭했다. 이런 태도를 철저히 배격할 것이다. 엄격한 신상필벌과 함께 소통을 강화해 내부 역량을 결집하겠다. 해양수산 현장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정책적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소신을 키워야 한다.”

“한 번 무너진 해운 네트워크는 복원 어려워”


▎취임한 후 부산 자갈치 시장을 찾은 김영춘 해수부 장관. 해양수도로 불리는 부산은 그의 지역구가 있고, 한국 해양수산의 온갖 과제와 희망이 몰려 있는 공간이다.
공무원들만 탓할 수 없는 문제도 있다. 취임하자마자 군기를 잡는다는 불만도 나오지 않겠나?

“해양수산·해운·항만 등 관련 업무나 사업이 잘되고 있다면 공무원 조직을 탓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모든 게 너무도 어려운 상황이다. 과거의 관행대로 일하면서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하나? 공무원들이 보신만 생각하면서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하겠나? 질서는 잡고 법치는 세워야 하지만 어려운 관련 업계에 필요 이상으로 관권을 남용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그런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무원들이 하루아침에 바뀌기는 힘들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그들도 분명 선한 동기를 가지고 공무원 일을 하고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제가 주문한 대로 노력하는 공무원들에겐 보상을 해주고, 그렇지 못한 공무원에겐 어떤 형태로든 불이익을 주려고 한다. 충돌과 불만도 있겠지만, 그러면서 서서히 조직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운물류 기반이 결정적으로 와해된 것이 큰 타격이다. 물론 해수부의 책임은 아니지만 국가가 풀어야 할 과제가 된 것 아닌가 싶다. 장관으로서 그 문제를 해결할 복안은 무엇인가?

“해운이 어려워진 것은 1차적으로 기업 책임이다. 경영진의 잘못된 경영과 판단이 빚은 사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운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이에 대처하는 정부의 해법이 나와줘야 한다. 결국 정부가 최종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다른 선진국들도 해운회사가 어려워지면 정부가 개입한다. 회사를 통합시키기도 하고, 공적자금을 투입해 회생을 시키거나, 심한 경우 아예 국영기업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해운회사를 살리는 것이 국가를 위해 이롭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최대 선사의 문을 닫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마치 공장 하나 문닫듯이 그렇게 쉽게 생각한 것이다. 그때 정책 결정자들이 한마디로 무지했던 것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수출운송의 99% 이상을 해운에 의존하는 나라다. 한진해운이 문을 닫으면 어떤 후유증이 생길지 미처 예측을 못했던 것일까. 당장 수출운임이 올라가서 모든 수출기업을 힘들게 했다. 한 번 무너진 해운 네트워크는 잘 복원되지 않는다. 외국회사에 의존하며 훨씬 더 큰 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입체적이고도 종합적인 플랜이 필요한 일 아닐까?

“대통령에게 보고해 재가를 받은 종합적인 플랜이 바로 가칭 해양산업진흥공사의 설립이다.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의 100대 과제 안에 포함시켜 추진할 생각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그런 프로그램이 있긴 했다. 산발적으로 4~5개 프로그램이 가동되어 업계가 조금씩 도움을 받긴 했지만 결정적으로 물꼬를 바꾸는 역할을 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진흥공사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런 프로그램들을 하나로 묶고 종합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기능을 확보할 계획이다.”

남북이 공동으로 동해에서 사라진 명태 복원하자


▎지난 6월 30일 부산 국립해양박물관에서 열린 ‘원양어업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는 김영춘 해수부 장관. / 사진:해양수산부
문재인 대통령 임기 중 경직된 남북관계가 풀린다면 해양수산 부문에서 북한과 어떤 협력사업이 가능하리라고 보나?

“정부는 북한의 도발에 강력히 대응해 나간다는 기본 원칙을 확고히 하면서 국제사회 대북제재 틀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민간교류는 확대한다는 입장이다. 현재 북한의 미사일 도발 등으로 어려운 여건이지만 향후 남북관계 개선 시 바다라는 공간을 활용한 다양한 협력방안에 관한 복안들이 있다. 예를 들어 동해안 명태 방류사업은 의미가 작지 않은 사업이다. 작년 강원도 고성 해역에 명태 치어 15만 마리 방류했고, 올해는 30만 마리, 내년에는 100만 마리 이상을 방류한다. 북한도 명태 치어 방류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는데 흥미로운 일이다. 같이 힘을 합쳐 동해에서 사라진 명태를 복원하는 일은 대단히 좋은 공동사업이 될 것이라 본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정상회담을 통해 합의했던 다양한 해양어업 협력사업을 되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 때도 합의가 됐지만 가장 쉽고 빠른 수단이 서해 해역에서의 공동 어로작업이다. NLL을 중심으로 남북 군사경계선상에서 파시를 여는 등 해상교역을 활성화시켜보자는 구상이다. 나진항을 통해 중국 동북삼성의 물류를 유치하는 사업, 러시아 연해주 쪽 물류를 부산항으로 연결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일은 해수부 내에서도 기초연구가 많이 축적돼 있다. 남북 간 논의도 많았던 분야라 정치군사 환경이 개선되면 즉시 착수할 수 있는 일들이다.”

중국이 북한과 어업협력을 강화하면서 한민족의 어족 자원을 가져가고 있는 일이 안타까운데.

“중국어선들이 북한 해역에 입어료를 지불하고 동해에만 1000척 이상 입항하고 있다고 한다. 서해는 셀 수도 없이 중국어선이 많다. 북한과 중국은 어업약정을 체결해 2004년부터 중국 쌍끌이 저인망어선이 북한 수역에서 조업 중이다. 이런 중국어선이 우리 수역에 침범해 불법어업을 감행하고 해경이 단속하면 북한 수역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북한이 중국과 한 계약을 우리도 한다면 서로 굉장한 이익이 될 것이다. 우리가 중국보다 많은 입어료를 지불해도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예산을 투입해서 어선을 줄여라 하는 판인데, 그 어선 세력을 북한 수역에서 조업시키면 얼마나 좋겠나. 수입에 의존하는 수산물을 직접 잡게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남북 합작으로 공동어로 작업을 할 수도 있다. 남북 모두에 이익이 되는 사업이 많다. 정치군사 상황이 나아질 때를 대비해서 착실하게 준비할 생각이다.”

동해에서 사라진 명태의 복원은 의미 있는 사업이 맞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한반도 수역의 어족자원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나. 어족자원이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은?

“해양 환경의 회복이 중요한 관건이다. 그래서 제가 바닷모래 채취에 대해 기본적으로 조심스럽게, 경우에 따라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제기하는 것이다. 모래 채취는 바다 생태계를 망가뜨리는 과정이다. 어민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대목도 있다. 그물 등 자신들이 쓰던 어구를 함부로 바다에 투기하는 일이다. 농부가 문전옥답에 폐기물과 오염수를 뿌리는 것과 같은 행위다. 어민들의 의식개선과 폐기물의 수거작업도 우리 해수부가 해야 할 일이다. 이런 노력을 민관이 함께 하면서 바다 생태계를 회복시켜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멸실된 어족자원을 회복하기 위한 치어 방류사업, 양식사업을 열심히 해보고 있다. 동해안에 명태가 사라져 거의 100% 수입해야 하는 처지다. 북한도 아직 연구소 수준이긴 하지만 명태 치어 방류사업을 하고 있으니 좋은 협력 사업이 될 것이다. 남북에서 방류하는 명태가 물길을 따라 돌아다니다 남에서 잡히기도 하고 북에서 잡히기도 할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에도 큰 도움이 되는 합작사업이다.”

4차 산업혁명과 해양수산과는 어떤 관련이 있나?

“4차 산업혁명이란 것은 ICT를 포함한 첨단 산업과 기존 산업을 융합시키는 과정이다. 해수부 내에서도 그런 업데이트를 통한 고부가가치화가 절실하다. e-내비게이션 프로젝트가 있다. 우리나라가 선도적으로 풀어나가는 게 아니라 세계 해사기구(IMO)가 주도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어선이나 상선은 그 시스템이 대부분 아날로그적이다. 항공기처럼 디지털화된 보편적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다. 아날로그 방식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 생산성·안전성 측면에서 문제점이 많다. 현재 IMO가 주도해서 전 세계에 표준을 권고하고 있다. 디지털화된 관제시스템 등을 육·해상 동시에 전 세계적인 규모로 이 작업을 적용시키자는 것이다. 우리나라 조선·해운·항만산업에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조선·해운·항만에도 4차 산업혁명 일어난다


▎지난 6월 21일 인천항만공사를 방문해 직원에게 정책 브리핑을 받고 있는 김영춘 해수부 장관. / 사진:해양수산부
장관에 취임했지만, 정치인으로서의 김영춘을 주목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정치인의 관점에서 장관직을 수행하게 되면 그것도 함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장관직을 정치적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다면 국민이 손해를 본다. 정치인 김영춘과 장관 김영춘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장관직을 무엇이 되기 위한 발판으로 생각한 적은 없다. 저는 원래 동기 부여를 내부에서 찾는다. 지금은 장관직을 최선을 다해 잘 수행하는 것 자체가 제겐 동기가 된다. 원래 낭만주의자이고, 이상주의적인 면이 강하다. 정치인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가보고도 싶지만, 그 자리가 내 삶에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곱씹게 될 것이다. 거기서 만족할 만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저는 그 자리를 추구하는 행동을 계속하지 못한다. 이 시대 정치인의 과제는 선진문명국으로 남과 북을 통합하는 일일 것이다. 제가 정치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비전조차도 지금 여기 해수부 장관직의 수행보다 더 가치 있게 보이진 않는다. 사람은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존재이고, 내일 죽어도 후회가 없으려면 지금 여기의 일에 올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해수부 장관직에 최선을 다할 뿐 그 다음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1984년 고려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돼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여당인 민정당사 점거시위를 주도해 구속돼 1985년 2월 12일 총선 이후 출소해 노동운동을 했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며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다면?

“1981년 3월 고려대 문과대(영문학과)에 입학한 첫주에 문과대학 대형 강의실에서 벌어졌던 일을 잊을 수 없다. 한 여학생이 교탁으로 올라가서 ‘학우 여러분 이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전두환 독재정권이….’ 여기까지 30초 정도 발언을 시작했는데, 강의실 맨 앞줄에 앉아 학생처럼 보였던 사복경찰 10여 명이 교탁 위로 달려갔다. 그들은 저항하는 여학생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욕설을 하며 개돼지처럼 그녀를 끌고 강의실을 나갔다. 신입생 때 받은 그 충격이 너무도 커서 학생운동 가담을 결심한 것 같다. 1984년 학도호국단을 폐지시키고 학생회를 부활시키는 과정에 참여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그때 서울대 이정우, 연세대 송영길, 고려대의 김영춘 3인이 각각 총학생회장을 맡으며 호국단 폐지와 학생회 복원을 주도했다. 당시의 치열했던 투쟁 기억이 지금도 강렬히 각인돼 있다.”

가장 중요한 가치 첫째는 가족의 행복


▎김영춘 해수부 장관은 “남북관계가 호전되면 군사경계선상에서 파시를 여는 등 해상교류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1984년 학도호국단 폐지, 총학생회 부활 투쟁은 학생운동사에서 명장면으로 남아 있다. 그 사건으로 제적된 후 무엇을 했나?

“제적돼 있는 동안 인천에 가서 노동운동을 해보겠다고 자청했는데, 노동운동권 쪽에서 저를 받아주지 않았다. 고려대 총학생회장으로 공개적인 활동을 했기 때문에 조직 입장에서 받아주기엔 리스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주변만 돌아다니다 왔다.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1986년 무렵 제가 일했던 작은 공장이 있었다. 그 공장 직원 중 제일 고참이 15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았다. 그 돈으로 산동네 단칸방에서 형제들하고 생활하면서 시골의 어머니에게 돈도 보내고, 장가들겠다고 저축도 하고, 그렇게 살았다. 월급날 회식이 동네 선술집에서 막걸리 한 잔에 두부 한 모 먹는 정도였다. 3년 뒤에 민주화가 되고 나서 그 공장을 가봤다. 임금이 3배로 올라 있었다. 그 고참은 저축도 늘리고 월급날엔 삼겹살을 사먹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민주화된 직후 내수 경제가 유례없이 활성화된 결과였다. 부의 재분배에 의해서 전에 아주 가난했던 서민들이 조금은 더 쓸 수 있는 형편이 되니까 나라 경제도 훨씬 좋아진다는 교훈을 제가 그때 얻었다.”

대학 후배인 안희정 충남지사를 김덕룡 의원에게 소개해 정치에 입문토록 했다. 그 후 안 지사는 굉장한 정치적 성장을 했다. 후배의 활약상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안희정 지사는 타성과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그의 그런 점을 높이 평가한다. 열린 정치인, 진심의 정치인이다. 안 지사가 더 크게 성장했으면 좋겠다. 안 지사 같이 좋은 정치인들과 아름답고 당당하게 경쟁하고 싶은 것이 내 꿈이기도 하다.”

인생에서 추구할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제 평소 좌우명은 ‘내일 죽어도 후회 없는 오늘을 살자’다. 아울러 인생에서 추구할 가장 중요한 가치의 첫째는 가족의 행복이며, 둘째는 국가의 발전, 마지막으로 즐겁고 보람된 나의 인생이다.”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가장 깊게 사숙한 사상가가 있다면?

“대한민국의 독립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던 우당 이회영 선생, 석주 이상룡 선생, 백범 김구 선생을 가장 존경한다. 이분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개인과 가족의 희생을 무릅쓰고 헌신한 공통점이 있다. 감명 깊게 읽은 책을 꼽으라면 서중석 교수가 집필한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이 있다. 이 책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독립투사와 그 가족들의 역사와 고난을 기록했다. 소상히 그려진 그분들의 헌신과 희생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 글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glutton4@joongang.co.kr / 사진 김현동 기자 kim.hd@joongang.co.kr

201708호 (2017.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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