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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포니 쿠페 콘셉트’ 복원 모델 최초 공개 

 

최은석 월간중앙 기자
■ 쐐기 모양 노즈·원형 헤드램프·기하학적 선 완벽 재현
■ 현대차의 물리적 유산…다방면에서 창의적 영감 제공
■ 포니 쿠페 양산 기대감 ‘업’…현대차 “결정된 것 없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등이 포니 쿠페 복원차량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 현대자동차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포니’가 부활했다. 현대자동차는 18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레이크 코모에서 ‘현대 리유니온’ 행사를 열고, ‘포니 쿠페 콘셉트’ 복원 모델을 최초로 공개했다.

현대차는 이날 행사에서 지난해 11월 시작한 포니 쿠페 콘셉트 복원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처음 선보였다. 1974년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서 선보였던 포니 쿠페 콘셉트를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현대차는 포니 개발을 통해 자동차를 국가 중추 수출산업으로 육성하는 등 국민들의 더 나은 삶을 염원했던 정주영 선대회장의 ‘수출보국’ 정신과 포니 쿠페를 앞세워 글로벌 브랜드로 나아가고자 했던 당시 임직원들의 열정을 되짚고자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비롯해 주요 전현직 임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현대 리유니온은 현대차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한편, 미래를 향한 현대차의 비전과 방향성을 소개하는 헤리티지 브랜드 플랫폼이다.

정의선 회장은 “정주영 선대회장은 1970년대 열악한 산업 환경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심지어 항공기까지 무엇이든 생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독자적 한국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비전을 실현했다”며 “이탈리아와 한국을 비롯해 포니의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해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고 말했다.

이번 포니 쿠페 콘셉트 복원 작업은 이탈리아의 전설적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와 그의 아들인 파브리지오 주지아로와의 협업을 통해 진행했다. 이탈리아 디자인 회사 ‘GFG 스타일’의 설립자 겸 대표인 조르제토 주지아로는 포니와 포니 쿠페 디자인을 시작으로 포니 엑셀, 프레스토, 스텔라, 쏘나타 1·2세대 등 다수의 현대차 초기 모델을 디자인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날 행사 현장에는 조르제토 주지아로와 이충구 전 현대차 사장 등을 비롯해 포니 콘셉트 개발 당시 큰 기여를 한 디자이너들과 엔지니어들이 함께해 의미를 더했다.

장재훈 현대차 사장은 “전동화 전환 시대에 과거로부터 변하지 않는 브랜드 가치를 살피는 것은 현대자동차가 미래 모빌리티 분야의 리더가 되기 위해 중요한 과제”라며 “앞으로도 현대 리유니온을 비롯한 다양한 헤리티지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통해 현대차의 다양한 과거 유산이 미래의 혁신과 융합될 때 유서 깊은 브랜드만이 제공할 수 있는 가치를 소통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포니 쿠페 콘셉트는 현대자동차의 역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모델이다. 현대차가 첫 독자 생산 모델인 포니와 함께 1974년 토리노 모터쇼에서 선보인 포니 쿠페 콘셉트는 쐐기 모양의 노즈와 원형의 헤드램프, 종이접기를 연상케 하는 기하학적 선으로 공개 당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포니 쿠페 콘셉트는 공개 이후 선진 시장을 타깃으로 한 수출 전략 차종으로 양산 직전까지 개발이 진행됐지만, 1979년 석유파동으로 인한 글로벌 경기 침체와 경영 환경 악화로 실제 양산에 이르진 못했다. 이후 홍수 등 자연재해로 인해 도면과 차량이 유실돼 한동안 역사 속으로 사라졌었다.

현대차 관계자는 “포니 쿠페 콘셉트에는 선진국 진출을 위해 스포츠카라는 분야에 도전한 현대자동차의 담대함과 혁신 정신이 담겨있다”며 “이는 오늘날 현대자동차가 고성능 수소전기차 분야를 개척하고 전기차 시장에서 선도적인 행보를 이어가는 데 큰 경험적 자산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 포니 쿠페 콘셉트 공개를 계기로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포니 쿠페의 실제 양산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현대차는 “포니 쿠페 양산 여부는 아직 결정된 게 없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첫 국산차 포니 개발 스토리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이탈리아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포니 쿠페 복원 차량에 탑승해 대화하고 있다. 사진 현대자동차
한국이 자동차를 조립 생산하게 된 건 1960년대 초반부터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자동차공업보호법이 시행되면서 해외 선진 업체와 제휴를 맺고 부품을 공수받아 자동차를 생산하게 된다. 그 시절 조립 생산은 국내 자동차 산업에 새로운 전기를 열었지만, 외국 기술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다. 당시 독일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최고 시속 200㎞를 넘는 스포츠카들이 도로를 달리던 상황이었다.

정주영 선대회장은 1940년부터 정비소를 운영하면서 자동차 구조와 기계적 원리를 터득했다. 그는 독립을 맞이한 이후 현대차그룹 뿌리인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다.

현대차는 당시 한국의 시대적 필요와 정 선대회장의 비전이 맞물린 자리에 뿌리를 내렸다. 경제 발전에 맞춰 중장거리 운송량이 늘어나면서 철도 수송에 한계가 생기자 정부는 2차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해 고속도로 건설을 적극 추진했다. 현대자동차공업사에서 축적된 자본으로 설립한 현대건설은 국내 도로 확충의 상당 부분을 맡아 진행했는데, 정 선대회장은 이때 자동차 수요가 늘어날 것을 예상했다.

한 나라 국토를 인체에 비유하며 도로는 혈관과 같고 자동차는 그 혈관 속을 흐르는 피와 같다는 생각을 했던 정 선대회장은 미국 자동차 기업 포드가 한국 진출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빠르게 움직였다. 경제 발전에 대한 비전은 물론 정비소 운영으로 자동차 지식에 해박한 정 선대회장과 포드와의 제휴 협상이 빠르게 이뤄졌고, 1967년 12월 현대자동차가 설립된 것이다.

현대차는 이듬해 울산에 조립공장을 짓고, 포드의 코티나 2세대 모델을 들여와 생산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술력으로 설립 1년도 채 되지 않은 자동차 회사가 공장을 짓고, 조립 생산을 시작한 것은 이례적 일이었다.

‘현대 코티나’는 경쟁 모델인 ‘신진 코로나(도요타와 기술 제휴를 해 생산한 차량)’보다 큰 차체와 넉넉한 출력으로 이목을 끌었지만, 곧 생각지 못한 문제에 부딪힌다. 다른 택시에 비해 코티나 택시 차량의 고장이 잦았던 것이다. 승용차 대부분이 영업용 차량으로 운영되던 시절인 만큼 큰 문제였다.

그런데 포드가 파견한 조사단은 난감한 결론을 내렸다. 고장 원인을 ‘차를 험하게 굴리기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비포장도로에서 운행을 자제할 것’이라는 해결책을 내놓은 것이다. 코티나는 선진국 도로 컨디션을 바탕으로 설계됐는데, 그때만 해도 한국 도로 포장률이 20%에 불과할 정도였으니 차가 멀쩡할 리 없었던 것이다.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인 나라에서 포드 조사단이 제시한 해결책은 ‘자동차를 운행하지 말라’는 말과 같았다. 현대차는 포드에서 조립 모델을 들일 때마다 독자적으로 품질을 보강하며 현지화에 노력을 기울였지만, 자체 기술력 없이 외국 기업에 의존하는 조립 생산자의 한계를 느꼈다. 한국 땅에 맞는 자동차에 대한 바람은 점점 간절해졌다.

현대차는 단순 조립을 넘어 독자 제조 단계에 진입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제휴사인 포드와 새로운 합작사를 세우기로 합의했다. 주요 부품부터 자동차까지 국내에서 직접 생산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 포드의 생각이 바뀌는 사건이 생긴다. 범아시아 진출 계획을 세우던 포드가 중국 진출을 위해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도요타의 행보에 따라 현대차와의 합작사 계약 이행을 계속 미룬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달리는 국기’ 역할


▎포니 양산 모델. 사진 경주세계자동차박물관
자본금 납부가 늦어진 데다 주요 부품을 국산화하기로 한 약속을 철회하려는 포드의 태도에 결국 합작사 설립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1971년 일이었다. 선진 업체가 제시하는 불리한 조건에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협상이 거듭 실패하자, 지친 현대차는 독자적으로 한국 첫 대량 양산형 고유 모델을 개발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당시 국내 업체 입장에서 선진 업체의 부품을 수입해 조립 생산한 자동차를 판매하는 것은 큰 투자 부담 없이 이윤을 내는 안정적 사업 방안이었지만, 독자적 모델을 갖길 원했던 현대차의 의지는 굳건했다. 현대차는 마침내 1975년 첫 독자 모델 ‘포니(PONY)’를 시장에 선보였다. 현대차 설립 후 10년이 되지 않은 때 일이다. 한국 기계 공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동차 생산을 100% 국산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정 선대회장의 각별한 노력과 빠르고 담대한 결단으로 포니가 탄생할 수 있었다.

자동차 산업은 다양한 소재와 가공 기술이 접목된 종합 산업이다. 정 선대회장은 자동차가 한국 기계 산업을 이끌 것이라는 믿음을 놓지 않고 도전했다. 그가 전망한 대로 독자 모델 개발은 현대차가 글로벌 기업으로 발전한 계기이자, 한국이 산업 강국으로 우뚝 서는 디딤돌이 됐다.

포니는 국내에 출시되자마자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포니가 본격 출시된 1976년 당시 국내 승용차 판매 대수는 2만4618대였는데, 포니 단일 모델만 그해 1만726대가 판매되면서 44%의 점유율을 차지하게 된다. 국내에서 개발해 한국인의 체격과 도로 사정에 적합했고, 조립 생산차보다 내구성마저 좋았던 점이 인기 비결이었다.

이후 포니2가 출시된 1982년에는 국내 승용차 판매 점유율의 67%(포니1·2 합산 기준)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처럼 포니는 출시 첫해부터 포니1이 단종된 1985년까지 약 10년간 한국 1위 모델로 자리매김했다. 한국 승용차 시장 성장을 주도했고, ‘마이카’ 시대를 여는 핵심 주역이던 셈이다. 현대차가 설립 당시만 해도 국내 자동차 등록 대수는 불과 6만 대 남짓이었다. 오늘날 한국에는 약 2500만 대의 자동차가 등록돼 있다. 숫자로만 보면 국민 절반이 자동차를 가졌다.

포니를 통해 국내는 물론 해외 수출 시장의 길을 닦은 현대차는 1985년 전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인 미국 시장에도 본격 진출했다. 현대차는 그해 세계 각지에 포니, 스텔라, 포니 엑셀, 프레스토 등의 모델을 수출해 글로벌 브랜드로 거듭나게 된다. 포니는 이처럼 글로벌 시장에 수출돼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는 ‘달리는 국기’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현대차가 이후 다양한 라인업을 개발하고 수출하는 데 중요한 초석이 됐다.

- 최은석 월간중앙 기자 choi.eu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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