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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한국의 중산층, 왜 줄었을까? 

“집값 하락과 인플레로 삶의 질 추락” 

박세나 월간중앙 기자
신도시 주민도 “나는 중산층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부동산 자산 가치 하락
좁아진 중산층 진입의 문… “내 자녀 세대는 계층 이동 가능성 더 작을 것” 우려


▎90년대부터 우리나라 중산층을 상징하는 1기신도시 중 하나인 일산신도시의 모습. 당시 일산신도시에는 화이트칼라 관리직, 월 600만원의 소득, 호수뷰 신축 아파트 등 중산층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세대가 모여 살았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의 호수마을단지에 거주 중인 이후남(66) 씨는 1997년 일산신도시로 왔다. 당시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이 “동료들 대부분이 이곳에 산다”며 이사를 적극 추진했다. 호수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신축 아파트에서 이씨는 두 아들을 유학 보내고, 결혼도 시켰다. 20여 년이 지나 부부만 남게 되자 이씨는 본가인 서울 은평구로 이사를 계획했지만 좌절감을 맛봤다. 과거 비슷한 수준이었던 아파트 값이 그 사이 격차가 너무 벌어져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현재 이씨의 집은 9억원인 데 비해 은평구 아파트의 호가는 11억원에 달했다.

서울 입성을 포기한 이씨는 “나는 이제 더 이상 중산층이 아니다”고 자조했다. 부동산으로 인한 자산 격차에 따른 심리적 박탈감뿐만 아니라 ‘중산층에서 서민층으로 내려갈 것’이라는 계층 하락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나는 중산층이다” 답변 32% 불과

일산신도시는 과거 우리나라 중산층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화이트칼라 관리직, 월 소득 600만원, 호수뷰의 신축 아파트단지나 주택단지에 입주한 중산층 세대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부동산 가치 상승을 따라잡지 못하면서 거주자들 대부분이 서울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게 된 것이다. KB부동산리브온에 따르면 2013~2023년 10월 기준 일산신도시의 집값 상승률(83.6%)은 분당(145.8%), 평촌(107.8%) 등 다른 1기 신도시에 비해 가장 더딘 것으로 집계됐다.

그렇다면 1기 신도시 중 집값 상승폭이 가장 컸던 분당 사람들의 정서는 어떨까. 공기업에 다니고 있는 40대 김명재(가명) 씨는 “내가 중산층이라 생각해본적이 없다”라고 단언했다. 서현동에 재건축 아파트를 보유한 김씨는 “일산 사람들은 분당을 부러워할지 모르겠지만, 분당 안에서도 정자동·수내동과 다른 동네의 격차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중산층을 순자산 기준으로 정의한다면, 나는 ‘영끌’이라 주택담보대출에 허덕이고 있어 중산층이 아니다”고 말했다.

부동산을 포함한 총자산, 부채를 뺀 순자산, 가구소득 등 중산층을 측정할 수 있는 지표는 다양하다. 하지만 정작 ‘나는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심리적 지표는 계속 하락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국갤럽은 1989년 ‘당신은 중산층인가’라는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응답에 응한 20~60대 한국인 중 75%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로부터 약 35년이 지난 2023년 상황이 바뀌었다. 설문조사기관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20~60세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3년 중산층 인식 조사’에서 현재 본인이 중산층이라고 답한 비율은 32%였다. 반면 하류층에 속한다는 응답이 41.7%로 가장 많았다.

현재 중산층을 가늠하는 방식은 소득을 기반으로 한다. 일명 ‘기준중위소득’이다. 2024년 기준중위소득은 2인 368만원, 3인 471만원, 4인 573만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산층 기준인 75~200%를 적용하면 2인 276만~736만원, 3인 353만~943만원, 4인 430만~1146만원이 된다. 이 구간에 속한다면 중산층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선 이런 기준 자체에 의구심을 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소득으로는 중산층에 속하지만 실제 생활은 팍팍한 데서 오는 괴리감을 토로한다. 대기업 디자인팀에서 근무하는 김선영(41)씨는 올 초 동대문구의 신축 주상복합에 입주했다. 국책연구기관 수석연구원인 남편과 연봉을 합치면 연소득 1억5000만원에 달하지만, “중산층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김씨는 “매월 나가는 대출금이 많은 데다, 아이 교육비와 돌봄비 등을 내고 나면 실제 우리 가족이 쓸 수 있는 돈이 부족해 살림이 점점 쪼그라드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고물가와 고금리 상황에 따른 소비 격차와 상대적 박탈감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진웅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장은 “실제로 중산층의 생활을 누리고 있더라도, 부동산 보유 여부 등 본인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하위층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크다”고 설명했다.

중산층 의식 엷어진 이유는 고금리·고물가 영향


통계청의 2024년 1분기 가계동향조사 결과를 보면 더 확연해진다. 이 기간 가구당 월평균 소득은 약 512만원으로 전년도 같은 분기 대비 1.4% 늘었다. 그러나 가구당 월평균 소비지출도 약 291만원으로 늘면서 전년도 같은 분기 대비 3.0% 증가했다. 소득 증가 비율보다 소비지출 비율이 더 높다 보니, 가처분소득이 줄어든 셈이다.

지출 증가의 가장 큰 원인으로는 고금리와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물가 상승의 영향이 꼽힌다. 이는 물가 영향을 포함한 실질소득 추이를 보면 더욱 확실하게 체감된다. 2024년 1분기 실질소득이 전년도 같은 분기 대비 1.6%나 감소한 것이다. 2021년 1분기 이후 3년 만에 감소 전환한 것으로, 2017년 1분기(-2.5%) 이후 최저치다. 소득구분상 중산층에 속해도 “나는 중산층이 아니다”라고 느끼는 괴리감의 이유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중산층 축소는 더 가속화되고 있다. 고양시청의 인구 통계 자료를 보면 2024년 6월 기준, 일산 인구 합계는 57만8334명이고 그중 고령자는 9만3427명이다. 2021년 동월 기준으로 일산 인구가 60만121명, 고령자가 7만8066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불과 3년 만에 중산층을 상징했던 일산신도시가 ‘고령도시’로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일산신도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중산층이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하다.

중산층이 소멸돼 가고 있다는 한국 사회의 우려와 위기감은 19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습득한 경험에서 비롯된다. 당시 대규모 해직을 거치며 가구 소득의 하락으로 가정경제는 직격탄을 맞았고, 일부는 가족 해체로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때의 트라우마가 요즘 다시 ‘중산층 붕괴 위기’라는 탈을 쓰고 스멀스멀 되살아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OECD는 2019년 보고서를 통해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디지털 전환, 기후변화 대응, 중간 일자리 감소 등 산업과 노동시장의 여러 변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중산층 축소에 대한 전 세계적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문제는 중산층 축소가 경제적·사회적 갈등을 일으키고 양극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중산층 붕괴를 막기 위한 국가 차원의 정책과 사회 안전망 주문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에서도 중산층 계층 이동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좋은 일자리 창출과 가구 내 추가 취업자 증가’를 언급했다.

아울러 은퇴 시점에 하층으로 내려갈 확률이 있는 고령자의 소득을 보장해주는 사회 안전망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실제 기초연금을 실시했던 2014년은 전년 대비 노인빈곤율이 다소 해소되면서 빈곤층이 감소하는 효과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 밖에 아이가 있는 가구에 돌봄 서비스를 보장하는 정책, 계층사다리 역할을 해줄 교육의 기회를 넓히는 정책도 정치의 몫이라고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더 나은 상태로 계층 이동 불가능” 답변 69%


▎인플레 영향으로 장바구니 물가가 오르면서 중산층 가구의 실질소득도 감소했다.
흥미롭게도 내부의 인식과 별개로 바깥에서는 여전히 한국을 ‘허리(중산층)가 강한 나라’로 평가하고 있다. OECD가 조사한 ‘국가별 중위소득 75~200%의 인구 비중’에서 한국은 61.1%로 나타났다. 대한민국의 중산층이 61.1%라는 의미로 OECD 평균인 61.5%와 거의 비슷하다. 일본은 65.2%, 미국은 51.2%, 스웨덴은 65.2%로 나타났다.

하지만 정작 한국 사회 내부는 ‘나는 더 이상 중산층이 될 수 없다’는 암울함에 짓눌려 있다. ‘2023 중산층 인식 조사’에서 응답자의 69%가 “계층 상승에 대한 욕구는 있으나, 더 나은 상태로의 계층 이동은 불가능하다”고 답한 것이다. 또한 ‘한번 가난해지면 평생 가난하게 산다’는 물음에도 절반이 넘는 응답자가 “그렇다”고 답변했다. 우리나라를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나라’(27.5%)라거나 ‘중산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많은 나라’(20.7%)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이런 미래에 대한 절망감은 특히 젊은 층일수록 더 높게 나타났다. 20대 응답자의 56.4%, 30대의 55.6%가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비전을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고 답했다. 게다가 응답자의 80.5%, 즉 10명 중 8명은 “앞으로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가 더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 사회는 상류층과 하류층만 있을 뿐 중산층이 줄어들고 있다”는 응답자도 58.5%에 달했다.

이렇듯 계층 간 이동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은 잠재적으로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문제를 잉태하고 있다. 본인뿐 아니라 자녀 세대의 계층 이동 가능성에 대해서도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KDI는 ‘우리나라 중산층의 현 주소와 정책 과제’라는 보고서에서 노력으로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을 묻는 항목에 대한 긍정 답변 비율이 2011년 28.8%에서 2019년 23%로 감소했다고 밝혔다. 또 자녀 세대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고 응답한 비율은 2011년 41.7%에서 2021년 30.3%로 감소했다. 중산층 진입의 문이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는 암울함이 대한민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형국이다.

- 박세나 월간중앙 기자 park.sena@joongang.co.kr

202408호 (202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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